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죽음경험자 - 4

아이루다 2019. 6. 19. 07:46

 

4. 동행

 

거하게 밥을 먹은 후 둘은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현수는 희연에게 병원에 가보자고 제안을 했다. 기억을 잃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기에 딱히 외상은 없어 보였지만 내출혈이나 심한 경우 뇌종양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밥을 두 공기씩이나 뚝딱 해치우는 건강한 처자가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억을 잃을 까닭이 없었다. 희연은 별 말 없이 현수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다.

 

"처음 오셨어요?"

 

근처에 있는 조금 커 보이는 병원에 들어갔다이런 경우엔 딱히 어떤 종류의 병원을 갈지 알 수 없기에 일단 제일 큰 병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머리의 문제이니 내과는 아닌 것 같고 정형외과는 더욱 더 아닌 듯 하고, 그렇다고 안과나 비뇨기과를 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그냥 이것 저것 진료를 다 한다는 병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둘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어찌할 줄을 몰라 서성대고 있자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그럼 여기에 진찰 받으실 분 성함하고 전화번호 그리고 주민등록번호 적어주세요."

 

한 눈에 보기에도 사람 좋게 생긴 간호사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작은 종이가 있었고 방금 말한 것처럼 이름, 전화번호, 주민번호, 주소를 적는 란이 있었다. 순간 희연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드러났다. 희연의 입장에서 보면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큰 시험에 들고 만 것이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현수와 당장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연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현수를 바라보는 희연의 표정엔 도대체 이런 정보를 적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병원에 가자고 했냐는 원망이 섞여 있었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현수의 눈빛은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몰랐다는 발뺌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게.. "

 

희연이 망설이면서 말을 꺼내려고 했다.

 

"무슨 문제 있으세요?"

 

", 그게 이것을 꼭 적어야 하나요?"

 

". 그래야 의료보험 처리가 되거든요."

 

"그럼 의료보험처리가 안 해도 되면 이것 안 적어도 되나요?"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험이 없으세요?"

 

"그게 아니라.."

 

", 오늘 검진 받을 분이 이 여자분인데, 지금 기억을 잃어서 그것에 대해서 검사를 받으러 온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 본인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검사만 받으면 안될까요?"

 

".."

 

간호사는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을 했다.

 

"그럼 잠시만요. 원장님에게 물어보고 올게요."

 

간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보험이 안되면 돈이 많이 나오는 것 아니에요?"

 

희연이 괜히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아마도 그렇겠죠."

 

"저 돈 없는데요."

 

"알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저 때문에 돈이 많이 들게 되잖아요.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쩔 수 없죠. 그리고 기억을 되찾으면 갚아요."

 

", 그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병원비에 돈 다 쓰고 나면 밥 사먹을 돈이 없는 것은 아니겠죠?"

 

현수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채 빤히 희연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본인도 뭔가 찔리는지 또 다시 배시시 웃었다상황이 상환인데도 참 잘 웃는 여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자신의 죽은 동생 민서도 그랬었다하지만 둘이 닮은 점은 그거 하나뿐이다. 민서는 저렇게 옷을 엉망으로 입지도 않고, 저렇게 먹을 것을 밝히지도 않았다. 민서는 훨씬 얼굴도 몸매도 예뻤다.

 

"그럼 일단 같이 오신 남자분 명의로 검사 받으실래요? 원장님이 사정을 듣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네요."

 

원래 다른 사람 명의로 검사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시골 병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인간적이 면이 남아서 그런지 원장이 뜻밖에 그런 제안을 해왔다.

 

"그래도 될까요?

 

", 다른 사람 주민번호 외워서 오는 분들도 있는데요 뭘."

 

아직도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싶었다. 아무튼 병원의 제안은 뜻밖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그럼 남자분 이름, 주민번호, 연락처를 적어 주세요."

 

현수는 갑자기 식은 땀이 났다. 외웠던 오연수의 주민등록번호가 기억나질 않았다. 현수가 주민번호 적는 부분에서 망설이고 있자 간호사는 뭔가 의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현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현수는 나머지 정보를 먼저 적었다. 그리고 노력해서 생각해보니 적어도 앞자리 6자리는 떠올랐다. 다행히 생년월일이라서 기억이 난 것이다.

 

", 제가 암기력이 약해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못 외워요."

 

현수는 자신이 듣기에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대면서 주섬주섬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백사장이 보내 온 문자를 확인한 후 나머지 7자리 숫자를 마저 적은 후 종이를 간호사에게 건넸다.

 

"오연수씨? 36살이시죠?"

 

", 맞습니다."

 

"저기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현수와 희연은 뒤로 물러나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들 이외에 몇 명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들 TV나 자신의 폰을 바라 보느라 그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갖질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오연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났다. 그러자 희연이 벌떡 일어났다.

 

"갔다 올게요."

 

희연은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현수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근처에 있는 잡지 하나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최신 의료기술 동향이란 이름을 가진 잡지였는데 읽다가 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쓰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뇌 속에 있는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을 가진 회사에 대한 소개로써 이미 어느 정도 많은 진전을 이뤘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 기술이 제대로 인정이 되면 나중에 지문이나 DNA 판독처럼 용의자의 기억을 읽어서 법정에서 범인 여부를 가리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기사에 뒷 부분엔 실제로 회사에서 일하는 기술 담당자 인터뷰가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자신들의 기술은 기존에 시도되던 방식인 외부에서 뇌파를 탐지해서 디지털 이미지화 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라고 했다외부 탐지 대신 사람의 뇌 속에 있는 뉴런과 뉴런 사이에 존재하는 시냅스에 직접 특수 목적으로 개발된 칩을 삽입해서 뇌 속에 오가는 화학적 신호와 전기적 신호를 얻어내어 해석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 삽입되는 칩은 자신들이 특수하게 개발한 바이오칩으로 인체 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칩을 삽입해도 인체에 전혀 무해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자사의 기술로 응용 가능한 분야를 꼽을 때 범죄자의 기억을 추출해내어서 범인 여부를 판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분야는 따로 있다고 했다예를 들어서 말을 못하는 사람의 경우 생각을 읽어서 음성으로 변환시켜 줄 수 있고, 요즘 거의 유일한 입력장치인 키보드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생각을 음성화 시킬 수 있듯이 생각으로 타이핑도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컴퓨터 키보드나 혹은 스마프폰과 같은 장치에 표시되는 불편한 작은 입력 장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듯 보였다기술 담당자는 자신들의 회사는 정보의 역방향, 그러니까 기억을 읽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원하는 정보를 뇌 속에 저장시킬 수 있는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추가로 설명했다. 현수는 그 내용을 읽고는 그렇게 되면 미래의 애들은 학교 다닐 때 힘들게 영어 단어 암기 따위를 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정말로 개발되어 나오면 대박을 칠 듯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시대가 열리면 지난 번 현수가 돈을 받고 했던 가짜 자수 같은 것은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거짓말로 자수를 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기술이 적용되면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뇌에 칩만 삽입하면 금세 들통이 날 것이다그러니 이 기술은 정말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기술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이용되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거짓말을 하기 힘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마 이 세상은 멸망할지도 모른다. 원래 인간의 세상은 진실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의 힘을 믿지만 그 힘  자체가 거짓의 지대한 역할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잡지 하나를 꼼꼼히 다 읽고 났는데도 희연은 나오질 않았다. 시간은 벌써 5시 반이 넘어 있었고 현수의 마음은 조금씩 조급해졌다. 희연에게 일어난 일이 별 문제 아니었으면 했다. 잠깐 단기적으로 기억을 잃는 상태였으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일까? 현수는 두 번째 잡지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최신 의료 도구를 소개하는 잡지였다. 로봇 수술, 최신 의료 보조기, 손끝만 대도 수 많은 건강 문제를 파악해주는 장치들과 소프트웨어가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로봇 수술 전문가를 취재한 기사도 있었다. 그 의사는 국민의 좀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위해서 로봇 수술 역시도 빨리 의료보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왔어요."

 

그 후로부터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희연이 나타났다.

 

"뭐라고 해요?"

 

", 이런 저런 검사 많이 했는데, 딱히 문제는 없데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엔 어떤 큰 심리적 충격으로 인해서 스스로 기억 자체를 막는 경우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정신과를 한번 찾아보라고 했어요."

 

"정신과요?"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의사가 추천했으니 못들은 척 할 수는 없었다.

 

",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CT MRI 검사 결과에서 뇌에 작은 종양 같은 것이 발견되었대요. 크기는 5mm 정도인데, 형태가 비선형은 아니라서 암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모르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전문가에게 정밀 검진을 받아 보래요. 혹시라도 지금 나타나고 있는 증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암은 아니고 당장 뭔가 해야 할 것은 아니란 뜻이죠?"

 

"대충 그런 말 같았어요. 의사도 그리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거든요."

 

"그럼 일단 나가요. 그리고 정신과는 내일 가죠.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현수는 카드를 꺼내서 결제를 했다. 진료는 의료보험이 되었지만 CT는 보험처리가 되었지만 MRI 검사는 보험처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총 검진비가 70만원에 달했다. 생각보다 큰 비용이 나오자 희연은 현수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의사가 시킨대로 한 것인데. 그리고 의사도 어련히 필요하니 했을 것이다. 현수는 가능하면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돈과 백사장에 받은 돈을 합치면 지불해야 할 1억을 빼고 나서도 1억 정도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돈은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곧 죽을 사람에게는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죽기 전까지만 쓸 돈이 남아 있으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병원비가 그리 아깝지만은 않았다. 단지 희연이 병원을 나서면서 한 말로 인해서 어처구니가 없어졌을 뿐이다.

 

"저녁 먹을 시간이네요. 우리 뭐 안 먹어요?"

 

현수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희연이 검사를 받느라고 힘들어서 지금 너무 배가 고프다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우겼기에 둘은 결국 근처 콩나물국밥집으로 들어갔다. 현수는 늦은 점심을 먹은 것이 여전히 남아서 반쯤 먹고 말았지만 희연은 한 그릇 뚝딱 다 비우고 나왔다. 참 식성이 좋은 여자였다.

 

"오늘은 일단 여기 근처에서 자고, 내일 오전에 병원에 갔다가 결과 보고서 이후 서로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죠."

 

현수는 계획을 세울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일단 내일까지 일정을 정리했다. 그나저나 희연의 존재가 참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기억을 되찾으면 서로 헤어지면 끝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냥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자신이 되살아나는 순간의 최초 목격자이기에 더욱 더 그냥 헤어질 수는 없었다. 밥값 들어가는 것만 빼면 그리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녀가 기억을 찾지 못하는 한 계속 같이 다녀야 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그냥 쉬기로 했다.

 

둘은 근처 모텔에 들어갔다. 아직은 이른 시간에 젊은 남녀가 와서 방을 두 개를 따로 잡으니 일하고 있는 분이 다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열쇠 두 개를 건넸다. 3층의 302호와 303호였다. 둘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둘은 거의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다. 현수는 현수대로 앞으로 일정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고 희연은 희연대로 자신의 기억이 쉽게 되살아나지 못할까 봐 걱정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럼 쉬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9시에 모텔 입구에서 봐요."

 

문 앞에서 둘은 짧게 인사를 하고는 각자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잘 잤어요?"

 

현수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희연은 머리를 감고 바로 나온 듯 아직 머리가 젖은 채 밖으로 나왔다.

 

"잘 잤어요."

 

"그럼 저쪽에 정신과 전문 상담 병원이 있으니까 그쪽으로 가봐요."

 

시골이라서 그런지 정신과 상담 병원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검색을 해보니 하나가 나왔다. 현수는 희연과 택시를 타고 그쪽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병원에 들어서자 어제 병원과 비슷한 쪽지가 보였다. 현수는 잠시 그 종이를 바라보다가 일단 현수의 새로운 신분으로 적었다. 그리고 나서 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간호사는 그 말을 듣더니 잠시 생각하고 나서 원장 허락도 받지 않고는 그냥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제출한 이름이 연수라서 원장님도 여자라고 착각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그제서야 생각해보니 백사장이 현수의 새 이름을 오연수라는 여자 느낌이 나는 것으로 바꾼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이 되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입으로는 오연수를 부르면서 얼굴은 희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희연이 들어간 후 현수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 병원은 어제와 달리 자신들 이외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시간도 이르고 원래 정신과는 좀 그런 것 같았다. 현수는 또 다시 어제처럼 잡지를 하나 골랐다. 그리고 그냥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 프로이트 심리학의 재발견이란 제목이 보였다. 대학교에 다닐 때 교양수업에서 들어봤던 프로이트였다. 그 강의에서 들었지만 유일하게 기억나는 단어는 오직 항문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반가웠다. 현수는 잠시 동안 그 기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현아, 이분이 오연수씨 보호자신가?"

 

현수는 갑자리 들려운 굵직한 남자의 음성으로 인해서 프로이트의 항문기로부터 현실로 돌아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의사인 듯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간호사에게 자신이 보호자인지를 묻고 있었다.

 

", 같이 오신 분이에요."

 

"두 분 무슨 관계인가요?"

 

의사는 현수를 보면서 물었다. 그리고 의사의 그런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현수는 몹시 당황했다그리고 자신과 희연이 무슨 관계인지 생각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게.. 사귀는 관계는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모르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의 횡설수설하는 대답에 질문을 했던 의사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 두 분이 가족은 아니란 뜻이죠?"

 

", 당연히 아니죠."

 

"그럼 곤란한데. 아무래도 이 환자는 최면 요법을 해봐야겠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말을 듣고서야 현수는 의사가 왜 관계를 물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냥 제가 하면 안되나요?"

 

"원칙적으로 가족만이 가능해요."

 

"그럼 어떻게 하죠?"

 

".. 일단은 그냥 진행할게요. 뭐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니까요. 주현아 이분에게 최면치료 동의서 받아라."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뒤돌아서 상담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현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새삼 자신과 희연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관계라고 해야 사람들이 쉽게 고개를 끄덕여줄까?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동의서를 들고 와서 서명을 해달라는 간호사의 요청으로 인해서 금세 흩어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넘게 시간이 흐른 후 닫혔던 상담실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보호자 분도 들어오라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상담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엔 희연이 뚱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최면 요법까지 시도해봤는데 뭔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 판단에 이 환자분의 경우엔 어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서 아주 강하게 기억이 억제되어 있는 상태인 듯 보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죠?"

 

", 원인은 다양합니다만, 가장 일반적인 경우를 보면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에 노출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내면에서 본인이 견디기 힘든 극심한 두려운 상황에 놓이면 기억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폐쇄 시켜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한 경우엔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지는 경우까지 생겨서 결국 다중자아를 갖는 정신병으로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꽤나 심각하네요."

 

"그래서 조금 무리해서 최면 요법까지 시도했는데 실패했네요하지만 끝은 아닙니다제가 최면 치료는 하긴 해도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서 좀 더 잘하는 최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을 수 있다면 해결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솔직히 말씀 드려서 꽤나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제가 아는 최면 전문가가 한 분 계시니 소개해드리겠습니다최면 치료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최고 권위자입니다."

 

듣고 보니 의사의 이야기는 별 것이 없었다. 둘은 일단 의사로부터 전문가가 있다는 서울에 있는 병원 이름과 담당 의사 그리고 연락처를 받아서 나왔다. 다행히 치료비가 어제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서울로 가봐야 하나요?"

 

이틀 연속 아무런 성과가 없자 희연이 조금 실망한 듯 물었다.

 

", 그래 봐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제가 아까 기다리는 동안 조금 다른 방법이 생각해냈어요."

 

"뭔데요?"

 

"아예 해결 방법을 좀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죠. 희연씨가 기억을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희연씨를 아는 사람들을 찾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 아니겠어요?"

 

"어떻게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저를 아는 사람을 어떻게 찾아요?"

 

"그거야 사람 찾은 일의 전문가한테 부탁하면 되죠."

 

현수는 그 말을 하면서 백사장을 떠올렸다. 사실 그 분야가 백사장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다. 물론 사진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에 특화되어 있긴 하겠지만, 그 사진을 보고 그 사람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연이 고아가 아니라면 분명히 가족이 찾고 있을 테니 경찰이든 어디든 연락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지금 경찰서에 가는 것 조차 조심스러우니 백사장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 해줄 것 같았다.

 

", 그런 방법이 있군요."

 

"일단 연락을 해볼게요."

 

현수는 당장 백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참 신호가 가고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결국 음성 사서함을 이용할 것인지를 묻는 안내 문구가 나왔다. 현수는 두 번 연속 전화를 걸어 본 후 일단 연락을 포기하고는 먼저 공주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전화야 하루 종일 걸다 보면 한번은 받을 것이니까.

 

"터미널로 가요. 공주에 가야 하니까요."

 

희연은 어차피 붙은 혹이었다. 백사장에게 일을 맡기기로 하면서 가족을 찾을 때까지는 희연을 같이 데리고 다니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마음이 굳어지자 결정하기가 편해졌다. 이제부터는 백사장에게 희연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연락이 올 때까지는 같이 지내면 된다.

 

"공주요?"

 

", 제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좀 있어요."

 

곧 둘은 택시를 타고 서산 터미널로 향했다.

 

"참 규모가 작네요."

 

희연은 많은 버스가 오가는 터미널치고는 작은 서산터미널을 보면서 신기해 했다. 사실 현수도 그랬다. 터미널 하면 늘 커다랗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광경만 떠올랐는데 이 작은 시골 터미널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공주 직행으로 가는 버스가 있으려나.."

 

현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위쪽에 크게 붙여진 버스 노선표를 살폈다.

 

"저기 공주 행 있네요."

 

희연의 손끝을 따라가보니 정말로 공주 행 버스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직행이었다.

 

"요금은 6 5백원, 두 시간 정도 걸리네요."

 

두 시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뭐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현수는 일단 마음이 놓였다. 일단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11 30분이었다. 그럼 12시에 떠나는 버스를 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 점심 안 먹어요? 아침도 안 먹었잖아요."

 

희연이 갑자기 물었다. 현수는 아 그렇구나, 밥을 먹어야, 아니 희연에게 밥을 줘야 하는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밥 먹고 오후 한시 차 타고 떠나요."

 

그때 떠나면 아마도 공주에 3시쯤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신분증과 통장을 찾고는 시간이 되면 오늘 바로 목적지로 향하고 너무 늦었다 싶으면 내일 아침에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예전만큼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닭갈비 집 봐뒀는데.. 혹시 닭갈비 싫어해요?"

 

희연은 좋아하냐고 묻지 않고 싫어하냐고 물었다. 일단 싫어하지만 않으면 먹겠다는 의지였다. 다행히 현수도 닭갈비를 좋아했다단지 숯불은 싫었고 철판이 좋았다.

 

"숯불이면 싫고요, 철판이면 먹을게요."

 

가게를 가보디 둘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은 들어가서 닭갈비 2인분에 모둠사리 추가 그리고 볶음밥 2인분까지 시켜서 바닥까지 박박 긇어 먹었다. 물론 그 역할은 희연이 담당했다. 둘은 트림을 꺽꺽 거리면서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다.

 

“공주 행 한 시, 어른 두 명이요.


현수는 반원 형태로 뚫리고 한 눈에 보이게도 작고 낡은 구멍 안으로 현금 이 만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파란색 티켓 위로 천 원짜리와 백 원짜리 몇 개가 얹혀져 되돌아 나왔다. 그리고 그 끝엔 그것들을 밀고 있는 사람의 손이 있었다. 한눈에 보이게도 여자의 손이었다. 그리고 새빨간 매니큐어가 정성스럽게 칠해진 손톱을 가진 손이었다.


순간 현수는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묘한 감정도 상기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백사장을 만나러 그의 사무실에 갔을 때 봤던 세연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의 손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녀 역시도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여인의 손처럼 화려한 네일 아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현수는 뜬금없이 성적 욕망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와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왜 이럴까 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현수가 가진 기억으로 자신은 여자의 손톱에 대해서 이상한 패티시 같은 것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천박한 느낌도 받기도 하는, 그냥 그런 손톱일 뿐이었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잔돈과 표를 받지 않고 있자 빨간 손톱의 주인공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빨리 그것들을 받아가라는 신호였다. 그제서야 현수는 정신이 되돌아 오면서 서둘러서 받았다. 그러자 빨간 손톱을 가진 손은 금세 작은 구멍 안으로 사라져서는 거기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현수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자 희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요."

 

현수는 대충 둘러대고 넘겼다. 둘은 좁은 대합실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자 버스에 탔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버스 안의 손님은 그들 말고는 둘 밖에 더 없었다. 한 명은 아주머니였고 다른 한 명은 할아버지였다. 그렇게 운전 하는 분까지 총 다섯 명이 탄 버스는 공주를 향해 출발했다. 둘은 식곤증인지 아무튼 출발한지 20분도 채 안돼서 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공주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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