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골디락스

아이루다 2021. 7. 20. 08:31

 

생명 탄생에 대한 학설 중 가장 유명한 이론은 바로 '진화론'이다. 사실상 거의 유일한 과학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이 이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진화론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체가 어떤 식으로 진화가 되는지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밤을 아주 잘 까는 귀여운 다람쥐나 꽃에서 꿀을 빨아 먹고 사는 벌새 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정말로 먹이를 잘 먹을 수 있게 진화를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몹시 신기하기도 하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저렇게 딱 맞는 신체기관을 갖게 되었을 지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자연의 신비함을 느낀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다가 보면 어떤 절대적 존재가 그렇게 설계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의식의 흐름은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화론에 대한 착각이긴 하다.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해 가장 크게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사실은, 진화의 결과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점이다. 그러니까 다람쥐는 밤을 잘 까도록 진화되었고, 벌새는 꿀을 잘 빨도록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결과일 뿐 목적이 아니다. 다양한 다람쥐들 중에서 밤을 제일 잘 까는 녀석이 자손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다양한 벌새들 중에서 꿀을 제일 잘 빠는 녀석이 자손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진화의 기본 원리는 '돌연변이'이다. 자연은 끝없는 유전자 뒤섞음을 통해 매 세대마다 유전자 오류를 만들어 낸다. 물론 오류라는 표현 자체도 문제이긴 하지만, 원래 부모의 유전자에 비해 뭔가 달라진 점이 생겼으니 그냥 오류라고 하자.

 

그렇게 생겨난 돌연변이가 몹시 운이 좋다면 다른 동료보다 좀 더 생존에 유리할 수 있다. 반대로 운이 나쁘다면 열등하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 식으로 만들어진 돌연변이들 중에서 우연히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타고난 녀석들이 이후 많은 자손을 남김으로써 해당 종의 대표가 되게 된다.

 

그렇지만 최종 결과물만 보게 되면 그 자체가 신기해 보인다. 마치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생존 조건을 선택해서 진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수 많은 시행착오 중 하나 얻어걸린 결과이다.

 

우주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골디락스 존'이란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춥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적당한 곳이란 뜻인데, 지금의 지구가 위치한 곳이 바로 골디락스 존이다.

 

골디락스라는 말은 여러 분야에서 쓰이는데, 천문학에서 쓰일 때는 '생명이 거주 가능한 영역'을 뜻한다. 그 조건으로는 암석 행성이며,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해야 하고, 대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적절한 수준의 자기장을 가지고 있어서 우주 방사선 입자를 막을 수 있어야 하고, 크기도 너무 작으면 안 된다. 물론 너무 커서 중력이 과도하게 강해도 안 된다

 

이것들 말고도 지구의 경우엔 커다란 달의 존재가 있어서 지구 자전축 흔들림을 막아주고 있고, 먼 거리이지만 거대 행성인 목성이 존재하고 있어 내행성 계로 들어오는 수 많은 운석들을 처리해주고 있다.

 

 

그 정도 조건은 되어야 지구처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조건을 갖춘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그래서 과학계엔 아예 우리가 외계 문명과 소통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하는 방정식이 있을 정도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N = R *  fp * ne *  fl *  fi *  fc *  L


N: 
우리 은하 내에 존재하는 교신이 가능한 문명의 
R*: 
우리은하 안에서 1년동안 탄생하는 항성의  (= 우리은하 안의 별의 /평균 별의 수명)
fp: 
이들 항성들이 행성을 갖고 있을 확률 (0에서 1 사이)
ne: 
항성에 속한 행성들 중에서 생명체가   있는 행성의 
fl: 
조건을 갖춘 행성에서 실제로 생명체가 탄생할 확률 (0에서 1 사이)
fi: 
탄생한 생명체가 지적 문명체로 진화할 확률 (0에서 1 사이)
fc: 
지적 문명체가 다른 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있는 통신 기술을 갖고 있을 확률 (0에서 1 사이)
L: 
통신 기술을 갖고 있는 지적 문명체가 존속할  있는 기간(외부 충격으로 멸종하거나 내부 분열로 자멸하지 않는 기간) (단위)

 

이 값은 사실 매우 작지만, 이 우주엔 정말로 많은 별들과 그 별들을 돌고 있는 수 많은 행성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 조건을 통과하는 행성의 숫자는 꽤나 많다. , L의 값은 확실치 않기 때문에 인간 문명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가 오래 버틸수록 좀 더 확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이 진화해서 이런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은 꽤나 기적적인 일로 보인다. 또한 그렇기에 이 역시도 진화의 결과처럼 어떤 절대적 존재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 역시도 비슷한 이유로 착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이토록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조건들이 다 갖춰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조건들이 다 갖춰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를 목적으로 보느냐 결과로 보느냐의 차이인데, 최종 결론은 진화론처럼 결과일 수 밖에 없다.

 

진화의 본질이 우연함이듯, 우리가 지구에서 문명을 이룬 것도 골디락스 존이란 조건하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란 뜻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시선은 최종 결과를 목적으로 보는데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밤을 잘 까먹는 다람쥐가 경쟁에서 이겨 결국 다람쥐의 대표가 되었다는 생각보다, 다람쥐는 어떻게 저렇게 밤을 잘 까먹을까 하고 신기해 한다. 또한 골디락스 존이기에 인간이 이런 문명을 이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런 조건들을 다 갖춘 곳이 우리에게 주어졌을까, 하고 신기해 한다.

 

그 신기함은 신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품게 만든다.

 

우리들 각자 개인의 특징을 이루는 조건들은 꽤나 다양한 편이다. , 얼굴, 지능, 운동 능력, 언어 능력, 사고력, 창의력, 유머 능력, 손재주, 절제력, 인내력, 집중력 등등 꽤나 많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조건이 우세하냐, 열등하냐에 따라 각자마다의 고유한 특징이 생겨난다.

 

문제는, 모든 조건을 다 좋게만 타고 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간혹 모든 것을 다 가진듯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은 일정 조건을 어느 정도만 가지고 태어나거나 그 조차도 안 되는 사람들도 꽤나 많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아쉬움을 느끼거나 심한 경우 집착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니 뭔가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태어날 때 주어지지 않는 것들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밤을 잘 까지 못하게 태어난 다람쥐이거나 골디락스 존에 생성되지 못한 행성이다. 뭔가를 이뤄내기엔 최적화 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이나 골디락스 존처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과연 특정 조건들을 타고 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특정 조건들로 인해서 결국 지금의 내가 된 것일까?

 

비슷한 표현 같지만, 그것이 품은 의미는 전혀 다르다. 내가 만약 어떤 원하던 조건들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부족함과 불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런 조건들을 타고 나지 못했기에 현재의 내가 되었다면 그것들은 그저 운이 없는 것이다.

 

물론 운이 없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질 것은 없다. 단지 우리는 매우 익숙한 관점 하나를 바꿀 수는 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현재의 나에 대해서 100% 만족한다고 하면 내가 갖지 못한 조건들이 여전히 운이 없거나, 불만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불만과 불운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그저 현재의 내가 나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에 대해서 만족한다면 내가 갖지 못해서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은 오히려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내는 매우 필수적인 조건이 되지 않았을까?

 

만약 정말로 사랑하는 아내를 대학교 시절 만났다면, 좀 더 머리가 좋아서 더 좋은 대학교를 갔다면 못 만났을 것이다. 정말로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만약 더 잘 생기거나 예뻐서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결코 맺어지지 못할 인연이었다.

 

결국 과거에 타고난 모든 것들과 내가 경험한 모든 시간은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내는 조건들이었고, 그로 인해서 현재의 내가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태라면 그 순간부터 내가 가진 모든 단점과 장점은 현재의 나를 만들어 내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나이기 위한 '골디락스 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그리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가진 능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지금 현재의 나에게 가능하면 최대한 만족하려고 노력해야 할까?

 

물론 이 둘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목적을 향한다. 갖지 못한 능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동안 자신에게 100% 만족하는 일은 경험할 수 없다.

 

물론 자신에게 100% 만족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수 많은 조건들을 갈망하며 평생 동안 집착하고 사는 것보다는 쉬울 수 있다.

 

사실 나 자신에 대한 온전한 만족은 지금 당장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만의 '골디락스 존'이 될 수 있다. 그것을 막는 것은 결코 남이 아니다. 그저 두려워서 끝없이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려는 욕망이 그것을 단단히 막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를 내가 가진 조건들의 총합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만족할 수만 있다면, 도대체 갖지 못한 능력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남들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느껴며 열등감을 느끼거나,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존재일까 하는 자괴감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은 하겠지만, 더 나아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나로써 충분하다. 그저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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