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64

[단편] 변두리 삶 #2

* * * 나는 온 몸이 밧줄로 의자에 묶인 채 어두운 공간에 갇힌 채 정신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병원에 있었는데, 잠을 깨고 보니 이런 이상한 장소에 와 있다. 더군다나 나는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비록 밧줄에 묶여 있긴 하지만, 사지에서 감각이 확실히 전달되어 왔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발을 살짝 돌리고, 고개도 돌릴 수 있었다. 눈도 뜰 수 있어서 바깥세상도 보였다. 하지만 내 머리 바로 위에 켜 있는 조명이 너무 밝아서 주변 것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코끝으로 곰팡이 냄새와 희미한 비린내가 섞여서 났다. 피부에는 축축한 느낌이 올라왔다. 잘 모르겠지만, 어떤 창고인 듯 했다. 대충만 둘러봐도 낡고 더러운 곳이 분명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지금 이곳에 있는 ..

소설, 에세이 2021.03.20

[단편] 변두리 삶 #1

'직업', 생년월일부터 이름과 지금 사는 주소까지, 막 힘없이 써내려 가던 나는 직업란 앞에서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직업을 써 내야 했던 시절과는 달랐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였다. 그 시절엔 딱히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못 썼고,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쓸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스러웠다. 입으로는 늘 건설 기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아버지는 일 년 중 기껏해야 서너 달 밖에 일을 못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여느 날처럼 일을 하던 아버지는 5층 높이의 공사장에서 추락해 척추에 큰 손상을 입었다. 몇 년간 치료와 재활을 한 끝에 겉으로는 멀쩡해 지긴 했지만, 그때부터 아버지 몸엔..

소설, 에세이 2021.03.20

[단편] 완벽한 인생 #2

거기까지 진행되자 이제는 오히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나는 예전에 돌 던지기를 부탁했었던 핸드볼 선수에게 연락을 했다. 예전에 했던 일을 또 다시 해달라고 하자 상대는 웃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나라고 하자 이번엔 깜짝 놀라는 음성이었다. 정말로 해도 되는지를 몇 번이나 되물었다. 나는 그때보다 백만 원을 더 얹어주겠다고 했다. 대신 지금 돈 지급은 그 일이 끝난 후 해줄 수밖에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상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오늘이 화요일이니 로또 당첨번호가 발표되는 주말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남은 시간 동안 내가 움직일 동선과 시간대를 설명해주고 적당히 알아서 돌을 던져달라고 했다. 만약 이 일이 완전히 헛짓거리..

소설, 에세이 2021.03.10

[단편] 완벽한 인생 #1

"뭐라고요?" 너무 어이가 없었던 탓인지 내 직업상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아니 해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 나오고야 말았다. 누구처럼 평생직장은 아니더라도 이 바닥에서 십여 년 발을 붙이는 동안 정말로 별의 별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보긴 했지만, 오늘 들은 요구는 그 중에서도 제일 황당했다. 하지만 나는 나름 관록이 쌓인 프로였다. 덕분에 아주 잠깐 외출했던 정신은 금세 다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내 앞에 선 고객은 내가 조금 전 보여 준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살짝 미소까지 머금은 채 다음 말을 이었다. "이미 들은 그대로 입니다. 좀 알아보니 이곳이 평가가 제일 좋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

소설, 에세이 2021.03.10

김두삼씨 이야기 - 끝

[에필로그] 장씨 아저씨가 밥 먹으러 언제 내려올 거냐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2층 내 방에서 천천히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꽤나 담담한 기분으로 짐을 싸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거의 빈손으로 오다시피 했는데, 떠날 때가 되니 제법 짐이 늘었다. 아주머니는 이 집에 원래 있던 물건이라고 해도 필요하면 다 가져가라고 했다. 단, 부엌에 있는 식기들만 제외하고.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이 집에 있었던 물건들 중에서 딱히 탐 날만한 것은 없었다. 혹시나 장작을 패는 도끼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것을 들고 다녔다가는 곧 경찰서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장씨 아저씨에게 멱살을 잡힐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 아주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식사는 푸짐하게 끓인 동태찌개였다. 겨울이..

소설, 에세이 2020.02.20

김두삼씨 이야기 - 16

16. 비난과 인정의 간극 "왜 그랬냐고?" 남상현도 내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 혼잣말 하듯이 내 질문을 되감았다. 그러고 나서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부지깽이를 들어 이제는 슬슬 숯이 되어가는 장작들을 툭툭 쳐서 여러 조각으로 부러뜨렸다. 그 순간 수많은 불티들이 허공으로 날리며 찰라간 환해졌다가 금세 사그라져 갔다. 불티들의 불꽃은 순간적이었지만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눈앞에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런 식으로 타던 장작을 뒤집어 놓자 덜 탄 부분이 불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꺼져가던 불길도 금세 다시 되살아났다. "나는 불을 피울 때 이 순간이 제일 좋더라고." 남상현은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그가 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싫어서 말을 돌리고 ..

소설, 에세이 2020.02.19

김두삼씨 이야기 - 15

15. 죽음 그리고 그 후 10월 들어서 이춘삼은 훨씬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것이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불안함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불안하게 한 것은, 김회장이 이춘삼이 될 때마다 폐병이 걸린 사람처럼 콜록댔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사람이 기침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김회장이 이춘삼일 때는 일단 골치 아픈 바둑도 두지 않아도 좋았고, 요즘처럼 좋은 날이면 같이 가을 길을 산책을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10월 중순쯤 어느 날, 김회장이 바둑을 두는 도중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전에도 가끔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긴 적이 있긴 했지만 이번엔 뭔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당장 내가 응급조치를 하긴 했지만..

소설, 에세이 2020.02.17

김두삼씨 이야기 - 14

14. 슬픈 자는 등을 돌린다 하루는 느리게, 일주일은 그냥 저냥, 한 달은 제법 빠르게 흘러갔다. 지구 온난화의 여파인지 여름 내내 뉴스에서 '역대 급 더위' 라는 용어가 자주 흘러나왔다. 딱히 뉴스를 보지 않아도 정말로 덥긴 더웠다. 정말로 지구에 어떤 문제가 생기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진짜로 큰 문제들은 내가 다 늙어서 죽기 직전이거나 혹은 죽은 후에나 생길 모양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더위에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엄청 끔찍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더운 만큼 내 몸에서 땀이 많이 났을 것이고, 땀이 많이 나게 되면 당연히 내 몸에서 나는 냄새도 심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착각하지만 내 몸에서 나는 냄새라고 해서 예외적으..

소설, 에세이 2020.02.14

김두삼씨 이야기 - 13

13. 각연사 혜영은 떠났다. 내가 혜영에서 화를 냈던 그날 이후로는 우리 사이엔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었다. 물론 그 벽은 혜영이 아닌 온전히 내가 만든 벽이었다. 결국 나는 혜영이 집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데면데면하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벽으로 인해서 이별의 순간이 그리 힘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만약 계속 내 감정의 변화를 그냥 두었다면 나는 아마도 혜영이 떠나는 것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원래 무언가에 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담담한 나와는 달리 장씨 아저씨는 딸과 헤어지는 것을 많이 힘들어 했다. 혜영이 타고 갈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던..

소설, 에세이 2020.02.11

김두삼씨 이야기 - 12

12. 쫓겨난 자와 떠나온 자 그녀는 텃밭에 처음 심은 옥수수의 키가 내 무릎 정도쯤 왔을 때쯤 이곳에 왔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미국에서 왔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이국적인 느낌이 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도착 당일에 입고 있던 옷 때문에 그랬던 같기도 하다. 인천공항까지 마중 나갔던 장씨 아저씨의 차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그녀는 찢어진 청바지와 회색의 배경에 한 눈에 보기에도 래퍼처럼 보이는, 챙이 반듯한 모자를 쓰고 진한 선글라스에 여기저기 피어싱을 잔뜩 한 사람의 얼굴이 커다랗게 인쇄된 티를 입고 있었다. 그런 옷 스타일을 입은 사람을 길에서 본 적은 있지만, 내가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와는 달리 뭔가 좀 자유로울 것 같은 같은 분위기, 내가 장씨 아저씨의..

소설, 에세이 202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