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죄책감을 자극하는 사람들

아이루다 2019. 12. 9. 12:10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혼자 억지로 살려면 살겠지만, 그런 삶은 행복하기가 힘들다. 아니 행복은커녕 생존조차 힘들다혼자 살 때는 작게 베인 상처나 감기조차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잘 맺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생존과 행복 두 관점 모두에서 그렇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는 것과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사는 것처럼 외톨이로 살거나 심한 경우 적대적 관계, 즉 적에 둘러 쌓여서 사는 것은 오히려 혼자 사는 것보다도 못하다.

 

,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기본적으로 지인들이란 존재는 자신과 어느 정도 같은 편에 서주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상황에 따라서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같이 해주는 사람들이다. 나와 성격적, 능력적, 상황적 특징이 유사하고 더해서 목표가 엇비슷한 경우에 놓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인들이 많을수록 삶은 점점 더 안정적이며 행복해진다.

 

하지만 지인들과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다어쩔 수 없는 문제는 두 사람이 늘 같은 것만을 원할 수는 없기에 생겨난다. 심할 경우 상황에 따라서는 지인이 경쟁자가 되는 경우도 일어난다.

 

그래서 그런 갈등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협상이나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지인은 언제든 상황에 따라서 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오히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도 못하는 일은 제법 일어나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갈등을 빚을 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된다.

 

실제로 누군가 성공할 수 있는 조건 중에서 지능, 외모, 신체 능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 보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는, 그러니까 많은 갈등 상황에서 적절하게 그것을 잘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더 중요하다. 단지 그 능력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주 잊혀질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까우리는 대부분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거나, 이번에 한번 나를 도와주면 나도 언젠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거나, 이것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강조하면 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수단을 다 써도 상대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경우는 늘 존재한다.

 

상대를 확실히 설득할 근거도 없고, 상대가 이미 그 일을 해봤는데 별로 안 좋았던 경험이 있고, 해도 별로 도움이 안되더라는 기억이 있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협박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실 협박은 회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설득법이다. 이번에 이 일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하면 다음 인사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던가 심한 경우 쫓겨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악당들은 보통 지금 나를 돕지 않으면 당신의 소중한 어떤 것을 파괴시켜 버릴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강압적인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교를 부려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울면서 상대에게 읍소를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확실하게 보상을 제시하거나 화를 내면서 왜 나를 돕지 않냐고 따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많은 방법들 말고 사람들이 아주 자주 그리고 흔히 쓰는 숨겨진 교묘한 비법이 하나가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설득을 하는 사람이나 설득을 당하는 사람 모두 거의 무의식적으로 경험하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꽤나 잘 통하는 편이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잠재적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이다상대가 자책감을 느낄만한 그럴듯한 근거가 별로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은 꽤나 잘 통하는 편이다.

 

왜 그럴까이유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다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교육과 경험을 너무도 오랫동안 해온 탓이다. , 인간성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주입된 도덕적 가치 그리고 더해서 이미 가지고 있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그런 자책감이 생겨나게 된다.

 

세 사람이 함께 일을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서로 각자 맡은 작업량이 있고 그래서 각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다른 두 명에 비해서 일을 잘하는 편이라서 좀 더 빠르게 일을 마치고 쉬게 되었다. 누가 봐도 정당한 휴식이다.

 

그런데 아직 일이 덜 끝난 두 사람 중 하나가 '시간 나면 와서 좀 돕지 그래. 서로 도와가며 살아야지' 라고 지나가듯 가볍게 말을 한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쉬고 있던 사람의 머리 속은 어떨까?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지 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마음 속 감정은 다르다. 뭔가 불편하다. 머리 속의 정당함과 다르게 감정으로는 이미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자책감의 원인이 바로 평소에 사람은 서로 도와야 한다, 남의 불행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등의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주입 받은 도덕적 가치이다이후 상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그러니까 일 좀 잘하지' 라고 넘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지' 라고 점잖게 말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돕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왜 그 따위로 말을 하냐'  화를 낼 수도 있다.

 

어린 시절 어린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 수십 년간 연락이 끊겼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너무 어린 시절이라서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 사실상 남이며 더해서 어려서 자신을 버리고 나간 엄마이기에 보고 싶다는 좋은 감정보다는 원망이라는 나쁜 감정이 훨씬  상대이기에 원래는 죽든 말든 상관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 뭔가가 움직인다. 그때 움직이는 것이 천륜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자신을 낳아 준 엄마에 대한 도리, 즉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 같은 희미한 도덕적 잣대가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가 볼 생각은 전혀 없다그래도 기분은 결코 좋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자책감이 든 것이다.

 

사실상 이 두 경우 모두 딱히 어떤 식으로든 자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일을 잘해서 먼저 끝낸 것이나, 어린 시절 자신을 두고 집을 나가서 사실상 남인 존재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책임이 있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책감을 느낀다희미하긴 하지만 오히려 희미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경우가 많다. 확실한 책임이 있거나 아니면 아예 무시할 수 있어야 화가 안 나는데 희미한 책임감을 느끼기에 오히려 화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원인에는 바로 '나보고 어쩌라고?' 라는 식의 마음이 담겨있다.

 

정말로 그렇다. 어쩌라고 그러는 것인가? 당신들이 일이 먼저 끝나면 나를 도와줄 거야? 수십 년 전 어린 자식을 두고 도망친 엄마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 행세를 하려는 거야?

 

하지만 이 분노 자체가 그저 자책감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어떤 종류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다면 그저 남 일 보듯이 그것을 넘기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자책감을 아주 영리하게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다. 고객을 매장 내 상품을 볼 때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서 상대방의 자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을 쓴다. 그러면 미안해서 사기도 한다. 선거철이 되면 막걸리 한잔 사주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막걸리를 먹는 것과 누군가를 찍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먹었으니 찍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찔린다.

 

더 심한 경우도 많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왜 뭔가를 하지 않고 있지?' 라고 말을 하면 그 순간에는 즉시 자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본 후 황당해져서는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데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하죠?' 라고 따지게 된다.

 

결혼 전 그 결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그리 뜯어 말렸는데 기어코 결혼을 하더니 결국 결혼 1년 만에 이혼을 하면서 '왜 그때 나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냐'고 따지는 딸의 말 조차도 자책감이 드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혼자 놀다 다쳐도 자신의 탓으로 여긴다. 자식은 부모가 가진 자책감의 원천이 된다.

 

그로 인해서 자식들은 본능적으로 그 자책감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다른 애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는 왜 안 사주냐?' 라는 식의 비교를 통해서 부모의 자책감을 자극한 후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 사실 이런 비교는 매우 질이 나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곧잘 그것에 넘어간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에게 '다른 아내는...' 라고 하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다른 집 남편은...' 라고 하면 대부분은 부부싸움으로 이어진다. 같은 위치에 있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자책감을 자극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기 보다는 화를 낸다. 그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방법을 쓰는 것이 또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식들이 다른 부모와 자신의 부모를 비교하게 되면 놀랍게도 많은 부모들이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다른 부모만큼 해주지 못함에 대한 자책감으로 인해서 슬픔도 또한 느낀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무리를 해서라도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한다.


 

자식들은 비록 어리지만 어떻게 해야 부모를 자극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부탁, 애교, 땡강, 울음 등 다른 많은 설득법들이 통하지 않을 때 결국 이 방법을 쓴다. 그리고 부모는 듣는 순간엔 화가 몹시 나지만 결국 자책감을 느끼고는 무리를 한다.

 

그런 식으로 자책감을 느끼게 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경우는 어린 시절부터 흔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특히 인간의 도리, 도덕적 가치 등을 기반으로 한 설득법은 꽤나 잘 먹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회사를 그만 두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떠나면 팀원들은 어떻게 하냐?' 라는 식으로 말한다. 사실 그 사람이 팀원을 책임질 그 어떤 근거도 없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그 말이 마음 속에 남는다. 그래서 결국 회사를 옮겨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을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악당조차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사람 앞에서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처자식이 있다' 라고 말하거나 가족사진을 보여주려고 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면 처자식에게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자책감을 자극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한마디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지라도 결국 뭔가 찜찜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좀 더 잘 생각해보면 그런 종류의 자책감들은 전혀 상대방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 상대방은 그것을 노리고 말을 했을 뿐 결국 자책감을 느낀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말로 사실상 잘못한 것도 거의 없는데 그런 자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자책감을 느끼고 좋은 마음으로 상대의 부탁을 들어주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스스로도 고통스러우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돕거나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짓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도리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것들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상대적 가치' 이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주입 받는 그런 개념들은 모두 서로 같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어떤 것' 은 아니기에 그렇다.

 

인간사회의 도덕은 그 어떤 순간에서도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최대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가 잘 살기 위한 목적이지 인간의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누군가 평생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저 남을 죽여야 할만한 상황에 놓이지 않아서 그렇다. 악당이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할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막지 못하는 부모는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저 무능하고 비겁한 존재일 뿐이다.

 

삶을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불필요한 자책감을 최대한 버려야 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끝없이 우리의 자책감을 자극하려고 할 것이다. '언니가 빠지면 어떻게 해', '부장님이 그렇게 남 일 말하듯 말하면 안 되죠', '엄마는 왜 엄마 하고 싶은 것만 해' 라고 말 할 것이다.

 

속지 마라.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자책감을 건드는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낼 필요도 없다. 또한 거절한다고 해도 상대가 상처받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그런 말들은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이니까 말이다.

 

실제로 자책감으로 인해서 뭔가를 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억지로 힘들게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다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그 화가 남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있는 자신에게 적당한 배려나 챙김이 없을 경우 자신의 그런 노력이 무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필요하게 심한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이 하기 싫은 행동을 할 때, 그것이 자신이 가진 자책감으로 인한 충동인지 아니면 정말로 해야 할 일이라서 하는 것인지 혹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를 잘 판단해야 할 것이다.

 

자책감은 생각보다 무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기에 정말로 오랫동안 생각해야 겨우 알아챌 수 있다. 또한 최종적으로 자책감이란 결론이 나더라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냥 하는 편이 낫다. 단지 그럴 경우엔 자신이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불편해서 하는 것이란 생각을 확실히 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실제로 도움을 주고 나서 딱히 어떤 보상을 받지 못하더라도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친구가 돈을 꿔달라고 했을 때 꿔주기 싫은데 우정이라는 자책감으로 괜히 꿔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 더 깊이 생각해보고 단호히 거절을 하거나 혹은 그냥 준다는 생각으로 돈을 꿔준다면 돌려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상처를 받을 일이 없다.

 

사실 사람들이 자책감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이 스스로 결정해서 움직이게 하려는 마음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 내가 직접적으로 상대방에게 부탁을 하는 것보다 자책감을 느끼게 해서 상대방을 살짝 찌르면 그 후로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마음의 빚이 되지 않고 그저 그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적어도 부탁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낀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례히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 , 정말로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밥 한번 먹지' 라는 말과 비슷하다. 조금 더 나아 가면 '왜 나랑은 밥 안 먹어요?' 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들에 대해서 딱히 자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정말로 밥을 먹고 싶다면 그때 먹으면 된다. 누군가와 밥을 먹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정말로 오랫동안 자책감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 중의 거의 대부분의 부탁은 거절 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또한 반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일을 할 수도 있다. 거절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을 때가 되어야 진정한 선택이 시작된다. 그때야 말로 제대로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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