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 남은 이야기

아이루다 2021. 6. 13. 07:34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상위 1%에 해당되는 확실히 머리가 좋고 확실히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적당히 머리가 좋고 달성하기 쉬운 목표를 가진 사람들, 그러니까 분류상 1번과 5번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것의 괴리로 인해서 어쩔 수 없는 좌절감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결코 좌절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매우 활동적이며, 매우 적극적이다. 좌절해서 주저 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복하기 위해서 매우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스스로 패배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고,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매우 집중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누군가에 대한 열등감이다. 아주 좋게 평가해줘야 부러움이다. 단지 그 열등감이 좌절이라는 부정적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만들어 내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그러니 그렇게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부지런하고 거침없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좋은 것이다. 단지 자신이 열등감이나 질투심 그리고 좌절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착각만 안하면 된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바로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감지하는 능력이 둔해서 그 사실을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열등감으로 인해 자기증명 할 때마다 아주 큰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나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그것을 매우 좋아해서 한다고 믿는다.

 

물론 좋아하는 것은 맞다. 잘해서 인정 받을 때 누구보다도 행복하니까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

 

 

::둔한 사람들::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어릴 때부터 감정을 억제 받아서 그렇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감정을 숨기도록 강요를 받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더해서 타고난 성격 자체도 둔하다. 둔하게 태어난 사람에게 감정을 억제하는 훈련을 하게 되면 결국 감정 둔감성이 심각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만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주로 여자보다는 주로 남자들이 여기에 많이 속하는데, 감정이 둔한 것 자체는 비슷한 비율이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감정을 숨기도록 강요를 받기 때문에 결국 더 많은 비율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남자는 어려서부터 우는 것부터 시작해 수 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래서 결국 감정이 거의 없는 듯한 모습을 가진 존재들로 자라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열등감조차 감각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로 인해서 부수적으로 많은 남자들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 퇴화해서 자신의 감정을 잘 감각하지 못하니 타인의 감정 역시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다.

 

또 하나의 경로는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한 경우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시기는 바로 어린 아이 시절이다. 그래서 그 당시엔 부모의 관심과 인정은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똑같이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운이 없다면 고아로 자라는 경우도 있다.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무관심은 생존 그 자체를 위협 받는 상황이라고 인식된다. 물론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그렇게 자란 사람은 평생 동안 부모의 관심을 끌려는 삶으로 흘러가게 된다. 삶의 유일한 의미가 바로 타인의 인정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엔 어린 시절 제대로 받지 못한 부모의 인정에 대한 끝없는 욕구가 숨겨져 있다.

 

이 욕구가 너무 강렬하다 보니 다른 모든 감정들이 다 삼켜진다. 그래서 결국 둔해지고 마는 것이다. 어딘가 너무나 많이 아프면 상대적으로 작게 아픈 곳들은 다 무시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너무도 밝은 빛은 적당히 밝은 모든 빛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만들어 버리고 만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부모로부터 삶을 부정당한 경우이다. '왜 태어났니' 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이다. 태어나게 해 준 존재에게 부정을 당한 삶은 이후 단 하나의 목표만 남게 된다. 바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꺼져버린 사람들::

 

같은 증상인데 앞과는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좌절로 인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강렬한 에너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거의 죽은 사람처럼 만드는 경우이다. 느끼기 싫은 감정들을 너무 자주 경험하다가 보니 아예 감정을 느끼는 능력 자체를 스스로 퇴화시켜 버린 경우이다.

 

쉽게 말해서 시장통에 오래 메어 놓은 개와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과 너무도 다양한 냄새들이 나는 시장은 개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많은 정보들을 생산한다. 그러니 개는 살아남기 위해서 점점 더 멍해진다. 처음에 묶어 놨을 땐 사람이 지날 때마다 일어나 꼬리를 흔들고, 새로운 냄새가 날 때마다 코를 벌름거리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이젠 누가 지나가도, 심지어 누군가 자신을 쓰다듬어도, 바로 옆에 좋은 냄새가 나는 먹을 것들 던져줘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는다.

 

살아 있지만 사실상 죽어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이 올라오니 아예 감정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스스로 둔감해져 버렸다. 그래서 외부에서 자극이 올라와도 멍한 시선을 바라 볼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는 에고로 인해 비교된 후 판단된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사람은 선택적으로 부정적 감정들에 대해서만 둔해질 수는 없다. 그러니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긍정적 감정들에 까지도 둔해지고 만다. 그러니 삶이 행복하지도 못한다. 딱히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도 느껴지지 않고, 새로운 것을 접해도 멍한 시선으로 바라 볼 뿐이다. 매일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니 살아간다.

 

차라리 어린 시절에 감정을 억제 당하거나 부모로부터 태어남을 부정당했다면 그로 인한 반발로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니 좌절감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에너지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결국 아마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살아 있지만 눈에 보이질 않는 존재가 되고 만다.

 

 

::부정하는 사람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 이야기가 있다. 높은 나무에 열린 포도를 보고 나서, 먹고 싶지만 자신이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 없으니 '저 포도는 분명히 신 포도 일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멀어져 간다.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으니 포도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우화는 실제로도 일어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보면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 그것이 가진 의미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그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도록 만든다. 문제는 실제로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이다.

 

여우가 포도를 포기하고 멀어져 간 후 다시는 포도를 보지 않는다면 곧 잊어 먹고 또 다른 어떤 것들을 욕망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포도를 먹고 있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여우가 아무리 포도가 시어 보여서 먹지 않기로 했다고 주장하더라도 여우 내부에 있는 무의식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안 돼서 그것을 갖지 못했음을 말이다. 그래서 능력 있는 누군가 포도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원래는 그것을 열등감으로 표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논리와 팩트를 기반으로 한 상대방에 대한 부정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포도가 얼마나 해로운 과일인지, 포도를 오래 섭취한 사람들이 어떤 병에 걸릴 있는지, 포도를 재배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토양이 낭비되고 있는지, 농부들이 풍성한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농약을 살포하는지 설명한다

 

실제로 그것들이 거짓말도 아니다. 논문이 나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포도가 정말로 해로운 것이고, 아무리 맛이 있어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우는 그렇게 자신의 열등감을 처리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마치 자신의 열등감이 사라진 듯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 뿐이다. 여우는 그저 포도가 먹고 싶었던 것이다. 먹고 싶은 만큼 부정을 한 것이다. 그러니 부정을 하는 노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먹고 싶었던 것뿐이다. 결국 여우는 괴물이 되어 간다. 포도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장점과 단점을 가진 열매이다

 

 

그렇지만 여우는 포도의 단점 부분만 극대화 시킨다. 자신의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서 포도를 괴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자신도 같이 괴물이 되어 간다. 그렇게 괴물이 되어 가던 여우는 언젠가는 포도를 먹는 존재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한다고 믿게 된다. 그것들은 사회에 악성 종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직 여우만 열등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에 비슷한 열등감을 가진 존재들이 주변에 몰려 든다. 그리고 다 같이 한 마음으로 외친다. 포도는 괴물이며, 포도를 먹는 사람들도 괴물이라고 크게 소리친다.

 

여우는 사람들을 더욱 더 확실하게 설득하기 위해서 포도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다 모은다. 포도 박사 수준이 된다. 물론 여우가 모은 정보는 모두 포도에 관한 부정적 정보로만 제한된다. 그렇게 확증편항이 일어난다. 그런 시간이 수십 년 흐르고 나면 여우는 이제 자신이 왜 포도를 괴물로 여기게 되는지조차 잊고 만다. 그저 포도에 대한 복구 불가능한 증오만 가득 찬 존재가 된 채 살아간다.

 

 

::쳇바퀴를 도는 사람들::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은 하고 있다. 까닭없이 화가 나고, 불필요할만큼 신경질적이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탈출구를 찾고 싶어 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시장통에 메였지만 개 목걸이를 뜯고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큼은 에너지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맨다. 자기 계발서를 읽고 흉내를 내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좌절한다. 그러면 어딘가에서 자신을 위로해주는 책들이 눈에 띈다.

 

노력하다가 좌절하고 실망하다가 위로 받고 다시 힘을 낸다. 삶이 끝없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이 된다.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하고, 능력이 좀 된다면 어딘가에 글을 쓴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속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도움을 주기도 쉽다. 누군가를 가장 쉽게 가르치는 방법은 선생님의 실력이 아니라 학생의 배우고자 하는 의지이다.

 

문제는 그것이 잠시 해결된 듯 해도 결국 또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머리로 듣고 읽었기에 머릿속 생각만 바꿔서 그렇다.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행동이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환원되어야 하는데 그 흐름이 멈춰서 그렇다. 삶이 원래 그렇고, 보는 관점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실천될리가 없다.

 

인간은 오직 행동으로만 변한다. 또한 누군가에 대한 신뢰 역시도 그 사람의 행동으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행동할 때 나는 나에 대한 신뢰를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은 힘든 일이다. 실제로 물리적으로도 힘들고, 행동 그 자체가 변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힘들 수 밖에 없다. 원래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 힘들다.

 

사람의 몸과 두뇌는 어떤 목적에 최적화 된 기계와 같다. 그래서 평소에 하던 일을 할 때 가장 잘 한다. 반대로 하지 않던 생각이나 하지 않던 행동을 하려면 어색하고 불안하다. 더군다나 익숙하지 않아서 시행착오도 많다. 그러니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변하고 싶다면 행동을 해야 한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들어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단지 그런 그럴듯한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한 불쏘시개 역할은 할 수 있다.

 

 

::열등감에 관한 조금 다른 시선::

 

인간에게 있어서 열등감은 에고를 가지고 있는 한 반드시 함께 갖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자신이 못하는 것을 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런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고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주변에서 원래 잘난 사람이니 잘 못해도 딱히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니 그런 감정을 느껴도 아주 희미하게 느낄 수 있는 행운이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열등감을 도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에고를 가진 존재는 그것을 없애지 않는 한 무조건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열등감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가장 먼저 열등감을 무조건 나쁘게 보지 말자.

 

물론 에고의 존재를 우리가 계속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져야겠지만, 겹쳐져 있는 동안만큼은 오히려 에너지로 만들어 쓰는 편이 좋다. 그러니까 열등감을 느끼기 싫어서 무시하고 둔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사는 삶이 낫다는 뜻이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 어린 시절에 겪은 좌절로 인해서 생겨난 괴물임을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나를 공격하도록 놔두지는 말아야 한다. 열등감을 느끼고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좌절하고 스스로 자책하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열등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 다른 모든 감정들이 희미해져 버리고 마는 둔한 삶, 열등감에 눌려 삶이 희미해져 버리고 마는 존재감 없는 삶, 열등감의 대상을 철저하게 부정하다가 증오심만 남게 된 삶, 매일 무엇인가는 하지만 결국 쳇바퀴 돌듯 되돌아 오는 삶이 되어 버리고 만다.

 

꼭 그렇게 살 필요까지는 없다. 열등감을 제대로만 바라볼 수 있다면, 자신의 한계점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이후 인간의 한계점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나만 바라보는 삶이 아닌, 너도 바라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집착을 막아준다. 열정은 좋은 것이지만 집착이 되는 순간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집중은 좋은 것이지만 중독이 되는 순간 스스로를 망치고 만다.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든 그만 둘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열등감으로 인해 생겨난 강렬한 의지는 집중과 열정을 넘어 집착과 중독으로 변하고 만다.

 

열등감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만큼 잘난 존재가 되지 않는 한 절대로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올라가도 계속 더 잘난 존재들이 눈에 들어 올 뿐이다. 상위 1%로 태어나지 않는 존재들의 숙명이다.

 

그래서 결국 좌절하고 만다. 이 흐름을 멈춰야 한다이런 글들을 통해 우리가 왜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를 이해했다면, 비로소 멈추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차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엔진이 아니라 브레이크이다. 우리는 멈출 수 있기 때문에 달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원할 때 끝낼 수 있어야만 완성된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차는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만다.

 

집착과 중독을 멈추고, 좌절과 포기를 멈추고, 매일 어떻게 하면 더 둔한 사람이 될지를 멈추고, 증오를 멈추고, 쳇바퀴 도는 삶을 멈출 수 있어야 한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다. 시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작할 줄 모른 것이다.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제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섰다. 어디로 갈 것인가? 오던 방향대로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서 새로운 삶으로 가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