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 1

아이루다 2021. 6. 8. 15:55

::두 가지 욕구::

 

아주 맛나 보이는 음식 앞에 섰을 때, 그리고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상황과 먹어도 되는 권리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꼭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그래서 실제로 숟가락이나 포크를 들고 그것을 먹고 나서 주로 후각과 미각을 통해 '맛남' 이라는 감각을 얻는다. 물론 이때 맛깔스러운 모습을 통한 시각과 씹는 소리를 통한 청각 그리고 식감이라고 불리는 촉감 역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오감을 통해서 맛있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누구인들 참을 수 있으랴.

 

하지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아니, 처음엔 사소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살이 찌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목소리이다. 그렇게 맛난 것만 잔뜩 먹다가는 살이 많이 찌거나 혹은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미래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손에 숟가락을 들거나 포크를 들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아직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서게 만든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맛난 음식 앞에서 먹고 당장 행복해지고 싶다는 현재의 욕구와, 좋은 몸매 유지하거나 건강한 몸으로 살고 싶다는 미래를 위한 욕구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에 굴복하는 편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으니 나중에 운동이라도 해서 먹었다는 사실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음식을 먹는 순간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는 늘 하는 것을 현재를 위해 찬성하는 욕구나 아니면 미래를 위해 반대 편의 욕구가 싸우고 있다. 혹은 현재를 위해 하지 않으려는 욕구와 미래를 위해 해야 한다는 욕구가 싸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을 사는 일, 가고 싶은 여행을 가는 일, 보고 싶은 공연을 보는 일과 미래를 위해 돈을 아껴야 하는 일이 싸우고 있고,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싶지 않은 것, 직장에 가고 싶지 않은 것,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것들을 하지 않을 경우 미래에 자신이 받게 된 예상되는 참담한 결과와 싸우고 있다.

 

그래서 삶이 무척 힘들다. 만약에 어떤 상황에서 오직 하나의 욕구만을 느낀다면 삶은 매우 단순하게 행복할 것이다. 그야말로 100% 순도의 욕구이며, 그런 욕구를 충족할 때 100% 행복하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먹으면서도 걱정하고, 하지 않으면서도 불안해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해도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그렇게 마음 편하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행복한 삶의 비결 중에서 '현재를 살아라' 라는 말이 그렇게 확 와닿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억제하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했던 삶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라는 말이 그렇게나 깊이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언제라도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든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1년만 쉬어도 평생 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두 가지 욕구를 느끼게 될까?::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한 상황에서 두 가지 욕구를 느끼게 될까? 아니 심지어는 두 가지 이상, 세 가지, 네 가지 욕구를 느끼는 경우까지도 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단순한 흐름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상한 것은 바로 그것을 억제하거나 강제하는 내가 이상하다. 도대체 나는 왜 나를 그렇게 억압할까?

 

그 답은 바로 내가 가진 높은 지능이다. 높다고 해서 남들보다 머리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 비해서 머리가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억압하게 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높은 지능에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쌓인 기억이 더해질 때 그렇게 된다. 높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제대로 된 기억이 존재하지 못하면 그리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기억이라는 창고가 아주 작다. 당연히 지능도 좋지 않다. 그러니 개나 고양이가 자신의 몸매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음식을 조절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 그런 식의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주인이 그들을 대신해서 억제 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이들도 비슷하다. 동물에 비해 지능이 충분하고 기억의 공간이 훨씬 넓지만 그 공간에 아직 지식과 경험이 쌓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동물들과 아주 유사하다. 내면에서 말리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매우 순수하게 욕구를 느낀다. 그러니 아이들의 욕구는 매우 순수하며 그로 인해서 그들이 경험하는 행복은 매우 그 순도가 높다. 그러니까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동물들이나 아이들의 욕구는 그 자신은 아니지만 그들을 키우는 주인이나 부모에 의해서 강제로 억제 되게 된다. 스스로는 안 해도 누군가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경험과 지식이 쌓인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들의 부모가 왜 그렇게 자신을 억제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이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아이는 부모의 모습을 닮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부모의 억제가 없어도 스스로 억제를 하기 시작한다.

 

이때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이 된 아이는 이제 아이를 낳은 후 자신이 당했던 대로 자신의 자식을 동일하게 억제하게 된다. 과자를 먹지 말라고 하고, 맛없는 채소를 먹으라고 한다. 집 안에서 뛰지 말라고 한다. 제발 공부 좀 하라고 한다. 게임 좀 그만하라고 한다. 이것은 인류 역사 동안 내려온 전통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과 동물이 확실하게 구분되기 시작한다. 동물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스스로를 억제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지적 능력의 한계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경험과 지식이 거의 쌓이지 않는 문제이다.

 

 

::두 가지 종류의 감정::

 

인간도 동물이며 살고 싶기 때문에 생존에 관한 욕구를 가진다. 살고 싶기에 먹고, 자고, 싼다. 하지만 결국 죽기 때문에 후대를 남기기 위한 성욕도 느낀다. 이 욕구를 통해 두려움, 공포, 고통, 충동 그리고 안도감, 편안함, 상쾌함, 만족감 등과 같은 본능적 감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감정들은 머릿속에서 아무런 여과 없이 '본능적'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지적 능력이 좋은 인간들은 좋은 머리와 커다란 기억 공간에 쌓인 경험과 지식을 통해, 미래를 위한 추가적이 욕구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불안함, 짜증, 질투, 열등감, 억울함, 복수심, 혐오, 분노, 미움, 지루함, 어색함, 수치심, 슬픔, 기쁨, 흥분, 재미, 즐거움, 호기심, 충만함, 애정, 감동, 존경심 등과 같은 감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감정들은 순수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통해 '판단적'으로 만들어 진다.

 

이렇게 감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만들어 지는 감정들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적으로 만들어 진다. 본능적으로 만들어 지는 감정들이라고 해도 판단적으로도 언제든 만들어 진다. 하지만 둘은 그것이 시작되는 원인이 다르다.

 

숲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면 본능적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호랑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가 된다. 그리고 해결하는 순간 금세 안도감으로 바뀐다. 하지만 오랫만에 만난 대학 동창이 자신과 비교도 안 되게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났다가 금세 질투나 분노, 열등감 등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대에 대한 미움이나 억울함도 느낄 수도 있다.

 

본능적 감정들은 순수하게 그 형태가 유지되지만, 판단적 감정들은 그 판단의 잣대나 상황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형태가 바뀌고 만다. 그리고 그 판단엔 언제나 타인이라는 존재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비교를 통해 판단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에서 호랑이에 쫓기든, 토끼에게 쫓기든 본인이 무서워서 쫓긴다면 그 감정은 그대로 두려움을 남는다. 하지만 토끼에게 쫓기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그것을 비웃게 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변형되기 시작한다. 두려움이 수치심으로, 자괴감으로, 열등감으로, 분노로 변해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토끼를 두려워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아닌 척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타인에 의해 나쁜 평가를 받게 되는 감정들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기대,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만드는 강압, 하고 싶은 일을 막는 억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제어 능력을 '이성' 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어떤 욕구를 느꼈을 때 그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감정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을 좀 차리라고, 제발 이성적으로 굴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빵을 먹고 싶을 때 그것을 참는 것은 전혀 이성적 활동이 아니다. 그 빵을 뺏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미래에 일어날 두려움들, 그러니까 아이의 부모가 보여 줄 분노, 그것을 알게 된 사람들의 비웃음, 심한 경우 경찰서에 끌려가게 될 상황에 대한 판단적 두려움이 그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판단했다'는 사실로 그 존재를 이성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거기엔 그 어떤 이성도 없다. 그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판단했고, 결국 두려움이 생겼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성공한 친구를 통해 두려움을 느끼고 싶지 않기에 성공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강렬한 기대를 하게 되고, 성공한 미래를 위한 책임감을 다하려고 하며,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싫은 일도 하게 만드는 의지라는 이름의 강압과 지금 당장 행복을 추구하려는 본능에 대한 억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는 어린 시절엔 존재하지 않았던 본능과는 구분된 두 번째 자아가 생겨난다. 그것은 태어날 땐 없었지만 이후 자라면서 지식과 경험이 쌓인 지적 능력이 만들어 낸 새로운 감정 발생의 주체이다.

 

 

::에고의 강화::

 

심리학자였던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아주 오랫동안 관찰한 끝에 이드, 에고, 수퍼에고라는 역할로 구분했다. 본능적 감정을 관장하는 이드, 판단적 감정 중에서 기대 부분만을 관장하는 에고, 나머지 책임, 강압, 억제를 담당하는 수퍼에고로 분리한 것이다

 

이 분리가 맞을 수도 있지만, 사실 수퍼에고는 그저 에고의 한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본능과 에고,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본능은 누구나 비슷하게 타고 나고 평생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는 반면,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해 생겨난 에고는 사람마다 얼만큼 똑똑한가, 얼만큼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는가, 어떤 기질을 타고 났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어린 시절엔 본능의 감정에 사로 잡혀서 거의 대부분 비슷해 보이던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에고를 강화시켜, 이후 전혀 다른 존재들로 분화되어 간다.

 

에고는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에 의해서 강화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고가 발달하는 원인이 지적 능력은 아니다. 지적 능력은 그저 에고를 발달시킬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요리 한 음식이 맛이 있다면 지적 능력은 요리에 쓴 칼이나 냄비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경험과 지식은 식재료나 조미료 등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맛이 있다는 최종 결론을 나게 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배고픔이란 고통과 음식을 먹을 때 느끼게 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하는 일이다.

 

에고에 관해서 배고픔과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하는 일에 해당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과 그 두려움을 자극하는 외부의 자극이다. 특히 타인과의 비교, 경쟁, 승부 등이 주 원인이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에고는 어릴 때는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어른이 되면서 그 존재감이 확실해진다. 특히 사춘기가 바로 에고가 폭발적으로 강화되는 시기이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 넣어 두기 때문에 본인이 하기 싫어도 끝없이 비교, 경쟁, 승부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학교는 에고가 강화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에고를 강화시키는 두려움은 본능의 두려움과는 아예 근본적인 종류가 다르다. 본능의 두려움은 당장 현재 생겨나는 종류의 것이라면 에고를 강화시키는 두려움은 미래에 닥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 오늘 아무리 상태가 좋아도 결코 완벽히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게 됨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도 모르게 평생 동안 에고를 강화시키게 된다. 그나마 나이를 많이 먹게 되면 줄어들긴 한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미확정 상태이다. 대략 어떻게 될지 예상만 할 수 있을 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또한 지금 미래를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 과연 정말로 제대로 된 노력인지 알 길도 없다. 마치 눈 먼 사람이 더듬더듬 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내 상태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지를 결정할 수 있다. 또한 힘드니까 이제 좀 쉬어도 되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자신과 비슷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이때 주로 비교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바로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된다. 혹은 비슷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 된다.

 

누군가 얼만큼의 연봉을 받고 있는지, 누군가 언제 집을 사는지, 누군가 직급이 무엇인지, 누군가 결혼을 했는지, 누군가 어떤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누군가 어떤 차를 타고 있는지, 누군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누군가 어떤 관계들을 맺고 사는지, 누군가 어떤 아내나 남편을 만났는지에 대해서 끝없이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자신의 현재 상태를 판단하게 되는 기본 정보로 활용이 된다.

 

그리고 이때 부족하다면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 두려움은 불안함이 되며, 불안함은 이후 자신도 남들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 과정을 통해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은 이후 다양한 기대와 억제, 의지, 극기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더욱 더 밀어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들 똑같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나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에고는 매우 다채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