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죽음 경험자 - 1

아이루다 2019. 6. 3. 10:10

 

1. 특이한 의뢰

 

시선을 들자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강한 빛이 그의 망막을 괴롭혔다. 이미 오후 5시 반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의 태양은 여전히 세상의 밝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현수가 앉아 있는 의자의 방향이 서쪽이어서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앞을 보려면 해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평소엔 덥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촉각적으로만 감각했던 햇살이 그렇게 대놓고 시각적으로 다가오자 꽤나 성가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곧 서쪽 하늘로 사라질 녀석의 마지막 발악인가 싶기도 했다.

 

몇 번 시도 끝에 앞을 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현수는 오른쪽 위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요즘 서울 시내에 많이 설치된 최첨단 장치인,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작은 전광판이 있었다. 심지어 가로를 열고 '여유' 라고까지 표시되어 있는, 그야말로 정보화 시대의 놀라운 단면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지금을 기준으로 그가 기다리고 있는 2134번 버스가 도착하려면 앞으로 7분이 남아 있었다. 방금 전 확인했을 때 11분이 남아 있었으니 그 사이 4분이나 지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4 59초인지 4 1초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니 냉정히 말해서 대단한 장치이긴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현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 좀처럼 소리를 내고 있는 주체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현수는 대충 그 소리가 단순한 앰뷸런스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적어도 여러 소리가 겹쳐서 나는 꼴이 소방차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소방차 무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느끼면서 작은 만족감을 느꼈다저 정도 규모의 출동이라면 어딘가 큰 불이 난 것이 분명했다

 

"어디 불났수?"

 

현수는 멍하게 소방차가 지나가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옆에서 들어온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허리가 거의 90도로 굽은 할머니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관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에도 불이 난 것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불구경이란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는 옛날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답을 해주고 싶어도 소방차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현수 자신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비록 같은 서울에 있다고 해도 오늘 처음 온 초짜나 다름없는 처지인데다가 어딘가 멀리서 연기가 나고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역시 불구경을 하고 싶긴 했지만 어디에서 불이 난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곳이 초행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현수는 별로 그럴 마음도 없었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대답을 했다사실 불이 난 장소에 별로 관심도 없고 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묻는지 귀찮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정작 노인은 그의 예의 바른 태도에 전혀 감동을 받지 못하는 듯 그저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있는 두 눈을 꾸뻑거리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곧 몸을 돌려서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수는 그런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생각난 듯 버스 전광판을 확인했다. 이제는 그가 기다리던 버스가 3분 남아 있다고 표시되고 있었다. 이제 3분만 지나면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을 괴롭히던 눈 따가운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마음 속 조급함이 사라지거나 마음이 편해지거나 하는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 순간에도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은 그의 두 눈을 괴롭히고 있는 태양의 존재처럼 여전히 건재했기에 그랬다.

 

상황에 따라서 3분이란 시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배가 심하게 아파 화장실을 찾을 때 3분은 상상하기 힘들만큼 긴 시간이 된다. 하지만 3년간 짝사랑하던 사람과의 첫 데이트 중에 경험하는 3분은 정말로 눈 한번 깜빡할 동안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현수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3분이 화장실을 찾는 3분일지 아니면 데이트를 하는 중의 3분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간은 분명 빠르게 흐르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세상의 모습은 마치 잔뜩 느려진 슬로우 비디오처럼 한 없이 늘어지고 있었다.

 

그는 남은 3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가야 하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가고 싶지 않는 곳을 가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현수가 그곳에 가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그러니 당연하게도 그가 그곳에 갈지 말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는 지금 어느 도심 속 공원에서 분명히 존재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물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개미와 같은 존재였다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이 왜 불이 났는지를 물어 본 할머니에게 그토록 예의 바르게 대답을 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밥을 먹기 위해 들어간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 이외에 그 할머니만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 준 유일한 존재였다. 오직 할머니만이 그를 개미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할머니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말이다.

 

결국 영겁의 세월이든 찰나의 시간이든 간에 결국 버스는 도착했다. 그러자 현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세웠다. 그래도 꽤나 앉아 있었던 듯 다리가 약간 저려왔다. 하지만 가볍게 그 느낌을 무시한 후 몸을 돌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버스는 문을 닫고는 출발을 했다. 현수는 자신이 걸어가는 방향과 같은 쪽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버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왜 자신이 버스를 탈 것도 아니면서 저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자신이 출발할 시간으로 정했는지 떠올렸다. 처음 전광판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늦게 도착할 버스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늦게 출발할 수 있는 버스였던 것이다.

 

현수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200M쯤 걸으면 나올 5층짜리 건물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갈 건물은 서울 시내 다른 장소에서 자주 보는 같은 높이의 건물들과는 구조가 전혀 달랐다. 일단 높이는 같아도 넓이가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꽤나 오래 전 상가 건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전자 제품, 특히 컴퓨터를 판매하는 것으로 과거에 한 때 엄청난 호황기를 누렸던 장소였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다. 한참 잘나가던 시절 바가지, 막말, 덤탱이, 불친절 등으로 악명을 떨친 그곳은 인터넷 쇼핑이 자리를 잡으면서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다그 후로 10년이 이상 지난 지금 그곳은 내장이 파헤쳐진 채 죽은 동물의 사체처럼 을씨년스럽게 낡은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6시가 다 되어가는 이 시간엔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조차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그래도 현수는 그런 건물의 상태가 그리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자신이 방문해야 할 곳이 이 낡은 건물 안에 있으며, 적어도 7시까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며칠 전 직접 사장과 통화를 한 내용이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건물 앞에 서자 괜한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문을 닫았다면 그냥 돌아가면 되니까 말이다. 적어도 자신은 최선은 다한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머리 속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생각들에 사로잡힌 채 걷다 보니 금새 건물 앞에 섰다. 현수는 낡고 녹슨 기색이 역력한 손잡이 앞에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손잡이를 쥐고는 힘껏 밀자 거기에 연결된 유리문이 신경을 긁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과 반대편 고정된 문 사이로 사람이 지날 만큼 간격이 벌어지자 그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건물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하지만 반쯤 들어가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저절로 멈췄다. 그 순간엔 그 이유를 현수 그 자신도 몰랐지만,  그는 왜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건물 내부에 갇혀 있던 공기 때문이었다. 유리 문 안쪽의 공기는 방금 전 자신이 통과해 온 밖의 신선한 공기와는 달리 눅눅하고 더러운 무엇인가가 잔뜩 뒤섞여 있는, 마치 그것을 호흡하면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공기였다순간 현수는 몸을 돌려 되돌아 나가지도, 그렇다고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서지도 못한 상태로 잠시 서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몇 번 호흡에도 불구하고 몸에 별 다른 이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천천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쪽으로 들어선 그는 천천히 한걸음씩 복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장에 켜져 있는 형광등은 반쯤은 나가고 몇 개는 전멸을 반복하고 있는 탓에 왠지 공포스러운 분위기까지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동하는 동안 실내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하기야 이런 상황엔 오히려 사람이 나타나면 깜짝 놀랄 분위기였다. 그래서 건물 안에 머문 오래된 침묵이 안도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가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새삼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현수는 여전히 두려움이 두려웠다.

 

복도를 따라 쭉 배치되어 있는 작은 간판들이 내걸린 가게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형태로 문이 닫혀있었는데, 따로 쉰다는 손으로 쓴 안내장조차 없는 것을 보니 불경기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아예 장사를 접은 모양이었다현수는 건물 안쪽에 들어서고부터 갑자기 생겨난 불안감을 외면하기 위해서 볼 필요도 없는 간판과 오래되고 낡은 종이조각에 적혀 있는 글자들을 무의식적으로 훑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1층 통로 중간쯤에 위치한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설 수 있었다.

 

그가 가야 할 장소는 1층이 아니라 이 건물의 3층의 구석에 있는 한 사무실이었다. 그래서 현수는 낡고 더러운 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현수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왜 이런 건물에 입주해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명 백사장이라고 불리는, 전자제품을 파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사람은 왜 이런 음침하고 퇴락한 건물에서 자리를 잡았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가 하는 일과 이 건물의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현실이었다. 그래서 이 건물을 선택한 것일까? 만나면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3층에 도착했다.

 

사무실 문에는 24호 세진 용역이라는, 심하게 색이 바랜 글자가 새겨진 낡은 문패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음식배달 전단지들이 너저분하게 붙어 있었는데, 그 역시도 낡아서 색조차 바랜 탓에 무슨 메뉴들이 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현수는 손을 대기도 더러운 느낌이 나는 문 앞에 서서 문을 발로 찰까 고민하다가 그냥 손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깨끗한 부분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잠시 후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현수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한번 꿀떡 삼킨 후 한여름에 음식 쓰레기통 손잡이를 잡듯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천천히 돌려서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군요."

 

사람이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상대에 대한 정보는 수 많은 통로를 통해서 전달이 된다. 외모, 복장, 말투, 어휘, 목소리 톤, 태도, 표정, 제스처까지, 모두 누군가를 분류해서 판단하는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에 대한 첫 이미지가 한 단어로 압축되는 경향이 있다. 호감이다, 착하다, 순하다, 못돼 보인다, 신경질적이다, 진지하다, 장난스럽다, 좀 이상하다, 독특하다, 비열하다 등등이 그런 표현을 위한 대표적 단어들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수가 느낀 백사장에 걸맞은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바로 '장사꾼' 이었다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스스로 설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말이다.

 

5월 말임에도 이미 더위가 찾아왔기에 반팔을 입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백사장은 하얀색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누구에게 갖출 예의인지 모르지만 붉은색과 검은 색이 교차되어 있는 넥타이까지도 메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50대 초반쯤 보이는 얼굴이었고 앞머리가 반쯤 벗겨졌지만 남은 머리는 포마드 같은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단정하게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리고 왼손에는 커다란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남자가 그렇게 큰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이 낯설다는 느낌까지도 들었다. 그는 방금 문을 열고 들어 온 현수를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덥죠? 냉커피 한잔 드릴까요?"

 

현수는 순간 머리 속에서 백사장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을 중단했다. 사실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중요할 것은 없었다. 그가 이미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적어도 사기꾼은 아니며 꽤나 이 바닥에서 실력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현수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사건들도 거절하지 않고 맡아 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이미 그와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첫 번째 의뢰를 할 때 얼굴은 못 본 채 전화상으로만 얘기했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시간도 늦었기도 하니 빨리 끝내도록 하죠."

 

처음부터 커피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도 않았는지 백사장은 두 번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현수에게 앞쪽에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소파에 앉을 것을 손짓했다. 그리고 현수는 그 지시대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보내주신 조사 결과는 잘 받았습니다."

 

", 그리 만족스럽지는 못하시겠지만, 솔직히 말씀 드려서 그 정도 비용으로는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한 결과입니다."

 

백사장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강조했다일단 방어를 하는 것이었다.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으니 당연히 그는 지금 현수가 오늘 따지러 온 것이라고 믿는 듯 했다. 사실 현수가 결과물을 받아 들고는 많이 실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워낙 특이한 의뢰였으니까 말이다그러니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백사장이 저리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현수가 오늘 사무실까지 직접 방문한 이유는 그것에 대해서 따지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2차 조사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1차 조사 때 제가 전달해드리지 못한 참고할만한 정보들도 있고 해서 이렇게 직접 왔습니다."

 

", 그러시구나. 그런데.."

 

백사장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 네 알고 있습니다. 비용 문제.."

 

"그렇죠. 사실 첫 의뢰 때 지불하신 비용도 저희 쪽에서 최소한으로 받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추가적인 조사에 들어가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객님이 의뢰한 건이 저희 입장에서도 워낙 특이해서 조사 범위가 아주 넓어 질 수 있으니까요."

 

당연히 돈이 문제였다. 그리고 현수는 지금 그 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 오늘 마음 속의 부담감과 두려움을 감당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오늘 의뢰를 성사시킬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속에서 자꾸 생겨나고 있는 질문, 그러니까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에 대한 답을 내고 싶어서 온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곳에 온 것 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의뢰가 성사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는 자책감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형식과 절차가 중요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가장 최상위급 조사 의뢰는 얼마 정도 필요한가요?"

 

"저희가 첫 의뢰는 기본인 2천을 받고 했지만 이게 더 깊이 들어가려면 경찰 내부 정보와도 연결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건비가 많이 드는 특별한 분들에게 조사 의뢰도 해야죠. 그러니까 경찰들 뇌물도 좀 먹어야 하고, 고급 인력으로 투입을 해야 하니, 그러다 보면 돈이 제법 듭니다.”


백사장은 자신의 양 손을 가볍게 맞잡으면서 정말로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얼마 정도면 되는 것인가요?"

 

"최소 1억 입니다."

 

백사장은 자신이 충분히 설명을 했다고 느낀 듯 짧고 간결하게 답했다.

 

현수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막상 1억이란 돈이 답으로 나오자 답답해졌다. 가지고 있던 돈에 그가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까지 다 빼서 나왔지만 지금 현재 그가 가진 돈은 오천밖에 되질 않았다. 사실 이 오천으로 의뢰를 하고 나도 잠을 잘 곳이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으로는 시작조차 할 수조차 없는 상태이다.

 

"뻔한 처지이니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전 재산을 다 끌어 모은 돈이 오천입니다. 이 돈으로는 어떻게 안될까요?"

 

", 오천이면 시도는 해볼 수 있겠죠. 하지만 지난번 의뢰 후 받은 결과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란 확신은 드릴 수 없겠네요."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거절하는 것도 현수의 처지를 생각해줘서 수락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고 싶으면 해봐라, 하지만 책임은 질 수 없다, 단순한 장사꾼의 그것이었다.

 

"제가 나중에라도 나머지 오천을 마련해 드릴 테니 어떻게 할 수 없습니까?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현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이 시도마저 거절되면 이제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고객님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요. 그런데 이미 저에게 설명을 했다시피 이미 다섯 번이나 자살을 하셨다면서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고객님과 미래를 두고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객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믿는 저의 입장이 되어 보신다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백사장의 표정은 제법 진지해졌다. 하지만 현수는 그 진지함 뒤에 오히려 자신을 향한 감춰진 진한 의구심을 온 몸으로 느껴졌다.

 

"하긴 그렇네요. 저 처지에 미래를 두고 약속을 하는 것도 참 웃기는 일이네요."

 

"이해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현수는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주섬주섬 주변을 챙겼다. 딱히 놓고 갈만한 귀중한 소지품도 없는데 버릇처럼 그랬다.

 

"그런데.."

 

백사장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현수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잠시 동작을 멈칫하고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저도 이런 일로 밥 벌어 먹고 살고 있긴 하지만, 이번 의뢰가 저희들 입장에서도 하도 특이한 탓에 개인적으로 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뭐요? 제가 죽어도 죽지 못한다는 것 말인가요?"

 

현수는 아까부터 명백하게 전달되어온 백사장의 의구심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하기야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궁금증이 안 생기면 이상할 일이기도 했다.

 

".. . 그 말. 사실 조사 결과를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 조사팀이 고객님이 주장하신 사건들에 대해서 관련된 증거를 단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죠. 아주 철저하게 은폐가 되었거나 혹은 고객님이 거짓.. 아니 착각을 했다는 말이 됩니다."

 

"세 번째로 팀이 무능한 것일 수도 있죠. 아무튼 그런데 사장님은 후자라고 믿는 것이죠?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이에요."

 

"솔직히 말씀 드려서 어쩔 수 없지요저뿐만이 아니라 누가 그런 말을 쉽게 믿겠습니까? 우리야 돈을 주니까 일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객님이 하는 주장이 다 옳을 수는 없지요. 옳고 그름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좀 궁금해서 말입니다."

 

백사장은 현수의 소극적인 불만 제기를 가볍게 씹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 제가 지금 또 다시 제가 죽었던 사건들을 다시 설명한다고 해서 딱히 믿을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서 좀 더 깊이 조사를 해보고 싶은데 돈이 부족하고요. 어쩌겠습니까? 그냥 이대로 묻고 말아야죠."


현수는 맡아 줄 것도 아니면서 호기심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나서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순간 백사장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현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

 

"뭔가 서로에게 정말로 좋을 수 있는 제안을 하나 할 것이 있는데 어떠신지.."

 

백사장은 노련한 낚시꾼처럼 현수 눈앞에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달린 바늘을 디밀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일단 물고 볼 일이었다.

 

"설명해보세요."

 

"이번에 저희 쪽에 들어온 의뢰가 하나 있습니다. , 먼저 시원한 커피 한 잔 하면서 대화를 나누시죠. 세연아 여기 시원한 얼음 커피 한잔 가지고 온나."

 

백사장은 갑자기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도대체 사무실에 그 외에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누구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현수의 머리 속에서 생겨난 궁금증이 인식도 되기 전에 놀랍게도 벽으로 보였던 한쪽 면에 작은 틈이 생긴 후 점점 커지면서 문 모양의 직사각형 통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통로를 통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니 여자가 튀어나온 벽면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뒤쪽으로 은밀하게 숨겨진 다른 사무실 공간을 숨기는 용도인 듯 했다통로를 통해서 나타난 여자는 빨간 색 반팔 스웨터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밑으로 뻗은 다리엔 커다란 별 모양의 패턴을 가진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대충 보기에 20대 중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현수가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녀는 양손으로 냉커피가 올려진 쟁반을 든 채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에 있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수의 남자 본능은 착실히 동작하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훑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생기거나 밉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키도 작은 편이었지만, 나름 귀염성 있게 생긴 얼굴에 볼륨감이 좋은 몸매와 옷차림으로 인해서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디에선가 들었던 말처럼 여자는 키보다는 오히려 비율이란 말이 딱 어울릴법한 여자였다.

 

하지만 현수는 세연이라고 불린 여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에게서 퍼져 나오는 것이 분명한, 진한 향수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아마도 찌든 담배 냄새인 듯싶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공복에 그런 냄새까지 더해지니 속은 더욱 더 메슥거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몸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얼굴 전체에서 오직 입술만 웃고 있는 자본주의적 웃음만 짓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여기요."

 

그녀는 화려하게 장식된 네일아트가 되어 있는 손톱으로 음료수 잔을 감은 채 현수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그는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손톱을 보는 순간 아주 뜬금없는 성적 충동이 일어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런 낡고 너저분한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 여성에 대한 퇴폐적 성적 욕망 같기도 했고, 어쩌면 이미 한참 오래 전에 헤어져서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한 여자에 대한 기억 같기도 했다.

 

"받으세요."

 

여자는 현수가 자신이 건넨 음료수를 반쯤 받은 상태에서 멈춰있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채근했다. 월급을 받기에 짓는 미소는 딱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 했다. 현수는 그녀의 재촉에 당황한 채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서둘러 컵을 받아 들었다. 어두운 실내로 인해서 그의 얼굴색 변화까지는 들키지 않는 것이 그 와중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전혀 맛있게 먹길 바라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여자는 마지막까지 인사성 밝게 말을 하고는 현수가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냉큼 몸을 돌려서는 자신이 빠져 나온 문을 통해 들어가고는 바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그곳은 다시 처음처럼 온전히 벽이 되었다현수는 잠시 그녀가 뻐꾸기 시계 속에 살고 있는 인형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한잔 쭉 드세요. 얘기가 좀 깁니다."

 

백사장은 현수가 냉커피를 한 모금 목으로 넘기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다른 고객에게 맡은 다른 의뢰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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