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묵은 감정

아이루다 2021. 8. 19. 09:28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런 감정들을 보통 묵은 감정이라고 한다.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 기억이 날 때도 있고감정은 존재하지만 도대체 왜 이 감정이 생겼는지조차 잘 모를 때도 있다우연히 가끔 남의 일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도 하고어떨 때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강렬하게 다시 체험할 때도 있다.

 

언뜻 생각하면 꽤나 복잡해 보인다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움은 그저 오래 전에 겪었다는 이유로 그 원인이 전혀 다른 두 가지 형태의 감정을 '묵은 감정'으로 묶었기 때문에 생겨난다묵은 감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고전혀 다른 원인으로 생겨난다그렇기에 그것이 생겨난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전혀 다르다.

 

기본적으로 묵은 감정은 과거에 어떤 이유로 인해서 기분 나쁜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남는 현상이다그러니까 어떤 문제로 인해서 감정이 발생할 당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게 되면 그 감정이 내면에 새기듯이 남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해결 되었다'의 의미 자체가 두 가지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과거에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것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서 남아 있는 경우이다감정을 느낀 이유는 명확히 알지만 그것을 처리하지 못해서 억울한 것이다친구가 대놓고 내 뒤통수를 쳤는데 그것을 그 자리에서 화내지 못하고 만 일이다누군가와 싸웠는데 분명히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재주가 없어서 결국 당하고는 집에 돌아와서야 제대로 대꾸할 말이 생각 날 때 그렇다.

 

이런 억울함과 복수심에 관한 묵은 감정은 보통 '해묵은 감정'이라고 한다원인이 단순하며 해결책도 단순하다다시 가서 제대로 복수를 하든가할 수 없다면 그냥 잊고 사는 것이 최선이다붙잡고 있어봐야 나만 손해다.

 

다른 하나는 예전에 분명히 어떤 기분 나쁜 감정을 느꼈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를 때이다과거에 누군가 나를 배신했거나나를 미워했는데 도대체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다른 말로 하면 내가 과거에 느낀 그 감정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억울함은 내가 느낀 나쁜 감정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음을 명확히 알고 있을 때 생겨난다. 반대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딱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잘못한 것 같지도 않는, 모호한 상태이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빠내가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대 놓고 차별 대우한 엄마학교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생활했는데 나에게만 면박을 주던 선생님아무 설명도 없이 잠수 이별을 한 남자 친구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와서는 너 같은 인간하고는 다시는 말도 안 섞겠다고 한 절친 등등지금 생각해도 그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 지에 대해서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그런 납득되지 않는 감정들이 가끔 떠오를 때면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던 것일까?'

 

설령 제대로 납득은 되지 않더라도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원래는 큰 문제는 아니어야 한다그럼에도 그런 감정의 기억들은 나를 아프게 찌른다왜 납득되지 않은 묵은 감정이 나를 찌르는 것일까?

 

그 이유는그 이유를 제대로 모른다면 그 일이 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갑자기 바퀴벌레가 나타났을 때 기분이 나빠도 잡으면 끝이다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바퀴벌레의 등장을 두려워한다왜 갑자기 바퀴벌레가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면 계속 그것에 대해서 걱정을 할 수 밖에 없다

 

과거에 나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그 문제는 과거의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우리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걱정이 떠돈다.

 

'나는 어쩌면 딱히 아무런 이유가 없이 보기만 해도 싫어지는 사람일까?'

 

과거의 납득되지 않는 감정이 미래의 두려움을 만든다그런데 나중에 아빠가 집을 나간 이유는엄마가 말한 이유처럼 내가 어릴 때 너무 유별나게 울어서가 아니고엄마가 바람을 피다 걸려서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엄마가 나를 차별 대우한 이유는엄마가 아빠에게 커다란 배신을 당했는데형제들 중에서 내가 제일 아빠를 닮아서 그런 것임을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선생님이 나를 면박 준 이유가 사실은 엄마가 돈봉투를 주지 않아서 그렇고잠수 이별을 한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이 생겼는데도 비겁하게 그 말도 할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고어느 날 갑자기 다시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절친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그랬던 이유를 알고 나면 이해가 가고 납득이 된다그렇게 이해되고 납득된 묵은 감정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 당시엔 어려서 어른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파악하긴 힘들었다그 순간에 왜 그랬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지금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물어 볼 수도 없다그러니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고납득도 되지 않은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처음부터 누군가의 접근을 막는 높은 담의 역할을 하게 만든다누군가 용기 있게 그 벽을 뚫고 들어와도 '그 사람이 떠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에 떠나기 전에 밀어 내려고 한다. 그 밀어냄을 견디다 못해 떠난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래, 너도 결국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더 깊이 들어가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누군가 자신을 미워했을 때 그 이유를 이해할 없었던 과거를 지닌 사람이 겪어야 하는 어둠이다.

 

이런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해결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심리 상담가'이다이들은 상담 받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과거 이야기들의 조각을 퍼즐처럼 맞춰서 부모가선생님남자 친구가절친이 왜 그런 행동들을 했었는지를 설명해준다그들의 설명을 듣게 되면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사실 그들의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들었을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으며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겨나면 된다그제서야 마음을 두껍게 덮고 있던 장막이 사라지면서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다.

 

그래서 납득되지 않은 묵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전문적인 심리 상담을 받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버림으로써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를 향한 삶을 살 수 있다과거에 겪었던 일이 내 잘못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고설령 또 다시 겪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닌 상대방의 잘못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자기 신뢰를 되찾는 일그것이 바로 묵은 감정을 처리해야 하는 진짜 이유이다.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다들 뭔가 결함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결함이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누군가 내 결함을 보고 나를 싫어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내 결함으로 인해 그 사람의 내면에 뭔가가 건들여진 것이다. 아이에게서 싫은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고 차별한 엄마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처음부터 내 문제도 아니고, 내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그런 문제로 인해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미움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로써 태어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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