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죽음경험자 - 5

아이루다 2019. 6. 27. 08:37

 

5. 의뢰하는 자와 의뢰를 받는 자

 

공주는 서산보다 확실히 컸다. 일단 도착한 터미널 규모부터 차이가 컸다. 버스에서 내린 현수는 희연을 데리고 백사장이 알려준 주소를 찾아갔다. 그곳은 처음 예상대로 전당포였으며, 그가 문자에 온 내용대로 보관번호와 비밀번호를 말하니 조그만 종이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안엔 신분증과 통장 그리고 통장을 만들 때 썼던 오연수라는 이름의 막도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외에 A4 용지를 접은 종이가 하나가 접혀 있었는데 꺼내서 펼쳐보니 어딘가를 가는 약도로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찾아가서 사건을 의뢰할 장소로 가는 길인 듯 했다. 이미 주소를 아는데 이렇게 따로 약도를 줬나 싶어서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금세 머리 속에서 지우고는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네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 찾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일단 머리 속에 당장 해야 할 소소한 일들이 떠올라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듯 하니 뭔가 준비를 해야 했다. 희연에게 따로 묻지는 못했지만 그녀도 자신처럼 어제 입었던 속옷을 그냥 입고 있을 것이다. 양말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것들 좀 챙겨야 했다.

 

현수와 희연은 전당포 건물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재래 시장으로 갔다. 둘은 속옷도 사고 그런 여러 가지 물품을 담을만한 편한 백 팩도 하나씩 샀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오연수의 명의로 희연이 쓸 폰도 하나 장만했다. 구형이긴 하지만 그래도 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였다. 희연은 새로 생긴 스마트폰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이 후 둘은 희연이 갈아입을 옷도 좀 샀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후줄근했다

 

시장에서 쇼핑을 하자 시간은 금세 흘렀다. 그사이 딱히 문제가 될만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장에서 튀김과 떡볶기 그리고 순대나 닭발을 파는 가게를 지날 때마다 희연의 발걸음이 너무 느려져서 쇼핑을 끝내고 나니 벌써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희연이 자신의 새롭게 생긴 스마트폰으로 처음 한 일은 바로 공주 맛 집 검색이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요."

 

검색을 해서 찾아간 맛 집은 크게 맛난 것은 없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그리고 둘은 음식점을 나와 일찌감치 숙소를 잡았다. 모텔 주인은 자고 간다고 하니 좀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그냥 방을 내줬다. 원래는 안 되지만 장사도 잘 안 되는 평일이기에 자고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희연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고 현수는 알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그래서 모른 척 했다. 둘은 지난 밤처럼 각자 방에 들어간 후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만났다.

 

"옷은 다 갈아 입었죠?"

 

희연은 어제 산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현수는 속옷도 다 갈아입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중의적으로 물었다.

 

", 다 갈아입었죠. 그리고 가방에 넣었어요."

 

희연의 새로 산 가방은 제법 두툼해져 있었다. 겉옷까지 들어가서 그런 듯 했다. 현수는 저 옷들은 어딘가 옷 버리는 곳에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희연에게 이동하자고 신호를 했다.

 

"아침은 안 먹어요?"

 

"안 먹어요."

 

현수는 원래 아침을 안 먹기 때문에 아예 아침을 먹을 생각조차 나질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희연의 얼굴을 보니 이대로 갈 수는 없어 보였다. 그는 근처 편의점에서 에너지바라고 써진 초코바 몇 개와 우유를 사서 희연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 먹었다.

 

"우리 어디로 가요?'

 

"이 주소대로 가야 해요."

 

모텔을 나서면서 주인에게 슬쩍 문자 속 주소를 보여주면서 물어보니 계룡산 쪽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가 어디인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일단 신원사 쪽으로 가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해줬다. 그리고 현수는 잘 모르는 대중교통으로 복잡하게 이동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택시를 타자 신원사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리는 제법 되는 듯 요금이 3만원 가량 나왔다. 둘은 택시에서 내려서 신원사로 향하는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계룡산에도 가을이 와 있었다. 길가 양 옆으로 화려한 붉은 색으로 치장한 단풍나무들이 보였고, 저편으로는 노란 은행나무들이 색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많은 나무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색감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둘은 눈 호강을 하면서 걸었지만 그래도 이제 곧 맞닥트릴 현실로 인해서 온전히 거기에 집중할 수는 없었다.

 

"여기 너무 예쁘네요."

 

"그러게요. 예전에 여기 신원사에서 갑사로 가는 글 한 편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현수는 계룡산에 관한 예전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생각난 것은 그것이 다였다.

 

"갑사는 또 어디에요?"

 

"저도 모르죠. 처음 왔는데. 아무튼 절에 다 와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현수는 근처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이 주소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분명히 이 동네에 사는 듯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친절하긴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그때서야 현수는 어제 찾은 종이가방에 들어있던 약도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것을 꺼내 펼쳤다. 약도에는 신원사가 표시되어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산길을 타고 이동하는 듯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야 했다.

 

"일단 산을 좀 타야 할 듯 한데요. 아무래도 산 속에 있는 집인 것 같아요."

 

현수의 설명에 희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다른 말을 했다.

 

"밥은 먹고 가죠. 그곳에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고, 거기에 먹을만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현수는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문을 연 식당을 찾았다. 결국 둘은 이제 막 문을 열어서 준비도 안된 가게로 들어가서 민폐를 끼치며 밥을 먹었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젊은 남녀가 이른 아침부터 들어오니 밥도 반찬도 듬뿍 내주었다. 그로 인해서 희연은 밥 먹는 동안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넘게 했다. 아주머니는 그런 희연을 보고는 요즘 사람들 같지 않게 젊은 아가씨가 참 복스럽게 먹는다고 거듭 칭찬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복실복실하게 살찐 돼지를 바라보는 흐뭇한 눈빛이 분명했다. 둘은 식당에서 나와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가면서 등산 안내도와 약도 속 그림을 비교해보니 목적지가 대충 어딘지 알 수 있을 듯 보였다. 대략 한 시간 정도만 걸으면 될 듯한 곳이었다. 둘은 그리 빠르지도 그리 느리지도 않게 걸었다. 희연은 밥을 듬뿍 먹어서 힘이 나는지 가는 내내 뭔가를 떠들었다. 하지만 현수의 그녀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점점 긴장이 되었다.

 

"거 젊은 분들이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나?"

 

한참 걷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약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보아하니 누군가를 찾아가는 길 같은데, 잠시 시간 내서 점이나 보고 가지 않겠나?"

 

얼굴에 주름은 많이 없었지만 백발의 머리와 하얀색 한복을 입은 탓에 그 나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 던지는 말투는 그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들게 했다.

 

"아니, 저희는 빨리 찾아가봐야 해서요. 죄송합니다."

 

현수는 원래 점이나 사주팔자 같은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계룡산은 원래 저런 사이비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 아닌가?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그리 급히 간다고 해서 만날 상대가 아니네. 천천히 돌아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

 

현수는 속에는 '낚시질 좀 해보셨네'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으로 보이니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점 같은 것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급한 마음에 찾으면 보이지 않을 것이요,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도인은 대답 대신 또 다른 이상한 신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사기꾼이 분명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현수는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고는 인사를 하고 다시 출발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인생, 그리 빨리 간다고 그것이 해결될 성 싶은가!"

 

도인은 그리 크지 않게 말했지만 그 말이 현수의 귀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옆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현수는 순간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굳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려서 도인을 바라보았다도인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점을 보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현수는 혼란스러웠지만 방금 전처럼 도인을 무시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도대체 누구신지?"

 

"나는 무학도사라고 하네. 이 신령한 계룡산에서 30년 넘게 도를 닦고 있지.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고 모든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보는 심안을 가지고 있다네어찌 한번 나에게 점을 볼 생각이 있는가?"

 

하지만 현수는 여전히 상대를 제대로 신뢰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비밀을 한 눈에 꿰뚫어 보고 있는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사실 그냥 던진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무시할 수도 없고 하자는 대로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갑자기 그렇게 긴장한 얼굴인데요?"

 

현수의 얼굴이 갑자기 굳자 희연이 걱정되는 듯 조그만 소리로 물어왔다. 현수는 뭐라고 답을 하고 싶지만 딱히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 돈도 안 받을 테니 와서 점을 한번 보시게."

 

현수의 태도가 변하자 도사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현수는 돈을 받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마음 속 의심이 많이 풀렸다. 상대가 적어도 돈 뜯어 내려는 사기꾼은 아닌 듯 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 한번 봐주세요."

 

", 왼손을 내 밀어 보게."

 

현수는 자신의 왼손을 내 밀었다. 그러자 도사는 그의 손을 잡고는 한참을 바라보고 그리고 난 후 현수의 얼굴도 한참 바라보았다. 행동하는 모습이 그의 손금과 관상을 보는 듯 했다.

 

"생년월일을 말해 보게."

 

"84 4 12일 생입니다. 아침에 돼지 밥 주는 시간에 태어났다고 들었습니다."

 

현수는 그냥 자신의 원래 생일을 말했다이름이야 오연수를 쓰더라도 생년월일은 그대로 써도 상관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특히나 믿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사주팔자를 보는 상황에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오연수의 가짜 생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몇 시에 태어났는지 알 길도 없으니까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도사는 그 말을 듣더니 한참 뭔가 입으로 중얼거렸다.

 

"자네, 이름은 뭔가?"

 

"오연수입니다."

 

"허허.. 그게 아니지. 진짜 이름이 뭔가?"

 

"?"

 

"자네는 오씨가 아니야. 오씨가 될 수 없는 사주를 타고 태어났지."

 

현수는 순간 몹시 당황했다. 사주를 보면 어떤 성씨를 타고 나는지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다시 한번 눈 앞의 도인에게 정체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채현수입니다."

 

"?"

 

이번에 소리를 낸 것은 도사가 아니라 희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오연수라고 알고 있었던 남자가 채현수라는 이름 대자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었어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그냥 저를 채현수라고 불러요. 그게 내 본명이에요."

 

"갑자년, 쥐띠 생에 어질 현자와 빼어날 수자를 쓴 이름을 가졌군. 좋은 이름이야.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분이군. 그런데 자네는 사주가 아주 특이해. 내가 본 사주 중에서 세손가락 안에 들어갈 사주야. 도대체 자네 정체가 뭔가?"

 

희연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도사는 먼저 자신이 할 말을 쭉 늘어 놓았다.

 

"저도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사주에 삶과 죽음은 단 한번 교차될 뿐이거늘, 자네는 도대체 어떤 운명을 타고 났기에 이리 삶과 죽음이 반복되고 있단 말인가.. "

 

도사는 혼잣말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몸을 뒤로 돌려 하늘만을 먼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현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상대에 대한 불안감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대체 자신의 사주가 어떻길래 저 도사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혹시라도 돈이라도 주고 더 알려달라고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제가 처음부터 삶과 죽음 반복되어 교차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얼마나 더 반복되어야 저의 운명이 마무리가 될까요?"

 

현수는 옆에서 듣고 있는 희연을 의식해서 마지막에 죽음이란 표현대신 마무리라고 했다. 또한 두려움 속에서도 눈 앞에 있는 이 도사가 정말로 진짜 도사라면 자신의 진짜 운명을 읽었을 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생겨났다. 사실 죽을 수 없는 것이 두려움이지 죽을 수 있는 것은 희망이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네. 내가 최대한 알 수 있는 것은.."

 

"어이, 도사!"

 

도사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중에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또 다른 커다란 목소리로 인해서 끊겼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들 쪽을 바라보면서 히쭉 웃었다.

 

"오늘도 또 거기서 사기치고 있냐?"

 

현수 또래이거나 조금 나이를 더 먹어 보이는 인물이었다현수는 순간 아무리 대한민국이 개방이 되었어도 자기 아버지뻘 되는 노인에게 저런 식으로 반말을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저 도인은 어찌되었건 간에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특이한 삶의 운명을 대략이라도 맞추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후 이어진 도사의 반응으로 인해 그의 기대를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 저 새끼 또 왔네. , 내가 좀 이러고 있을 때는 오지 말랬잖아."

 

도사의 목소리와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까만 해도 뭔가 분위기 있는 목소리였는데 갑자기 시정잡배 목소리로 바뀐 것이다.

 

"아니, 이번 건은 사주 봐주고 돈 벌 것도 아닌데 왜 거기서 그런 사기를 치고 있어?"

 

", 돈이 중요하냐? 사람이 즐겁게 살아야지. 그리고 지금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너 때문에 산통 다 깨졌다."

 

"하여간 사이비도 체질이다. 사람 속여 먹는 것이 그리 재미있냐?"

 

새롭게 나타난 남자는 혀를 차고는 현수와 희연을 바라보고는 웃었다.

 

"채현수씨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사기꾼 도사 놈이 뭐라고 하든 그냥 무시하세요원래 저렇게 점 보는 척 사기 치는 것이 유일한 행복인 인간이에요."

 

"?"

 

현수와 희연은 동시에 깜짝 놀라서 눈을 치켜 뜨면서 사기꾼 도사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눈을 피하면서 짐짓 딴 짓을 했다. 현수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남자의 이어지는 설명에 기회를 잃었다.

 

"백사장이 이미 몇 달 전에 채현수씨에 관한 정보 다 보내왔어요. 사진이랑 신상명세까지 모두요. 그래서 저희는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남자는 현수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듯 희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멈췄다. 순간 희연은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상대방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했다그러자 상대방은 말을 다시 이어갔다.

 

"제가 정말로 궁금한 점은, 이 분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에요."

 

그는 질문을 했지만 둘은 도대체 그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것을 궁금하다고 표현하는 남자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힘들었고 더해서 그들 역시도 그 질문에 대답할 처지가 아니었다. 둘 모두 희연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대도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닌 듯 했다.

 

"따라오세요. 일단 사무실로 이동하죠."

 

남자는 말을 마치고는 두 사람이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도 믿는  앞서 걸어갔고 방금 전까지 사기를 치고 있었던 가짜 도사는 현수 눈치를 살짝 보는 듯 하더니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남은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바라본 후 곧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30분 정도 걷자 넓은 공터가 나오면서 집이 보였다. 요즘은 흔치 않은 기와를 얹은 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 도사는 어느새 사라져서 그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조선시대 같으면 대감 댁은 아니더라도 제법 이름 있는 집안의 집 정도 크기는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있긴 했어도 아주 오래된 기와집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넓은 마당이 있고, 한쪽에 닭장도 있었고 한쪽 구석엔 시골집에 가면 흔히 보는 백구 두 마리가 있었는데 현수와 희연을 보자마자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도저히 집을 지킬 개들은 아닌 듯 했다. 그리고 희연의 손끝을 따라 위쪽으로 자세히 보자 검은 색 기와지붕 위에 그보다 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낯선 두 사람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흥미를 잃은 듯 다시 잠을 자기 시작했다.

 

"환영합니다. 여기가 우리들의 사는 집이자 사무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로 컴퓨터를 다루는 일을 담당하고 있죠. 그리고 아까 그 노인네처럼 보이는 인간은 자칭 무학도사라고 하는데, 보기엔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실제로는 30대 후반밖에 안됐습니다. 하지만 영업 전략상 그렇게 분장을 하고 다니죠. 그리고 한 명 더 있는데잠시만요. 서희야~"

 

자신을 이영진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계량된 현대식 한복을 입고 있었다. 편해 보이기도 하고 요즘 날씨 같아서는 추워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집 안에서 여자 한 명이 나왔다.

 

"드디어 현수씨가 왔다. 그리고 여기 옆에는.. 그러니까 제가 모르는 분인데 어떻게 먼저 소개라도 좀?"

 

영진은 현수에게 희연에 대한 소개를 부탁했다. 하지만 현수 입장에서 소개라고 할 것도 없었다.

 

".. 저도 만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잘 모르는 분이지만, 이름은 김희연으로 추측되고 주로 먹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분입니다."

 

현수가 소개를 하자 희연이 잠시 그를 째려보았다하지만 곧 웃으면서 스스로 인사를 했다.

 

"김희연이라고 불러주세요.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최소 30대 초반일 겁니다. 사람이 솔직해야지, 얼굴에 팔자 주름도 얼핏 보이는 구만."

 

현수가 재빨리 지적했다.

 

"뭐라고요?"

 

희연이 현수를 또 다시 째려봤다.

 

"아무튼 저하고 비슷한 또래네요. 저는 이서희라고 해요. 여기 영진오빠 친 여동생이고 이곳의 모든 살림을 담당하고 있어요."

 

새롭게 나타난 서희라는 사람은 희연보다는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키에 헐렁해 보이는 옷을 입어서 좀 말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말랐다그녀는 쌍 커플이 없는 눈이지만 컸고 계란형 얼굴를 가져서 희연과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났다. 하지만 말투를 들어 보니 눈에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성깔이 있는 듯 느껴졌다.

 

", 두 분이 오누이군요."

 

현수는 서희라는 여자가 나타난 후 영진이란 남자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관계가 오누이라는 말을 듣고는 금세 이해했다.

 

", 맞아요. 오빠는 컴퓨터 도사, 사라진 도사님은 구라 도사, 저는.. 살림 도사죠. 아무튼 둘은 여기에서 사람들 사주팔자 봐주는 일을 해요."

 

"컴퓨터 도사랑 구라 도사요?"

 

현수는 도대체 이 조합은 무엇일까 상상이 되질 않아서 되물었다.

 

", 간단한 트릭이에요. 여기를 찾는 고객들은 모두 아까 두 분이 온 길을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못 보셨겠지만 중간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그리고 거기로 고객의 얼굴이 찍히면 여기 영진이 오빠가 그 사람에 대해서 컴퓨터로 빠르게 조사를 해요. 그럼 그 사람에 대한 신상 정보가 다 나오죠."

 

"다 자동으로 이뤄집니다."

 

영진이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리고 서희는 자신의 설명에도 현수와 희연 둘 모두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둘을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빙긋 웃으면서 추가로 설명을 덧붙였다.

 

"설명이 너무 간단했죠? 아무튼 요즘 사람들 자기 신상명세 인터넷에 다 올려두잖아요. 페북이며 인스타며 카스며, 그래서 여기 영진 오빠가 단독으로 개발한, 아주 뛰어난 얼굴 인식 프로그램 돌리면 그 사람 과거가 다 나와요. 설령 그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안 나와도 주변 인물들 정보가 다 수집이 되죠. 그래서 고객이 여기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의 바람잡이 전문가인 무학도사님이 그 정보를 숙지하고는 상대를 다 아는 듯 굴죠. 과거에 어디를 갔고, 어떤 사고를 당했으며, 요즘 집안의 우환이 뭔지도 대략 알 수 있어요그렇게 그런 정보들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서 썰을 풀면 거의 다 그냥 홀라당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 순간 현수는 자신이 아까 그 자칭 무학도사라는 인물이 지껄인 말에 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그런 식으로 넘겨 집으면서 말하면 누가 넘어가지 않겠는가? 특히나 뭔가 간절히 원하고 오는 사람들을 금세 넘어갈 것이다.

 

".."

 

현수와 희연은 정말로 단 한 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정말로 헐 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영업 비밀을 이렇게 다 말해줘도 돼요?"

 

"어차피 여기에 며칠 있다가 보면 다 알게 될 텐데요그런데 사실 저도 영진이 오빠가 여기 희연씨에 대한 정보를 밝혀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정말로 궁금하네요. 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그런 사람 딱 한 명 봤는데 75살 먹은 할머니였어요. 그 나이면 그럴 만 하죠. 그런데 이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분이 어떻게 인터넷에 아무런 흔적이 없을 수 있죠? 조선시대에서 시간 여행이라도 하셨나요?"

 

서희가 살짝 웃으면서 농담하듯 물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저도 제가 누구인지 몰라요."

 

희연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그래서 아까 소개를 할 때 그렇게 이상한 표현을 했군요. 김희연으로 추정된다고 말이에요. 그러면 혹시 기억상실증?"

 

"그런 것 같긴 한데, 확실하게는 몰라요. 병원을 두 군데나 가봤는데 원인 불명으로 나왔거든요. 그리고 아무튼 지금은 백사장에게 맡겨보려고요. 그 사람 사람 찾는 일에 전문가니까 여기 희연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찾아 줄 것이에요."

 

현수가 대신 대답했다.

 

"하긴 그렇네요. 백사장은 그런 방면에 전문가죠. 그런데 혹시 최근에 백사장님하고 통화했어요? 사실 우리 쪽에서는 백사장과 연락이 안된지가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 그 사람이랑 연락이 안돼요?"

 

", 현수씨 일 관련해서 좀 물어 볼 것이 있어서 연락을 시도 했는데, 약 한 달 전부터 전화를 전혀 받질 않아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 그래서 어제부터 계속 전화를 하는데 안 받는구나."

 

현수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희연의 일을 맡겨야 하는데, 연락두절이라니.. 뭔가 징조가 좋지 않았다.

 

"현수씨도 연락을 못했군요정말로 무슨 일이 있나? 아무튼 계속 연락해 봐야겠네요그리고 기왕 두 분이 여기에 온 김에 여기 희연씨 일은 제가 한번 알아 보면 어떨까요? 예전에 만들어 두고 한번도 써 먹을 일이 없었던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이번에 그것을 좀 제대로 테스트 해보게요."

 

"그게 뭔데요?"

 

", 쉽게 설명하면 심층 검색 알고리즘이에요. 지금 고객들 상대 할 때는 속도가 생명이라서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간단한 검색 방식을 쓰고 있는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훨씬 많은 심층 정보들을 건져낼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 희연씨에 대한 정보를 찾아 낼 가능성도 높아지죠. 혹시나 해서 만들어 두고 그 동안 한번도 쓸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잘됐네요."

 

"그럼 소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요?"

 

희연이 물었다.

 

"운이 좋으면 2, 상황에 따라서 한 달 정도 걸릴 수 있어요."

 

"그러면 혹시 추가로 비용을 내야 하나요?"

 

현수는 은근히 비용이 걱정되었다. 자신의 일을 맡아 주는데 1억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 눈 앞에 있는 이들에게 정말로 그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스스로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희연에 관한 것은 계약 조건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추가 비용을 청구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아니에요. 이건 서비스로 해드릴게요. 그리고 현수씨 관련된 정보 검색은 일차적으로 다 끝내놨으니 조금 있다가 설명해드릴게요. 일단 곧 점심 시간이니 밥 먹고 해요. 서희야 점심 준비 가능하지?"

 

"당연하지. 아무튼 두분 환영해요. 그리고 만나서 반가워요."

 

서희는 둘을 보고 활짝 웃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긴 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보기 좋았다그녀의 서글서글한 모습에서 현수와 희연은 낯선 장소에 대한 뻔한 불안함이 많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이들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먼저 백사장이 보증한 사람들이고 그리고 지금 보여준 태도로 보아 아까 그 사기꾼 도사만 좀 이상할 뿐, 이씨 오누이에 대한 느낌은 좋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밥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좀 부담스럽긴 했다.

 

"! 밥이다, "

희연은 즐겁게 소리를 치면서 서희의 뒤를 따라갔다현수는 그 순간 밥에 대한 부담감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이 감당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까 그 도사님은 어디 갔어요?"

 

", 어딘가 갔을 거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밥 때 되면 귀신 같이 나타납니다."

 

영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현수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밥 먹기 전이라도 뭔가 간단히 설명해줄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희와 희연은 부엌 쪽으로 들어가고 영진과 현수는 방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와집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한 눈에 보이게도 모니터가 10개는 되어 보였다. 그리고 각 모니터에는 서로 다른 화면들이 계속 바뀌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광경이었다. 그나마 한 모니터만은 이해가 갔는데, 거기엔 아까 현수와 희연이 같이 걸어 온 길이 네 등분되어서 보이고 있었다. 아까 말한 CCTV 화면 같았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이미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명을 다 들었던 현수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깊은 산속, 기와집 안에 있는 이런 최첨단 장치라니.. 도대체 얼마나 이질적인 광경인가 싶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진짜는 지하에 따로 있어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현수에게 영진이 한 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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