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김두삼씨 이야기 - 3

아이루다 2020. 1. 10. 08:00

 

 

3. 사발면, 초콜릿 그리고 가을

 

출발 시간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나는 몸에 이상한 증상이 나타난 후로부터는 철저하게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왔다.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고 어쩔 없이 밖에 나가야 하는 일들, 그러니까 쓰레기를 버리거나 재활용품 정리하는 , 과자나 라면 등을 사기 위해서 근처 편의점에 다녀오는 일을 때는 최대한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을 이용했다. 그리고 12층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는 계단을 이용했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은 년에 번씩 근처 초등학교에 민방위 훈련을 갔을 때였다.

 

지난 3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가 이런 멀쩡한 대낮에 거리를 걷고 있느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만에 나는 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길을 걷는 사람들을 모두 나만 쳐다보는 같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과 우연히 눈만 마주쳐도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그것은 사무실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아니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과 년을 보낸 시간이 만들어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바라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스스로 자른 머리 스타일의 독특함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상관없이 나는 오전 동안 길을 걷는 내내 예식장에 잘못 들어간 강아지처럼 어쩔 몰라 했다. 길이란 것이 원래 장소와 장소를 서로 연결 시켜주는 통로의 역할이지만 세상과 단절이 되어 버린 나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면 나아가야 했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그렇게 시간쯤 걷자 한강변에 있는 자전거 도로 근처에 도착할 있었다. 장시간 쓰던 근육이 자극되고, 더해서 제법 긴장을 상태에서 걸은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양쪽 어깨에 배낭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존재감이 커졌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3 멀쩡했던 상태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 얼마나 체력적으로 약해졌는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나는 돌아다녀야 하는 동물이었는데, 동안 터무니없게도 식물로 살아온 것이다.

 

앞으로 최소 12시간은 걸어야 텐데 몸이 지금 상태에서 나아질 같지는 않았다. 순간 예전에 군대에서 군장을 메고 걸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훈련 때문에 장시간을 걷는 일이 있곤 했는데, 선임들은 군장 안에 들어간 가벼운 담뱃갑 하나도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라고 하면서 엄살들을 피우곤 했었다. 당연히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완전 헛소리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담배가 아닌 가스버너를 넣고 걷는 중이었다. 더해서 커피, 사발면, 초콜릿도 존재감을 점점 나타내고 있었다.

 

좋은 것도 있었다. 가을날씨답게 청명해서 걷는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날씨가 좋다보니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그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도움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빠르게 통과해서 지나가기에 몸에서 나는 냄새 같은 것을 맡을 시간이 없었다. 가끔 걷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걸으면 되었다. 만약 그들의 민감한 코에 몸에서 나는 냄새가 맡아지더라도 그들은 출처가 설마 사람일 것이라고는 예상하긴 힘들 것이다. 설령 사람이라고 의심이 되더라도 그렇게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나에게서 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을 훌쩍 넘어설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사람은 상상할 없는 것을 감각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한강변을 걷다가 보니 강을 따라 바람도 제법 불어서 몸에서 나온 체취는 금세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있었다. 대충 상황판단이 되고 머릿속이 정리되자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사람들과 거리만 적당히 유지하면서 걸으면 이상 신경 문제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오히려 장시간을 걸어야 하는 체력이 가장 문제가 터이다.

 

어느 정도 걱정이 줄어들자 주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근처 단풍잎들은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고 멀리 보이는 노란 색을 나무는 아무도 은행나무인 듯싶었다. 집에만 있었던 나는 몰랐지만 서울엔 이미 가을이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길가의 작은 풀잎부터 상대적으로 훨씬 나무들까지, 각자 다른 시간 속에서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고락을 함께했던 초록의 잎들과 작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의 이별은 웃거나 혹은 아쉬워하면서 이뤄질 있는지 길이 없는, '다음에 봐요' 라고 말하면서 수초 만에 끝날 일이지만, 이들의 이별은 수일에서 길면 수십 일까지 길어지기도 한다. 아마도 인간의 이별에는 만남으로 이어진다는 기대가 담겨있지만 이들의 이별은 이번이 다시는 보지 못할 마지막임을 알기에 그럴 것이다. 순간 나는 내가 겪었던 주변 사람들과의 이별들 역시 인간의 그것이 아닌 풀과 나무가 지금 겪고 있는, 돌이킬 없는 이별이었음이 떠올랐다. 아마도 나는 다시는 과거의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그들을 없을 것이다. 회자정리나 거자필반과 같은 말들은 듣기엔 꽤나 그럴 듯하지만 그런 말들은 나처럼 몸에서 냄새가 나보질 않는 사람이 만든 말이 분명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밖에 나와 기분이 나아진 탓인지 머리 속에는 예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할만한, 아주 조금의 여유가 생겨났다. 집안에 처박혀 있는 동안엔 그러면 같아서 필사적으로 억눌렀던 기억들이 기회가 생겨나자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멈추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마구잡이식으로 튀어 나오던 기억들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던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멈춰졌다. 당시 내가 차마 시동을 걸지 못하고 망설였던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금세 다시 우울해지고 말았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다시 우울해진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니 먹긴 해야 했다.

 

근처를 살폈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 버너도 켜고 해야 하니 가능하다면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야외에서 불을 피웠다가 잘못하다가는 신고라도 당할 있었다. 사실 신고를 당하는 것만 아니라 경찰서에라도 끌려가게 되면 거기에서 마주할 사람들과의 상황이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그러니 일단 여기저기 설치된 벤치에서 뭔가를 하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던 눈에 제법 괜찮아 보이는 장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곳은 길에서 벗어나 쪽으로 붙은 곳으로 강물을 직접 손으로도 만질 있을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좋게도 주변으로는 키보다 뼘은 보이는 갈대들로 둘러 쌓여있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나처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찾지 않는 주변을 통과한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만한 특별함도 전혀 없었다. 평범함 속에 숨은 익명성,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운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조건이었다.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없다 보니 자체가 없어서 거기까지 이동하기가 수월치는 않았다. 나는 넘어지지 않도록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이동을 했다. 그리고 도착하고 보니 비록 건너 멀리 도심의 풍경이 보이지만, 앞으로는 , 뒤로는 갈대로 가려진 비밀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같은 도심 속의 비자발적 자연인에게 어울릴만한 도심 숨겨진 오지였다. 그러니 적어도 장소를 발견한 것은 운이 좋았다.

 

나는 근처에 있는 엉덩이를 댈만한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 대충 자리를 잡고 버너를 꺼내 가스까지 장착했다. 그런데 불을 켜려는 순간 운이 좋을 없다는, 삶의 평범한 진실이 느껴졌다. 정신이 없어서 라면을 먹는데 가장 중요한 물을 구하는 것에 깜박한 것이다. 다시 길가로 나가 식수대라도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식수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헤매면 힘만 빠질 것이다. 다행히 초콜릿이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도 있었다. 충분히 가져왔으니 일단 점심 대용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나는 보온병에 담긴 아직도 뜨끈뜨끈한 커피 한잔을 컵에 따랐다. 커피를 보자 커피 물로 라면을 끓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깐 났다. 커피 라면? 아니다. 커피 맛도 라면 맛도 아닌 어떤 것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된다.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물고는 천천히 씹어 넘겼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초콜릿이 가진 달콤함의 여운이 남아 있는 입안에 커피 맛이 더해졌다. 초콜릿과 커피, 누가 만들어낸 조합인지 모르지만 설렁탕과 깍두기, 감자 칩과 케챱, 라면과 김치, 스팸과 흰쌀밥 등과 같이 찰떡궁합 하나이다. 나는 그것들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씹고 마셨다.

 

먹는 내내 바로 옆으로 흐르는 강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작은 물결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에 따라 작은 물소리도 반복되었다.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 시선을 멀리 했다. 그러자 멀리 누군가 보트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보트가 만들어 놓은 물결이 밑까지 도착했다. 작은 물결이 물결로, 작은 소리가 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분간에 걸쳐서 천천히 다시 원래 모습대로 되돌아갔다. 잠시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강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 모습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수천 , 수만 년을 이렇게 똑같이 흐르고 있는 강일 것이다. 이토록 세상은 변하지 않는데 나는 오년 만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다. 삶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변칙적인가? 나는 남들과 달리 이렇게 변화 속에서 이토록 비루한 삶을 지탱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삶엔 과연 내가 살아볼 만한 어떤 이유 같은 것이 남아있기나 것일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가석방이 되어서 나온 남자, 자살한 부룩스와 친구를 찾아간 레드 나는 누구에 해당될까? 삶에도 어느 해안에서 배를 수리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엔디가 있을까?

 

한번 떠오른 의문은 마치 옆을 흐르는 강물처럼 반복적으로 떠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씁쓸한 상념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어디에선가 스치듯 읽었던 구절의 문장이 떠올랐다. 같은 강물엔 발을 담글 없다는, 옛사람이 남긴 말이었다. 처음 들었을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지금 순간만큼은 묘하게 공감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삶의 변칙성도 그런 변화의 일부일 것이다. 봄에서 가을까지 풀과 나무들이 변하듯, 겨울이 오면 잎들이 누렇게 변해서 떨어지듯이, 역시 나이를 먹음에 따라 변해 것이다. 단지 변화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기준으로 많이 좋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2 전에 살았던 옛사람의 말을 끌어다가 이런 식으로 자위를 한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질 것도, 우울한 기분이 가실 것도, 이미 망가진 삶이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속에서나 그럴 듯해 보일뿐이다.

 

이미 꽤나 무리한 다리로 생각에 빠져서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몹시 뻐근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고생한 다리를 풀어 주었다. 다행히 쥐까지 나지는 않았지만 무릎 근처가 뻐근하고 밑으로까지 저려왔다. 나는 일어나서 잠시 동안 절뚝거리면서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자 서서히 저림이 풀렸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나는 배낭을 메고는 오지를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머리는 여전히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지만 배가 채워져서 그런지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러자 다시 오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였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가을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런데 오래된 기억은 비단 때문만은 아닌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멀쩡할 때도 이렇게 제대로 단풍을 적은 기억이 없었다. 아마도 마지막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에 있었던 공원에서 미술 대회에 참가했을 때인 같기도 했다. 후로 가을의 기억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 속의 가을은 아마도 TV 화면에서나 가을 행락객들의 모습이 전부였던 같다. 그런데 오늘, 가을은 원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 깊숙한 곳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왔다. 새삼스럽지만 파란 하늘이, 붉고 노란 단풍이, 시원한 바람이, 갈색으로 변한 풀들이 좋았다. 원래도 좋은 것들이지만 지금 순간에 가장 좋았다. 덕분에 거기에 취해서 다섯 시간을 내리 걸을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정도였다. 하지만 찍는다고 해서 딱히 보여 사람도 없으니 금세 포기했다.

 

걷는 방향이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뒤쪽으로 해가 졌다. 그리고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자 너무도 많은 건물들로 인해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에 수많은 부자연스러운 직각들이 생겨났지만, 멀리서 보니 그조차도 자연스러웠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지점엔 아직 남아 있는 하늘의 파란 빛과 붉게 변한 지상의 빛이 서로 만나 중간에 오묘한 빛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었다. 상식으로 파란색과 붉은 색이 만나면 보라색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과연 무슨 색일까 궁금했지만 물어 사람도, 물어 의지도 없었다. 이내 어둠이 온다는 사실만이 상기되었다.

 

 

서울에서도 제법 멀어졌기도 했고 이미 어둠이 내린 터라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숫자는 확연히 줄었다. 그래도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자전거를 채였다. 그들은 다들 타고 있는 자전거 앞쪽에 꽤나 밝은 등을 부착하고는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거나 통과해 갔다. 어둠 속에서 저렇게 속도를 내는 것이 겁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처지에 누구를 걱정하고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가끔 너무 강한 빛으로 무장한 자전거들이 있어서 눈이 아팠기에 그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금세 사라지고 짜증이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곳을 찾아야 했기에 시선은 그들에게 머물 수도 없었다.

 

다행히 멀리 모텔 간판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보였다. 불빛마다 거리는 서로 달랐고, 가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같긴 했지만, 중에서 하나 골라서 자면 것이다. 나는 혹시 무인텔이란 글씨가 보이는지 주의 깊게 봤지만 너무 멀어서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제일 밝고 가까워 보이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모텔 앞에 도착한 나는 깨끗함과 화려함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분명히 무인텔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아무도 없는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화려한 조명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괜한 자격지심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서는 다른 곳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자 옆으로 꽤나 오래 되고, 영업을 하고 있나 싶어 보이는 낡은 모텔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라 보이지 않았지만 지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유럽의 모양을 따다 만든 촌스러운 외관을 가진 모텔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무인텔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끌리듯이 모텔로 들어섰다. 문을 들어서자 문에 붙어 있던 작은 종이 침묵의 공간을 깨뜨리며 크게 울려 퍼졌다. 그로 인해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잠시 얼어붙은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잦아든 후에나 직원이 있을 같은 작은 창문 방향을 향해서 걸어갔다. 안으로 사람은 보이질 않았지만 TV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구멍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또래이거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 나이의 남자였는데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매우 심드렁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가 혼자 왔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심도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몸에서 나는 냄새조차 관심이 없는 굴었다. 그래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오늘 하루를 자겠다고 말했고 그러자 남자는 말도 하기 귀찮은 손으로 옆에 붙여 놓은 요금표를 가리켰다. 하루 숙박이 4만원이었다. 주말엔 비쌌는데 평일이라서 가격만 내면 되는 보였다. 나는 지갑을 꺼내서 현금으로 4만원을 건네고 상대가 주는 열쇠를 받았다. 번호는 202호였다.

 

등을 돌리자 나무로 난간이 있는 카펫이 깔린 낡은 계단이 보였다. 나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간 202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작은 냉장고 하나, 오래되어 보이는 화장대와 거울 그리고 낡은 선풍기가 있었다. 그리고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세트로 구석에 위치해 있었고 명이 만큼 커다란 침대가 한쪽에 있었다. 전반적으로 많이 낡은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한쪽 벽에 붙어 있는 에어컨은 최근에 교체한 홀로 깨끗했다.

 

나는 일단 외투를 벗어서 옷걸이 침대에 누웠다. 하루의 피로감이 밀려오면서 온몸이 뻐근했다. 천정을 바라보자 네모난 형태로 만들어진 형광등이 보였다. 처음에 지었을 때는 꽤나 멋진 객실이었을 것이다.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방에서 수많은 사연 속에서 짧은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나의 삶이 사연을 남기기 위해 이곳에 와있다. 그런데 삶은 꽤나 냄새가 나는 삶이다. 그리고 냄새를 남기고 삶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방의 다음 손님이 빠른 시일 내에 오지는 않을 같았다. 옆으로 새롭게 지은 깨끗한 모텔이 있는데 요즘 사람들이 뭐가 아쉽다고 여기에 오겠는가? 이곳은 이미 잊힌 공간이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이곳에 들어올 있었던 것이다.

 

원래 외로움, 단절, 잊힘, 외면, 고독, 쓸쓸함, 간극, 무관심과 같은 단어들은 모두 하나의 단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고립이다. 무리로부터 분리된 홀로 있어야 하는 상태, 그것이 고립의 본질이고 고립이 수많은 새로운 표현들을 파생시킨다. 하지만 그런 고립에도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울릴 능력이 되지만 자발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처럼 어쩔 없이 비자발적으로 혼자 있는 것이다. 둘은 같은 형식이지만 내용은 너무도 다르다.

 

낡은 공간에 사로잡힌 나는 생각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이 길어진다는 것은 좋은 증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그저 불행의 증거일 뿐이다. 원래 행복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야 정상이다. 책을 읽거나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불행해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평생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내가 지난 3년간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 것이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은 자꾸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그저 그들의 밥줄에 관한 문제일 뿐임을 모르기에 그런다. 그나마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세상엔 불행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원래 철학자들은 정신의 불행을 먹고 살고, 의사들은 몸의 불행을 먹고 산다.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언제 넣어 뒀을지도 모를 작은 생수병이 하나 보였다. 나는 물을 꺼내서 화장대 위에 있는 전기 포트 안에 부었다. 그리고 물을 끓였다. 낮에 먹지 못한 사발면을 이제라도 먹고 싶었다. 물을 끓이는 사이 냉장고 앞에 붙어 있는 오래된 치킨 배달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따로 가게 이름도 없이 치킨, 생맥주라고만 쓰여 있었고 밑으로 신속배달, 카드 환영이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밑에 연락처가 있었다. 031 시작되는 번호였다. 그렇다. 나는 서울을 벗어난 것이 분명했다.

 

옆으로 음식점 정보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야식을 주로 하는 같았다. 아예 식당 이름도 풍차야식이었고 따로 메뉴도 없이 연락처만 잔뜩 있었다. 가게 연락처는 물론 콜택시 연락처와 뜬금없는 응급실 연락처가 적혀져 있었다. 나름대로 공익성을 가진 전단지 정보였다. 하루 종일 초콜릿으로 버텼더니 배가 많이 고파서 뭔가를 시켜 먹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전화번호가 살아 있을 같지가 않았다. 그냥 라면을 여러 먹는 것이 나을 했다. 사이 전기포트 안의 물이 끓은 '' 소리가 나면서 전원이 꺼졌다. 나는 서둘러 라면을 준비한 물을 붓고는 잠시 먹기 시작했다. 먹는 너무 조용하고 적적한 느낌이 들어서 TV 켰다. 소음이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씻고 제목도 모를 영화 한편을 보는 도중 잠이 들었다.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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