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5

아이루다 2019. 5. 10. 08:08

 

3월이 되자 학생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바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나타났다서민국의 아침 출근 시간 중 학생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대학 졸업 후 2년 만에 사시를 패스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서민국은 이후 거의 대부분의 출퇴근을 차로만 해왔기에 그런 변화가 낯설고 불편했다아이들은 그저 단순히 공간만 더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실히 본격적으로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그들을 보고 있자면 예전의 자신이 떠오르곤 했다그리고 가끔은 뜬금없게도 아이들 각각의 행동과 표정을 보면서 그 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지가 상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자신처럼 말이 없이 조용히 지하철 한 구석에서 뭔가를 보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는 커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서울 내의 적당한 수준의 대학교를 나온 후 안정적인 직장을 잡게 될 것이다물론 그 삶이 뻔하긴 하지만 그다지 굴곡이 없는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운이 없다면 자신처럼 이혼을 눈 앞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친구들 앞에서 잘난 척 하면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아이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괴롭혔던 아이들이 시킨 치킨을 배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일수록 잘 생긴 외모나 남다른 운동신경 등신체적 능력이 우열을 가리는 것에 중요하게 쓰이지만 나이가 먹어 갈수록 지적 능력의 우월함이 거의 절대적이 되기에 그렇다서민국은 이 단순한 진실을 어린 시절엔 전혀 몰랐기에 공부를 무척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었던 자신에 대해서 자주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때는 잘 생기고 운동 잘하는 친구들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더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영향력이 컸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은 어떤 차를 몰고 어떤 직장에 다니며 어느 정도 연봉을 받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해졌다하지만 여자들의 세계는 또 미묘하게 달랐다여자들의 세계에는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외모가 중요한 경쟁력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특히 남자들은 여자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미모를 매우 중요한 매력으로 꼽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여자들은 바뀌긴 한다외모에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나 아이의 성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민국은 자신이 남편으로써의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었다. 로펌에 다니는 동안만큼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상위권에 속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 놓친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내가 지금 이혼을 결심하고 있고더 이상 자신과 단 한마디의 말조차도 나누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에 아내에게 받은 문자를 보면 아이들 역시도 아내와 살겠다고 했다고 한다씁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내가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할 때 그는 너무 바빴다. 그리고 그런 삶이 계속 반복되자 언젠가부터 아내는 아주 필요한 말 이외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언제부터 아내가 변하기 시작했는지 알 방법은 없다. 하기야 지금 그것을 기억해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내는 이미 마음이 닫혀 버렸고 아이들 역시도 아빠인 자신보다는 엄마인 아내를 선택했다. 하지만 좋게 생각하면 아직은 어린 아이들은 엄마가 키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니 자신은 부양자로써의 책임만 지면 되는 것이다. 머리 속에서는 이렇게 단순하고 합리적인 결론이 나긴 하지만 마음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전혀 그 결이 달랐다. 거기엔 배신감, 외로움, 두려움, 허무함까지 뒤섞여서 전체적으로 그를 침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그 가운데서조차 유일한 긍정적인 감정 하나도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홀가분함이었다. 십 수년간 그가 감당해야 했던 가장으로써의 책무, 아빠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 감정이 정체였다. 그리고 그 홀가분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는 생각보다 커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잠깐 자신이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다행히 학생들은 특정 지하철 역만 지나고 나면 대부분 내리기에 지하철 내부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민국은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기곤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작은 화면 속에 떠 있은 뉴스들도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와의 문제도 문제이지만 요즘 들어서 부쩍 조세나의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뭔가 구체적인 것이 잡힐 것 같기도 한데, 집중하면 할수록 불명확한 형체의 희미한 실루엣 같은 것들만 머리 속을 떠돌 뿐이었다그로 인해서 요즘은 머리만 대면 자던 그가 잠을 자기 위해서 한참을 고생을 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고는 했다. 그래도 오늘은 사무실의 김팀장이 불독에게 의뢰했던 일에 대한 최종 결과를 가져오는 날이다. 만약 뭔가 새로운 정보가 나온다면 머리 속 복잡한 실타래가 조금은 풀릴 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감이 생겨났다.

 

지하철 역을 나와서 사무실로 들어서자 김팀장은 이미 출근을 해 있었다오늘도 그는 자신은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서민국은 사무실 내에 가득 퍼진 커피 향을 맡으며 아침 출근길에 겪은 피곤함이 다소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방금 내려서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는 커피를 자신의 잔에 담아서 한쪽 구석에서 회의실로 쓰는 작은 테이블 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김팀장이 곧 그를 따라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혜영씨는 오늘 좀 늦는다고 하네요아침에 병원 좀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김팀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또 어디가 아프데요?"

 

"감기라는 것 같던데요."

 

"많이 아프면 그냥 쉬라고 하지요."

 

"꼭 나오겠대요. 자기도 제 얘기가 궁금하다면서요."

 

"하여간.. 그 성격은그렇다고 혜영씨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고, 먼저 얘기 좀 해봐요. 불독한테서 뭔가 좀 그럴듯한 것이 나왔어요?"

 

", 듣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좀 흥미로웠는데 변호사님 입장은 다를 수 있겠네요."

 

살림이 빠듯한 사무실 입장에서는 꽤나 많은 돈을 투자한 일이었다. 김팀장은 자신의 의견으로 진행했던 불독에게 오명수의 뒷조사를 맡긴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해서 약간의 압박감을 받고 있는 듯 보였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일단 제가 지난번에 조사를 하다 못한, 어떤 장소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은 예상처럼 고급 술집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조건이 되는 사람만 출입이 가능한 회원제 클럽인데, 그 조건이 아주 까다로워서 대한민국 내에서 그 클럽에 참가 할 수 있는 사람은 백 명도 채 안 된다고 하더군요. , 당연히 재계나 정계 쪽 유력 인사들이 주로 소속되어 있고 거기에 참석하는 여자들도 대부분 A급 수준의 현역 연예인이랍니다."

 

", 지금까지 파악해 본 오명수를 생각하면 새로운 일도 아니군요. 돈 있는 작자들이 즐기는 일이야 다 그 모양이지요. 뭐 다른 것은 없나요?"

 

"내연녀가 있답니다."

 

"내연녀요?"

 

서민국은 그 순간 장유정이 얘기했던 예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대상이 조세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세나 본인은 확실히 부정을 했으니 내연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새로운 인물일 것이 분명했다.

 

", 아마 변호사님도 아실 거에요. 유명한 여배우니까요."

 

"누구죠?"

 

"강서희라고작년에 천만 관객 들었던 영화 여주인공 역할 맡았던 여자요."

 

", 그 강서희가 오명수 내연녀라고요?"

 

워낙 연예인에 관심이 없었지만 서민국도 아는 여자였다. 작년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가 알게 된 배우이기도 했다. 볼 보조개가 예뻐서 기억에 남은 여자였다.

 

", 아예 반포동에 60평짜리 아파트 얻어놓고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답니다. 최소 주 3일 정도는 가는 듯 합니다."

 

"그 여자 그렇게 안 봤는데.. 하기야 연예인 믿는 것 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죠. 그나저나 오명수 너무 뻔한데. 도대체 왜 그렇게 뻔하게 살지?"

 

서민국은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면서 조세나가 했던 말, 오명수가 뻔한 사람이라서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오명수가 참 이미지 포장 잘하고 산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봐도 너무도 가정적이고 아내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오명수의 진실이 그럴 것이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다가 김팀장이 다시 입을 뗐다.

 

".. 솔직히 말해서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여부를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바로 오명수의 과거요."

 

"어떤?"

 

"그게, 오명수가 젊었던 시절에, 그러니까 20대 초반만 해도 오명수는 제양그룸의 차기 후계자 싸움에서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심지어 재계 내부적으로 돌던 소문으로는 그가 아예 내 논 자식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오명수가요사람들이 알고 있는 오명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죠대부분은 전혀 그렇지 않게 알고 있죠. 그런데 불독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 소문이 꽤나 신빙성이 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오명수는 여자 문제도 꽤나 복잡했고 더해서 마약도 좀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워낙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룹이라서 당연히 그런 일들은 언론에는 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며 유학을 핑계로 바로 미국으로 보내곤 했답니다."

 

".. 그러면 지금 오명수는 도대체 어떻게 저 자리에 있게 된 것이죠?"

 

"거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좀 있습니다. 오세환이라고 아시죠? 오명수 아버지. 그 사람이 자신의 후계자를 정할 때 한 달의 시간을 주고는 후계자가 될 자식들에게 미래의 제양그룹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보라고 했답니다. 남녀도 구분이 없고, 학벌도, 살아온 삶도 상관없이 오직 각자가 제시한 비전만을 근거로 후계자를 뽑겠다는 아주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것이죠."

 

"그 수준이면 거의 모험인데요."

 

"오세환이 원래 본인이 인생 막장을 살다가 운 좋게 때를 잘 맞춰서 자수성가한 스타일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세환은 본처 이외에 후처가 한 명 있었는데 그로 인해서 스스로 포기한 2명을 제외하고 당시 후계자 경쟁에 참여한 사람은  8명에 이르렀다고 해요. 그리고 당시엔 다들 오명수 역시도 당연히 알아서 포기할 것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참가 의사를 밝혀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도 합니다."

 

"흥미롭네요. 여자만 밝히고 마약이나 하던 인간이 그룹 후계자 자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군요.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면 그냥 집에서 주는 돈으로 평생 한량 짓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아닌가요?"

 

"그렇겠죠. 아무튼 그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오명수의 바로 웟형인 오현수였는데, 그야말로 후계자가 되기 위한 FM코스를 밟은 엘리트였다고 해요중학교 시절에 유학을 떠나서 하버드 경영학과에서 MBA 코스까지 밟은누가 봐도 그룹 후계자의 모습을 보였기에 당시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오현수가 당연히 차기 그룹의 회장이 될 것이라고 여겼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달랐군요. 바로 오명수가 되었으니까요."

 

",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렇게 되었지요."

 

"도대체 그룹 미래에 어떤 비전을 제시했기에 마약까지 한 뽕쟁이가 하버드 MBA 코스를 밟은 형을 제치고 그룹의 차기 회장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요?"

 

"거기까지는 불독도 알아내지 못했답니다. 사실 아는 사람 자체도 극소수라고 해요아마도 당사자들하고 그 비전을 심사한 아버지 오세환만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세환은 이미 죽었으니 오명수가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알 방법이 없는 셈이죠."

 

"아주 특이한 후계 방식이군요."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이 뭔지 아세요? 그것은 바로 오명수가 그룹의 회장으로 올라선 후 십수년이 지난 지금 제양그룹의 재계 서열은 한 단계 더 높아져서 3위에서 2위로 올라섰고 지금 추세라면 조만간 1위도 재칠 것 같다는 점이죠그러니까 오세환의 그런 특이한 그룹 승계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요즘 제양그룹 매출 신장세가 장난이 아니죠? .. 그러면 오명수를 선택한 오세환은 결국 뛰어난 혜안을 가진 셈인가요?"

 

", 그거야 결과론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러니 인정할 수 밖에 없겠네요."

 

"그나저나 궁금하긴 하군요. 도대체 어떤 비전을 제시를 했을지.."

 

"저도 궁금해요. 아무튼 오명수가 젊은 시절엔 방탕하게 지냈을지는 몰라도 머리가 아주 좋은 놈은 분명해요. 그러니까 저렇게 이미지 포장이 잘 되어서 사람들한테도 인기가 많은 것이죠. 예전엔 몰랐는데 알고 보니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잘 알고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작년에 아내인 한은서가 죽었을 때도 정말로 서럽게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서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크게 회자되었잖아요. 저도 그때 그 눈물을 보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방금 대중이 뭘 아는지 잘 안다 라고 말했죠?"

 

"?"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사실 오명수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는 잘 생기고착한 아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가정적인데다가, 능력도 탁월한, 사실상 완벽해 보이는 남자이자 남편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시작된 지점이 바로 그의 결혼 아닌가요? 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는 남자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이야기, 바로 신데렐라의 전설이 시작된 한은서와의 결혼이 그 시작점이었죠. 그 일로 인해서 대중은 처음으로 오명수란 인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오명수가 살아온 과거는 모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볼 수 밖에 없죠."

 

서민국은 순간 흐릿하기만 하던 실루엣 중 하나가 갑자기 명확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변호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오명수가 대중 앞에 최초로 나선 시기가 바로 죽은 한은서와의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서 집안의 반대로 인해서 스스로 후계자 자리를 내 놓은 그 순간이었군요."

 

"그렇죠. 그리고 그 모습이 아주 강하게 각인이 되면서 오명수는 이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그 이미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비밀 클럽을 다니고 또한 내연녀를 두고 있고요."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에요."

 

서민국은 잠시 오명수와 한은서에 대해 더 얘기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오명수에 대해서 이 정도까지 까발려진 상황에 친구 장유정과의 약속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판단은 빨랐고 바로 다음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가 들은 뒷얘기에 의하면 오명수와 한은서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은, 둘 중 하나에 신체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예 잠자리를 안 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 그러면 둘이 무늬만 부부였다고요?"

 

김팀장은 뜻밖의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지금 전체적으로 상황을 종합해보니 결론이 그렇게 나는군요. 뭐 다르게 생각해 볼 것이 있나요?"

 

"아니, 제가 정말로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한은서처럼 예쁜 여자랑 결혼을 해놓고 부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내연녀가 따로 있다는 말은 남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김팀장은 오명수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은서의 실물을 본 것은 아니지만 서민국도 한은서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를 아내로 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본능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한은서가 너무 착해서 그런 것일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 있잖아요여자가 너무 착하면 성적 욕망도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그래서 남자들이 자신의 여자가 요조숙녀 이길 바라잖아요. 낮에는 숙녀이고 밤에는 요부가 되라고요."

 

"그건 여자들이 나쁜 남자 좋아하는 거랑 똑같은 거지요. 자신에게만 착하고 남들에게 못된 사람 이길 바라는 것이랑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여자나 남자는 존재할 수 없죠."

 

착하기에 성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김팀장의 추론부터 잘 이해가 가질 않았던 서민국이 결국 요조숙녀 부분에서 참지 못하고 핀잔을 주고 말았다. 서민국의 입장에 그것은 남자들의 헛된 욕망 중 하나였기에 그랬다.

 

"아무튼 존재하든 못하든 중요한 것은 사람이 너무 착할 경우 성적 욕망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에요. 저 같아도 그러겠어요. 실제로 한은서가, 아니 한은서씨 같은 사람이 제 앞에 있으면 저는 그 착한 기운에 휩싸여서 그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으로 느껴질 것 같아요. 변호사님도 아마 그럴걸요?"

 

김팀장은 서민국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확신을 가진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서민국 역시 자연스럽게 상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눈 앞에 한은서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이 성적 욕망을 느낄지 여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딱히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하면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김팀장의 말이 그저 헛소리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오명수는 왜 한은서랑 결혼을 했을까요? 결국 처음부터 한은서를 사랑을 한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도대체 그런 생쑈까지 해가면서 결혼을 한 이유가 이해가 되질 않네요."

 

김팀장이 자신의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그 순간 서민국의 머리 속에서 뭔가가 터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확실히 정리되는 느낌이 왔다. 오명수가 한은서와 결혼을 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너무도 확실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의 한심함에 절로 한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 정말로 머리가 안 돌아갔네요. 오명수에게 그 결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였네요. 바로 그룹 이미지 전체를 바꾸는 절차, 그것의 시작점이 바로 결혼이었던 것이죠. 돌이켜서 잘 생각해봐요. 그 전만 해도 제양그룹은 그저 흔한 국내 재벌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돈도 많고 권력도 막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재벌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죠. 그런데 지금의 제양그룹 그런 재벌들 중 하나가 아니에요. 아주 독보적이죠. 그 그룹은 인간적이고, 친화적이고, 사회 공헌을 많이 하고 있으며, 정직하고, 훌륭한 기업 정신을 가진 기업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실제로 여론 조사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룹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것도 2등과는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져 있죠."

 

"아!"


서민국의 말에 김팀장은 짧은 비명과 같은 탄성을 질렀다. 그 역시 그 순간 서민국이 느꼈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저도 그 중 하나네요. 언제 그렇게 바뀐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오명수가 지난 15년간 해온 일이죠. 자신의 이미지를 바꿈으로써 기업 전체 이미지를 바꾸는 일."

 

"아 그럼 혹시 그가 오세환에게 제안했다는 비전이 이것과 관련된 것일까요?"

 

"그거야 정확히는 모를 일이지만 일단은 그렇게 보이네요. 생각해봐요. 요즘 사람들은 빈부격차에 대한 불만과 가끔 특권층이 보여주는 기가 막힌 현실로 인해서 재벌 자체에 대한 대한 분노가 엄청나요. 그리고 그 분노가 강렬한 만큼 그 반대 편에 있는 기업,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착하다고 평가 받는 기업이 얻는 잠재적이득은 상상을 초월하죠. 결국 제양그룹에 속해있는 회사들 같은 곳에 대해서 사람들의 호의가 넘쳐나고 있다고 봐야 해요. 그래서 지금 이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양그룹 소속 회사들의 제품을 알아서 홍보해주고, 착한 회사 제품 사주기 운동을 벌이고 있을 정도에요. 그러니 제양그룹 전체 성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셈이죠. 국내의 그 어떤 그룹이 제양그룹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어요. 거의 독보적이죠."

 

"만약 정말로 변호사님 추측이 맞는다면 오명수는 정말로 치밀하고 대단한 놈이네요."

 

"그 놈이 어떤 인간이든 상관없이 대중이 가장 원하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군요. 사실 누가 그런 방식으로 그룹을 운영할 생각을 했겠어요."

 

실마리를 찾긴 했지만 머리 속이 복잡했다자신도 모르게 주입된 이미지, 소위 말해서 브랜드라는 것이 가진 힘이 자신도 모르게 아주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두려워졌다. 도대체 언제 어느 틈에 제양그룹에 대한 호의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퍼진 것일까? 서민국은 그 순간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이 다 제양그룹에 소속된 제양전자의 것이란 생각이 떠올랐다아내 역시도 다 비슷한 수준의 제품이라면 이왕이면 착한 기업의 제품을 쓰자는 주의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방 세제부터 흔히 쓰는 화장실 휴지까지도 모두 제양그룹과 관련된 회사의 것이었다.

 

"그 놈들은 정말로 우리들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군요."

 

김팀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 꼭 그들만 그럴까요? 사실 연예인들도 모두 그렇잖아요. 대중 앞에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해 놓느냐에 따라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떠오르죠. 자신의 실제적 성격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드라마 주인공 역만 잘 맡아도 사실 평생 광고만 하고 살아도 될 이미지를 얻기도 하잖아요."

 

", 그렇네요. 그런 배우들이 있긴 하죠."

 

"각자의 머리 속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새겨진 선입견, 그것이 바로 브랜드니까요."

 

"하지만 알면서도 당하고 살 수 밖에 없겠죠?"

 

"그렇죠. 그런 것들을 꿰뚫어 보려고 하다간 세상 살기가 무척 힘들어질 테니까요."

 

김팀장이 씁쓸하게 물었고 서민국 역시 씁쓸하게 답했다.

  

"슬픈 일이네요."

 

"슬픈 일이죠."


"뭐가 그리 슬퍼요?"

 

그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남혜영이 들어섰다. 그리고 소리쳤다. 서민국과 김팀장은 둘 모두 어디에서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지 난감함을 느끼면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냥은 넘길 수 없었다. 남혜영은 그리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자 한다면 알아야 그 끝이 난다. 서민국은 사무실의 주인답게 김팀장에게 눈빛으로 '알아서 처리하세요' 라고 표시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럴 때 사무실 주인이라는 권력을 쓰는 것이다. 결국 권력에서 밀린 김팀장은 자신이 했던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서민국과 나눴던 대화도 반복해야 했다.

 

남혜영은 마지막엔 너무 깊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당장이라도 오명수의 정체를 언론에 까발려야 한다고 하면서 아는 기자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 김팀장은 그것을 힘겹게 뜯어 말렸다. 그런 기사를 실어줄 신문도 없고 더해서 자칫했다가는 대중의 분노를 사서 돌팔매질을 당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 한 TV 보도 프로그램이 전국민적이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에 대한 비판적 진실을 다뤘다가 광고가 다 끊긴 적도 있었다. TV 방송국도 그러할 처지인데 일개 변호사 사무실은 초토화 될 것이 뻔했다. 남혜영은 결국 점심에 자신이 좋아하는 베트남 쌀국수를 먹는 조건하에 언론사에 연락하는 것을 포기했다. 김팀장은 왜 그런 결론이 나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행동을 말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고 있던 서민국의 머리 속에는 한가지 새로운 생각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생각을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조만간 주상훈을 한번 더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조세나의 변호에 좀 더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전에 반드시 한가지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에서 들여 온 미지의 약품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데렐라의 친구 - 17  (0) 2019.05.17
신데렐라의 친구 - 16  (0) 2019.05.14
신데렐라의 친구 - 14  (0) 2019.05.06
신데렐라의 친구 - 13  (0) 2019.05.03
신데렐라의 친구 - 12  (0) 2019.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