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아이루다 2021. 6. 5. 08:03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출처의 감정을 접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하나는 내 안에서 생겨나는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서 생겨나고 있는 감정이다. 이후 이 둘은 그것들에 대한 민감성 여부에 따라 총 네 가지 종류의 조합으로 분리가 되는데, 각자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지게 된다.

 

첫 번째 유형은 내 감정을 잘 느끼면서 타인의 감정도 잘 느끼는 사람들이다. 아주 흔한 유형으로,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내 감정을 스스로 잘 느낀다는 말은 딱히 덧붙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뻔한 것이고, 타인의 감정을 느낀다는 말의 의미는 실질적으로 공감능력을 뜻한다. 그러니 보통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가진 우리들 대부분이 이 분류에 속하게 된다. 단지 전체적으로 감정에 얼만큼 둔하냐, 민감하냐 정도에만 차이가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내 감정을 잘 느끼지만 타인의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단순히 말해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에 대해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이 감정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한다는 선입견이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감정은 보통 사람들처럼 아주 잘 느낀다. 어쩌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의 감정은 잘 못 느낀다. 이 불균형이 그들의 문제를 만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어도 참는 이유는 그 사람도 나와 같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또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우리가 살인을 하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에게는 첫 번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단지 두 번째 이유만을 해결하면 된다. 그러니까 들키지만 않는다면 살인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된 사이코패스는 어떻게 될까? 흔히 표현하는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중 아주 일부만이 그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이코패스들은 스스로 사이코패스인지조차 잘 모른 채 다른 사람들과 잘 섞여서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진 증상은 명확하다. 사람들과는 어떤 식으로든 잘 지낼지 모르지만, 드라마는 보지 못한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공감능력을 십분 활용하는 장르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인물들은 대부분이 극단적으로 단편화 되어 있다. 선한 사람은 너무 선하고, 악당은 너무 악하다. 단순한 사람은 너무 단순하고, 복잡한 사람은 너무 복잡하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눈 앞에서도 아니고 TV나 극장 화면과 같은 2차원 매체를 통해, 오직 시각과 청각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드라마는 극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는 연기를 잘해야만 한다. 3차원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모두 자극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TV 속에 나오는 연기자에게 제대로 공감하려면 그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되고 만다. 현실세계에서는 타인과 잘 지내기 위해서 얼마든지 연기를 할 수 있지만(스스로 연기임을 모른 채라도) 드라마 속 인물들은 자신과 그 어떤 연관도 없고 이득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격하게 감정을 강요해온다.

 

이때 사이코패스는 크게 두 가지로 반응하게 된다. 자신이 충분히 상태가 괜찮다면 그냥 무관심하거나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서 약간의 호기심이나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게 본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그렇지 못한 상태라면 그냥 짜증이 난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현실이 아니니 공감하는 듯이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이들은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데, 웃음은 그나마 따라 웃을 수 있지만, 눈물은 공감이 되질 않으면 전혀 흐르지 않기에 그렇다. 우리 인간은 기쁨은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전혀 이유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지만, 슬픔은 전혀 이유를 모르는 상황에서 따라서 울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해가 되고 공감이 일어날 때 눈물이 나게 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무관심하거나 짜증이 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이코패스들만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바로 세 번째 유형이 속한다.

 

 

세 번째 유형은 자신의 감정도 잘 못 느끼고, 타인의 감정도 잘 못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 말을 들으면 도대체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특이한 유형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 이들이 타인의 감정을 잘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이코패스와는 전혀 다르다. 사이코패스는 뇌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이들은 사실상 매우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단지 어린 시절에 어떤 이유로 인해서 감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것이 그 이유이다. 보통 억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러다 보니 감정 그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작용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도 잘 못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감능력은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 자체가 매우 한정적이다. 그나마 자신이 느끼는 아주 소수의 감정들만 타인들을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감은 오직 내 감정 영역 안에서만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감정 자체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이 둘은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렵다. 너무도 과도한 공감능력으로 인해 무엇이든 쉽게 결정할 수 없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머리도 아프다. 그러다가 나중에라도 하나라도 빼놓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이 그리 신경 쓰이고 후회가 된다. 그러니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유형이 속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완전히 반대인 이유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 힘들다.

 

내 감정을 잘 알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도 잘 알지 못하니, 사람들과 같이 있긴 하지만 전혀 결이 다른 세상에 속해 있게 된다. 분명히 같은 주제를 가지고 비슷한 반응을 하면서 대화를 하지만 각자의 머릿속에는 아예 전혀 다른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아무리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어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질 못한다. 오히려 시간이 쌓인 만큼 서로에 대한 오해만 더 생길 뿐이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제대로 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 원인은 전혀 다르지만 이들도 사이코패스처럼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명랑하거나 즐거운 드라마는 아주 잘 볼 수 있다. 따라서 웃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서 그렇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번도 울어 보지 못한 사람, 누군가 슬픈 이야기를 할 때 들어도 별 다른 감정이 올라오지 않아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당황스러운 사람, 그럼에도 밝고 즐거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슬픈 드라마에 관해서 사이코패스는 무관심이나 짜증의 태도를 보인다면, 이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움과 어색함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자신의 감정은 잘 못 느끼고, 타인의 감정은 잘 느끼는 사람들이다. 분명히 조합상 나올 수는 있지만, 절대로 존재할 수는 없는 유형의 사람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공감능력은 무조건 자신의 감정을 기반으로 하기에 그렇다.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을 잘 못 느끼면서 타인의 감정을 잘 느낄 수는 없다

 

만약 혹시라도 존재한다면 뭔가 심각하게 고장 난 사람이거나 완벽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너무도 높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해서 그렇다. 그러니까 완벽히 이타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다. 원래 고결한 도덕적 존재가 되려면 자신의 욕망엔 완벽히 무관심하고 타인에게만 무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엔 무관심하고 타인의 감정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런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삶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라는 말을 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에 나에 대한 연민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라는 말은 말을 하는 것이다.

 

정말로 완벽한 이타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오히려 세 번째 유형만 가능하다. 자신의 감정에 완벽히 무관심해지면 타인의 감정에도 완벽히 무관심해질 수 있으며, 그때부터는 감정이 아닌 오직 이성적 판단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로봇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만들어 진 로봇은 인간에게 완벽히 이타적이다. 돈을 지불하고 사면 고장 나기 전까지 단 한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냉장고가 그렇듯이 말이다.

 

결국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유형은 크게 사이코패스이거나 감정불능자이다. 하지만 거기에 두 가지 유형이 더해진다. 그것도 첫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너무 힘들어서 보지 못하는 유형이다. 그야말로 공감능력이 너무 발휘되어서 사실상 가짜인 드라마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 조차 힘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놓인 처지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현재의 자신의 힘들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운 좋게 다시 행복해지면 그때는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감정에 너무 둔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된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꽤나 많은 편인데, 보통은 어릴 때부터 끝없이 감정 표출을 제어 받은 남자들이 여기에 많이 속한다.

 

이들과 세 번째 유형의 차이점이라면, 이들은 드라마 중에서 상대적으로 그 주제가 무거운 작품들은 잘 본다. 그러니까 정치 드라마, 역사 드라마와 같은 것들은 잘 보는 것이다. 개인의 미묘한 감정적 갈등보다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음모와 정쟁을 다룬, 강한 자극이 오는 작품들을 볼 때 비로소 공감이 일어난다. 둔하기 때문에 오직 강한 감정적 자극만이 감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나면 슬픈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유형은 네 가지나 된다. 그리고 다 서로 다른 원인과 이유로 인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결과는 하나 뿐이다. '저 사람은 슬픈 드라마는 별로 흥미 없어 해.' 그리고 이런 결과는 그 사람의 드라마 취향으로 정의되고 만다. 그런데 그 취향을 잘 살펴보면 실제로 그 안엔 깊은 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그것들을 겉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자신이 자신의 감정에 그리고 타인의 감정에 얼만큼 민감한지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타고난 성격적 취향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별 다른 문제 없이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단 한 번도 그 이상을 느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라고만 믿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렇게 호응하고, 환호하고, 비난하고, 칭찬하고, 비웃고, 욕하고, 틀렸다고 말하고, 옳다고 동조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모든 행위의 깊은 내면엔 그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민감성과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이 각자마다 다르게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