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7

아이루다 2019. 5. 17. 07:40

 

봄의 여왕이 귀환했다. 4월이 되자 서울 시내 곳곳에서 하얀 벚꽃의 물결이 넘실거렸고 그에 맞춰서 각 지자체들은 곳곳에서 축제를 열고 여러 가수들을 초청했다. 비록 일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 잎이 피기도 전 나무 가득히 하얀 꽃부터 피우고 보는 벚나무의 독특한 취향은 봄을 기다려 온 많은 사람들의 눈을 호강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올해 역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4월 초가 되자 사방에 하얀 색 벚꽃들로 가득 찼다.

 

보통 봄은 산수유와 목련으로 시작된다고 한다그리고 봄은 벚꽃이 필 때 완성된다. 또한 그 옆으로 노란색 꽃을 가득 담은 개나리들 역시 한몫하고 있다. 그렇게 하얗고 노란 색들이 사방에서 활기를 가득 내뿜고 있을 때 비로소 봄이 도착한 것이다더해서 이때쯤이 되면 낮은 곳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은 작은 들꽃들도 많이 핀다봄이 올 것 같으면 재빠르게 꽃부터 피우고는 어느새 홀씨까지 날릴 준비가 끝난 민들레들도 있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는 꽃마리꽃도 한쪽 구석에서 앙증맞게 작은 꽃을 피우고 있다. 온 산과 들에 냉이가 자라고 쑥이 쑥쑥 크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아름다운 날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서민국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그리고 그 이유가 매년 봄이 올 때쯤이면 함께 오곤 하는 불청객인 미세먼지 때문은 아니었다드디어 오늘이 조세나의 재판의 마지막 판결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이미 판결은 내려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신미약이라는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이상 더 뭔가 기댈만한 것은 없었다. 어느 봄날의 햇살은 따사롭고 꽃들은 한참 아름다웠지만 서민국에게는 그저 햇살은 따갑고 꽃구경을 나온 행락객들이 번잡하게만 느껴졌다.

 

재판이 시작되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판사는 판결문 내용을 기계적으로 읽었고 최종적으로 조세나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리고 검사가 지난 재판에서 구형했던 20년 형에서 5년을 뺀 15년 형으로 최종 선고했다. 그나마 5년을 뺀 것은 검사 측 주장에서 조세나가 조세나가 한은서를 죽이기 위해서 따로 준비를 했을 수 있다는, 다소 황당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검사 측에서도 그 주장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관례상 뭔가 하나쯤 빼야 한다면 선택하기 쉬운 항목 하나를 넣어 둔 것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15년 형이면 살인죄, 특히 조세나처럼 초범에 흉악 범죄도 아닌 경우를 감안하면 너무 무거운 판결이었다. 보통 10년이 넘은 형량은 잔혹한 범행 수법으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심한 분노를 일으킨 사건들의 범인들에게나 적용되는 수준이었다그런 면에서 조세나의 범죄는 비록 친한 친구를 죽인 것이지만, 그렇게 잔혹한 것도 아니고 반인류적인 범죄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판사도 여론의 눈치를 보고 판결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렇기에 항소를 하면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여론의 눈이 많이 쏠린 사건에 대해서 사법부가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일단 1심에서는 강하게 처벌을 하고 2심에서 형량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간의 이목이 워낙 집중되다 보니 흔히 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나 재벌들의 범죄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루는 수법이 조세나의 사건에도 적용된 것이다아무튼 그렇게 된다고 해도 조세나는 앞으로 10년간의 세월을 감방에서 보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심리적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에 젊은 시절보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더 소중한 법이니까 말이다.




 

"어때요?"

 

서민국은 '만족스러워요?' 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끝까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버티다가 최종적으로 15년 형씩이나 선고 받은 조세나에 대한 답답함이 안타까움과 함께 마음 한 켠으로는 쌤통이라는 두 가지 감정 형태로 치밀어 올라왔기에 그랬다. 하지만 서민국의 그런 복잡한 감정과는 달리 오히려 조세나는 판결 전과 후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그녀는 판결을 받는 순간 그저 고개를 끄덕였으며 서민국의 그런 질문에도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그런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본 서민국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처음 변호를 계약 할 때 성공 인센티브를 따로 책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서민국 입장에서 보면 이 재판에 이기냐 못 이기냐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단지 뭔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처음 이 사건을 맡게 된 이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분명히 친구 장유정의 부탁과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서 이 일을 계기로 뭔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맡았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기대처럼 유명해지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었기에 그의 사무실엔 사건 의뢰가 제법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당장은 조세나 사건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긴 했지만, 이 정도 유명세라면 자신과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김팀장과 남혜영이 앞으로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세나를 바라보는 서민국의 눈에서는 차마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항소 준비하셔야죠?"

 

조세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에 항소 이야기를 했다. 1심에서 자신을 위한 그 어떤 변호도 하려고 하지 않았던 여자가 15년 형이란 판결을 받은 후 처음으로 뱉은 말이 바로 항소였다. 서민국은 당연히 이해가 가면서도 황당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해묵은 궁금증이 다시 올라왔다

 

조세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재판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원래 재판은 1심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항소심인 2심은 1심의 재판 절차에 문제가 없었는지 정도만 판결하는 절차였다. 그래서 1심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결국 1심의 결과대로 끝나는 것이 바로 2심이었던 것이다. 상고인 3심은 더 했다. 거기는 그저 법리를 제대로 적용했는지 여부만 따질 뿐이었으니까 말이다그래서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아주 가끔 그럴 경우 그 내용이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흔하지 않는 일이란 뜻이다그러다 보니 법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 누구든 1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변호사를 쓸 때도 1심에서 비싸더라도 가장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럴 수 있는 1심이 끝났다. 그런 상황에서 항소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조세나의 말은 공허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이유를 물어 봐도 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해야죠.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안 해도 아마 검사 쪽에서 할 걸요? 사람들이 15년형으로 만족하겠어요?"

 

조세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서민국은 그제서야 15년 형의 의미를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되었다. 사실 매우 중하게 형량이 선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감정상 그 형량은 아마도 너무 적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원래 법의 집행과 사람의 감정 사이엔 결코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강이 놓여 있기에 그렇다.

 

"그나저나 변호사님도 좀 피곤하겠네요. 요즘은 협박 전화 같은 것은 안 와요?"

 

"오긴 오죠. 그런데 모르는 번호는 아예 받지 않고 있어서 잘 모르겠네요."

 

"받긴 받으셨군요."

 

"그렇죠. 초반엔 좀 많았어요. 요즘은 좀 줄었고."

 

"그래요. 고생이 많으셨어요. 이제부터 항소심을 준비해 보도록 해요."

 

좌절하고 있는 서민국과 달리 오히려 조세나는 1심 판결 후에 뭔가 더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지금 본인의 이런 상황이 재미있어요?"

 

"어느 정도는요. 그리고 시간 좀 지나고 나서 제가 연락 한번 드릴게요. 너무 그렇게 좌절하지 마세요."

 

조세나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는 교도관들에게 둘러 쌓인 채 자신이 먹고 자고 있는 구치소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그녀는 이제 항소방으로 방을 옮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상고방에 갔다가 결국 교도소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는 흘러가는 상황만 보면 말이다. 그렇지만 서민국은 이상하게도 조세나의 마지막 말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희망이 생겨남을 느꼈다. 스스로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말이다.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세 사람은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은 주변에 가끔 가는 부대찌개 집으로 가서 먹었다. 4월 초이긴 하지만 아직은 차가운 공기가 좀 더 어울리는 시기라서 그런지 낮이라도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아니 그냥 좀 따뜻해지고 싶었다. 몸이라도 말이다.

 

"오늘은 날이 날이니 사리 좀 잔뜩 시킬 거에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남혜영은 사리를 많이 먹겠다는 각오를 스스로 되뇌었다. 그리고 실제로 추가로 햄을 비롯해서 사리 종류를 잔뜩 시켰다. 그래서 결국 3인분이 담아 왔던 냄비를 4인분으로 교체해야 했다.

 

"그냥 처음부터 4인분을 시킬 걸 그랬나?"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일하시는 분들을 번거롭게 했다는 생각이 드는지 남혜영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두 남자는 목석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이제 막 끓기 시작하고 있는 냄비만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누가 죽었어요? 왜 그렇게 둘 다 그런 표정으로 있어요."

 

", 생각 좀 하느라고요."

 

김팀장이 문득 정신이 드는지 대꾸를 했다.

 

"변호사님도 정신 좀 차리세요. 일단 잘 먹고 잘 잔 후에 항소 준비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은 쉬운데 항소를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이 있겠어요?"

 

조세나와 있을 때 잠깐 느꼈던 희망의 느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기야 조세나의 미소 하나로 희망을 품었던 그 순간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었다.

 

"그럼 제가 희망의 불씨를 지펴볼까요?"

 

국자를 들고 찌개가 고루고루 잘 익도록 뒤적거리고 있던 남혜영이 갑자기 정색하면서 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집중을 하고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제 밤에 드디어 기쁜 소식이 왔어요. 한달 전에 일본에 의뢰했던 그 문제의 약품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거든요. 아침에 이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오늘이 중요한 판결이 있는 날이라서 지금까지 참았다고요."

 

"정말이요?"

 

김팀장이 되물었다.

 

"그럼 정말이죠. 제가 지금부터 천천히 설명을 드릴게요."

 

남혜영은 자신이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하기 앞서 일본 쪽 지인에게 받았다는 이메일을 인쇄 해 온 문서를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일본어와 한국말이 어지럽게 뒤섞인 문서였다.

 

"제 이야기를 먼저 듣고 나중에 이것 읽어 보세요. , 생각해보니 먹고 나서 이야기를 시작할걸.."

 

남혜영은 젓가락으로 햄을 하나 집어서 날름 입 속에 넣고는 다 먹고 나서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우리가 알아보려고 했던 보니테임이란 이름을 가진 약품에 아주 놀라운 배경이 있더라고요. 그게 원래는 일제 강점기에 더러운 목적으로 개발된 약품이래요."

 

"무슨 목적이요?"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길들이려고 만든 항정신성 약물이라는 거에요."

 

"? 어떻게요?"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했는데 자신들의 말을 잘 안 듣는 조선인들이 많으니 아예 그 성향 자체를 개량할 목적으로 만든 약품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일종의 민족성 교화 정책이란 이름으로 연구해서 만든 결과물이란 뜻이에요."

 

"그럼 어떤 효과가 있는데요?"

 

"사람을 온순하게 만든대요말이 그렇지 결국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하는, 일종의 말 잘 듣는 순둥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인 약품이었단 것이죠."

 

", 정말로 그런 약품이 존재할 수 있어요?"

 

", 보니테임이 그런 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다른 정신병 치료 약물 역시도 어느 정도 환자의 상태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보니테임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요?"

 

서민국이 물었다.

 

", 그거야 저도 잘 모르죠. 그런데 아무튼 다행스럽게 보니테임이 대량 생산이 되기 이전에 해방이 되었고, 그 후 일본에서는 이 약품을 정신병 치료제로 용도를 바꿔서 허가를 내어 사용했다고 해요. 그런 식으로 일반 의약품이 된 보니테임은 60년대까지는 일본 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대요."

 

"그런데요?"

 

"그런데 커다란 부작용이 발견되었대요."

 

"뭔데요?"

 

"그 약을 장기간 복용할 경우 나타나는 치명적인 부작용인데, 여자들 경우에는 불임 현상이 나타나고 남자들에게는 정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서 결국 남자 역시도 아이를 만들 수 없는 몸이 되고 만데요."

 

".. 부작용이 꽤나 끔찍하군요. 하기야 사람의 정신을 그렇게 강제로 순하게 만들게 되면 몸도 따라서 변할 수 있겠네요. 특히나 성욕처럼 공격적인 성향이 사라지게 되면 결국 그것이 성적 기능의 퇴화로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요?"

 

"오, 그럴 듯 해요. 변호사님 말씀이 나름 합리적인데요? 아무튼 그래서 그 후로 이 약품은 전면적으로 일반적 투여가 중단되었고이후로는 사나운 동물에게 투약하거나 학문적으로는 응용할 분야에만 한정적으로 쓰였대요. 그로 인해서 요즘도 여전히 소량 생산은 하고 있다고 해요."

 

", 그럼 그런 목적으로 생산된 약품을 장수철씨 동생이 다녔다는 그 병원에서 수입을 한 것이군요."

 

", 그런 셈이죠. 그러니까 그 병원에서도 공식적인 수입 목적은 바로 연구용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약품이 제양그룹 쪽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렇죠. 그런데 제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것은, 도대체 그 약품을 가져다가 어떤 용도로 썼느냐 에요. 마약도 아닌 끽해봐야 사람을 온순하게 만드는 일종의 정신병 치료제인데, 그토록 거금을 들이고 또한 그렇게 장기적으로 불법적인 경로로 약품을 구해서 무엇을 했을까요?"

 

"혜영씨, 그 약품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들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되기에 사람이 온순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서민국이 뭔가 집히는 것이 있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그 약을 투여 받게 되면 그 사람의 성향이 매우 너그러워진다고 해요. 흔히 말하는 착해지는 것이에요. 보통 항정신성 약물들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지만, 이 보니테임은 그런 부작용이 없이 사람 자체를 착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보면 좋은 약품이죠. 사람이 착해지니까요. 부작용만 없으면 참 좋을텐데.."

 

"사람이 착해진다고요?"

 

그 순간 서민국의 머리 속에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그리고 그는 제양그룹에서, 아니 오명수가 그 약품이 어떤 용도로 쓰고 있었을 지가 떠올랐다.

 

"한은서네요. 그 약이 투약된 대상이 말이에요."

 

서민국의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은서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된 이유가 바로 그 보니테임을 장기간 복용한 결과란 뜻이죠. 물론 그녀는 천성도 착기도 했겠지만 그 약품을 장기간 투여 받으면서 인간의 수준을 한참 벗어날 정도로 착한 사람이 된 것이에요."

 

"네? 정말로 그런 것일까요?"

 

나름대로 앞뒤가 맞는 설명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민국과 달리 한은서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서민국은 그녀의 착함 정도에 대해서 장유정에게 너무도 또렷하게 들었다. 자신의 심장조차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체방어기제를 한참 넘어서는 착함이다. 그러니 당연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이제서야 밝혀진 것이다.

 

"그것에 관한 또 하나의 간접적 증거가 바로 오명수와 한은서가 육체 관계를 맺지 않았던 점이에요. 그 약의 부작용을 이미 알고 있는 오명수가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한은서에게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조차 없었던 것이죠. 비록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라도 낳을 수 있다면 부부관계를 했겠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완벽히 이용할 목적으로 결혼을 한 사람이기에 아무런 애정도 없었을 것이고사실 오명수는 자신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한은서에게 일종의 혐오감을 느꼈을지도 몰라요."

 

"자기가 다 이용해놓고 혐오감을 느낀다고요?"

 

"흔히 스스로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혐오죠.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만 당하는 약자이용을 당하고도 전혀 모른 채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어리석음에 대한 혐오가 생겨났을 수 있어요. 사람이 원래 그렇거든요. 너무 착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기도 해요. 그 착함이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명수는 한은서에게 어떠한 성욕조차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서민국의 설명에 두 사람의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변호사님 말씀은, 오명수가 처음부터 남다르게 예쁘고 착했던 한은서를 노리고 접근을 한 후, 언론의 주목을 최대한 받은 채 결혼을 강행하고, 그 후 보니테임을 장시간 복용시켜서 천사처럼 착하지만 임신은 하지 못하는 여자로 만든 것이군요. 그렇죠?"

 

", 그런 셈입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다 앞뒤가 맞네요. 이제 남은 것은 오명수는 왜 한은서에게 그 약을 장시간 투여했느냐 여부입니다. 도대체 한은서를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본인이 어떤 이득을 얻고자 그런 일을 했을까요?"

 

서민국의 질문에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민국 본인도 뭔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이 조세나의 사건과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건은 별개로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자 머리가 아파왔다.

 

"우리 일단 밥 좀 열심히 먹자고요."

 

열심히 떠드는 사이에 부대찌개 국물이 많이 졸아 있었다. 남혜영은 일어나 주방 근처에 가서 육수를 가져와 붓고는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국물이 다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기 전까지 남혜영을 제외한 두 명은 각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아무런 말도 없이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 다시 먹을 만큼 찌개가 끓자 다들 먹는 것에 집중을 했다. 하지만 서민국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른 채 여전히 생각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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