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김두삼씨 이야기 - 끝

아이루다 2020. 2. 20. 08:01

 

 

[에필로그]

 

장씨 아저씨가 밥 먹으러 언제 내려올 거냐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2층 내 방에서 천천히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꽤나 담담한 기분으로 짐을 싸고 있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거의 빈손으로 오다시피 했는데, 떠날 때가 되니 제법 짐이 늘었다. 아주머니는 이 집에 원래 있던 물건이라고 해도 필요하면 다 가져가라고 했다. , 부엌에 있는 식기들만 제외하고. 그런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이 집에 있었던 물건들 중에서 딱히 탐 날만한 것은 없었다. 혹시나 장작을 패는 도끼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것을 들고 다녔다가는 곧 경찰서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장씨 아저씨에게 멱살을 잡힐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 아주머니가 해주신 마지막 식사는 푸짐하게 끓인 동태찌개였다. 겨울이 한창이 요즘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맛났다.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려고 했지만 아주머니가 말렸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그런 일까지 하냐면서 올라가서 짐 싸는 것이나 마무리 잘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2층 방으로 돌아와서 남은 짐을 쌌다. 그렇게 다 챙긴 후 1층으로 내려오자 아주머니와 장씨 아저씨가 나를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살짝 억지웃음을 지은 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들도 나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며칠 전까지도 없었던 하늘색 소형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장씨 아저씨가 떠나는 나를 위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급하게 구해 준 중고차였다. 물론 당연히 돈은 내가 지불해야 했지만. 그래도 차 값이 싸기도 했고 돈의 여유도 어느 정도 있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 여기에 있는 동안 모은 월급, 그리고 김회장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받은 퇴직금, 더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김회장은 나에게 따로 약간의 돈을 남겨 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주머니와 장씨 아저씨에게도 그랬다. 덕분에 차를 구매하고도 시골이라면 당장 방 한 칸짜리 전세 정도는 얻을 돈이 통장에 들어 있었다.

 

잘 견디고 계시던 아주머니는 내가 짐을 트렁크에 넣고 힘차게 닫은 순간에 결국 터지고 말았다. 아마도 최대한 참았을 것이다. 내가 떠날 때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그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 역시도 울컥 하긴 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장씨 아저씨는 울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도 두 눈이 붉어져 있음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그런 모습을 놀려 먹었을 수도 있는데 날이 날인지라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그렇게 작별의 순간은 길고도 짧게 끝이 났다. 운전석에 앉은 나는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켰다. 그리고 기어를 바꾸고는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발을 뗐다.

 

차는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차가 앞으로 나갈수록 차 안에 있는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작아졌다. 두 사람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전에 회사를 그만두는 날 주차장에서 나는 홀로 세상과 이별을 했는데, 오늘 이곳에서는 나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두 분의 배웅을 받으며 세상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김회장의 장례식이 끝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다행히 아주머니와 장씨 아저씨는 그 집에 계속 있기로 결정되었다. 그 역시도 김회장의 배려인 듯 했는데, 듣기로는 우리에게 남겨 둔 약간의 돈 이외에 모든 유산을 아들에게 넘기는 대신 이 집만큼은 우리들이 있고 싶을 때까지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사실 아들인 김사장에게 당장 이 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충분한 돈을 가진 그는 그냥 나뒀다가 나중에 땅값이나 더 오르면 팔면 그만인 곳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든 별 상관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두 사람에게 더 이상 월급도 줄 필요가 없어졌으니 오히려 공짜로 집을 관리해주는 사람이 생긴 셈이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두 사람은 여기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떠나기로 결정했다. 두 달 동안 내 미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 최종 결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결정을 하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김회장이 떠나고 나까지 이렇게 떠나게 되면 아주머니는 이 넓고 외진 곳에서 홀로 잠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니 나이가 많기에 오히려 더 무서운 일일 수 있었다. 다행히 장씨 아저씨는 자신의 집을 정리하고 다시 이곳에 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 사이에 늘그막이 무슨 일이나 생길지도 모르겠다. , 그러면 그런대로 좋은 일이다.

 

남상현은 그날 밤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부터 보이질 않더니 그 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솔직히 나는 지금 그날 밤의 대화가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그냥 한바탕 이상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아주머니와 장씨 아저씨는 남상현의 말 없는 실종에 대해서 별로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젊으니까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장씨 아저씨는 그 인간 안볼 수 있어서 오히려 좋다고도 했다.

그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말로 그런 특별한 능력을 지닌, 내가 상상도 하기 힘든 어떤 세상에 속한 존재일까? 아니면 그냥 미친 또라이에 불과했을까?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설령 그의 말에 따라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내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한 나는 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것에 대해 아는 이가 있다면 죽은 김회장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적어도 과거에 자신이 이춘삼이란 인물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음을 알고 떠난 듯 하니까. 그런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것과 상관없이 내 결정은 이미 내려졌으니까.

 

나는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내 삶이 여전히 내 삶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아주머니나 장씨 아저씨와의 관계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서의 일 년의 추억이 잊힌다는 것은 많이 아쉬운 일이긴 했다. 그럼에도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되면 과거에 내가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조차 전혀 모를 테니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대신 내가 남상현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마음먹은 진짜 이유는 바로 아직 내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직전에 혜영을 떠올렸었다. 나도 혜영처럼 그렇게 내 삶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내 미래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내 몸이 가진 문제가 실제로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단순한 희망이 아닌, 실제적인 계획도 포함하고 있었다. 특히 장씨 아저씨가 제안한 시체를 닦는 일은 꽤나 그럴 듯한 직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내 삶을 누군가가 설계했다는 남상현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앞으로 내 삶은 어떤 식으로든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남상현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긴 했다.

 

오늘은 1229일이다. 지금 이곳을 출발한 나는 이제 고향 집에 들러서 어머니를 뵐 것이다. 거기에서 이틀을 보낸 후 1231일이 되면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동쪽 끝으로 가려고 한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11일 날 뜨는 해를 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예전엔 그런 짓을 참 유치하다고 여겼었다. 촌스럽다고도 생각했었다. 매일 뜨는 해가 새해 첫날이라고 뭐가 다를까? 실제로 다를 것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앞에 두고 나는 그 형식을 따르기로 했다. 어떤 경우엔 분명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니까. 새로운 해가 뜨는 동쪽에서 내 미래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던 한 옛사람의 말처럼 매일 뜨는 해도 그날은 분명히 다른 날과 또 다를 것이다. 내 삶도 그 해처럼 달라질 것이다. 거기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분명히 예상치 못한 좌절이 불쑥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볼 때까지 가보려고 한다. 나는 이제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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