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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삼씨 이야기 - 14

14. 슬픈 자는 등을 돌린다 하루는 느리게, 일주일은 그냥 저냥, 한 달은 제법 빠르게 흘러갔다. 지구 온난화의 여파인지 여름 내내 뉴스에서 '역대 급 더위' 라는 용어가 자주 흘러나왔다. 딱히 뉴스를 보지 않아도 정말로 덥긴 더웠다. 정말로 지구에 어떤 문제가 생기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진짜로 큰 문제들은 내가 다 늙어서 죽기 직전이거나 혹은 죽은 후에나 생길 모양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더위에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엄청 끔찍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더운 만큼 내 몸에서 땀이 많이 났을 것이고, 땀이 많이 나게 되면 당연히 내 몸에서 나는 냄새도 심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착각하지만 내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 해서 예외적으..

소설, 에세이 2020.02.14

김두삼씨 이야기 - 13

13. 각연사 혜영은 떠났다. 내가 혜영에서 화를 냈던 그날 이후로는 우리 사이엔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었다. 물론 그 벽은 혜영이 아닌 온전히 내가 만든 벽이었다. 결국 나는 혜영이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데면데면하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벽으로 인해서 이별의 순간이 그리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만약 계속 내 감정의 변화를 그냥 두었다면 나는 아마도 혜영이 떠나는 것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원래 무언가에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담담한 나와는 달리 장씨 아저씨는 딸과 헤어지는 것을 많이 힘들어 했다. 혜영이 타고 갈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던..

소설, 에세이 2020.02.11

김두삼씨 이야기 - 12

12. 쫓겨난 자와 떠나온 자 그녀는 텃밭에 처음 심은 옥수수의 키가 내 무릎 정도쯤 왔을 때쯤 이곳에 왔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미국에서 왔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이국적인 느낌이 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도착 당일에 입고 있던 옷 때문에 그랬던 같기도 하다. 인천공항까지 마중 나갔던 장씨 아저씨의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그녀는 찢어진 청바지와 회색의 배경에 한 눈에 보기에도 래퍼처럼 보이는, 챙이 반듯한 모자를 쓰고 진한 선글라스에 여기저기 피어싱을 잔뜩 한 사람의 얼굴이 커다랗게 인쇄된 티를 입고 있었다. 그런 옷 스타일을 입은 사람을 길에서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는 달리 뭔가 좀 자유로울 것 같은 같은 분위기, 내가 장씨 아저씨의..

소설, 에세이 2020.02.09

김두삼씨 이야기 - 11

11. 이춘삼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한 장씨 아저씨는 아침밥을 먹기도 전에 자신이 가져 온 사진을 확인해 보라고 내 눈 앞으로 디밀었다. 그 사진 안에 15년 전의 남상현이 있다고 하면서 똑바로 보라고 했다. 머리 스타일과 옷만 좀 달라졌을 뿐, 지금과 똑같다고 확신 있게 말했다. 얼떨결에 사진을 건네받아서 살펴보자 그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함께 찍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 집을 처음 지었을 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 듯 보였다. 사진 속 인물들 중에서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나 보이긴 하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일단 사진의 가장 중앙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김회장이 서 있었다. 늙고 심술궂은 표정의 그가 아니라..

소설, 에세이 2020.02.06

김두삼씨 이야기 - 10

10. 첫 눈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에 잠겨있는 방은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옆으로 뻗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들어서 켰다.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 시간에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일까? 이 집에 온지가 벌써 한 달 반을 훌쩍 넘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단잠을 깨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약간 짜증이 난 상태로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밖에서 지금 일어나야 하다는 말소리가 웅성거리듯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새벽부터 나를 깨운 장본인은 바로 장씨 아저씨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이 시간에 나를 깨우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그는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

소설, 에세이 2020.02.03

김두삼씨 이야기 - 9

9. 승부 10일이란 날짜는 길면서도 짧게 지나갔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와중에 길게 느껴진 것은, 내가 주문한 제품 중에서 소형 카메라가 세관에서 통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수입대행사의 설명에 의하면 예전엔 별 문제 없었는데 요즘 몰래 카메라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인해서 세관에서 고성능 소형 카메라의 수입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한 통관 절차를 거치는 모양이었다. 세관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 제품을 수입해서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그 사용처를 밝힐 것이며, 또한 내가 밝힌다고 해서 그들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야말로 요식행위가 아닌가? 하지만 결국 아쉬운 것은 나였다. 그러니 설령 지어내더라도 그..

소설, 에세이 2020.01.31

김두삼씨 이야기 - 8

8. 김두삼씨와의 첫만남 다음 날 아침엔 바둑업체에서 나온 직원이 흠집이 난 바둑판을 수거하기 위해서 집을 방문했다. 그는 문제가 생긴 바둑판을 잠시 살펴보더니 오일 정도면 충분히 수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끼어들어서는 수리기간을 좀 더 늘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천천히 열흘쯤 걸리도록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은 아주머니의 부탁을 즉시 거절했다. 그는 마치 대본을 읽는 사람처럼,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고객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이 회사의 기본철학이라서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일부로 수리 기간을 늘릴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직원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는 것에는 회사 철학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어 보였다. 그 이유 말고 아마도 우리들을 믿을 수 없어서 그..

소설, 에세이 2020.01.28

김두삼씨 이야기 - 7

7. 하기 싫다면 판을 깨라. 장씨 아저씨의 설명에 의하면, 김회장은 오전 시간엔 항상 바둑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에는 산책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나마 날씨가 따뜻할 때이고 요즘 가을 날씨처럼 쌀쌀하면 거의 생략한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서는 아니고 꼭 간병인을 데리고 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김회장이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해서 그러냐고 물었다. 사실 꼭 간병인이 없다고 해도 장씨 아저씨가 같이 가도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자 장씨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꾸했다. 김회장이 산책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주제들에 대해서 말하는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김회장의 대화 상대가 돼주기엔 역부족이라고 했다. 평생 몸을 쓰는 일만 한 ..

소설, 에세이 2020.01.23

김두삼씨 이야기 - 6

6. 바둑을 두는 또 다른 방법 나는 가장 먼저 국내 유명 쇼핑몰에 접속했다. 내 계획엔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제품이 있어서 찾아봐야 했기에 그랬다. 한참을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내가 쓰려는 용도에 딱 맞는 제품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앞으로도 두개나 있었다. 하나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필요한 제품들이 꽤나 고가여서 내가 지금 가진 돈으로는 살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 가능할 것 같았다. 나만큼이나 절실한 오사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문제가 좀 치명적이었다. 내가 사야 하는 제품은 총 두 개인데 모두 해외 배송으로만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주문한 제품들이 내 손까지 도착하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하..

소설, 에세이 2020.01.20

김두삼씨 이야기 - 5

5. 별빛 속에서 장씨 아저씨의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장씨 아저씨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그라져서는 결국엔 굳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스스로도 그 떨림이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로 왜 바둑을 잘 두는지 묻는지를 되물었다. 하지만 장씨 아저씨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한결 다급해진 음성으로 나에게 여기를 소개시켜 준 오사장님한테서 바둑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당연히 들은 기억이 없던 나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장씨 아저씨는 잠시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렇더라도 혹시라도 바둑을 둘 줄 모르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기대를 품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절차상 마지막 확인인 것 같았다...

소설, 에세이 2020.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