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6

아이루다 2019. 5. 14. 06:47

 

"지금까지 증인의 전문가적인 의견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명의 전문적인 의사로써, 한 명의 아빠로써, 한 명의 남자로써, 한 명의 인간으로써 피고 조세나씨의 상태에 대한 최종 평가를 부탁 드립니다." 

 

세 번째 진행된 재판에서는 서민국이 신청한 증인인 정신과 의사가 증인석에 앉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지금까지는 사전에 연습한 대로 별 무리 없이 잘 진행해왔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최종 하이라이트였다. 이 법정 안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최대한 흔들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말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논리가 아닌 공감이기에 그렇다.

 

"누구에게나 중고등학교 시기는 무척 민감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입은 작은 상처들조차도 성인이 된 후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남다르게 심각한 상처일 경우엔 오랜 시간 내면에 잠복해 있다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어른이 된 후에는 커다란 정신적 문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특히 폭력적인 면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조세나씨가 중학교 시절에 겪은 의부에 의한 성폭행 사실은 그녀에게 아주 끔찍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의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을 어떻게 집중시킬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변호사님도 방금 전 말씀하셨다시피 저 역시도 한 명의 딸을 키우는 입장으로써 그녀가 겪은 그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큰 슬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힘없고 약했던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른으로써 크게 미안함 역시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비록 정신과 의사이지만 그 정도의 심각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가진 경우를 접할 일이 그다지 흔치는 않기 때문에 당시 그녀에게 특별하게 깊은 연민을 느꼈던 기억도 납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죠하지만 어떤 트라우마들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세나 씨의 경우도 그랬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현재의 조세나씨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생각을 버릴 수가 없군요."

 

"그렇군요그래도 당시 조세나씨는 많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정신과 상담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고 봐야 하겠죠. 보통 다른 사람들은 그냥 굴복하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상처를 세상을 향한 분노로 바꾸고 말죠. 그래서 폭력적으로 행동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끝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 면에서 조세나씨는 달랐죠. 당시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법정에 앉게 된 피고 조세나에게는 그런 과거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상처였고, 결국 지금의 나이까지도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 깊숙이 지닌 채 살아온 것이군요."

 

"제가 지금의 조세나씨와 상담을 해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눈물이라도 나올 기색이었지만 그 정도까지 되지는 않았다슬픔을 가득 담은 의사의 대답을 듣고 있던 서민국은 만약 조세나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연기를 아주 잘 해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부족하긴 하지만 의도한 효과는 충분이 나타났다. 서민국과 의사,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에 법정 안의 분위기는 많이 변했기 때문이었다조세나의 끔찍한 과거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된 방청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입에서 가끔 짧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고그녀를 바라보는 판사의 시선에서도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법정 안에서 오직 검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조세나의 힘든 삶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서민국은 속으로 충분히 만족해 하면서 여전히 슬픔을 간직한 표정을 유지한 채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 왔다.

 

"검사, 반대 심문 하세요."

 

잘 조율된 악기처럼 좋은 소리가 나던 서민국과 정신과 의사 사이의 증언은 끝이 났다그리고 이제부터는 검사가 의사를 공격할 때였다. 더해서 서민국 입장에서는 자신과 의사 사이에 이뤄졌던 심문보다 검사와 의사 사이에 이뤄지는 심문이 더욱 중요했다그리고 검사의 공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방어하냐에 따라서 재판의 최종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물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서민국과 의사는 이미 사전에 검사가 할 만한 예상문제를 뽑아서 연습을 해두긴 했다. 하지만 검사가 예상하지 못한 빈틈을 발견하고 찔러오게 되면 이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서민국이 이 시점에 긴장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증인은 현재 원장의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실무로 정신과 상담의 일을 하고 있나요?"

 

",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보통 일년에 몇 명의 환자와 상담을 하나요?"

 

".. 매년 편차가 좀 있긴 한데 아마도 150 내외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원장의 직책을 맡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그때는 아마도 300명 정도 상담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정도면 많은 숫자인가요?"

 

", 저희 병원을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실제로 국내에서 가장 정신병에 관련된 첨단 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실제로 그 성과도 다른 병원에 비해서 완치율이 높은 편이라서 전국적으로 환자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재방문은 어느 정도 한정적이지만, 마음이 아파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경우엔 훨씬 오랜 기간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기에 그 정도 숫자면 꽤나 많은 편입니다. 또한 저희 병원은 환자 한 명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분배하고 각 환자들이 가진 문제를 최선을 다해.."

 

"증인, 물어 본 말만 대답하세요."

 

틈을 놓치지 않고 병원 홍보를 하려고 했던 의사는 검사의 제지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을 멈췄다. 서민국은 그런 의사를 보고는 참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이런 법정에 들어서면 떨리기 마련인데, 저 의사는 검사 앞에서도 자신이 이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한 목적을 잊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아무나 못할 일이었다.

 

"방금 말씀 중에서 장기적이라면 대략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죠?"

 

"아주 길게는 10년도 넘게 되는 분들도 있고 보통은 1년에서 3년 정도 사이라고 봐야죠."

 

"그럼 피고가 3년 정도 상담을 받은 것은 특별한 경우는 아니군요."

 

",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일년에 300명씩 20년이면 그 사이 피고와 같은 환자가 적게 잡아도 천명이 넘는 환자들이 있었을 텐데어떻게 피고에 관련된 기억들을 그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수 있을까요? 물론 저는 그렇다고 해서 증인이 거짓으로 위증을 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지금 방금 느낀 감정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는 궁금합니다물론 상담 내용 자체야 기록물에 있으니 기억이 사라졌더라도 남아있을 수 있지만, 상담 당시 담당 의사로써 느꼈던 연민과 안타까움 등과 같은 개인적 감정들을 그렇게 명시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좀처럼 수긍되지 않습니다그것도 이미 20년이나 지난 일인데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할 것이 있습니까?"

 

나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검사나 변호사나 상대 진영 쪽 증인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공략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증언의 신빙성을 낮추는 일이었다. 특히나 인간의 기억력의 문제점은 언제나 흔한 공격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 면에서 20년이나 흐른 세월은 당연히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것은 흔한 공격 패턴이기에 서민국과 의사의 예상 문제집에 이미 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조세나씨가 당시 참 예뻤기 때문입니다."

 

"?"

 

의사의 단순한 대답에 오히려 질문을 한 검사가 잠시 당황하는 듯 보였다. 보통 이런 류의 질문에서 서투른 증인들은 곧잘 상대방이 펼쳐 둔 논리의 덫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력이 멀쩡함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노련한 전문가인 상대에게 금세 주도권을 빼앗기고 방금 한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스스로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약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꾸를 하게 되면 형세는 급변한다. 그것은 바로 논리나 사실이 아닌 그냥 아주 단순한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저 산에 왜 오르고 싶으냐에 대한 답을 논리적으로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저 산에 왜 오르고 싶으냐에 대해서 '저 산에 올라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 싶다' 라고 대답을 하면 넘어갈 수 있다. 제프리 노먼이 말한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른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제가 예쁜 여자를 좀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미모가 유지되고 있지만, 20대 초반의 조세나씨는 정말로 예뻤어요. 남자가 젊고 예쁜 여자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기억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저도 의사이면서 또한 남자니까요."

 

의사가 제법 능청스럽게 대꾸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방청객 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까지 났다. 좋은 징조였다. 남자가 예쁜 여자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는 될 수 없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답변은 될 수 있었다. 순간 검사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것도 역시 좋은 징조였다. 아마도 서민국이라면 이 질문을 계속 물고 늘어지지 않을 것이다. 검사 역시 그랬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검사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그리고 그 시간만큼이나 서민국의 긴장감도 높아졌다. 일단 한번의 공격은 잘 방어를 했지만 또 어떤 날카로운 공격이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피고는 20년 전 3년에 걸쳐서 일주일에 한번씩 상담을 받았습니다. 맞지요?"

 

", 맞습니다."

 

"그런데 상담 기록을 살펴보면 피고가 실제로 상담을 한 횟수는 총 70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맞지요?"

 

"..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그 정도가 될 것입니다."

 

"1년이 55주 정도 되기에 3년은 대략 165주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70번이면 출석률이 50%도 채 되지 않는군요."

 

", 통계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사실 그것은 오다 안 오다 한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을 계속 오지 않아서 생긴 틈입니다. 제 기억으로 한 6개월 정도까지 연속으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요."

 

", 그렇군요. 그런데 그 이유가 뭐죠? 왜 피고는 상담 중에 그렇게 장기간 나오지 않았던 것인가요?"

 

"단순히 설명하기는 좀 힘든 질문이군요. 그냥 원칙적으로 설명 드리면, 원래 정신과 상담이 자신의 과거에 일어난 문제를 돌이켜 생각하는 과정이기에 어떤 환자들 경우엔 그 과정이 너무 두려워서 도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조세나씨처럼 그렇게 장기적으로 상담에 빠지는 경우는 흔히 일어나지요."

 

"그러면 그렇게 장기적으로 빠진 후 조세나씨의 상태는 어땠나요?"

 

",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전히 과거에 있었던 일들로 인해서 내적 갈등과 정신적 문제가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요."

 

"피고가 그런 자신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진정성 있게 상담에 응했나요?"

 

"진정성이란 개념을 어떤 기준에서 판단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녀가 그랬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상담에 빠진 횟수도 횟수이지만 실제로 상담 내용을 살펴보면 상담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냥 개인적 사담에 가까운 내용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전날 봤던 영화 이야기로 상담 시간을 다 채운 경우도 있고, 친구와 만났던 이야기, 회사 내에서 있었던 동료와의 갈등, 심지어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만 떠들다가 만 적도 많더군요."

 

"원래 상담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모든 이야기가 바로 상대방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되기에 그렇게 합니다. 말을 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서 진짜로 하고 싶은 말들이 튀어나오거든요."

 

",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상담 기록을 쭉 살펴본 결과로는 초반엔 그나마 정신과 상담처럼 보였지만 나중에 보면 상담 시간 자제도 30분을 넘지 못했고 그 내용도 그저 흔한 대화 주제로만 보였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증인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시도하지만 피고는 그런 시도를 농담이나 비아냥 등으로 피해가는 대화가 오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비전문가이긴 하지만 제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검사의 지적은 듣고 있던 서민국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조세나는 3년간 상담을 받긴 했지만, 사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상담 그 자체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가장 충격적인 기억조차 거짓으로 털어놓았던 그녀는 의사가 자신의 거짓말을 일년이 넘도록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실망을 했던 것이다그래서 결국 이후 상담에서 그녀는 치료보다는 재미를 목적으로 했음이 분명했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진실이 아니라 검사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였다.

 

"그런 부분이 좀 있긴 합니다. 조세나씨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서 마음을 여는 과정이 무척 오래 걸렸거든요. 그리고 그런 환자들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

 

"아예 열어야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요?"

 

"그건 아니지요. 분명히 어린 시절에 겪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물론 그녀가 겪은 과거는  역시 딸을 가진 아빠로써 매우 마음이 아픈 사건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 사건조차도 그저 피고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 아닌가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피고의 부모는 현재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피고의 주장이 진실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조세나씨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요. 거짓말은 보통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에 관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이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과 돈 많은 것을 버리면서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 법정에서는 분명히 그 거짓인지 진실이지 모를 그 이야기가 현재의 피고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질 않은가요? 그러니 이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그것은.."

 

순간 의사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나타났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검사는 증인에게 마치 피고가 지금 저지른 범죄에 유리하게 하려고 무려 20년 전 일부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는 식의 무리한 증언을 이끌어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민국이 서둘러 끼어들어서 제지를 했다. 자칫하다가는 의사가 검사의 교묘한 덫에 빠질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다행히 그의 이의제기는 판사에게 통했다.

 

"검사는 무리한 억측으로 증인의 증언을 추궁하지 마세요."

 

검사는 비록 지적은 받았지만 그 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증인과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주도권일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명백히 의사 쪽으로 기울었지만, 이 두 번째 질문은 거의 팽팽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사의 여유롭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좋지 않는 징조였다.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증인의 판단에 피고는 3년간의 상담을 마치고 나서 어느 정도 상태가 치료된 것이라고 판단했었나요?"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말씀 드리면, 정신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완치의 개념이 없습니다. 마치 한번 걸린 암처럼, 한번이라도 문제가 생기게 되면 평생 관리를 받아야 하죠. 그리고 조세나씨의 경우는 치료가 되긴 했지만 그래서 상담이 마무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조세나씨 스스로 나오지 않아서 끝난 경우니까요. 그러니까 검사님 말씀처럼 어느 정도라도 치료가 된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죠. 또한 이후 어떤 삶을 살았냐에 따라서 병은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상태로 치료를 끝냈지요?"

 

"그것은 원래 강제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만약 조세나씨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문제가 만약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이라고 판단이 되었다면 강제적으로 보호자 동의를 받아서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는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조세나씨는 그 정도까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 그러니까 조세나씨의 정신적인 문제가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다는 뜻이네요?"

 

" 그렇게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격리가 필요한 만큼 아주 심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봐서 여기 법정에 있는 사람들 모두와 상담을 하게 된다면 이때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고 결론이 나오는 사람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증인의 입장이 아닌 관련 분야에서 수십 년간 경험을 쌓아 온 전문의로써 진실된 답변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검사의 질문에 의사의 얼굴에 조금 더 긴장된 기색이 서렸다.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 검사의 마지막 말로 인해서 갈등을 느끼는 것이다. 원래 사람들은 딱히 그럴 이유도 없지만 하늘이나 잘 알지도 못하는 조상을 걸고 진실이냐고 물으면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순간 서민국의 긴장감이 수직 상승했다.

 

"여기 분들을 제가 모두 상담할 수는 없으니 그냥 정신 의학계에 발표된 통계치를 기준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략 이 중에서 약 10% 정도는 어느 정도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40% 정도는 상담을 한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권고를 받을 수준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50%정도는 괜찮지만 그래도 인생의 어떤 시점엔 한번쯤 상담을 받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적 분야의 명예를 걸고 솔직히 말씀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 그렇다면 다시 피고 이야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죠. 방금 전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의 숫자가 10%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과 조세나씨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비록 종류는 다르지만 비슷한 수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서로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대략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재판정에 있는 사람들 중,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10%는 언제든 그런 정신적 문제로 인해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뜻이군요. 그래서 폭력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심한 경우 피고처럼 살인을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지금 증인의 입장에 따르면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각자가 받게 되는 처벌 수위는 과거에 운 좋게 정신과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겠군요. 그렇죠?"

 

"?"

 

"10%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과연 얼마나 정신과 상담을 받을 기회를 가졌을까요?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신과 상담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죠. 그런데 이 법정에서는 지금 실제 죄를 저지른 사람의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연히 일어난 정신과 상담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과정인지 묻는 것입니다. 만약에 피고인 조세나씨가 과거에 일어났던 상담의 경험으로 인해 죄를 탕감 받는다면, 반대로 10%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우연히 죄를 저질렀지만 그저 과거에 상담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엄중한 판결을 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그것은 법의 형평성에 관해서 아주 큰 문제가 되질 않겠습니까?"

 

"재판장님, 검사는 지금 증인과 관련 없는 법적 영역에 관련된 판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위기였다. 서민국은 재빨리 검사의 말을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검사도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판사님,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 인터넷 청원 사이트에는 정신병이나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했을 때 형량을 줄여주는 관행에 대한 비판이 매우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는 법을 집행하는 의무를 가진 사람들로써 그런 감정적 행태에 휩싸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적으로 공감대를 얻은 그런 의견들을 그저 묵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피고가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는 과거의 일, 그것도 20년이나 지난 일을 근거로 그녀가 지금 저지른 살인의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충분히 재고가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질문에 대한 전문가의 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검사의 설명을 들은 후 판사는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증인은 검사의 질문에 답을 하세요."

 

순간 의사는 난감하다는 한 표정을 서민국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서민국은 그 순간 오늘 이 재판이 자신이 원하던 결과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직감했다. 서민국은 방금 전 검사가 한 질문을 예상 문제로 뽑아 놓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 생각해보면 알고 있었다고 해도 쉽게 답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단순히 답만 내자면 쉬웠다. 그저 검사의 말에 반대를 하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검사는 의사가 오늘 증인으로 참석한 이유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게 대놓고 병원 홍보를 해댔는데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그렇기에 검사는 의사에게 전문의로써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의 원장으로써 입장을 표명하라고 암묵적으로 압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의 답변에 따라서 그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의 미래가 바뀔 것이다.

 

이미 전 국민적인 분노를 얻고 있는 조세나였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관점에서는 그냥 단순히 의학적 관점에서 의견을 표하는 것과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로 다가온다. 앞의 것은 직업적 소견이지만 뒤의 것은 개인의 가치관이니까 말이다만약 여기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상식과 다른 발언을 하게 되면 전 국민적인 분노가 병원 전체로 쏟아질 수도 있다. 검사는 의사가 처음부터 병원 홍보를 원했지 조세나의 무죄를 증명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대답을 하고 있는 의사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여줬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목소리는 좌절감으로 인해 낮고 떨림까지 느껴졌으며 아마도 그 안에는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어서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두려움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아마도 그 모습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숨겨진 모습을 상대해 온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는 사람의 당연한 최후인지도 몰랐다. 단지 그의 무너짐이 서민국과 조세나에게 악영향을 미칠 있음이 문제였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과거 20년 전에 조세나씨를 직접 상담했던 의사의 의견으로도 조세나씨의 그런 과거가 현재 시점에 저지른 죄를 단죄하는데 있어서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는 의견이시군요.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검사는 등을 돌려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서민국의 두 손으로 자신의 양쪽 뺨을 감싸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물론 반대 심문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의사 쪽을 바라보고는 이내 포기를 했다. 그는 아예 서민국 쪽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조세나 본인 뿐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희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조세나 스스로 변호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검사 측 심문에서도 진술거부권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희망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오직 조세나만이 알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말하지 않고 있는, 이 사건의 진짜 진실을 파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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