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아이루다 2021. 2. 25. 07:35

살다 보면 가끔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게 된다. '너는 그 정도 밖에 안돼' 라는 식으로 대 놓고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고, 최근 아이를 잃은 사람 앞에서 자식 자랑을 하는, 실수로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으며, '이번 입사 지원에 불합격을 통보합니다.' 라는 식의, 개인이 아닌 단체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정중하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면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는 그 사람의 잘못인가? 또 하나는 내 문제인가? 이다. 그리고 판단을 한 후 상대방의 잘못이 크게 느껴질수록 분노가 솟구치고, 내 잘못이 크게 느껴질수록 자책감이 든다. 오직 내 입장에서만 보면 이 둘 중에서는 자책감보다는 분노가 낫다. 분노는 억울함과 복수심 같은 감정들을 만들어내다가 결국 서서히 잊혀지는 반면, 자책감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인해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자존감까지 낮아지게 만들어서 결국 삶을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면 그 상처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길 바라게 된다. 그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면 흔히 하는 행동이 바로 자신이 상처를 받았던 상황을 제 삼자에게 - 주로 친구 -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잘못임을 객관적으로 증명 받고자 하는 노력이다.

 

지난 명절에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여자들이나, 직장상사의 문제점을 토로하는 남자들, 반대로 처갓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남자들이나, 직장 내 불평등함에 대해서 분노하는 여자들, 그 모두가 같은 상태이며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상대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며, 그 상처를 가능하다면 상대방의 탓으로 결정하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래 네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했네' 라고 말해주는 행위를 우리는 '공감한다' 라고 표현 한다. 그로 인해 만약 그런 말을 듣고도 중립적 위치에서 잘잘못을 따지다가는 공감능력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십상이다. 남자들이 여자들과 대화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상처는 실제로 복수를 하거나,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제 삼자에게 공감을 받으면서 서서히 잊혀져 간다. 하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삶을 좀먹고 조금씩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다 보니 상처를 자주 받는 사람들의 삶은 쉽지 않다. 그래서 그 정도가 심한 경우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 버리려고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식의 고립은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 많은 종류의 행복조차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만다. 결국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받은 상처를 잘 다루는 것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상처를 잘 다룰 수 있을까

 

모든 것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단 하나다. 전쟁의 참혹상을 겪지 않으려면 전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안 해야 한다. 상처로 인해 삶이 피폐해지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상처의 원인::

 

나는 왜 상처를 받을까? 아니, 어떤 사람들은 왜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전혀 상처를 받지 않는 듯 보일까? 똑같은 말이 나에겐 상처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까? 반대로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불같이 화를 낼만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일까?

 

여기에 상처의 진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상처의 본질은 받는 것이지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 내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은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상처를 받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받는 상처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문자를 보낸 인사 담당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 문자를 보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합격자에게는 축하의 문자를, 탈락자에게는 위로의 문자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런 상황은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와 이미 약속을 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약속이 생겼다는 이유로 나와의 약속은 깨는 경우는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친구는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아주 사이가 안 좋아서 서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히려는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계를 처음부터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정도면 친구가 아니라 원수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 친구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을 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나와의 약속을 깰 때 나를 상처 입히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통보한 것이다. 오히려 나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 사실은 자신이 미움 받고 싶지 않으려고 - 다른 핑계를 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앞에서 나온 인사 담당자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상처를 받는다. 주지 않아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친구에게 있어서 새로운 약속 상대보다 못하다는 명백한 비교를 당했기에 그렇다. 나보다 그 친구와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단지 그 이유로 인해서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그 상처는 온전히 내 몫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악의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다. "너는 그 정도 밖에 안돼." , "네 수준에서는 무리지." , "뻔 해. 네가 제대로 할 리가 없지", 등등의 말로 대놓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에 그렇다. 말을 세게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 받을 수도 있고, 말을 싸가지 없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나마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를 해보자면, 그들도 뭔가 속이 편치 않으니 그런 악의적인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말하고, 비꼬듯이 말하고, 비판이 아닌 비난의 어투로 말한다. 심지어 대놓고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내 문제가 아니라 상대 문제라는 점은 너무도 명백해 보인다. 단 한 가지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런 가시 돋친 말들을 쉽게 내 뱉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로 어느 누군가에게는 웃으며 정겹게 말을 한다. 주로 자신이 아쉬운 사람에게 그런다. 혹은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했다가는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

 

, 누군가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자주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도록 내가 허락해준 것이란 의미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지 않든가, 나를 떠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나를 떠나지도 않고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해댄다.

 

인터넷으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의 해결책은 '악플을 달지 말아라' 가 아니다. 그저 고소를 하면 된다. 악플를 단 정보를 잘 모아서 고소를 하면 분명히 자필 사과문을 받을 수 있다. 아니라면 돈이라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주 하게 되면 악플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악플 조차도 결국 자신이 유명해졌기 때문에 받은 것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말의 의미는 호감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지만, 비 호감의 시선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에 한쪽 면만 가진 것은 없다. 좌가 있으면 우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다. 앞과 뒤가 있고, 하늘과 땅이 있으며 밝음과 어둠이 있다. 악플을 고소하는 것과 별개로 도대체 그런 악플을 왜 달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말로 자신에 대한 악플을 보고 싶지 않다면 유명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는 무플형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내 팔이 부러져서 아플 때 그 팔을 살짝 만 건드려도 너무 아프다. 그래서 화가 나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늘 그렇듯 평소대로 건드렸을 뿐이다. 내가 아프다면 이미 팔이 부러진 상태라서 그렇다. 내가 상처를 받기 쉬운 사람이라서 상처를 받는 것이다. 내가 상처를 받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다. 내 팔이 부러진 상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내 팔을 아프게 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라도 내 팔을 세게 때리면 아프긴 할 것이다. 그러면 가만히 있지 말고 같이 때리든가, 증거를 모아서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확실히 선을 그어서 다시는 나를 때리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뒤에 가서 구시렁대거나 그것도 안되면 혼자서 삭히고 만다.

 

 

 

 

::도대체 왜 가만히 있을까?::

 

상처를 받는 원인이 모두 나에게 있다면, 솔직히 좀 슬퍼지고 억울해질 수 밖에 없다. 도대체 해결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배우면 오히려 희망이 생겨나고 어떤 의지가 솟아날 수 있지만, 그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대체 답이 없어 보인다.

 

아니다. 답은 명백하게 존재한다. 단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가 문제이다. 하지만 사실 다들 그 정도의 용기는 가지고 있다. 그 누구도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저 막연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첫 해외여행을 가는 것과 같다. 그때는 비행기 예약부터 시작해서, 여권을 발행하는 일, 비행기 타는 수속을 밟는 일,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는 일, 첫 기내식에서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 도착지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 등이 모두 커다란 두려움이 된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모여들게 되면 도대체 해외여행을 어떻게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 된다.

 

하지만 단 한 번만 다녀와도 그런 두려움들은 대부분 사라진다. 물론 여행지가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장소에 대한 두려움은 생기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호기심이나 궁금증 그리고 재미와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 오히려 두렵지 않으면 흥미가 생겨나지 않으며 지루한 여행이 되고 만다.

 

한번 잘 생각해보자. 당신은 왜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허용했을까

 

물론 처음에는 그냥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상대는 당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평소대로 말을 막하다가 당신에게도 상처를 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때 만약 당신이 정색을 하고 그 상처에 대해서 말을 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이후 당신을 경계하거나, 멀리하거나, 아니면 친하게 지내면서도 말 조심을 할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또 다른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을 계속 할 것이다. 그저 당신만 그 대상에서 예외가 된 것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 순간 정색하고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면 그 다음 날이라도 다시 찾아가 명백하게 말하면 된다. 내가 어제 당신에게 이런 말을 듣고 기분이 많이 나빴는데, 다시는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면 된다. 내가 이미 팔을 다쳐서 거기가 아프니까 다시는 그 부분을 건들지 말라고 하면 된다. 상대는 이미 지나간 일로 정색을 하는 당신에 대해서 황당해 하겠지만, 그래서 떨떠름한 태도로 그렇겠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자기 변명을 하긴 할 것이다.

 

아주 해결책이 쉽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이것을 해내지 못할까? 상대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을 때릴까 봐 그럴까? 아니다. 당신이 이렇게나 쉬운 말을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미움 받기 싫어서 그렇다.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까 봐 그렇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미움 받을 용기' 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것이다.

 

상처를 입고도 아무 말도 못하는 당신이라고 해도 육체적인 상처인, 팔을 다쳤을 때 그 팔을 건드는 사람에게는 명백하게 건들지 말라고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왜 정신적인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확실하게 말하지 못할까?

 

단순히 하나는 육체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여기엔 두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육체적 상처와 정신적 상처::

 

첫 번째 비밀은 육체적 상처는 정신적인 상처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공감이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팔이 부러지면 아주 특별한 사람을 빼놓고는 누구나 다 아프기 때문에 팔을 다친 사람의 팔을 건드는 행위는 누가 봐도 건든 사람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신이 따질 때 상대방도 쉽게 수긍을 한다. 그런 지적을 했다고 해서 나를 싫어하거나 복수심을 품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그냥 미안해 한다.

 

정신적인 상처는 그런 공감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상처는 온전히 받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에 각자마다 상처를 받는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바보' 라는 말을 들어도 누군가는 무척 기분이 나쁘고, 누군가는 웃으며 지나가기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듯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 대놓고 따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로 인해서 잘못 따지면 오히려 자신이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해도 주변 사람들은 공감하기 보다 오히려 왜 그런 일에 상처를 받지? 하는 태도로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조차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그저 건성으로 사과하는 정도로 끝낼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두 번째 비밀은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주입해 놓은 '정신력'의 가치 때문에 생겨난다. , 우리들 대부분은 몸이 아픈 사람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고는 그 사람이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정신적인 상처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면 '정신력이 부족하다', '여전히 살만 하네', '아직 덜 힘들었군' 라는 식으로 말한다.

 

더해서 정신적으로 약함을 드러내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도 깎인다. 약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류는 이미 육체의 시대에서 정신의 시대로 옮겨졌다. 어떤 사람이 강하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강한 것이지 육체적 능력이 강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을 때 몸짱을 뽑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강하고, 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리더쉽을 가졌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육체적으로 약한 것도 여전히 사람의 평가를 깎는데, 정신적으로 약한 것은 더욱 더 그렇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그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한다. 상처 따위는 받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상처를 받는 것을 최대한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연습을 한다. 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포커 페이스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두 이미 상처를 받은 상태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신은 상대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자신이 받은 상처를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받지 못해서 약자로 취급될까 봐 자신에게 오는 상처를 허용하고 있다. 상처를 받지 않는 척을 하거나, 받고 나면 앞에서는 아무 말 못하고 뒤에서 끝없이 구시렁대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관없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하지만 좀 다르게 살고 싶다면 뭔가를 바꿔보자. 이제 좀 말 좀 하고 살자. 아프면 아프다고 하자.

 

 

::진정한 강함::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아플 곳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팔이 부러지는 일이 없어야 누군가 팔을 건드려도 아프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잘난 사람으로 보여도 그렇다. 단지 잘난 사람들은 그 잘남을 우월감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잘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만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 그것을 실수로라도 건들면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상처를 건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열등감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조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실수로라도 열등감을 건들고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때 어떻게 하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악의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관계를 끊거나 고소를 해서 정신을 차리게 하면 된다. 하지만 실수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답은 결국 하나뿐이다. 바로 '인정'이다.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또 다른 용기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진정한 용기이다.

 

열등감을 인정하라. 그것이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가장 큰 보호막이 되어 줄 것이다. 우리가 열등감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되고 싶은 나' 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좀 더 잘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생존하고 싶다는' 본능이 꿈틀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다. 열등감이 희미한 존재는 있지만, 없는 존재는 없다. 만약 정말로 없다면 그 사람은 별로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이다.

 

부족한 나를 인정하는 것이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첫걸음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실수로 건든다면 그것에 대해 정중하게 말해줘라.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쉽게 상처를 입는다고 말해주면 된다. 누군가 내 머리 숱이 부족해 보인다고 하며, 내가 머리 숱 없는 것에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런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해주면 된다. 꼭 정중하게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웃으면서 말해도 된다. 사실 안 웃길 일도 아니다.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사실 왜 화를 내는가? 그 사람은 정말로 부족해 보이니까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다. 설령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더라도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기분 나빠질 일이 없다. 그냥 헛소리이거나 지나가는 말로 끝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도대체 왜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가?

 

그럼에도 상처는 여전히 받는다. 아무리 인정해도 인간이 상처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살고 싶은 이상 열등감은 무조건 생겨나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건드려진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남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말해서 속풀이를 할 필요도 없다. 잠시 기분이 나빠졌다가 금세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과 관계를 끊는 일이 아주 쉬워질 것이다.

 

한번 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회사 내에서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부터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대해라. 개인적인 친분을 제거하고 나면 그 누구도 일을 못하는 것 이외에 나에게 함부로 말을 할 사람이 없다. 도대체 같이 월급 받는 입장에서 왜 그런 말을 하겠는가

 

그래도 한다면 그 사람의 눈에 당신은 뭔가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상처를 주는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라.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회사라 절대로 그만둘 수 없거나, 빠른 승진을 하고 싶어하거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거나,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이든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회사를 오직 월급을 받는 곳으로만 여기고 다닌다면 그 누구도 당신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일을 못하면 쫓겨날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렇게 하다가 쫓겨났다면 결국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착각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쫓겨났다면 그곳은 처음부터 당신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 숨겨진 진실이다. 당신이 못났다는 말이 아니라 그곳은 당신의 장점이 발휘되는 곳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대도 왜 당신은 그곳에 있었을까?

 

그저 욕망 때문에 그렇다. 그런 곳에 속해서 좀 더 나은 사회적 시선과 더 많은 돈을 원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만약 모든 사람을 업무적으로 대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상처를 받고 있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거기에 속해 있는한 상처는 무조건 받게 되기 때문에 상처받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다.

 

사실 행복한 삶의 측면에서만 보면 당신은 자신이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어울리는 곳에 있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물론 당신의 욕망은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버텨낸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버틸 수 있는 곳에만 서 있는다. 그래서 강해 보인다.

 

 

::어떻게 살 것인가?::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상처를 받더라도 스스로 가진 욕망과 '되고 싶은 나' 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유지 할 것인지, 그것들로부터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정을 통해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삶을 살지 결정해야 한다.

 

그것은 선택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저 선택이 불가능해 보일 만큼 자신에 대한 욕망이 큰 것이다. 만약 선택을 할 수 없다면 그저 받은 상처들을 감수하면서 살면 된다. 하지만 그때는 반드시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받고 있는 모든 종류의 상처는 스스로 허용한 것임을 말이다.

 

그러니 상처를 받더라도 너무 크게 분노하거나,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자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화가 나더라도, 스스로 실망스럽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잊는다면 화는 원망과 복수심으로 변하고, 실망은 자괴감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한걸음 물러서는 선택을 했다면 자연스럽게 상처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 사이에 살다가 보면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된다. 만약 그것이 악의적이지 않다면, 그때마다 말해주면 된다. "나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야." 라고 말이다. 조심해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내가 너를 멀리 하지 않게끔 해달라고 하면 된다. 내가 너와의 사이에 두꺼운 벽을 치지 않게 해달라고 하면 된다.

 

만약 주변에 악의적인 사람이 있다면 끊을 수 있으면 끊으면 된다. 회사 같이 어쩔 수 없는 조직이라면 철저하게 업무적으로 대하면 된다. 상처를 입는 것보다 그것이 낫다. 인간적으로 얽히면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평가를 듣게 된다. 업무적으로만 얽히면 오직 업무능력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된다.

 

만약 누군가 그것이 이외의 일로 상처를 준다면 명백하게 말해줘라. 내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회사를 다니는 중이지 당신들에게 인간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못박아 둬라. 그러면 그들은 뒤에서는 여전히 그러겠지만, 당신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상처는 종속성에서 나온다. 대중의 관심을 통해 돈을 버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는 대중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 그러니 악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상처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종속성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상처로부터의 자유가 실현된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무엇에 종속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라.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것은 그저 욕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욕망 자체가 이상한 것은 전혀 아니다. 살고 싶으니 욕망이 만들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굳이 그런 욕망까지 가지고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은 욕망들이 꽤나 많다.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상처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각자 몫이다. 또한 정답도 없다. 오직 각자가 정할 뿐이다. 그 누구도 그것을 대신 답 내줄 수는 없다.

 

긴 글이지만 글이 끝나가는 지금 이순간이 당신의 출발점이다. 지금 이 순간 어느 방향으로 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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