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20

아이루다 2019. 5. 21. 08:27

 

"요즘 일거리는 좀 들어오시나요?"

 

주상훈은 방금 주문한 아이스커피 두 잔을 두 손에 들고 와서 서민국의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럭저럭 이요. 앞으로 먹고 사는 일은 큰 걱정은 없겠네요."

 

서민국은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달 전쯤 조세나 사건이 마무리 되고 난 후 사건 의뢰는 제법 되는 편이었다그래서 나름 바빴고 결국 서민국은 오늘에야 겨우 그 동안 한번 봐야지 해왔던 주상훈을 만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산에 있는 주상훈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사무실 에어컨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서민국을 근처 커피 가게로 데려갔다. 더운 오후라서 그런지 남자 둘이 커피 가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으신 모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세나씨 덕분이지요."

 

서민국의 뼈가 있는 말에 주상훈은 씩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세나씨한테 앙금 같은 것이 남아 있나 봐요?"

 

"결국 어떤 의도이건 간에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논 셈이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성과를 내고는 있잖아요."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말 나온 김에 하나 물어 볼게요. 계속 궁금했던 점이 하나 있어서요."

 

"뭔데요?"

 

"상훈씨도 세나씨가 세운 그 황당한 계획에 발 좀 담궜죠? 솔직히 말해봐요."

 

"? .. 그거요."

 

주상훈은 잠시 당황하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나씨가 처음에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저도 말렸어요. 그런데 말려도 될 분위기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이왕 하는 김에 재대로 하자라는 마음으로 같이 세부 계획을 짰죠."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어쩐지 사람 마음을 대놓고 가지고 놀더라니.. 그럼 결국 예전에 제가 처음 찾아왔을 때 이미 다 알고서는 모른 척 한 거군요."

 

", 그렇죠. 하지만 제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해하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의문이 하나 있어요세나씨에 대한 것인데, 상훈씨 생각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순수한 목적으로 그 일을 했나요?"

 

".."

 

주상훈은 잠시 주춤했다가 말을 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그냥 다 말씀 드리죠. 변호사님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의문, 그것이 왜 생기는지 저도 잘 알아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그 의심은 충분히 근거가 있습니다세나씨가 그런 일을 벌인 진짜 이유는 따로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지루해서요. 그러니까 세나씨는 지루하니까 재미난 일을 찾으려고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에요."

 

"재미요?"

 

재미라는 말에 서민국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물었다.

 

". 재미요. 세나씨에게 그 일은 마치 새로 선물 받은 흥미로운 장난감 같은 일이었어요."

 

"어이가 없군요. 친구의 그런 억울한 죽음을 재미로 삼았다고요?"

 

"물론 그런 일을 재미 삼아 벌인 그녀를 비난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세나씨 본인은 사람들에게 한은서가 당해야 했던 불행한 일에 대해서 알린 것, 그 목적만 달성되었다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결론만 잘 나면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네요."

 

서민국의 혀를 찼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 드려요세나씨가 은서씨의 목 뒤의 급소를 제대로 찌르기 위해서 전문의에게 따로 과외를 받았어요. 그리고 두터운 돼지 살을 사서 찌르는 연습까지 했고요."

 

"?"

 

서민국은 순간 기가 막혀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사람을 찌르는 연습을 했다는 조세나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래 망나니가 어설프면 그에게 죽는 사람이 죽기 전에 더 큰 고통을 겪게 되죠. 그래서 세나씨는 한은서를 제대로 찌르기 위해서 그런 노력을 한 것이에요.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그녀가 이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 동기는 나름대로 순수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죠. 그리고 그런 행동이 정말로 순수하다고 믿으세요?"

 

"사람들 마다 각자 관점에 따라 다르겠죠. 아무튼 저 개인적으로는 그 순수성 자체는 믿어요. 적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최선은 다한 것이잖아요."

 

".. 아무리 그렇더라도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드네요."

 

"그렇죠?"

 

주상훈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세나씨도 이해 할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삶을 제대로 바라봐 줘야 하지만요. 그녀가 이 세상의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 받지 못한 채 홀로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왔던 삶 말이에요. 그녀는 사실 어린 시절 의부와 그런 일을 경험하고 나서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에 타인에 대한 신뢰도 같이 잃은 것이죠.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식으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기에 다른 사람과 교감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해져버리고 말았어요. 그런 면에서만 보면 조세나씨는 친구 한은서씨와 정반대 편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선악에 관한 정규분포곡선에서 양쪽 끝 지점처럼이요?"

 

"세나씨에게 그 얘기를 들으셨어요?"

 

"아니요.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장유정이라고 죽은 한은서씨의 친구이자 저의 친구이기도 한 사람한테 들었어요."

 

", 그렇군요. 사실 그 얘기는 세나씨 본인이 오랫동안 머리를 짜내서 만들어 낸 이론이에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한은서씨에게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줘야 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그 이론 자체도 본인이 만들어 놓고는 뭔가 심오한 철학이 있는 듯 한은서씨에게 알려준 것이네요?"

 

", 맞아요. 세나씨가 보기에 한은서씨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천사와 같은 미소로 가려져 있는 은서씨의 고통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세나씨만 꿰뚫어 봤으니까요. 놀랍게도 다른 사람에게 너무 과도한 공감을 느껴서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사는 은서씨를 다른 사람과 그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하는 세나씨가 알아 낸 것이에요.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런 얘기들은 저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네요."

 

"세나씨는 늘 진실과 거짓이 혼재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진실도 거짓처럼 그리고 거짓도 진실처럼 말하죠. 그래서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아요."

 

"그럼 일종의 사이코패스인가요?"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보통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데 반해서 세나씨의 경우엔 그 자신이 살아온 남다른 경험들로 인해서 살아 남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까요. 다른 이들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차단해야만 본인이 살아갈 수 있었기에 그렇게 변한 것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도, 남의 감정을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거부하죠."

 

"그래도 최종적으로 집행유예 판결 받고 기자들 앞에서 펑펑 울 때는 나름대로 진심으로 우는 것 같던데요?"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그녀의 눈물을 믿지 않아요. 변호사님도 솔직히 말해서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 그래도 혹시나 아니길 바랬는데.."

 

"변호사님도 이미 말했듯이, 조세나씨는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그녀에게도 숨겨진 진심은 존재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물론 오랜 시간 같이 한 저 조차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지만요. 하지만 혹시 변호사님이라면 그것을 파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서민국이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변호사님 세나씨 집 비밀번호 알고 있잖아요."

 

"? 그 사실도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그것도 같이 계획했던 일인데요."

 

"그렇군요.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저는 정말로 꼭두각시에 불과했군요스스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저의 손발에 끈을 연결하고 저를 조종하고 있는 인형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어리석은 존재 말이에요."

 

"다 그런 것은 아니죠. 특히 보니테임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파해진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그것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에요."

 

"운도 실력이죠."

 

주상훈은 웃으며 답을 했다.

 

"아무튼 말이 좀 샜는데, 변호사님이 세나씨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해요. 그리고 만약 지금도 세나씨가 집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죠."

 

"무슨 의미요?"

 

"요즘 세나씨와 연락해요?"

 

주상훈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아니요. 연락도 안 오고 전화를 해도 안 받네요."

 

"만약에 평소의 세나씨였다면 연락을 해왔을 것이에요. 아직 남아 있는 여흥을 즐겨야 하니까요. 하지만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럴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겠네요. 그러니 한번 찾아가 보세요. 제가 직감이 좀 있는 편인데, 두 분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서민국은 주상훈의 말에 잠시 쓴 웃음을 지으며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맘도 어느 정도 있긴 했는데 도대체 엄두가 나질 않았다. 오늘 조세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나니 더욱 더 두려움이 커졌다. 더군다나 이혼을 한지 이제 겨우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고객이었던 사람을 말이다. 다른 사람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입방아 오르기에 딱 좋은 일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세나씨는 보통 사람들과 너무도 다른 상식과 선악 기준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선과 악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죠. 어차피 상대적인 것인데요."

 

"선과 악이 상대적이라고요?"

 

"그렇지요. 연쇄 살인범에 비하면 우리는 모두 선한 존재이지만, 한은서씨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린 모두 악한 존재가 아닌가요? 원래 처음부터 선과 악은 그렇게 상대적으로 정의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것은 사람들의 집단 착각이죠."

 

"..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지난번에 세나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요?"

 

", 누군가 착하다는 것은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라고 들었지요."

 

"맞아요. 착하다, 선하다 이런 판단은 어차피 상대적이며 자신의 이득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득이 되지 않아도 선한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낯선 사람에게 길을 알려준다든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물론 그런 경우도 있죠.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란 점은 다름이 없죠. 그런 선의를 베풀면 결국 본인도 행복해지니까요."

 

"그 착한 행동을 하면서 본인이 오히려 상처받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다른 사람들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자신에게 꾸준히 상처를 주는 사람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착한 행동이 늘 행복을 위한 것만은 아닌 거죠."

 

"그들의 경우엔 두려움 때문이죠."

 

"두려움이요?"

 

"원래 처세술 중에서 가장 흔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착하게 구는 것입니다. 일단 웃으면 한대라도 덜 때리게 되니까요생각해봐요. 왜 그렇게 다들 낯선 사람을 보면 웃는지를요. 상대에게 착하게 보이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요. 그리고 그것은 삶의 두려움을 줄여주죠."

 

",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처세술로 착하게 군다는 뜻인가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은 착하게 굴어야 안전해진다는 사실에 너무 깊게 매몰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불행해지면서까지 착하게 구는 것이죠."

 

"그러면 착함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인가요?"

 

", 그런 셈이에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면 생명체는 결코 착할 수 없습니다. 여우가 토끼를 불쌍하게 여기면 그 자신과 새끼들은 굶어 죽고 마니까요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에너지를 근원으로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심지어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조차도 땅의 영양분 그리고 물과 햇빛을 두고 다른 식물들과 경쟁을 하고 살아가니까요. 그런 면에서 누구든 일정 수준 이상으로, 그러니까 자신이 불행해지면서까지 착하게 되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한은서씨의 경우엔 약물의 힘으로 넘어섰고, 보통 사람들의 경우엔 착하지 않았을 때 감당해야 할 두려움 때문에 넘어서게 되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너무 착한 것은 정신병이라고 해도 별 상관이 없겠네요."

 

"맞아요. 사람은 적당히 자신의 이득만큼만 착하게 살아야 해요. 그래야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죠. 그리고 그런 설령 자신이 그리 착하지 않더라도 자책을 하거나 자신을 비난할 필요도 없어요. 착하게 사는 것도, 착하게 살지 않는 것도 사실상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에요. 바로 자신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죠. 그리고 가능하다면 착하게 구는 편이 자신에게 장기적으로 유리해요."

 

"그런데 이런 설명은 세상 사람들이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네, 이해해요. 그렇지만 이 세상엔 자신이 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실제로 한은서씨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그것에 관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되겠죠그렇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분들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저 같은 찾거나 혹은 그저 홀로 삭히면서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가 너무 힘드니 자신은 착하게 사니까 결국 사후에 구원을 받을 것이란 믿음을 갖기도 하죠. 아무튼 이렇게 덜 착한 사람들은 이득을 보고 멀쩡하게 사는데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망가져서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은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그냥 덜 착하게 살면 되죠마음만 고쳐 먹으면 되잖아요. 안 착한 사람이 착하게 살기는 힘들지만 착한 사람이 안 착하게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서민국이 그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말했다.

 

"그게 쉬울까요만약 자신의 행복이나 이득을 위해서 착하게 굴었다면 그럴 수 있었겠죠. 하지만 두려워서 착하게 굴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요결국 그런 사람들이 착하지 않게 사는 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마니까요그런데 평소에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고 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도 무섭지 않을 수가 없죠.

"음.. 그렇긴 하겠네요."

 

"맞아요. 쉽지 않은 일에요. 더군다나 사람의 선함이나 도덕성과 같은 것들은 또 다른 형태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뭔데요? 그것들은 한은서씨의 경우처럼 악용되지만 않으면 좋은 가치들이 아닌가요?"

 

"좋은 가치이긴 하죠. 하지만 가치라는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인간 사회가 스스로의 미래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허상이거든요."

 

"그것은 또 무슨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착하면 착할수록, 도덕적이면 도덕적일수록 더욱 더 인간 사회는 도움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회는 언제나 선, 도적, 정의와 같은 가치를 강조하고 각 개인에게도 주입하려고 하죠. 그리고 놀랍게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가치들에 세뇌된 사람들은 그 가치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삶을 희생까지 하고 말죠. 물론 필요해요.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는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순간에서조차 사회에서 주입한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다고 착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 나쁜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도 아니에요. 인간은 원래가 게으르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거든요. 그래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놀고 먹어야 행복하죠. 처음부터 착하게 살거나, 도덕적으로 살거나,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에요단지 그렇게만 살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렇게만 살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니까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옳은 것이 아니라 손해를 덜 보거나 이득을 얻을 수 있기에 착하게 살아야 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또한 인간의 본성이 그러니까 사회가 끝없이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밀어대고 있잖아요. 매일같이 용기 있으라고 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처음부터 그랬으면 왜 그런 말을 해요."

 

"듣고 보니 이해는 가지만 인정하기는 힘든 말이군요."

 

"변호사님도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 안에 아주 깊게 뿌리 내려진 선과 악에 대한 선입견에 대해서 말이에요."

 

"아무튼 말씀 감사합니다. 방금 해주신 얘기는 시간을 두고 좀 더 싶게 생각해볼게요혹시 가끔 와서 궁금한 점들 좀 물어봐도 될까요아무래도 그럴 일이 좀 있을 것 같네요."

 

서민국은 조세나가 머리 속에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네 언제든지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저는 사무실이 더우니 잠시 여기에 좀 더 있다가 갈게요."

 

인사를 마친 서민국은 커피 가게를 나서서 밖으로 나왔다여름이 한창인 도심의 열기는 그가 밖으로 나오자 마자 뜨거움으로 그를 열렬히 반겼다. 오늘은 그나마 넥타이도 메고 오지 않아 간편한 복장이었지만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서 호흡을 하기가 곤란한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 전 새로 차를 샀기에 그랬다. 비록 할부이고 예전에 타고 다니던 성공한 사람의 흔한 표식과도 같은 외제차에 비하면 훨씬 싼 국산 준중형이지만, 그래도 이런 뜨거운 날 차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쐬면서 사무실까지 갈 수 있는 행복은 가져다 줄 수 있다. 차가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다가 있으니 그만큼 고마운 것도 없었다.

 

차를 타고 자유로를 거쳐 강변북로를 타고 가는 길에 갑자기 예전에 읽었던 수필에서 나온 한 조각 글귀가 떠올랐다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데, 그와 조세나의 인연은 과연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도 그와 조세나는 인연은 수필 속 표현처럼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못 만나지도 않고 아니 만나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가는 동안 한강에 반사되는 해의 일렁임이 유난히 눈에 부셨다. 여름이 가득한 날이었다. 가을이 그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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