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3

아이루다 2019. 5. 3. 08:10

 

머리 속에 많은 생각이 혼돈스럽게 뒤섞였다. 건물을 나선 서민국은 약간 답답한 마음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거기엔 낮고 두꺼운 진한 회색 빛 구름들이 단 한 점의 파란 하늘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 오늘 아침에 봤던, TV 속 여자 기상 캐스터가 오늘 중부 지방에 눈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운전을 하고 다녔을 때는 신경 써야 할 뉴스였지만 아내에게 차를 뺏긴 후로는 지하철만 타고 다니니 그런 걱정이 없어서 좋았다. 언제까지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하철로 장유정의 사무실이 있는 서대문에서부터 조세나를 만나기 위해서 가야 하는 동부구치소까지는 대략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그러다 보니 서민국이 구치소 인근 지하철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 무렵이었다. 그는 구치소 근처에서 밥을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지하철로 한 구간만 더 가면 복합 쇼핑몰이 있고 거기엔 먹거리가 좀 더 풍성하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지어진 지가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그 화려한 쇼핑몰은 아이러니하게도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사라지게 될 청계천 주변의 영세 상인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준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결이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깨끗하고 편리하지만 시스템화 된 공간 그리고 좁고 복잡하고 불편하지만 인간적인 공간이 서로 맞을 리가 없었다결국 당연히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서 지은 후에도 제대로 활용이 되지 못하고 한참을 텅 빈 공간만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청계천에서 온 상인들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지고 그들이 떠난 자리엔 의류 메이커와 백화점까지 끌어 들여서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쇼핑몰로 탈바꿈을 했다. 그러면서 당연히 먹거리도 많이 풍부해져서 비록 홀로 먹는 점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구치소 주변에 있는 식당들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머리가 좀 복잡해서 잠시라도 구치소와 조세나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달보다 이틀이나 적으면서 초반에 명절이 낀 데다가 졸업식과 방학이 걸쳐 있는 2월은 체감상 확실히 빠르게 지나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벌써 중반을 지나 말로 접어든 시기이기에 곧 새로운 봄이 다가올 기미도 보였다. 그렇지만 학교는 여전히 방학 중이었고 그로 인해서 평일 임에도 불구하고 쇼핑몰 안에 있는 식당가는 학생들이 제법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가격이 상대적으로 착하고 양이 많은 곳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번호표를 받아서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이 쇼핑몰의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식당들은 이제 꽤나 수익성이 좋아졌을 것이다. 물론 그런 보통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줄 수 있는 변화의 시간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마르다 못해 바스러져간 많은 청계천 출신들의 슬픔은 겹으로 쌓이고 또 쌓여서 어디에선가 깊은 병이 되었을 테지만 말이다.

 

서민국은 학생들로 몹시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살짝 벗어나 그나마 사람이 적어서 한적해 보이는 한 식당을 선택해서 들어갔다. 그곳은 만두와 갈비탕을 주로 하는 곳이었는데 과거에 가족들과 와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그는 식당에 들어서서 식탁을 살펴보고 2인용 테이블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가서 앉은 후 별다른 고민 없이 갈비탕을 시켰다. 아직은 추운 날씨라서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주문한 요리는 금세 나왔다. 그는 최대한 먹을 것에 집중했다.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카드로 식대를 결제하고는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천천히 1층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쇼핑몰에서 나와 구치소까지, 지하철 한 구간 정도의 거리를 느긋하게 걸었다순간 장갑을 끼지 않고 있던 그의 손등에 어떤 차가운 어떤 것이 닫는 느낌이 들었다. 서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봄이 코 앞인데 겨울은 아직 갈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예보처럼 먹먹한 하늘에서 하얀 눈이 가득 내려오기 시작했다.

 

매년 눈이 줄어드는 듯한,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눈 구경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은 기분 탓인지 겨울이 다 간 2월의 끝자락에 내리는 눈이라고 해도 꽤나 반가웠다. 특히 어린 시절에 눈이 많이 내리는 지방에서 자란 서민국은 눈을 좋아했다어린 시절 그는 겨울 방학 내내 동네 친구들과 썰매를 타곤 했었다그 시간들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고, 눈이 오는 날이면 그 시절의 행복이 기억되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눈이 내리는 날이 오면 그 눈의 차가움만큼이나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그리고 신기하게도 눈이 내리자 갑자기 복잡하게 얽힌 마음 한 구석이 모두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아침에 장유정을 찾아가서 들었던 이야기들지금 곧 만나게 될 조세나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들, 그리고 그가 오늘 조세나를 만나 물어봐야 할 질문들의 복잡함들이 갑자기 별 것 아닌 듯 느껴졌다그것은 거대한 도심의 수 많은 복잡한 것들이 눈이 와 하얗게 덮이고 나면 하루 사이에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백색의 세상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했다순간 서민국은 스스로 당황할 만큼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 아침에 눈을 떠 밖으로 보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옆집도, 앞집도, 매일 다니던 길도 사라졌었던 오래된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하지만 서울에 내리는 눈은 절대로 그렇게는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많이 오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오더라도 쌓이기도 전에 다 치워질 것이다.

 

그래도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제법 많이 내렸다구치소에 도착할 때쯤이 되었더니 머리와 어깨에 하얀 눈이 제법 쌓여 있을 정도였다서민국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머리와 어깨를 털어서 눈을 최대한 없앤 후 젖고 차가운 손으로 문을 밀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면회를 신청한 곳에서 가서 변호사 접견이란 명목으로 신청했다그 후 대기를 할 수 있게 만든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시린 자신의 손을 마주 비비면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밖에 눈 오죠?"

 

조세나는 서민국을 보자마자 눈이 오냐는 질문을 했다.면회를 오는 길에 밖으로 나있는 조그만 창문을 통해 눈이 내리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 제법 내리네요."

 

"! 눈 맞으면서 걷고 싶다."

 

서민국은 순간 '그럼 눈 한대 맞으실래요?', 라는 말장난이 떠올랐지만 이내 머리 속에 지웠다. 하얀 눈이 그를 지금과는 다르게 장난기 많았던 어린 시절로 되돌린 모양이었다.

 

"눈 좋아해요?"

 

"그럼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눈이에요."

 

"그러니까 재판 준비 열심히 하세요. 그래야 빨리 나가서 좋아하는 눈 구경 실컷 할 수 있죠."

 

"그러니까 변호사님이 더 열심히 해줘요.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조세나는 웃고 있었고 서민국의 표정을 굳어 있었지만 오히려 서민국의 눈빛이 좀 더 차분해 보였다.

 

"오늘은 변호사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리 꽤나 차분하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차가운 눈을 좀 맞았더니 기분이 이렇게 된 모양입니다. 아무튼 차분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실수를 할 가능성이 낮아지니까요."

 

"분위기가 좀 낯설군요. 그래도 좋네요. 사람이 너무 한결같으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조세나가 웃었다. 하지만 서민국은 그런 그녀의 웃음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는 동안 머리 속에 좀 복잡했습니다. 특히 오늘 세나씨와의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갈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데 눈이 내리니까 갑자기 모든 것이 단순하게 보이네요. 오늘은 그냥 제가 묻고 싶은 것들을 물어 볼게요. 그러니까 대답하고 싶은 대로 대답하세요."

 

"변호사님 진짜로 오늘은 평소와 달리 많이 다르네요. , 상관없어요. 돌려서 말하든 아니면 대 놓고 말하든. 아무튼 궁금한 것 있으면 다 질문하세요. 제가 다 대답해 드릴게요."

 

그 순간 조세나의 눈빛은 뭔가 흥미로운 장난감을 찾은 아이의 표정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런 표정을 본 서민국은 어쩌면 오늘 뭔가 의미 있는 진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근거 없는 기대도 생겨났다.

 

"그럼 일단 첫 번째 질문. 세나씨와 죽은 한은서씨의 남편오명수씨는 무슨 관계이죠?"

 

차분해져 있던 서민국이었지만 질문을 하는 순간만큼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상대에게 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었고 당연히 대답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하, 그 질문이 그렇게 궁금하셨구나. 어려운 것도 아닌데 진작에 물어 보시지."

 

"어려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직접 물어 보기는 쉽지 않는 질문입니다. 아무튼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일단 당연히 서로 어느 정도는 아는 사이이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라고 해서 말씀 드리는데, 예전에 제가 좀 더 젊었을 때 오명수 그 사람이 저한테 한 동안 집적댔어요. 그 사람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른 면이 있거든요. 하지만 제가 명확하게 거절했죠. 물론 제 친구의 남편이라는 뻔한 도덕적인 이유는 아니었고그냥 그 사람이 너무 흔해 빠진 사람이라서 아무런 흥미가 생지지 않았거든요. 저는 이 세상에서 흔한 사람이 제일 지루해요."

 

"그 오명수가 흔한 사람이라고요?"

 

"흔하죠. 재벌가에 태어나서 돈만 많을 뿐, 그 사람이 가진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거든요.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을 보고 그 사람이 매우 특별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오명수는 전형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에요. 돈이 많은 것 자체는 특별하지만, 돈이 많은 사람으로써는 평범하죠."

 

"그럼 세나씨가 생각하는 특별한 사람은 도대체 뭔데요?"

 

"특별하다는 것은 정말로 말 그대로 특별한 것이에요. 변호사님,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 아마도 뭘 기준으로 특별한 것을 따질지에 따라서 다르겠죠."

 

"아니에요. 확실하게 특별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요?"

 

서민국은 순간 자신이 조세나에게 끌려간다고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세나의 다음 대답이 많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변호사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특별해지길 원해요. 돈이 많거나, 권력이 강하거나, 사람들에게 인기를 많거나, 인정을 받거나크게 성공을 하거나,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거나,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거나 등등, 이것들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자신이 특별해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특별해지고 싶을 때 그 중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은 누굴까요?"

 

"..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되는 것?"

 

",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장 특별한 사람은 바로 특별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죠. 안 그런가요?"

 

".. 말장난 같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네요."

 

"같은 맥락으로 보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요돈을 통해서 자신이 특별해졌기에 돈이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될 수 밖에 없죠. 그러니 돈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은 돈을 통해서 특별해지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돈은 많은데,  돈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겠죠.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이 특별해지려면 돈을 버는 일과 돈을 쓰는 일에 관심이 없어야 해요권력도 비슷해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아주 특별해지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없을 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자신이 머리가 좋은 것에 관심이 없을 때 그 사람은 특별해질 수 있어요."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어떻게 그것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부터 타고 나지 않은 사람은 특별해질 기회도 없는 셈이네요."

 

"그러니까 누군가가 특별해지기가 쉽지 않죠. 그리고 제가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더욱 더 흔치 않게 되고요."

 

"아무튼 오명수는 흔한 재벌 2세라서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거죠?"

 

", 맞아요그리고 제가 어떤 사람인 줄 모르니까 몇 번 은근슬쩍 저를 떠보긴 했죠. 하지만 뭐, 제가 반응이 없으니 알아서 물러나더라고요. 오명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성공만 하고 살아서 실패할 것 같으면 금세 도망치는 유형이거든요. 그래야 자신이 거부 당한 것이 아니라 거부한 것이 되니까요."

 

조세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그런데 왜 세간에는 세나씨와 오명수 사이에 불륜설 같은 것이 나돌까요?"

 

"? 그런 소문이 있어요?"

 

",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문이 있긴 해요."

 

사실 소문은 아니었다예전에 술을 마시다가 장유정에게 개인적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서민국은 장유정에게 그 사실을 들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얼버무렸다.

 

"그런 소문이 있었으면 신문에서 가만히 있질 않았을 텐데, 좀 이상하네요."

 

조세나는 뭔가 숨겨진 것을 알아내려는 듯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서민국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는 갑자기 씩 웃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겠어요. 변호사님이 곤란하겠네요.

 

"제가 뭐가 곤란한 일이.."

 

"그냥 넘어가 줄 때 넘어가요. 그럼 다음 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요."

 

", 그럼 두 번째 질문을 하죠세나씨, 혹시 마약 해 본적 있어요? 아니면 어떤 잘 알려지지 않는 특별한 약물을 접한 적이 있나요?"

 

하지만 이 질문은 조세나와 오명수 사이에 뭔가 어떤 식으로라도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제양그룹에서 비공식적으로 구매하는 그 미지의 약품이 조세나와 연관이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그녀보다는 오명수 본인이나 혹은 죽은 한은서와 관련이 있어야 했다.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할 것은 확실히 해야 했다.

 

"마약이라.. 오늘 변호사님 헛다리 많이 집으시네. 복잡하게 말하지 않을게요. 전 마약 같은 것은 안 해요. 몸을 상당히 심각하게 망치니까요."

 

예상외로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서민국은 뭔가 더 추가적으로 물어 볼 것도 없었다.

 

"그럼 혹시 죽인, 아니 죽은 한은서씨가 마약을 했거나 어떤 약물을 주기적으로 접한 것 같은 정황을 목격하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나요?"

 

그 순간 조세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서민국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물었다.

 

"왜요?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에요?"

 

", 뭐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희 쪽으로 들어온 정보 하나가 있는데, 혹시 그것과 조세나씨의 이 사건이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서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나씨보다 한은서씨 쪽, 그러니까 오명수라는 인물과 뭔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설령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어라도 개인적으로 진실을 밝혀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서민국은 말하고 있는 순간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이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장수철의 병약한 모습이 떠올랐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잘 모르는 것들이네요."

 

", 뭐 세나씨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게요."

 

", 하세요. 그런데 앞의 것들과는 달리 좀 흥미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네요."

 

"세나씨는 본인이 죽인 한은서씨를 많이 질투했나요?"

 

"? , 너무하시네. 오늘 한 질문 중에서 제일 뻔하잖아요저는 오명수가 재벌 2세이든 아니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사실 그가 가진 돈도 저한테는 그리 관심의 대상도 아니에요. 제가 쓸 정도의 돈은 스스로 충분히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왜 재벌 2세와 결혼한 은서를 질투하겠어요. 오히려 좀 불쌍하게 여겼죠."

 

"아니요. 질문의 포인트가 조금 달라요. 저는 지금 세나씨가 재벌 2세와 결혼을 해서, 소위 신데렐라로 불렸던 한은서씨를 여자로써 질투했냐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지금 세나씨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밝고 따뜻함이 가득한 세상 속에 속해 있었던 한은서씨의 삶을 인간적으로 질투했냐고 묻고 있는 것이죠. "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써 질투를 했냐고요?"

 

". 한은서씨가 가진 천성, 그 착하고 선한 성격에 대한 질투심을 말하는 것이에요."

 

"제가 왜 착한 것을 질투하죠?"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착함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이 되니까요. 사실 질투의 대상이 그런 것이잖아요.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데 자신은 갖지 못한 것, 외모, , 권력, , 좋은 직업 등등 많죠."

 

"그럼 제가 착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 타고난 선함을 가진 한은서를 질투했다좀 더 비약하면 제가 은서가 너무 착해서 죽였다, 라고 묻는 것이죠?"

 

"꼭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아무튼 사람은 누군가가 가진 것이 너무도 질투가 나면, 그리고 뺏을 수도 없다면 아예 망쳐버리고 싶어하잖아요.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린다, 뭐 그런 말들처럼 말이에요."

 

서민국 입장에서는 꽤나 오래 동안 생각을 해온 주제였다. 조세나가 한은서를 죽여야만 했던 이유 말이다그런데 그것은 지금까지 조세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면 전혀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 그러니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조세나는 그럴 만큼 특이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질문은 흥미가 좀 생기네요. 그런데 변호사님이 알고 있어야 할 점이 하나 있어요."

 

"뭔데요?"

 

"변호사님은 사람이 착하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라고 생각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서민국은 적어도 그녀의 흥미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착한 것이 착한 것이죠. 선과 악, 그것에서 선에 가까운 것이 착한 것이겠죠."

 

"매우 교과서적인 답이네요. 그럼 저는 착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쁜 사람인가요?"

 

"그거야 뭐,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죠. 누군가는 착하다고 생각하겠고, 누군가는 나쁘다고 생각할 것이에요."

 

하지만 이미 세상으로부터 둘도 없는 악녀가 되어 버린 조세나였다. 대한민국에서 과연 누가 그녀를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국은 그렇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서민국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딱 보니 거짓말을 하시는 것 같지만, 그 의도가 나쁘지 않으니 넘어갈게요. 그래요. 정답을 말씀하셨네요. 저의 착함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죠. 그래서 아무리 나쁜 악당도 선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악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에요. 슈퍼맨은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그로 인해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오히려 악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설령 악당이 아니더라도 슈퍼맨이 범죄자를 쫓다가 실수로 누군가를 죽게 했다면 그 사람의 가족은 슈퍼맨을 악당으로 여길 수도 있죠. 안 그런가요?"




 

", 그런 면은 있겠네요."

 

", 그래서 누군가가 착하다는 말은 다시 정의가 되어야 해요. 그것은 바로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사람이라고 해야 하죠."

 

".. 맞는 말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표현하면 너무 비인간적인 것 아닌가요?"

 

",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래서 이런 경우도 있어요. 나의 이득을 뺏어갈 생각을 하지 않기에 내가 딱히 상대를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사람 정도도 착한 사람으로 정의 되죠그런 사람이라면 만날 때는 손해에 대한 경계심이 들지 않기에 마음이 편하거든요. 사실 내가 오늘 밥을 살 때 다음에 상대가 밥을 살지 여부를 계산하는 일은 꽤나 피곤한 일이잖아요. 그냥 알아서 때 되면 주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대, 그렇지만 상대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산다고 느끼면 상대는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가 되죠."

 

"음.. 맞는 말 같긴 한데, 세나씨 설명을 쭉 듣고 있다 보니 갑자기 왜 주상훈씨가 떠오르죠? 혹시 그 사람한테서 들은 얘기에요?"

 

서민국의 질문에 조세나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스치듯 당황스러움이 떠오르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지면서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동안 서민국은 조세나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녀가 보통사람처럼 보였다.

 

", 맞아요. 그 사람이랑 너무 오래 같이 어울렸나바요."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치고, 왜 갑자기 착하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했나요?"

 

"뻔하죠. 제가 죽인 한은서의 선함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서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변호사님이 궁금해 하시는 제가 은서의 착함을 질투해서 죽였다는 착각을 깨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죽은 한은서씨의 착함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착함을 다시 정의하고 나면 그것은 그저 이득과 손해의 관점에서만 이뤄지는 그런 뻔한 것이다, 그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요?"

 

"단순히 그렇게 생각되세요?"

 

"세나씨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듣기엔 그렇게 들리네요."

 

"비슷하긴 하지만 사실 전혀 달라요."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요?"

 

"제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착했어요. 아예 제가 말한 착함의 범주 안에 들지 않아요. 사실상 은서의 선함은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 수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죠거의 절대적으로 착했으니까 말이에요. 아니, 그런 사람들조차 은서한테는 비교가 안될 수준이라고 해야 더 맞겠네요."

 

"정말로 그 정도였어요?"

 

".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미친거죠. 변호사님이 생각해도 사람이 그렇게 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럼 혹시 은서씨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죽였나요?"

 

"설마요."


"그럼 왜 죽었는데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해드릴 수가 없네요. 하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조사를 해오셨으니 그 보답으로 제가 은서를 죽인 이유가 그 친구의 착함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까지는 말씀드릴게요."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왜 자신의 변호사에게 그것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 것이죠?"


서민국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방금 전 조세나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분명히 살해를 한 이유가 있다. 적어도 말다툼 끝에 충동적으로 한 짓이 아니란 뜻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반드시 충동적이어야 했다. 충동적 살인과 계획된 살인은 형량으로만 따지면 사실상 다른 범죄니까 말이다.

 

"나중에 그 이유를 모두 알고 나면 이해가 되실 거에요. 그러니 은서는 왜 그렇게 착했을까에 대한 답을 구해 보세요.

 

서민국은 순간 본능적으로 조세나의 표정에서 어떤 빈틈이 있는지를 살폈다. 이런 얘기들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진짜로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인지 알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도 드네요. 설령 그 이유를 찾는다고 해서 그것이 이 재판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서민국의 판단으로도 한은서의 착함에 어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흥미 있는 이야기 꺼리였지만 설령 그 이유를 알아낸다고 해도 그것이 재판정에서는 전혀 통하지도 않은 뜬금없는 선악 논리였다.

 

"없을 수도 있지만, 있을 수도 있죠. 그것은 모를 일 아닌가요? 아무튼 뭔가 평범하지 않다는 말은 거기엔 문제가 있다는 말일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 결국 연쇄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요. 그러니 결국 뚜껑을 열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튼 알아 보라고 하니 알아는 볼게요. 하지만 너무 황당한 질문이어서 그 답을 찾는 것이 별로 자신이 없네요. 사실 찾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흥미로운 것과 별개로 누군가가 비정상적으로 착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좀 황당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설령 그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조세나가 한은서를 죽인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누군가 비정상적으로 착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된다. 물론 반대로 누군가 비정상적으로 악하다면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재미는 있을 것이에요."

 

조세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서민국은 조세나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가질 않아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그리고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오늘 대화를 통해서 마무리 해야 할 이야기나 마저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나저나 이제 다음 재판이 코 앞이에요. 하지만 우리측 증인은 이번이 아니라 다음 재판에 데려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재판은 거의 검사 측 증인만 나오게 될 것이에요."

 

"그럼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되겠네요."

 

"그래도 괜히 지난번처럼 웃거나 해서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하지는 마세요."

 

", 조신하게 있을게요."

 

조세나가 조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서민국은 갑자기 변한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고는 잠시 당황하는 듯 하더니 결국 외면했다.

 

"검사 측은 다음 재판에서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한은서씨가 살해되었고, 그 살인범이 바로 조세나씨라고 증명하려고 하겠죠. 그리고 그 과정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두 번째 목적인데, 그것은 유죄 자체보다는 조세나씨의 형량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봐야겠죠. 그래서 아마도 한은서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주변 인물들 데려다가 일명, 눈물 쇼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재판부와 여론을 흔들려고 할 것이고, 결국 자신들의 최종 목표인 최고형을 판결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 저한테 불리한 일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는 상당히 좋은 전략이네요."

 

서민국은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은 너무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잠시 조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조세나가 또 다시 조신하게 웃었다. 그 순간 서민국도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도 대응할 수 있어요. 그 다음 재판 때 정신감정 명령만 얻어낼 수 있다면 비록 유죄는 확실하더라도 형량은 최소화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다음 재판에서 세나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잘 버텨주세요. 사실 그 동안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별로 걱정은 안되긴 합니다만."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변호사님 본인도 제가 유죄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세요?"

 

조세나가 갑자기 뜬금없이 물었다. 그리고 서민국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거야.. 일단 정황은 그러니까요."

 

"그렇죠? 그냥 물어 본 것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튼 저는 들어갈게요. 재판정에서 봐요."

 

"아니,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 볼 것이 있어요."

 

"아직도 남았어요?"

 

"왜 저를 변호사로 지정하셨죠?"

 

"제가요? .. 아셨구나. 유정이가 말했군요."

 

", 유정이는 말했다는 사실을 세나씨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 유정이가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리고 사실 그 이유는 단순해요. 똑똑하고, 적당히 정의감도 있고, 적당히 속물이기도 하고, 그리고 서변호사님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가졌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잘생긴 것?"

 

"?"

 

"농담이고요. 절실함을 가졌다는 점이 좋았어요. 사람은 절실할 때 가장 최선을 다하게 되거든요."

 

"제가 절실하다고요?"

 

"그렇잖아요. 잘나가던 로펌에서 쫓겨나 홀로 독립한 후 딱히 자리를 잡지 못한, 하지만 하던 가락은 있으니 다시 어떻게든 오뚝이처럼 되살아나고 싶은 욕망, 그것이 바로 절실함이죠. 뭐가 또 절실하겠어요. 높이 날았다가 추락한 자가 다시 올라가려고 하는 절실한 것도 없죠. 그리고 변호사님 잘 생겼다고 한 것, 농담이긴 한데 사실이에요."

 

서민국은 그 순간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리고 그렇게 멍하게 있는 사이에 조세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에 자신이 나왔던 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자리에 남아 있던 서민국의 머리 속에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물어봤던 자신이 유죄라고 생각하냐는 질문과 자신을 잘생겼다고 한 평가,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내용의 생각이 혼란스럽게 뒤섞이고 있었다. 결국 서민국은 구치소에 오기 전이나 아니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모두 그 종류만 다를 뿐 혼란스럽기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구치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여기저기 눈이 쌓여있긴 한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 자체는 이미 멈춰져 있었다.

 

 

 

 


'소설,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데렐라의 친구 - 15  (0) 2019.05.10
신데렐라의 친구 - 14  (0) 2019.05.06
신데렐라의 친구 - 12  (0) 2019.04.27
신데렐라의 친구 - 11  (0) 2019.04.23
신데렐라의 친구 - 10  (0) 2019.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