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64

김두삼씨 이야기 - 11

11. 이춘삼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한 장씨 아저씨는 아침밥을 먹기도 전에 자신이 가져 온 사진을 확인해 보라고 내 눈 앞으로 디밀었다. 그 사진 안에 15년 전의 남상현이 있다고 하면서 똑바로 보라고 했다. 머리 스타일과 옷만 좀 달라졌을 뿐, 지금과 똑같다고 확신 있게 말했다. 얼떨결에 사진을 건네받아서 살펴보자 그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함께 찍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 집을 처음 지었을 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인 듯 보였다. 사진 속 인물들 중에서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나 보이긴 하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몇몇 보였다. 일단 사진의 가장 중앙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김회장이 서 있었다. 늙고 심술궂은 표정의 그가 아니라..

소설, 에세이 2020.02.06

김두삼씨 이야기 - 10

10. 첫 눈 밖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에 잠겨있는 방은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옆으로 뻗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들어서 켰다. 아직 6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 시간에 방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일까? 이 집에 온지가 벌써 한 달 반을 훌쩍 넘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나는 단잠을 깨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약간 짜증이 난 상태로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밖에서 지금 일어나야 하다는 말소리가 웅성거리듯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새벽부터 나를 깨운 장본인은 바로 장씨 아저씨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이 시간에 나를 깨우는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나는 그는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

소설, 에세이 2020.02.03

김두삼씨 이야기 - 9

9. 승부 10일이란 날짜는 길면서도 짧게 지나갔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와중에 길게 느껴진 것은, 내가 주문한 제품 중에서 소형 카메라가 세관에서 통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탓이었다. 수입대행사의 설명에 의하면 예전엔 별 문제 없었는데 요즘 몰래 카메라에 대한 사회적 관심으로 인해서 세관에서 고성능 소형 카메라의 수입에 대해서 좀 더 세밀한 통관 절차를 거치는 모양이었다. 세관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 제품을 수입해서 어떤 용도로 쓸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그 사용처를 밝힐 것이며, 또한 내가 밝힌다고 해서 그들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야말로 요식행위가 아닌가? 하지만 결국 아쉬운 것은 나였다. 그러니 설령 지어내더라도 그..

소설, 에세이 2020.01.31

김두삼씨 이야기 - 8

8. 김두삼씨와의 첫만남 다음 날 아침엔 바둑업체에서 나온 직원이 흠집이 난 바둑판을 수거하기 위해서 집을 방문했다. 그는 문제가 생긴 바둑판을 잠시 살펴보더니 오일 정도면 충분히 수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끼어들어서는 수리기간을 좀 더 늘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천천히 열흘쯤 걸리도록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은 아주머니의 부탁을 즉시 거절했다. 그는 마치 대본을 읽는 사람처럼,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고객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것이 회사의 기본철학이라서 안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일부로 수리 기간을 늘릴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직원이 우리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는 것에는 회사 철학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어 보였다. 그 이유 말고 아마도 우리들을 믿을 수 없어서 그..

소설, 에세이 2020.01.28

김두삼씨 이야기 - 7

7. 하기 싫다면 판을 깨라. 장씨 아저씨의 설명에 의하면, 김회장은 오전 시간엔 항상 바둑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에는 산책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나마 날씨가 따뜻할 때이고 요즘 가을 날씨처럼 쌀쌀하면 거의 생략한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서는 아니고 꼭 간병인을 데리고 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김회장이 혼자서 몸을 가누지 못해서 그러냐고 물었다. 사실 꼭 간병인이 없다고 해도 장씨 아저씨가 같이 가도 되는 것이 아닌지 궁금했다. 그러자 장씨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대꾸했다. 김회장이 산책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주제들에 대해서 말하는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김회장의 대화 상대가 돼주기엔 역부족이라고 했다. 평생 몸을 쓰는 일만 한 ..

소설, 에세이 2020.01.23

김두삼씨 이야기 - 6

6. 바둑을 두는 또 다른 방법 나는 가장 먼저 국내 유명 쇼핑몰에 접속했다. 내 계획엔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제품이 있어서 찾아봐야 했기에 그랬다. 한참을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내가 쓰려는 용도에 딱 맞는 제품들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앞으로도 두개나 있었다. 하나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필요한 제품들이 꽤나 고가여서 내가 지금 가진 돈으로는 살 수 없었다. 그래도 이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 가능할 것 같았다. 나만큼이나 절실한 오사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문제가 좀 치명적이었다. 내가 사야 하는 제품은 총 두 개인데 모두 해외 배송으로만 받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주문한 제품들이 내 손까지 도착하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하..

소설, 에세이 2020.01.20

김두삼씨 이야기 - 5

5. 별빛 속에서 장씨 아저씨의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장씨 아저씨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그라져서는 결국엔 굳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스스로도 그 떨림이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로 왜 바둑을 잘 두는지 묻는지를 되물었다. 하지만 장씨 아저씨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한결 다급해진 음성으로 나에게 여기를 소개시켜 준 오사장님한테서 바둑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당연히 들은 기억이 없던 나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장씨 아저씨는 잠시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렇더라도 혹시라도 바둑을 둘 줄 모르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기대를 품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절차상 마지막 확인인 것 같았다...

소설, 에세이 2020.01.16

김두삼씨 이야기 - 4

4. 64년 생 장순용 눈을 떴다. 아니, 떠졌다. 잠시 비몽사몽간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이뤄진 외박, 생각해보니 3년 전 회사를 그만 둔 후 시골에 계신 어머니한테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외박 기록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니 어제 무리해서 걸었던 몸이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끙끙 소리를 내면서 일어나서는 일단 TV부터 켰다. TV는 달갑지 않은 고요함을 깨뜨리는 용도로도 어느 정도 유용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을 멈추는 용도로써 더욱 더 훌륭하게 작동하는 물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TV를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고들 하지만 아마도 그런 헛소리를 한 사람은 한 번도 혼자되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 분명했다. 혼자 밥을 ..

소설, 에세이 2020.01.13

김두삼씨 이야기 - 3

3. 사발면, 초콜릿 그리고 가을 출발 후 첫 한 시간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내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 후로부터는 철저하게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왔다.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야 하는 일들, 그러니까 쓰레기를 버리거나 재활용품 정리하는 일, 과자나 라면 등을 사기 위해서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는 일을 할 때는 최대한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그리고 12층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는 늘 계단을 이용했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일 년에 한 번씩 근처 초등학교에 민방위 훈련을 갔을 때였다. 지난 3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가 이런 멀쩡한 대낮에 거리를 걷고 있느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왔..

소설, 에세이 2020.01.10

김두삼씨 이야기 - 2

2. 새로운 일자리 솔직히 말해서 알량한 자존심만 무시하면 이런 내 처지에서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다르게 내 말투는 스스로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퉁명스러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꼭 알량한 자존심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왕따로 2년, 혼자서 3년을 보낸 나는 더 이상 5년 전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과거에 내가 가졌었던 친절함, 상냥함, 배려심 같은 긍정적 성향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주변에서도 사람 좋다는 평가를 받았던 내 존재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의 별 의미 없는 말 한 마디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더 세게 되받아 치지 않으면 ..

소설, 에세이 2020.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