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표현의 착각

아이루다 2021. 8. 10. 07:12


누군가 나에게 '너는 나에게 참 이용가치가 높은 사람이야' 라고 한다면, 결코 그 내용이 나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기분이 좋을 수도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 것이다. 관점에 따라서 내가 호구라는 뜻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물건이냐, 이용하게?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표현을 조금 바꿔서 '너는 나에게 참 귀한 사람이야' 라고 하면 어떨까? 이 역시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될까? 아니다. 속이 엄청 꼬여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말하는 사람이 이죽거리면서 하는 말이 아닌 한, 그 말은 우리를 아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표현만 다를 뿐 내용 자체는 완벽히 동일하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많아 달라 보인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은 말이 있고 기분이 상하는 말이 있다. 표현이 의도보다 우선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것이고, 포장지가 내용물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상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신문지로 싸서 주면 기분이 영 별로이다. 그래서 선물은 가능하면 가장 좋은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줘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불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그 사람은 선물의 의미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다.

 

선물은 원래 '내가 필요한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수는 있지만, 돈 내고 사기는 좀 애매한 것'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받는 순간 기분이 가장 중요하다. 실제로 받은 것이 쓸모가 있는지 여부는 둘째 문제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좋은 표현을 쓰는 것이 좋다. 좋은 표현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고 그로 인해서 나도 기분이 좋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다.

 

 

흔한 표현으로 '문과 감성' '이과 감성' 있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면 문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반짝임의 물결' 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고, 이과는 '아주 작은 티클 주변에 수증기가 응결되어 붙음으로써 내리는 모든 색을 반사해서 흰색으로 보이는 물체' 라고 할 수 있고, 그 옆에 있는 문과도 이과도 아닌 군인은 '내 주말을 날려 먹는 백색의 원수' 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문과는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고, 군인은 우리를 웃기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과는 아무런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 짜증이 난다. 누가 눈이 생기는 과정을 물어봤나?

 

우리는 평소에 사실, 진실, 현실과 같은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사실, 진실, 현실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아주 단순히 생각해서 사람들 머릿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생각이 모니터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기계가 나왔을 때 이 세상은 좀 더 나아질까

 

아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수 많은 싸움이 나다가 결국 인류는 자멸할 듯 하다. 그래서 절대로 만들어져서는 안 되는 기계이다.

 

이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유지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는 매일 수 없이 많은 거짓말들을 하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너무 자주 해서 이제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처세술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오히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 문제가 된다. 뭐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누군가의 기분을 망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사실, 진실, 현실에 대한 직시가 필요할 때가 있다. 무조건 외면하고 거짓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보통의 경우엔 설령 거짓말이라도 좋게 말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자주 거짓말을 하다가 보면 본인도 그렇게 믿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매일 귀하다고 말하다 보면 사실은 그 사람이 나에게 너무도 필요해서 귀하게 느낀다는 것을 잊게 된다. 누군가를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다 보면,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함을 잊게 된다.

 

내가 한 어떤 행동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한다고 믿게 된다. 내가 어쩌면 이타적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 착각은 이후 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만다.

 

우리가 누군가를 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다. 그 사람이 어떤 용도로든 나에게 유용한 면이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이 나에게 도움이 되며,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재미가 있어서 그렇다. 더하면 나에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든가, 나를 인정해줘서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든가, 내가 모르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든가 하는 면도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나에게 '이득', 그러니까 나를 좀 더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사람을 원하는 것이다. 그냥 그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이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우리는 그 즉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정말로 이득과 손해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내 목숨을 노려도 여전히 그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착각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의무감 때문에 그런데, 과거에 내가 도움을 받았을 경우 양심적 가책에 의해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분명히 손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보면 정말로 우리 인간이 이득과 손해의 관점이 아닌 누군가를 귀하게 여길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도 나에게 결국엔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의무감에 의해 내가 손해를 본 짓을 했더라도 양심의 가책이 줄어든 이득이 더 크기 때문에 한 것이다. 그래서 손해가 양심의 가책이 줄어든 이득을 넘어 선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면서 살아야 할까

 

살다가 보면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며, 그것은 거짓된 삶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가식적 표현을 경멸하며 자신은 늘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산다는 도덕적 우월성까지 느낀다.

 

그렇게 살아서 얻는 것은 바로 끝없이 주변에 상처를 줘서 사람들이 멀어진 '고립'이다

 

왜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싶었을까?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그렇게 한 것이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것도 결국엔 그렇게 해야 자신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 사람들과 달리 자신만은 유일하게 진실을 말하고 산다는, 우월감이 주는 행복에 취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모기가 물려 가려우니 칼로 그 자리를 파내는 것과 비슷하다. 당장은 그것이 행복하니까 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피가 철철 흐르는 거대한 상처이다.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 라는 표현보다 '네가 중요하다' 라는 표현을 하고 살아야 한다. 단지 그것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 된다. 선물은 반드시 예쁜 포장지로 싸서 주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선물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나를 위해서이다. 나를 위해서 좋은 표현을 써야 하고, 나를 위해서 좋은 포장지를 써야 한다. 그것이 나에게 훨씬 더 큰 이득을 보장해줄 것이다. 결국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다.

 

그러니 안 할 이유가 없다. 안 한다면 오히려 정말로 스스로 그 말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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