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민감함이란 것 - 센서티브

아이루다 2019. 11. 11. 08:12

 

 

 

당신은 얼마나 민감한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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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고통이나 불편, 신세를 지거나 부탁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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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할 때, 머릿속으로 주고받을 말을 미리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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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의 논쟁에서 패하면, 다음 날이 되어서야 뒤늦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옳았는지 깨닫고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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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나 버스에 앉으면 잠이 오지 않아도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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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회사를 그만두거나, 친구와 절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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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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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이상을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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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내 약점이 보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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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을 받으면 크게 상처 받고, 나라는 사람이 쓸모 없게 느껴진다.

 

 

 

 

"혼자 차 마시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자연 속을 조용히 거닐기를 좋아하고
...
높은 기준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힘들어하면서

에너지를 많이 쏟고, 자신에 대한 비난과 자책이 심한 편인 나
!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돕는 직업(?)을 가진 내가 왜 매번 더 불안해하고

우울해하고 자괴감에 빠졌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센서티브라는 제목을 가진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단지 위에 나열된 내용들을 천천히 읽어보니 내가 나름대로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재확인 할 수 있긴 했다.

 

사실 내가 평균적인 사람들에 비해서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에 알게 된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 동안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를 둔감하거나 나름대로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한 진실을 잘 알고 있다내가 그 동안 그런 사람처럼 보였던 이유는 그저 남자로 태어났고, 남자로 키워졌으며 했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남자들의 세상 속에서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나는 내가 타고난 대로 자연스럽게 민감하게 살아가기보다는 최대한 나 자신을 둔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늘 언제나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존재로써 정의한 채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꽤나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믿어왔고 주변에서 그런 평가를 받기도 했다하지만 오랜 방황 끝에 이제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비록 그 과정이 힘들긴 했지만 내가 민감한 사람임을 알고 왜 민감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정확히 알고 난 후로는 더 이상 그렇게 억지로 둔해지려고 하거나 이성 추종자가 되어서 살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 그저 느껴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 때 남들보다 좀 더 민감하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으로 보면 민감함은 반드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다. 그 검을 잘 쓸 때는 그 무엇도 벨 수 있는 유용한 무기가 되지만 까딱 만 잘못해도 바로 나를 상처 입히는 흉기가 되고 만다그러니까 민감함은 쓰기에 따라서 행복의 열쇠이기도 하고 불행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가진 민감함을 나쁜 쪽인 흉기가 되는 쪽으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살기가 꽤나 힘들었다. 나를 많이 미워하기도 했고, 과거의 나는 위에 나열된 민감성 여부를 판단하는 설명들 중 대부분의 것들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나처럼 민감함이 무기가 아닌 흉기가 되는 현상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민감한 사람들이 겪는 현상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민감함이 좋게 작용하기는 어렵다그리고 거기엔 명확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민감함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몇 가지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민감함은 얼마든지 흉기가 아닌 유용한 무기가 된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때부터 민감함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된다. 그리고 민감함을 통해서 남들에 비해서 훨씬 쉽게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센서티브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충 설명을 보니 '남들과 비슷해지려고 하지 마라, 민감함은 신이 주신 축복이다' 라고 써있는 것을 보인다. 지금의 나로써는 정말로 많은 공감이 가는 설명이다. 민감함에 대한 대처 법으로는 그 설명은 정말로 옳다하지만 문제가 있다. 안다고 해서 민감함이 갑자기 흉기에서 무기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열등감이나 질투가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고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정말로 그런 말 한마디에 민감한 성격이 가진 문제점을 고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너무도 살기가 쉬울 것이다.

 

그래서 민감함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려면 좀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민감함이 축복이긴 하지만 민감함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도대체 왜 민감한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가 왜 민감한지를 알아야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무리 잘 이해해도 흉기가 무기가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방향성만 제대로 알고 간다면 언젠가 민감함은 축복이 된다.

 

그래서 지금부터 저 책에는 빠져 있는 민감함이 생겨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모든 것이 한 순간 다 이해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차분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민감함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런 변화를 그 누구보다도 잘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민감함을 가진 사람이다. 처음부터 둔한 사람은 변화되기가 무척 힘들다.

 

 

 

::민감함의 정의::

 

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갈까?

 
민감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은 좀 뜬금없기는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을 알 때 민감함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사람들마다 각자 그 답이 다르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의 최종적 목적은 '생존'이다. 이것은 복잡한 의미도 아니고 중의적 의미도 아니다. 정말로 숨쉬고 살아있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이 생존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정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가족, 사랑, 신념, 믿음, 성공, 관계, 돈 등이 보통 생존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착각이다. 물론 위에 나열한 것들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고 중간 목표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만다. 그래서 결국 많은 착각이 일어나고 그 착각으로 인해서 수 많은 오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민감함도 그런 오해를 받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민감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는 모두 살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은 좀 거부감이 들더라도 일단 적어도 내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행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생존을 위해서이다. 기본적으로 행복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져서 그렇다. 아니, 순서가 바뀌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생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판단이 들면 들수록 자신이 행복해졌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생존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과거로부터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동료의 존재였다. 인간은 똑똑하긴 하지만 약한 존재였기에 늘 무리를 지어서 행동했다. '무리를 짓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진정한 힘이었던 것이다.


즉, 아주 오랫동안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인간의 아주 단단한 보호 수단이자 강력한 공격 능력이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는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은 바로 신뢰이다. 그리고 신뢰를 얻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며, 신뢰가 쌓이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 필요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너는 여기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너 없으니 모두 다 엉망이 되고 말았어', '당신이 이곳의 주인공입니다' 등의 표현은 인정을 의미하며 듣는 사람을 크게 행복하게 해준다. 그리고 반대로 '너 같은 것은 없는 편이 더 나았어', '? 어제 안 온 줄도 몰랐네.', '니 까짓 게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등의 표현은 무시의 표현이며 듣는 사람을 매우 불행하게 만든다.

 

누군가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힘들거나 아플 때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상대가 무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뜻이고 옆에서 죽어가도 신경도 안쓸 것이란 의미이다.

 

 

 

::인정을 바라는 두 가지 이유::

 

지금은 훨씬 덜 하지만, 과거 우리의 조상들은 작은 단위로 무리를 지어서 살았으며 그 무리 안에서 살 수 있을 때 가장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무리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거의 죽은 목숨이 되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혼자 있게 되면 외로움, 고독, 상실감 등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무리라는 개념이 거의 사라진 요즘도 혼자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셈이다. 이런 불행의 감정들은 생존 가능성이 줄어들 때 느끼는 불안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무리에 속해 있을 때 그 무리에 계속 속해있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 답은 바로 무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정확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두 사람이 할 수는 없다. 각자 고유한 역할이 있을 때 두 사람 모두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인정 받는 것은 생존에 너무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매일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을 한다. 요즘은 예전과 같이 역할로 인정받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들 SNS 등을 통해서 서로 품앗이 하듯이 인정을 해주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즉, 내가 별 다른 이유없이 너를 인정해줄테니 너도 나를 인정해줘,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인정을 바라는 욕구는 크게 두 가지로 형태로 나뉜다.

 

하나는 최대한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가능하다면 남들보다 앞서 나가길 원하는 욕구이다. 또 하나는 최대한 못난 사람이 되지 않고자 하는 욕구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적어도 꼴등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욕구이다.

 

이 둘은 인정을 원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서로 차이가 나서 달라 보이긴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경우는 그것이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으로 흐름이 이어지지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저 소극적인 노력이란 점만 다를 뿐,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서 최대한 늦게 버림을 당하길 바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엔 인정을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잘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은 버림을 받기 전에 버릴 사람을 고를 위치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고 못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것은 버림을 받을 수 있지만 최대한 늦게 되길 바라는 마음인 것만 차이가 난다. 그리고 가장 늦게 버림을 받는 사람은 결국 또 가장 잘난 사람이다.

 

 

 

::생존과 민감함의 상관관계::

 

지금까지 생존, 인간관계, 인정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들과 민감함은 도대체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일까?

  

생각보다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생존을 하고 싶다는 욕구는 두려움이란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생겨난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뢰할만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잘 맺으려면 상대에게 인정을 잘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 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다. 이 능력을 다른 말로 매력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런 일을 잘할수록 주변의 인정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변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잘 파악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민감함이란 능력이 크게 의미를 가진다. 즉, 민감함이란 주변 사람들의 감정 변화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반대로 둔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아예 파악하지도 못하거나 엉뚱하게 파악해서 쓸데없는 일을 할 경우엔 인정은 커녕 혐오나 무시를 받을 수도 있다. 

 

마술사처럼 맨 손으로 불을 피우는 능력이 있어도 너무도 더운 여름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인정은커녕 욕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상대가 그 순간 진짜로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자신이 잘 알지도, 안다고 해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때 추리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추리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바로 민감함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민감해서 느끼긴 하지만 해석을 엉뚱하게 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나서 그렇다. 요리를 할 때 뭔가 맛이 이상하다는 것은 잘 알아채는데 도대체 어떤 양념이 빠졌는지 몰라서 설탕을 넣어야 하는 상황에 소금을 넣는 일을 한다. 그래서 결국 요리를 망치고 마는 경우이다. 그래 놓고는 매일 밤마다 낮에 한 그런 종류의 실수를 곰씹으면서 후회를 하고 자신을 비난한다. 차라리 둔해서 상대방의 미묘한 변화를 아예 파악하지 못했다면 편히 잤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민감함은 조금만 잘못 써도 자신을 베는 흉기가 되어 버리고 만다그래서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 민감함을 가졌는데 그 민감함으로 인해서 오히려 인간관계를 망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민감함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영역이 오히려 바로 인간관계이다그렇게 너무 힘들다가 결국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이상한 결론이 나고 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인간관계를 잘하고 싶으나 제대로 못해서 오히려 홀로 사는 사람, 이것이 바로 민감한 사람들이 가진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사실 진짜로 혼자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매우 둔한 사람이다. 민감한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지만 혼자 살기에 자신의 민감함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게 된다.    

 

::한 사람의 민감함이 결정되는 과정::

 

원래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민감함이란 능력을 통해 인정을 받아서 신뢰할만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아주 단순한 흐름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예기치 않은 문제가 더해진다.


그것은 바로 돈의 출현 때문이었다. 돈은 인간들의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하루벌어 먹고 사는 수준을 벗어날 때 생겨났다, 즉 돈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교환이 가능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런데 돈의 역할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돈은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즉, 돈이 인간관계를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인간관계로만 두려움을 해결해왔던 인간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즉, 꼭 인간관계를 잘 맺지 않아도 돈만 충분히 있으면 인간관계를 아주 잘 맺은 사람 못지않게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나라가 자체 군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용병을 고용해 대신 전쟁을 치루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후자의 경우엔 위험하긴 하다.


그래서 돈으로 인간관계를 대신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위험하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무조건 신뢰할만한가도 의문이 있다. 수 많은 배신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되어 오면서 사람들은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분화되었다.


첫 번째는 예전처럼 여전히 관계로만 두려움을 상대하려는 사람. 두 번째는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세 번째는 돈을 벌기 위해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 네 번째는 오직 돈만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분화는 민감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원래 민감함은 인간관계를 잘하는 능력에 특화된 능력이었다. 그래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과 그다지 크게 관련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관계 대신 돈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때 여전히 관계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가진 민감함은 이제 오히려 본격적으로 방해를 하기 시작한다.


원래 돈을 잘 벌려면 사업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 여부에 상관없이 돈만 된다면 친근하게 굴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쉽게 모이고 쉽게 흩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민감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일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런 가벼운 관계는 두려움을 상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기에 그렇다.


만약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지금도 예전처럼 관계만을 통해서만 해결책을 찾았다면 민감함은 여전히 축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의 등장이 모든 것을 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두려움을 상대하는 방법론이 이미 관계에서 돈으로 변했는데 여전히 관계만으로 두려움을 상대하려고 하고 있는 사람들, 이들을 우리가 민감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다들 적당히 가볍게 상호 이득의 측면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싶어하는데 혼자만 진지하게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에 끝없이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바로 민감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민감한 사람들은 자신이 맺은 모든 인간관계를 모두 다 가족처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가족에게 하듯이 잘 하지만 정작 그것을 되돌려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다들 관계를 가볍게 하고 싶어하는데 혼자만 진지하게 관계를 맺고자 해서 그 민감함이란 능력이 관계를 오히려 망치는 상황에 놓이는 것, 이것이 바로 민감함을 가진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이런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민감함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민감함을 상대하는 법을 알아보자.

 

 

 

::민감함을 다루는 법 - 두려움 이해하기::

 

지금까지 설명을 통해서 민감함이 왜 필요했는지, 왜 여전히 민감한지, 그 민감함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해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자신이 인간관계를 잘 맺고 싶은 이유는 그저 두려움을 오직 인간관계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성향 때문임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머리 속 한 구석에는 나는 '순수한 관계'를 맺고 싶어 했을 뿐인데, 라는 착각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오직 관계만으로 두려움을 상대하고자 하기에 자신이 맺는 관계에서 돈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관계가 늘 순수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착각이다. 돈은 관계의 반대가 아니다. 돈은 관계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해답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순수한 관계'는 처음부터 완전히 착각이며 민감한 본인조차도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래놓고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관계에서 이득을 추구한다 싶으면 스스로를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그런 불필요한 자괴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 믿고 있는 관계의 순순함의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그저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할 뿐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원래 인간은 이기적이며 관계도 이기적인 목적으로 맺는 것이다. 직접 돈을 주고 받지 않을 뿐, 모든 관계는 끝없이 뭔가를 주고 받는다. 심지어 그렇게 주고 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해도 그 목적 자체는 돈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상대방이 사랑으로 나를 보살펴주느냐, 돈을 받고 보살펴주느냐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돈을 주면 배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결국 최종적으로 내가 가진 민감함의 본질은 그저 '내가 살고 싶어서' 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살고 싶어서 민감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흐름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인간관계로부터 관계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에 덜 집착할 수 있다면 오히려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민감함을 다른 용도로 쓰면 된다.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능력, 어느 누구와도 적당히 맞출 수 있는 능력,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능력, 소외된 사람을 챙길 수 있는 능력 등으로 활용하면 좋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대상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더 행복하기 위해서 그러면 된다.

 

더해서 보통 사람들과 달리 홀로 숲 속에 있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 남들이 즐기지 못하는 행복도 즐길 수 있다. 사실 이 능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한달 동안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는 뜻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오랜 시간 힘들었지만 덕분에 그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사람들에게 계속 상처 입어서 견디다 못해서 도망쳤다가 우연히 갖게 된 능력이지만, 온전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것 장점 중 하나가 된다. 민감한 사람들은 그 능력을 이용해서 관계 속에서 을이 아닌 갑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

 

사실 민감한 사람들은 원래 다들 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관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서 끝없이 상처를 만들어 내고는 결국 스스로 을이 된 것이다. 그러니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즉시 갑으로 복구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민감하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특징이 되기에 그렇다.

 

이후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을 못하고 부탁을 잘 하지 못하는 모습을 괜히 부끄럽게 여기거나 소심하다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좋은 점도 많다. 부탁을 못하기에 뭐든 혼자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기에 그렇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들키거나 지적을 받아서 기분이 몹시 상할 때도 그것이 바로 자신이 관계를 잘 맺기 위한 본능에서 출발함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런 일로 인해서 자신을 미워할 필요까지는 없다.

 

어떤 면에서 두려움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돈으로 좋은 병실과 비싼 간병인을 쓸 수는 있지만 그때 우리에게 더욱 더 필요한 것은 말동무이자 내 두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가족이나 친구이기에 그렇다. 아직까지는 돈이 관계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려움의 해결책을 오래된 방법인 인간관계로 선택한 것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단지 그것에 너무 과도하게 몰입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 관계는 두려움의 해결책이지 순수하고 절대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나의 생존'일 뿐이다.

 

내가 가진 두려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내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 내가 두려움의 존재일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것, 그래서 내가 민감해진 것임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민감함의 불행이 아닌 행복의 도구로 쓰는 유일한 방법이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네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민감한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자신 역시도 상대에게도 동일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하거나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자신에게 신세지는 것 때문에 싫어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 순서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먼저 싫어하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착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까 봐가 아니라 내가 힘드니 당연히 상대도 힘들 것이라고 미리 지레짐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힘들어도 힘든 내색도 못하고 끙끙대면서 해준다. 그래야 자신도 나중에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부탁할 때가 되면 그때 속으로 끙끙 된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결국 부탁도 못한다.

 

결국 부탁은 잘 들어주고 부탁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속으로 썩어간다.

 

원래 남의 부탁을 흔쾌히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남에게도 쉽게 부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면서 자신은 부탁을 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남의 부탁은 잘 거절하면서 자신의 부탁은 쉽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까?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부탁을 못하면서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자신이 거절 당하면 상처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신이 거절하면 상대가 받을 상처가 염려되어서 거절을 못한다.

 

하지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좋은 의도가 아니다. 상대가 상처를 받을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상대가 상처를 받아서 결국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서 인간관계가 끊어질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는 뜻이다.

 

반대로 거절을 잘하면서 부탁을 잘하는 사람들은 주로 돈을 통해서 생존을 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관계가 그리 중요하지 않기에 당장 자신이 얻을 이득만 계산한다. 단지 그 계산 능력이 떨어져서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를 보지만 당장 이득만 되면 하려는 경향 때문에 진상으로 불리곤 한다.

 

두려움을 관계를 통해 해결하려는 사람이 반대로 주로 돈으로 그 해결책을 찾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 재앙이 된다. 왜냐하면 돈으로 해결책을 찾은 사람들은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에 관계 자체가 돈의 흐름에 따라서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책을 찾았던 민감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뒤통수를 맞는 일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배신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배신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해결책을 따른 것일 뿐이다. 단지 그들에게 관계는 민감한 사람들에 비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민감한 사람들은 끝없이 상처를 받는다. 관계에서 이득과 손해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의리를 지키고 끝없이 배려심을 발휘하는데도 결국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일을 계속 반복적으로 당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관계가 반복적으로 이어지면 관계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두려움이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두려움이 커지기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는 것을 더욱 더 선호하게 된다. 그래서 혼자 지내는 것을 상대적으로 더욱 편하게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착각이다. 언제라도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을 만나면 처음 봤어도 하루 종일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단지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없기에 가끔 만나게 되는 좋은 인연이 와도 너무 집착하다가 상대방이 진이 빠지거나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떠나 보내고 만다목이 심하게 마른 상태에서 갑자기 물을 벌컥벌컥 먹다가 심하게 체하는 꼴이다.

 

그것을 막고 정말로 좋은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변화 시켜야 할 것이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한계를 자각하자::

 

세 번째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민감함은 센서 역할일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은 그저 자신의 좁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이다. 그러니 내가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해석해 낸 내용은 그저 내 경험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만 옳다.

 

민감한 사람들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에 모든 신경이 상대방의 감정 상태에 가 있다. , 상대방의 말 한마디, 표정 한번, 태도 등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남들은 거의 보지 못하는 누군가의 미묘한 변화까지 모두 인식한 후 자기 식대로 해석을 하는 일을 반복한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 틀린다.

 

그런데도 뭔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거나 상대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낮 동안 일어난 일을 밤에 자기 전에 끝없이 되새기는 짓을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숙면을 하지 못하고 결국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자신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행동, 즉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니 미리 경계의 벽을 치는 짓도 한다. 괜히 관심 없는 척, 괜히 냉정한 척, 괜히 더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더욱 더 맺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거짓말을 평생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은 누군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다. 반대로 입만 열면 거짓말인 사람은 그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혀가 민감함과 요리에서 빠진 조미료가 설탕인지 소금인지 아니면 식초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별도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좁은 경험을 토대로 그것이 소금이라고 확신한다.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고 살짝 찡그렸을 때 그것이 자신을 싫어해서 그런 것인지, 갑자기 등이 따가워서 그랬는지, 그 전에 누군가로부터 안 좋은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민감한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향해 찡그리면 그것을 보고 자신을 싫어하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적어도 자신이 누군가 앞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을 싫어할 때만 그렇기에 그렇다. 자신은 아무리 등이 따가워도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인상을 쓰지는 않을 테니 상대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을 한 채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리 거리를 둔다.

 

이것은 민감함의 진짜 목적, 인간관계를 잘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행동이다. 그러니 조금 힘들더라도 '내가 착각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 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지켜보면 된다. 그랬는데도 지속적으로 동일한 신호가 나오면 그때서야 관계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도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다.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제대로 묻고 이후 행동을 결정하는 방법이다.

 

민감한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이다. 그러니 돈 거래를 하듯 그렇게 정확히 확인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면 생각보다 별 일이 아니다. 어설프게 혼자 한 판단이라는 불확실성이 사라지면서 감정이 제대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 상대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다. 그러면 밤에 잘 때 떠오르지 않는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나는 옳다::

 

민감함은 상대방의 미세한 변화도 알아채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바로 인간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조금만 실수한 느낌이 들어도 그것을 '실패했다' 라고 느낀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민감함 때문에 자존감까지 낮아지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잘할려고 했기 때문에 생겨난 부작용이다.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그 누구보다도 살고 싶어서 생겨난 감정들이다. 생명체가 살고 싶은 것은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살고 싶어한 한 행위들은, 설령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옳은 것이다.

 

생명체에게 생명을 보존하는 일은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도 옳은 일이다. 그러니 실수한 후 느껴지는 많은 감정들에 대해서 그리 미워하면 안된다. 또한 누군가 나를 비난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그 사람의 옳음이다. 내 옳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한 실수는 실패가 아닌 실수이며, 사실상 실제적으로 따지면 실수도 아닌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 진짜로 실수라고 해도 잘하려고 했다가 한 실수이다. 오히려 너무 잘하려고 했기에 생겨난 실수이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고 아쉬움이 남긴 해도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으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만 옳다. 너도 너에게만 옳다. 그렇게 각자마다 옳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옳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매일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싸운다. 우리가 매일 듣는 남의 말들이 바로 그것이다. 불안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말들이다. 그 말들에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들이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다.

 

이 사실만 잊지 않으면 괜히 객관적으로 옳음을 증명받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도, 남들이 하는 말에 괜히 마음 흔들릴 필요도 없다. 그저 스스로 옳으면 그만이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기준점 낮추기:: 


줄다리기를 할 때 쓰는 밧줄은 대충 골라도 된다. 중간에 끊어져도 그냥 넘어지고 말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절벽에 늘어져 있는 밧줄을 잡고 높이 올라야 할 때는 다르다. 밧줄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을 경우 중간에 끊어지거나 혹은 아주 곤란한 일을 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 반드시 믿을 수 있는 밧줄을 골라야 한다.

 
민감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일은 절벽을 오르는 밧줄를 고르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민감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을 때 신뢰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오히려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은 다들 줄다리기에서 쓸 밧줄을 고른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어느 정도 이득만 될 수 있다면 그 누구와도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또한 쉽게 헤어질 수도 있다. 서로 이득이 된다면 그 사람이 누구든 관계를 맺고 더 이상 이득이 없다면 서로 별다른 감정 없이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여부만 중요할 뿐, 그 사람의 인성이 어떤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차이로 인해서 민감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인성을 따진다. 그러다 보니 민감한 사람들이 가진 조건을 통과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탈락을 하게 된다. 사실 이 세상에는 신뢰는 좀 부족해도 관계를 맺으면 좋은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탈락해서 결국 관계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지고 만다.

 
이것은 그 누구보다 관계를 통해서 두려움을 해결해야 하는 민감한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민감한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준점을 낮춰야 한다. 최대한 너그럽고 관대하게 상대방을 이해해 줘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믿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그렇게 즐겁게 관계를 맺다 보면 행복해져서 자연스럽게 둔해지게 된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민감함이 가진 장점 살리기::

 

민감함은 분위기 파악 능력이 좋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쁜 감정에 대한 파악도 잘하지만 좋은 감정에 대한 파악도 뛰어나다. 그러니 관계를 맺는 일에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관계를 잘 맺는지에 대해서 딱히 설명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를 위해서'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 관계에 대한 집착도 떨어지고 그로 인해서 더 많은 관계를 쉽게 맺을 수 있는 기회도 열리게 된다.


 

감정 기복이 줄기 때문에 언제나 밝고 즐거우며 그리고 유쾌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민감함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며 그렇게 행복해지면 민감함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다. 오히려 너무 행복하면 둔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이다.

 

 

 

::민감함을 다루는 법 - 굴에서 나오자::

 

이미 민감함으로 인해서 힘들어서 자신만의 굴에 들어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더 행복해, 라는 착각에서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혼자 있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단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힘드니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사람들도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행복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혼자서 아무리 잘 지내는 사람도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더 행복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지낼 때 무척 피곤함을 느끼기에 어쩔 수 없이 혼자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지만 이미 이해했듯이 그 이유가 그저 너무 관계를 잘하려는, 그러니까 관계를 통해 생존하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 강해서 생겨나는 현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의 변화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 라고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정의하고는 그것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지금의 헛된 노력만큼은 멈춰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누군가 함께 할 때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그럴만한 사람을 찾는 일이 너무 힘들 뿐이다. 하지만 혼자서만 행복하려고 하면 평생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민감함 때문에 꾸준히 상처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끝없이 변화시켜 나가게 되면 언젠가는 관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더해서 소수의 정말로 마음에 맞는, 그러니까 관계를 통해서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여전히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이 글에 댓글을 남기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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