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은 주어진다

아이루다 2021. 11. 5. 06:19


나도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삶은 참 의문이 많이 드는 대상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다들 모두 매일 행복하길 원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실패해도 또 다시 도전한다. 매일 도전하고, 매일 실패하고, 매일 소수가 성공한다. 마치 로또가 매주 팔리고, 매주 꽝이고, 아주 소수가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 다시 로또를 산다.

 

그렇게 다들 '혹시나' 하면서 살아간다.

 

그냥 처음부터 다들 행복하면 좋지 않은가? 그냥 모두 다 로또에 당첨되면 좋지 않을까? 삶의 본질이 그런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신을 믿는 사람들이 강한 회의감이 들 때가 그 점 때문이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우리를 마냥 행복하게 해주면 되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불행들을 만들어 내고 있을까? 왜 이렇게 삶을 이상하게 만들어 놨을까?

 

일종의 악취미일까? 아니면 지루해서 해보는 유희일까?

 

오랜 시간 삶의 이런 이상한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더니 오늘 문득 깨달아지는 점이 있다.

 

갑자기 우리 인간의 삶이 왜 이런 형태로 밖에 살아갈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명백히 이해가 갔다. 알고 나니 그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우리가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 허망할 정도로 단순한 이유이다.

 

그러니까 삶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 내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거기엔 나의 어떤 의도도 없다.

 

삶은 그냥 주어진다. 삶 그 자체가 그렇게 수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이 점을 간과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선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것이 없다면 아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의지가 전혀 없는 존재, 그런 존재를 누가 인간이라고 부를 것인가?

 

우리는 의지를 갖기에 인간일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며 아주 오래 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삶이 수동적으로 '주어졌음을' 알긴 하지만, 그 사실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자신의 삶에서 얼만큼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지 여부만 따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두 손을 번갈아 앞으로 뻗었다가 접기를 반복하기만 하는 로봇을 옮겨서 샌드백 앞에 놓는 것과 비슷하다. 로봇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누군가 자신을 샌드백 앞에 뒀지만, 자신의 손에 샌드백이 잘 맞아서 좋은 소리가 나니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라고 믿게 된다. 반대로 두 손을 위로만 뻗을 수 있었던 로봇은 샌드백이 아예 맞질 않으니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긴다.

 

샌드백 앞에 놓인 것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샌드백을 얼마나 잘 치느냐 여부만을 따지며 샌드백을 치는 행위 자체를 자신의 의지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도대체 누가 최초에 샌드백 앞에 우리를 둔 것일까? 그게 샌드백이 아니라 절단기였다면 앞으로 손을 뻗었던 로봇은 금세 팔이 잘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따지지 않는다. 사실 따져봐야 소용도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누가 우리를 샌드백 앞에, 절단기 앞에 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다.

 

그래서 그냥 그런 존재를 일단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삶이 주어지는 순간이 내 의지와 상관없는 수동적이기에 이후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어쩔 수 없이 수동적이게 된다. 아무리 샌드백을 잘 쳐도 시작이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의지적 행위는 일단 '태어났으니까' 하게 된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우리에겐 매일 숙제가 주어지고, 우리는 매일 그 숙제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으니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고, 가만히 있으면 건강히 나빠지니 열심히 움직여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아 너무 심심하고 지루하니 뭔가 할 것들을 찾아서 재미있고 즐겁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한 100년쯤 살다가 보면 우리에게 숙제가 주어지는 일이 비로소 끝이 난다. 죽을 때가 되었으니 이제 겨우 삶의 숙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숙제를 하는 동안 행복한 일도 많았다. 즐거운 추억도, 따뜻한 기억도,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있었다. 운이 좋았다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얻었을 수도 있고,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그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들이다. 내 의지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실상 삶의 노예와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노예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또한 죽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고 해서 미리 죽을 필요도 없다. 내가 일단 숙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그것을 하면 된다.

 

태어난 자들의 숙명이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연장해가는 것은 수 많은 다른 생명체들의 삶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중요한 책임감이다.

 

왜 사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나쁜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하고 따질 필요도 없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 따지지 않는 것처럼 그래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잴 필요도 없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나의 삶이다.

 

나는 내 숙제만 잘하면 된다. 또한 유일하게 나만 할 수 있다. 남이 잘하고 있든, 남이 얼마나 하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시험장에 들어섰으며, 남의 답을 보고 똑같이 쓰면 그것을 컨닝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젠 그만 바라볼 때도 되었다.

 

우린 내가 쓴 답을 채점할 존재가 누구인지 모른다. 삶을 준 존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정답 여부를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면 된다.

 

 

사실 삶에 관한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착각에서 출발한다. 내가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간다는 헛된 믿음이다. 의지, 의도, 자의식, 극기, 목표, 자유, 선택, 지배와 같은 단어들이 모두 다 그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그것에 끌린다.

 

내가 내 삶을 의도하고 있다는 믿음이 실패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성공하고 싶어서 의도를 믿는다. 그냥 주어진 것은 성공과 실패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모든 것은 내 의도여야만 성공이란 개념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태어남이 내 성공이 아니란 점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성공이 아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주어졌다.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할 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그들을 돕는 셰르파이다.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고산족인데, 사실상 힘든 일들은 그들이 모두 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산에 오르기 때문에 등정에 성공해도 그 어떤 기사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산에 오르기를 목표하고 모든 비용을 감당한 존재만이 정상 등극이라는 명예를 얻는다. 산악인은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기를 성공하거나 실패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르는 셰르파는 성공도 실패도 하지 않는다.

 

산에서 자란 나무는 실패할 수 없다. 설령 자라다가 죽었더라도 실패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심은 나무는 잘 자라야 한다. 병들거나 죽으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나무에 자신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고 믿기에 그렇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한 것일까? 사실 한 것도 거의 없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나무를 심은 것하고 물을 주거나 거름을 준 정도에 불과하다.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한 흙, 태양, 물은 내가 만든 것들이 아니다. 원래부터 그냥 있었다. 나는 그냥 그것을 옮겼다. 나는 평생 노력해도 단 한줌의 흙조차 만들어 내지 못한다. 단 하나의 따뜻함도 못 만들어 낸다. 당연히 물도 못 만든다.

 

나는 그저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들을 적절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무가 잘 살아나면 그것이 내 의지라고 믿는다. 나무가 잘 살 수 있는 것에 0.0000001%의 도움을 줬지만, 100%가 내 의지이다. 내 자랑이 된다. 반대로 나무가 죽으면 스스로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삶이 이상해지는 순간이다.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수동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순응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다. 순응을 포기라고 생각한다. 순응은 나를 순리적인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다. 매일 선택은 하지만 그 결과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것들이 알아서 결정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나온다. 순응하는 삶을 산다면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냐고 되묻는다. 이 역시도 순응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순응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먹잇감을 구하는 생명체들 중에서 단 하나도 열심히 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생과 사가 갈리는 상황에서 게으르고 적당히 하는 존재는 없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사는 생명체들도 그렇다. 그들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해 그렇게 변해 버렸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에 수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 그냥 아주 단순히 열심히 살수만 있다면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 결과가 성공이냐 실패냐 여부에 상관없이 그래야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열심히 살기가 쉽지 않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열심히 살기엔 너무 불안해서 그렇다.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해보기도 전에 결과로 주어질 것들에 대해서 불안해 한다. 그래서 시작조차 못할 때가 너무 많다. 혹은 하더라도 대충 한다. 처음부터 실패를 대비하는 것이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도 확신만 있다면 열심히 한다. 그래서 다들 게임은 열심히 할 수 있다. 열심히 하면 명백히 그만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삶은 게임이 아니다. 그래서 대가가 주어질지 여부가 불확실하다. 그것이 오늘 내가 열심히 살 수 없는 이유가 되고 만다.

 

이런 열심히 살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후 삶 자체를 아주 심하게 뒤틀고 만다.

 

열심히 살지 못하니 많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는 쓸데없는 생각들이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 찔리니까 내가 열심히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핑계도 대야 하고, 가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비난도 해야 하고, 아주 가끔은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냥 열심히 살면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을 수 많은 잡념들이 생겨난다.

 

열심히 살지 않으니 시간이 남아 도니 자꾸 남들을 본다. 그렇게 그들의 '열심'을 측정한다. 저 사람의 열심은 대상이 잘못되었고, 저 사람의 열심은 방법이 잘못되었고, 저 사람의 열심은 그럴 듯 하고, 저 사람의 열심은 부럽다. 내 상태가 유독이 안 좋을 때는 누군가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질투 나서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열심히 하지 못하니 쉽게 얻는 법을 꿈꾼다. 열심히 하지 않고도 결과적으로 열심히 한 사람들이나 얻을 수 있는 것을 원한다. 일확천금을 꿈꾸고, 불로소득에 눈길이 가고, 그것을 얻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욕망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과정' 그 자체임을 까맣게 잊어서 그렇다. 그러면서도 성공한 누군가가 '꿈을 따라 가세요. 그러면 나머지는 모두 알아서 주어집니다' 라는 말을 하면 감동을 받는다.

 

까맣게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말에 끌리는 이유는 단지 평소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고, 내 머릿속에 수 많은 잡념들이 널뛰고 있는 이유는 열심히 살지 못하는 이유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 불안해진 우리들은 가끔 숲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본다. 냉정히 말해서 그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들은 아무런 쓸데없는 일이다. 버튼만 누르면 켜지는 불을 피우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고, 말리고, 땐다. 전화만 하면 배달이 오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봄부터 땅을 갈고 가꾸고 캐고 다듬고 있다. 도심에 사는 우리가 10분이면 할 일을 하루 종일 하고 있다. 사실상 도시에 살면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바라본다. 편안해진다고 느낀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들이 얻어낸 결과물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열심히 살고 있어서 그렇다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살면 된다. 삶은 이상하긴 하지만 잔혹하지는 않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살다가 100년쯤 후에 기분 좋게 뜨면 된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열심히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다. 노는 것도 열심히, 일도 열심히, 잠도 열심히, 밥도 열심히,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다. 모든 후회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생겨난다. 모든 걱정도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니 생겨난다.

 

피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핑계대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살면 된다. 왜냐고, 왜 그래야 하나고 따지지 마라. 삶이 원래 그렇다. 태어난 자의 운명이다.

 

물론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삶은 참 관대하다. 열심히 깔끔하게 조용히 잘 살다 가든 열심히 살지 않고 지저분하게 시끄러움 속에서 살다 가든 각자의 몫이다.

 

열심히 하라고 했지 욕심 내라고 안 했다. 열심히 하라고 했지 잘 하라고 안 했다. 열심히 하라고 했지 자랑하라고 안 했다. 열심히 하라고 했지 일등하라고 안 했다. 그냥 열심이만 하면 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오늘 삶이 혼란스러운가? 그렇다면 열심히 살고 있지 않아서 그렇다.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럽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라고 답을 해주겠다. 집 청소든, 운동이든, 게임이든 열심히 하면 된다. 심지어 TV도 열심히 봐라.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루지는 마라. 가장 우선적으로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삶은 주어진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간다. 사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은 끝없이 주어진다. 그러니 그것만 열심히 하면 된다. 그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숙제를 수행하는 수행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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