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제 10년

아이루다 2021. 12. 11. 05:48


얼마 전 화장실 샤워기 꼭지 부분이 망가졌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낡아서 그런 것인지, 혹은 그 둘의 우연한 조합으로 인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물이 나오는 부분과 수도와 연결된 부위에 있던 부속이 깨지면서 꼭지와 호수가 그 오랜 인연을 마감한 것이다.

 

사실 나는 그 샤워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위에서 떨어지는 방식의 별도로 부착된 천정형 샤워기를 쓰는 것이 훨씬 더 좋아서 그렇다. 하지만 나와 달리 아내는 오직 그 샤워기만 쓴다.

 

낮에 일어난 사건이니 아내는 퇴근 후에나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한 순간에 말이다.

 

낮에 일어났지만 나는 이미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씻으러 가는 아내에게 딱히 언급하지 않았고, 아내는 씻으려는 순간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샤워기를 손으로 잡고 씻어야 하는데 손으로 잡을 머리가 없고, 머리가 없으니 어딘가에 걸어 놓을 수 없었던 호수만 바닥에 덩그러니 있었으니 그럴 만 하다.

 

아내가 소리를 지른다. 샤워기가 왜 이러냐고 따지듯 묻는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낮의 기억이 떠올랐고 바로 고쳐놓지 않은 내 양심의 가책을 조금 줄이고자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듯한 목소리로 고장 났다고, 내일 고쳐놓겠다고 했다. 아내는 잠시 황당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화장실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순간 아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잠시 후 아내는 씻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자꾸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샤워기에서 꼭지 부분이 분리되었으니 당연히 물이 호수처럼 일자로 나왔을 것이고, 그로 인해 평소와는 다르게 물이 몸에 닿으니 그것이 그리 재미있는 모양이다. 혼자서 그냥 낄낄대면서 웃는다.

 

아내는 가끔 중학생처럼 행동한다. 낙엽만 굴러라도 까르르 웃는 그 시절의 아이들처럼 별 것도 아닌 일에도 그렇게 크게 웃는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기도 하지만, 그 웃음 때문에 나도 웃게 된다.

 

 

사람마다 각자 어떤 자부심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딱히 내 삶에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하나 정도 고르라고 한다면 아내의 그런 웃음이다. 물론 그 웃음은 아내가 타고난 것이다. 그래도 내가 한 것은 있다. 그 웃음이 40대가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쉬운 일 같지만 사실 그리 쉽지는 않다. 아내의 삶은 참 반듯하게 펴져 있다. 가끔 힘든 일도 있긴 하지만 삶에 큰 굴곡은 없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에서 돈이 다리미라고 했다. 사람의 삶을 반듯하게 펴준다고 하면서.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말은 결국 틀렸다. 돈이 삶을 펴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삶을 펴준다. 단지 사람들은 돈이 유일한 행복의 열쇠라고 믿는 것뿐이다.

 

행복이란 단어는 만족이란 단어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만족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해진다. 사실 우리네 많은 삶들이 그렇게나 힘든 이유는 바로 꽤나 자주 '무엇인가에 불만족인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불만족만 줄일 수 있다면 삶은 딱히 외부적 조건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 더 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이미 불만족에 중독된 삶에서 그것을 분리시켜내는 것은 암 수술보다 더 힘든 일이다. 그러니 각자 그냥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처음 이 블로그 글을 쓸 때 한 10년 정도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다. 그리고 올해가 우연히 딱 10년째이다. 2012년도 1월부터 2021 12월까지 엄청난 분량의 글들을 써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쓰고 싶은 글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떠오를 때도 있는데 쓰기가 좀 귀찮다.

 

그래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12월 중에 하나쯤 써야 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내의 샤워기 사건이 터졌다. 다음 날 아침 샤워를 하다가 어제 있었던 아내의 웃음 소리가 생각나면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좋은 일이다.

 

미래를 두고 '어떻게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삶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지금은 글을 멈추겠다고 해야겠다. 굳이 그것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별로 사람이 찾지 않는 이곳에도 가끔 찾아주는 분들이 있어서 그렇다어찌되었건 간에 약간의 마음의 빚이 있다.

 

글은 멈춰도 블로그는 꾸준히 볼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편하게 하고픈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길 바란다.

 

이런 조용한 마무리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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