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이와 어른의 경계

아이루다 2021. 7. 5. 07:09


최근 몸이 많이 안 좋아지신 아버지가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입원은 사실상 퇴원이 없는 입원이다.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셨으니까.

 

암 진단을 받으신 후로도 병원에 입원하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셨기에,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쯤은 이미 하반신은 쓰질 못하셨고, 말도 어눌하고 의식도 오락가락 하셨다. 아버지 당신이 많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런 아버지를 돌봐드리던 나이가 많으신 어머니 역시 너무 힘들어 하셔서 결국 병원에 입원을 하기로 하고 앰뷸런스를 불렀다.

 

절차 때문인지, 앰뷸런스 기사가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나이가 구십 세라 대답했다. 그러자 들것에 실려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입을 열어서,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구십 세가 아니고 팔십구 세라 정정을 했다.

 

이 장면은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이 얘기를 웃으면서 하셔서 알게 되었다. 당시 모여있던 가족은 이 작은 에피소드를 듣고는 다들 가볍게 웃었다.

 

우리는 유아 시절을 거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끝없이 주장하는 것 하나가 바로 '저 이제 어린 애 아니에요.' 이다. 구순의 나이에도 한 살이라도 더 낮추고 싶어했던 아버지와 달리 아이들은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대접을 받길 그리 원하는 것이다.

 

이해는 간다. 나도 그랬지만, 어린 시절, 단지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참 많은 것이 억제된다. 그러니 일 년이라도 더 빨리 어른이 되어서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그 자유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진실을 모른 채 말이다.

 

어른들은 한 살이라도 덜 먹길 바란다. 반대로 아이들은 한 살이라도 더 먹길 바란다. 그래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자신의 나이에 대한 태도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사람일 경우 보통 20대 초 중반쯤이 기준점이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시기가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황금 같은 시절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서투름을 어느 정도 벗어났고, 누군가와 불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이며, 인생 전체에 있어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이다. 성인이 되었기에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할 수 있고, 외모도 제일 꽃피는 시기이면서, 아직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은 나이이다.

 

그야말로 '젊음'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빨리 그 시절로 갈 수 있길 바라고, 어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아이들에게 '어려 보인다'는 욕이고, 어른들에게 '어려 보인다'는 칭찬이 된다.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시절, 그것이 바로 20대 초반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절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인생 전체에 걸쳐서 과연 무엇을 가장 욕망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가장 젊고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긍정적 관점에서 20대 초반을 바라보는데 익숙하지만, 사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짜 의미는 '강함'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젊은 시절은 가장 육체적으로 강한 시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강함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늘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다.

 

아이들이 어린 애 취급을 받게 되면 기분 나빠 한다. 물론 어리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에 대한 반발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일 뿐이다. 아이들이 진짜로 기분이 나쁜 이유에는 바로 '어린 존재는 약하다'라는 포괄적 이해에 대한 반발이 숨겨져 있다. 그러니까 '어리다'라는 말에는 '약하다'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어른들 역시도 늙었다는 취급을 받게 되면 '약해졌다'라는 무의식적 평가가 숨겨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늙은 사람 취급을 받을수록 그 존재는 상대방에게 약하게 인식된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약하다'란 평가가 가진 의미는 죽음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자랄수록 다른 아이들 틈에서 끝없이 교정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약한 존재로 취급하고, 그런 취급이 서로를 자극시켜서 강한 존재로 보일 수 있는 허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얼마나 '어른 흉내'를 잘 낼 수 있느냐 여부가 강한 존재에 대한 평가 척도가 된다. 그래서 그 허세가 심할수록 어른 시절부터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재미있게 놀던 놀이는 중학생만 되어도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친구들에게 어이없다는 눈빛을 받을 수 있다. 대 놓고 "초딩이냐?"라고 비난하는 친구도 있다.

 

주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에게 '어른스럽게 행동할 것'을 끝없이 주문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했던 행동을 하면 친구들처럼 비난은 하지 않아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들은 당사자는 점점 더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맞춰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최대한 어른스럽게 행동을 해서 '강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이것이 바로 누구나 겪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다.

 

그 안에 숨겨진 욕구는 여전히 똑같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니 그 욕구를 참고, 다들 '어른스럽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어른의 진정한 정체인 것이다.

 

물론 어른이 되면 관심사가 자체가 달라지긴 한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로봇 장난감이나 인형놀이는 이제 별로 흥미가 없다. 대신 술을 먹는 것이나 여행에 관심이 더 많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관심 대상의 차이일 뿐이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본질은 동일하다. 그래서 더 나이를 먹게 되면 술이나 여행보다 텃밭이나 족보에 관심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관심사를 기준으로 아이와 어른을 나누려고 하지만, 이것은 그저 아주 오래된 관행이다. 그것들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이 쌓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증상'인데 그것을 기준점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몸에 열이 나는 것을 보고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 열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올라가기 때문에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맞는 것은 아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럴 수도 있고, 운동을 해서 그럴 수도 있다. 지나친 흥분이나, 갑작스러운 호르몬 불균형 문제로도 그럴 수 있다. 그러니 늘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관심사 자체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것은 분명히 오류가 생긴다.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이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존재가 있고, 어려서부터 이상하게도 어른이 가질만한 관심사를 가진 아이도 있다.

 

아이와 어른을 정말로 구분하고 싶다면, 자신의 욕구를 바라보면 된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의 끝없는 간섭으로 인해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생겨난 것인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삶과 주변에서 끝없이 '어른스러워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교정한 상태에서 선택하는 삶의 차이이다.

 

이 말은 당연하면서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른이 된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출발점이 바로 어디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니까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욕망들의 근원이 생각보다 그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어른스럽기를 바라는' 주변 사람들로 인해 다듬어진 후에 생겨난 '원한다고 믿는' 것들을 하고 살아가게 된다.

 

결국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모든 원하는 것의 근원이 되고 만다

 

사실 이런 흐름은 전혀 문제가 없다. 원래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최대한 건강하게 오래 잘 살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갈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없는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20대 젊은 나이를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늙어가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현재까지로는 막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끝없이 추구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바로 '집착'이 생겨난다. 강함에 대한 끝없는 집착, 그것이 현대인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증상이다. 하지만 그 집착은 보통은 근육을 키우거나 무술을 배우는 등의 직접적인 현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강함은 단순히 신체적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에 대한 욕구, 경험에 대한 욕구, 능력에 대한 욕구, 영향력에 대한 욕구 등등으로 변형되어서 나타난다.

 

그래서 끝없이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끝없이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끝없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키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끝없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는 것 등의 노력을 하게 된다.

 

당연히 나쁜 것은 아니다. 안 하는 것 보다는 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집착을 하면 할수록 점점 그것들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러다가 결국엔 그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되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되고 만다.

 

그런 것들은 그저 자신이 약한 존재가 되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자기 자신만의 대항 무기인데 - 그것도 사실상 매우 부실한 - 그것을 스스로 심취하여 빠져드는 것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어린 아이'가 되기 싫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약한 존재에서 벗어나 강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욕망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 형태가 직접적으로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왜곡되어 보여서 전혀 그런 것들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실제적으로 육체를 강화시키는 노력 등을 폄하하기도 한다. 오직 정보와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최고이고남들과 잘 지내는 것이 최고라는, 정말로 아이러니한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최고의 것들이고 남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낮은 수준의 것들이란 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다들 '꼰대'가 된다. 자신이 약한 것이 너무 두려워, 끝없이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로 인해, 사회적으로 '어른스럽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들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그것이 넘쳐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조차 끝없이 강요하는 존재, 바로 그 모습이 꼰대이다.

 

그저 약한 존재가 되기 싫어서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고 싶고, 강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만들어 낸 결과인데, 그것에 완전히 빠져서 그 자체를 삶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목표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절대로 달성하지 못할 목표를 추구하며 평생 살아가 결국 죽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 되고 만다.

 

좀 다른 길은 없을까? 이토록 뻔한 결론에 이르는 삶을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머릿속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 이미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들었던 수 많은 주변의 참견들과 스스로 어른이 되고 싶어서 만들어 낸 수 많은 관념이 서로 뒤섞인 덩어리를 우선 정리해야 한다.

 

쉽지는 않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 머릿속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고 살고 있는 형편이다. 내 의지이고, 내 판단이고, 내 욕망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남의 의견이고, 남의 결정이고, 남의 욕망이다. 약한 존재에서 벗어나 어른스럽고 싶어서 만들어 진, 사실상 사회가 만들어 준 ''이다.

 

당연히 벗어나는 과정이 몹시 힘들다. 그래도 그 길을 가 볼만은 하다. 적어도 그 길은 뻔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두려움으로 인해 강해지고 싶어서잃어버린 진짜 내가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어른스럽게대접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깊게 숨어 버린 나의 본질이 존재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수 많은 사람들의 뻔한 교정으로부터 만들어 진 나로 인해 대체되어 버린 진짜 내가 있다.

 

만약 삶에 있어서 유일한 목적점을 정해야 한다면, 삶은 내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그 존재를 다시 되찾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바로 우리들의 진짜 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껏 삶이라고 믿어왔던 것들로부터 조금 벗어나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보자. 죽는 날까지 도착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 길은 적어도 우리를 조금은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