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2

아이루다 2019. 4. 27. 08:35

 

"이야 사무실 좋네~"

 

서민국은 서대문에 위치한 장유정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감탄했다. 사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사무실에 비해서 넓고 깨끗했으며 겨울 햇살이기에 많이 따뜻하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블라인드가 걷힌 창가를 통해 스며드는 맑은 아침 빛이 사무실 분위기를 훨씬 더 안락하게 보이게 했다더군다나 장유정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자신과 같이 일하고 있는 김팀장이나 남혜영보다 훨씬 젊었기에 외모를 떠나 그 젊은 자체가 주는 기운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젊음이 가진 긍정적 힘이었다.

 

"그러게, 사무실 좋네"

 

장유정 역시 서민국의 반응에 싫지 않은 듯 대꾸했다.

 

"예전에 정말로 꼬질꼬질하게 지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번듯한 사무실을 꾸렸냐? 남들 돕는 일 한다고 하면서 모은 돈 다 네가 쓰는 거 아냐?"

 

서민국은 장유정이 어려웠을 때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잘나가던 로펌 시절에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후 매우 크게 부러움을 표현했던 장유정의 예전 모습도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이다.

 

"무슨 소리야. 그럼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 돕는 일 하고 사는 사람은 평생 거적 깔고 살아야 하냐? 하여간 사고 방식이 아직도 쌍팔년도 수준이야. 나이도 한참 어린 것이."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사무실 유지할 돈이면 남들 더 도울 있는 것 아냐?"

 

"그럼 우리는? 우리는 뭐 풀 뜯어 먹고 사냐? 그러다가 우리가 다 굶어 죽으면 누가 그 사람들 돕냐? 일단 우리가 행복하고 그 사람들도 더 열심히 돕지. 우리가 무슨 아낌없이 주는 나무냐여기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고 나 역시 나를 위해서 이런 일 하고 사는 거야. 힘든 사람들 돕는 것이 내가 행복하고 그게 또 그들한테도 좋으니까 하는 거지."

 

", 그런 거야? 난 또 네가 아주 뭔가 뜻 깊은 신념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지."

 

"그래,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한참 젊었을 땐 그렇다고 생각했지내가 남들보다 유난히 좀 더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시간이 이렇게 흘러서 사십 대 나이가 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 젊었던 시절에 그렇게 생각한 것, 다 내 오만이었더라고사실은 내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도왔어. 내가 그들 덕분에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말이야. 더군다나 내 반 평생을 함께 해 온 내 친구은서한테 비교하면 나는 거의 악당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

 

"한은서가 그렇게 착했어? 너를 그 여자한테 비교하면 악당이라고 느낄 만큼?"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은서는 그냥 천사 그 자체였어. 만약 정말로 누군가 심장을 빼달라고 하면 그것이라도 빼 줄 애라니까. 솔직히 말해서 걘 주변에서 말려서 그 동안 살아 있었던 거야."

 

", 그건 좀 정신병 수준 아니냐? 그것은 착하다의 수준을 넘어 서는 건데. 아니 아무리 사람이 착해도 자신의 목숨을 끊을 정도 착한 경우가 어디 있어."

 

"네가 직접 은서를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그리고 너 같이 세상에 찌든 놈이 은서의 순수한 마음을 알 턱이 있냐? 아무튼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다는 연락도 없이 여길 다 왔냐?"

 

", 오늘 오후에 조세나 면회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만나기 전에 너 좀 보고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좀 있어서."

 

"나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고?"

 

"물론 너도 보고 싶어서 왔지. 그리고 본 김에 좀 물어 볼 것도 있고."

 

"아닌 거 뻔히 아는데 기분 좋으니까 그냥 믿는다. 커피 줄까?"

 

장유정은 서민국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커피 머신 앞으로 갔다. 그리고 캡슐을 하나 꺼내어 커피를 한잔 내렸다.

 

"요즘은 그건 것도 쓰는구나. 기부금이 꽤나 잘 모이나 봐?"

 

", 예전에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은서한테 그런 일 생기고 나서 걔가 생전에 했던 일들이 많이 밝혀지니까 사람들이 기부를 하더라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무실 얻고 새롭게 커피 머신 샀다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처음부터 우리도 은서가 많이 도와 준 덕분에 이런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던 거지. 은서 때문에 제양그룹 쪽에서 우리 재단에 기부를 많이 했거든."

 

"그들이야 뭐 세금 줄이려고 한 것이겠지."

 

"아무튼. 어떤 목적이든 그 돈이 힘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것이지."

 

"그럼 결국 그러면 이렇게 된 것도 다 한은서 그 사람 덕인 것이네?"

 

", 그런 셈이야. 근데 너는 세나에 대해서는 뭐가 더 궁금한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돌려 말하지 않을게. 내가 최근에 접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그것 좀 확인하려고조세나 평소에 정신 상태가 어땠어? 혹시나 이상한 점은 없었어?"

 

"? .. 뭐라고 해야 하나. 세나는 특이하지. 그런데 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래서 그런 특이함이 오히려 정상이었어. 작년에 갑자기 은서를 죽인 일 말고는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그냥 물어 보는 건데, 혹시 마약 같은 거 하는 느낌 못 받았어? 평소와 달리 몽롱하거나 어떤 환각에 시달리거나 혹은 심한 경우 중독 후유증 같은 증상 보인 적 없었어?"

 

"마약? 설마. 아니야. 내가 아는 한 세나는 마약 같은 것 하는 아이는 아니야. 걔가 그래 보여도 지킬 선은 칼 같이 지키거든. 젊었을 때 매일 클럽에 가서 죽순이 하면서 수 없이 많은 남자들과 놀아도 절대로 거기에서 만난 남자랑 2차도 안 가는 얘였어."

 

"그래? .."

 

"? 어디에서 세나가 마약 한다는 정보를 들었어?"

 

"아니, 정확한 것은 아니고, 조세나 사건과 별개로 우리가 하나 알아보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뭔데?"

 

서민국은 간략히 정리해서 장수철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장유정에게 설명해줬다. 어차피 인터넷에 글도 올라와 있는 이야기니 숨길 이유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네 생각에 그 미지의 약품이 마약일 수 있다? 그거지?"

 

"내 생각이기 보다 우리 사무실에 있는 김팀장이 그럴 수 있다고 해서. 나도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김팀장? 그 사람이 누군데?"

 

", 아직 모르는구나. .. 기억을 하려면.. 그 일대백 아저씨 있잖아."

 

"일대백?"

 

"그래 네가 예전에 술자리에서 만났을 때 얼굴 인상만으로 일대백까지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놀렸던 사람."

 

"아하!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너희 사무실에 합류했어?"

 

", 작년에 내가 오라고 했어. 아무래도 사람 뒷조사는 전문이니까.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고 해서 힘들게 오라고 했지."

 

"그렇구나그 사람 형사 출신이지? 그러면 그 사람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겠네."

 

", 확신은 아냐. 그래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믿는 것은 아니고. 사실 그 문제의 약품이 마약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긴 하지. 사실 그 정도 재력이면 그렇게 힘든 경로 말고도 마약 정도는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긴 하네. 요즘 TV에 나오는 뉴스들 보니 우리나라도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은 아닌 것 같다."

 

둘은 잠시 오늘 아침에 속보로 뜬 최근 시끄럽던 연예인 모발 검사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을 주제로 대한민국에 마약이 얼만큼 깊숙이 침투해왔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에 연루된 연예인들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관심 없는 걱정을 했다. 사실 진짜 걱정은 거기에 걸려든 연예인들 때문에 즐겨 보던 쇼 프로들이 갑자기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오늘 나를 찾은 이유는 세나가 혹시 마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된거야?"

 

", 큰 것은 그렇지. 오후에 만났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스럽기도 하고 해서 사실 별 기대 없이 찾아 온 거야. 오랜만에 맨 정신으로 얼굴도 좀 보고 싶어서."

 

서민국이 웃으며 말을 하자 장유정이 낄낄거렸다.

 

"하기야 생각해보니 우리는 늘 취해서 만나는 것 같다."

 

"아니지, 맨 정신으로 만나긴 하는데 끝엔 늘 취해서 끝나기에 마지막 기억은 상대편이 꽐라가 되어 있는 모습인 것이겠지."

 

"그렇긴 하네. 아무튼 오늘은 서로 맨 정신으로 헤어지겠네. 이거 좀 어색한데?"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서변호사."

 

이제 그녀의 사무실을 떠나 조세나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고 있던 서민국을 장유정 웃음이 멈춘 목소리로 불렀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불러. 긴장되게."

 

"내가 아까부터 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을 할까 말까 좀 고민이네."

 

"그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거지. 말을 안 할 거면 아예 그런 말도 하지 말아야지."

 

", 그렇긴 하지."

 

"뭔데? 빨리 얘기해 봐."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장유정의 얼굴에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서민국의 표정엔 묘한 기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대가 심각해졌다는 것은 뭔가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세나가 아니라 은서에 관한 것이라서.."

 

장유정이 말끝을 흐렸다. 일단 말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좋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이다. 특히나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서민국은 장유정을 오랜 시간 알아 왔기에 그녀가 말을 마음에 품고 사는 성격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느긋이 기다리면 알아서 하고 싶은 말들이 튀어 나올 것이다. 서민국은 별 다른 채근 없이 남은 커피만 홀짝거렸다.

 

"아까 네가 세나에 대해서 평소에 이상한 점 없었냐는 질문을 받으니까 그때 갑자기 은서와 함께 있었던 과거 사건들이 떠올랐어. 두 번 정도인데, 그때 은서가 좀 이상했거든."

 

"그게 뭔데?"

 

"한번은 한 오 년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처음 은서가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남편인 오명수와 거의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고 말을 했었어. 그것 때문에 좀 고민이 있다고. 사실 그때가 아마도 은서 입장에서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무래도 삼십 대 중반을 넘어 서면 아이에게도 산모에게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 , 그래도 요즘은 40대가 되어도 아이만 잘 낳더라."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여자 입장에서는 아이를 임신하고, 그 아이를 제대로 낳아서 키우는 것이 축복이면서도 매우 큰 두려움이거든. 그러니 임신에 관한 마지노선 나이가 넘어가는 은서 입장에서는 40대에도 아이만 잘 낳더라, 같은 말은 사실 하나도 들어오질 않지. 하나 낳고 늦둥이를 낳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면 그게 뭐가 이상해? 당연한 반응이고 자연스러운 반응 아냐? 설마 은서라는 사람이 너무도 착해서 그런 고민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아무튼 그것은 아니고, 그 당시 나도 좀 같이 고민하고 같이 속상했었는데, 그 후로 2년 정도 지나서 내가 넌지시 다시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그때는 좀 엉뚱한 반응을 하더라고."

 

"어떤 반응?"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때 느낌을 생각하면.. .. 무관심? 딱히 적당한 단어가 없네. 아무튼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아 하더라고."

 

", 나이가 더 먹었으니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이 아닐까?"

 

"그런 느낌이었으면 내가 지금 말을 꺼내겠냐? 그게 아니라 뭔가 좀 싸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분명히 2년 전에는 나한테 그 얘기를 하면서 울었었던 은서가 겨우 2년이 지나서 그 일에 대해서 너무 무덤덤하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그런 얘기를 했었는지에 대해서 조차 잘 기억도 못하는 것 같더라고. 그냥 내가 얘기를 꺼내니까 억지로 기억을 하려고 하는 듯해 보였어. 그리고는 자신은 이 세상의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고 대답했지. 그것도 내가 보기엔 전혀 거짓말 같지도 않았고."

 

"2년이 짧지만 긴 시간일 수도 있지. 그 사이에 은서씨에게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고."

 

"하여간 남자 놈들은 머리 속이 단순해. 여자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고 못 낳고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히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특히 은서처럼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사람일 경우, 그것이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바뀌는 일은 매우 힘들어. 사실 난 그 순간만큼은 은서가 약간 소름 끼치기도 했었어."

 

장유정은 말을 하다가 보니 그 날의 일이 떠오르는 듯 얼굴에 약간의 불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알았다. 그래, 나 둔하다. 아무튼 나도 그것이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네. 그럼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또 두 번째 것은 뭐야?"

 

"사실 두 번째는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뭐 그럴 수 있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네가 듣고 좀 판단을 해봐. 그런데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좀 이상하게 느낀 것 같아."

 

"그래, 말해 봐라. 나도 판단해 볼게."

 

"은서 죽기 한 일년쯤 전이었나?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수다나 떨려고 만났는데 그때 갑자기 은서가 좀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

 

"무슨 소리?"

 

"그때 내가 먼저 도착했기 때문에 심심해서 우연히 가계에 놓여 있던 책을 한 권 읽고 있었거든. 어린왕자라고 너도 알지?"

 

"어린왕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 너도 아는구나. 다행이다. 아무튼 그 책을 읽다가 보면 코끼리를 삼킴 보아뱀 얘기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 거 기억나지? , 어른들은 모자로 보는 그림인데 순수한 아이들은 그것을 커다란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켜서 위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모습을 보이는 거지."

 

".. 기억.. 나지."

 

"거짓말 하지 마라. 이미 얼굴에 기억 안 난다고 써 있구먼. 아무튼 내가 거기쯤 읽고 있을 때 은서가 도착했어. 그리고는 내가 뭘 읽고 있는지 보더라고."

 

"그런데?"

 

"은서가 그 보아뱀 그림을 보더니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자신에게는 이제 어린왕자와 같은 그런 순수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이야."

 

"? 그 그림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보이질 않고 모자로 보여서?"

 

", 비슷한데 모자가 아니라 엉뚱한 단어를 끄집어 냈지. 그게 바로 정규분포곡선이야."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 당시 나도 너랑 똑같이 반응했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런데 그때 은서가 그러더라고.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의 분포가 정규분포곡선을 따른다고 말이야. 사람들의 키, 몸무게, 외모, 지능, 재력, , 성격 등등이 모두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이 세상의 많은 것이 다양하긴 하지만 결국 정규분포곡선에 해당되는 불룩한 부분에 대다수가 모여 있고, 좌우 끝으로 갈수록 급격히 그 숫자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고 했지."

 

"그래 나도 그것에 대해서 대충은 알지만, 왜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한 거야?"

 

"그냥 보아뱀 그림을 보다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대.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이 최근에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인간의 선과 악에 관한 분포 역시도 결국 정규분포곡선에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그렇다고 했어."

 

"뭔가 좀 어렵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솔직히 그 다음부터 은서가 하는 설명을 제대로 알아 듣지는 못했어. 그런데 대충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야. 인간의 선함에 관한 정규분포곡선을 보면 중간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한 영역엔 그렇게 선하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지그런데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좌측으로는 점점 더 큰 악이 나타나고 반대로 우측으로는 점점 더 큰 선이 나타나는 것이지. 그래서 거의 극좌나 극우로 가면 히틀러와 같은 악당이 있거나 마더 테레사와 같은 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지."


 

", 그럴 수는 있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마더 테레사는 그리 선한 사람 아니었다고 하던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무튼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지. 그래 착한 사람을 그냥 은서로 바꾸자. 은서와 같은 착한 사람이 우측 끝에 존재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우측의 선함이 점점 더 심화될수록 정규분포곡선 특성상 반대편이 좌측에 있는 악도 결국 더욱 더 심화될 수 밖에 없잖아그 곡선은 무조건 좌우 대칭이니까 말이야."

 

".. 그러니까 그 얘기는 선한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악당도 많아진다? 그거야?"

 

"그것도 그것인데, 누군가 극단적으로 선해지면 누군가 극단적으로 악해진다는 뜻도 되는 거야."

 

", 뭐 그 얘기 들으니 예전에 봤던 영화 생각난다. 블루스 윌리스랑 사뮤엘 잭슨이 나왔던, 언브레커블이었나? 세상의 불운이란 불운은 다 닥치는 사뮤엘 잭슨이 자신과 반대로 세상의 행운이란 행운은 다 경험하는 사람을 찾은 얘기. 너도 봤었냐?"

 

", 나도 기억난다. 그래 그것이랑 비슷해."

 

", 그러면 아예 이상한 소리는 아니네물론 그 영화가 진실은 아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게 말이 되냐? 내가 오늘 좀 더 착해지면 오늘 누군가는 좀 더 나빠진다는 말이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다른 사람의 착함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너는 일단 더 착해질 일이 없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지. 너는 뭔가 바뀌어 봐야 더 나빠질 수나 있겠지. 아무튼 은서의 그런 설명 끝에 나온 최종 결론은 그것이었어. 자신이 선해지면 선해질수록 그만큼이나 누군가 더욱 더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거 일종의 망상증인데?"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은서는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어느 정도 믿고 있는 것 같더라고. 사실 요즘 TV에 나오는 범죄들이 얼마나 흉악하니?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고 어린 여자 아이를 성폭행하는 놈들도 있고, 인육을 유통한다는 소문도 돌고, 연쇄 살인, 묻지마 살인 등등,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범죄의 질이 너무 나빠진 것도 사실이잖아. 은서는 그런 세상에 대해서 너무도 깊게 슬픔을 느낀 것 같아. 아니 그것은 슬픔의 수준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봐야겠지더군다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으니 좌절감도 매우 심했던 것 같아. 그러니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을 자책한 것이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거의 정신병 수준이잖아? 너는 진정한 친구로써 그런 사람을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아니지."

 

", 그런데 그날 하루뿐이었어. 은서는 다시는 보아뱀 얘기도 정규분포곡선에 대한 얘기도 하지 않았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내가 한번 물어 본 적은 있었는데, 그냥 그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웃고 넘기니 나도 그냥 잊고 말았지.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나네."

 

"그래. 두 가지 일 모두 좀 이상하면서도 명확히 뭐가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의외네. 죽은 한은서란 인물의 머리 속에 그런 생각들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을 줄은."

 

", 은서도 사람이니까. 잠시 인간 세상에 내려왔던 천사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럼 너는 뭐가 내려 온 거냐? 우박이라도 내려온 건가?"

 

"뭔 소리야. 나는 그냥 조금 성질이 못된 천사지. 그런데 확실한 것은 너는 비행기에서 떨어진 똥인 것 같다. 너 같은 인간이 되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그럼 넌 똥이 얼어서 우박이 된 것이겠지."

 

장유정은 뭔가 한번 더 되받아 치고 싶었지만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화가 나면서 자연스럽게 주먹이 쥐어 졌다.

 

"그나저나 너는 오늘 나랑 같이 세나씨 만나 볼 생각은 없냐?"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기 전에 서민국이 말의 주제를 바꿨다. 과거에 몇 번 맞아 본 이력이 있는 그였기에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 내가 거길 왜 가."

 

"넌 친구랍시고 변호를 나한테 부탁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렇게 무관심하냐?"

 

"내가 무슨 변호를 부탁해. 다 세나가 나한테 시킨 일인데."

 

"무슨 소리야. 네가 처음에 두 친구 중 하나가 다른 친구를 죽였다면서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배려라고 하면서 나한테 부탁한 거잖아."

 

".. 맞다. 그랬지. 그래 그랬어."

 

장유정이 갑자기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야, 그거 아니네. 그럼 정말로 조세나가 나를 지목해서 변호를 맡아 달라고 한 거야?"

 

".. 그게, 너 절대로 세나한테 내가 그런 말 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세나가 나에게 부탁하면서 자신이 아니라 내가 부탁한 것으로 해달라고 했단 말이야."

 

순간 서민국의 머리 속은 몹시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조세나 본인이 자신을 지목해놓고는 지금 변호사인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더해서 법정에서도 남 일 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도대체 그녀는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고 또 무엇을 더 숨겨두고 있는 것일까? 머리 속은 매우 복잡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왜 나야?"

 

"왜 너냐고?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냥 내가 믿을만하고 너무 정의롭지도 그렇다고 너무 돈만 밝히지도 않는 변호사 한 명 추천해달라고 해서 네가 제격이다 싶었지. 그리고 몇 명 더 후보로 같이 추천해줬는데 결국 너로 결정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네가 지금 세나에게 선택된 것지."

 

"그래, 그건 알겠다. 그런데 머리 속에 자꾸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나에게 자신의 변호를 맡겼는지 말이야."

 

"어차피 오후에 만난다며. 그럼 만나서 물어봐. 그리고 나중에 나한테도 설명 좀 해주고. 지금 생각하니까 나도 궁금하긴 하네. 그리 잘생긴 남자도 아닌데 말이야."

 

서민국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장유정의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겨울 햇살이 그의 온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지만 그는 그저 아주 깊고 차가운 어딘가에 빠진 후 빛 하나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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