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19

아이루다 2019. 5. 20. 07:57

 

"피고는 작년 12 14일에 친구인 한은서씨를 살해한 혐의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은서를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6월에 열린 2심 첫 재판에서 조세나는 첫 번째 증인으로 나왔다. 1심에서는 증인석에 앉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그녀였기에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서민국이 처음으로 던진 질문에 부정으로 답을 했다. 조세나의 답변이 나오고 난 후 법정 안은 크게 술렁거렸다. 비록 초반에 비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법정 안에는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로 가득했기에 각자의 작은 웅성거림도 크게 들렸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녀가 자신의 범죄를 이렇게 완전히 부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하세요."

판사의 주의가 내려졌고 곧바로 법정의 소란스러움을 가라앉았다.

 

"하지만 검찰 측에 의하면 피고는 흉기를 써서 한은서씨를 살해한 정황이 있습니다. 범행 도구도 나왔고 거기에 피고의 지문도 찍혀 있었지요. 또한 피고는 범죄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고요. 이 모든 정황이 피고가 살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지금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까?"

 

", 그 사실들은 정확히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제 친구인 한은서가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죽으려고 할 때 그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칼로 찌른 것입니다."

 

"? 그 말은 죽은 한은서씨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제 친구 은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저에게 계속 지속적으로 자살을 하고 싶다고 했고, 그날 최종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오랜 친구의 간절한 소망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내용 자체는 충격적이었지만 조세나의 표정과 말투는 차분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부탁하거나 아니면 약을 먹고 죽어가는 동안 왜 119를 부르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치명적인 급소를 칼로 찔러서 죽음을 앞당긴 것이지요?"

 

"은서가 그렇게 해주길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바라보고 있고, 심지어 칼로 목뒤를 찌르는 행위는 명백한 살인입니다."

 

",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알고 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은서의 죽음이 그렇게 자살로만 끝나면 그녀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영원히 묻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억울했기에 저는 은서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살인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은 훨씬 크게 이슈화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씀은 한은서의 자살을 이슈화 시키기 위해서 일부로 살인처럼 꾸몄다는 뜻인가요?"

 

"대략 비슷합니다하지만 다시 정확히 설명 드리자면 저는 살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의 죽음의 과정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왜 그런 짓을 했죠제 판단으로 피고에게 아무런 이득이 될 것도 없는데요."

 

"저에게 이득이 될 것은 없지만, 제 소중한 친구 한은서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 숨겨진 진실을 이렇게 공개된 법정에서 밝힐 수 있는 기회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진실을 밝혀야 했기에 스스로 살인자의 누명까지 쓰면서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죠?"

 

"은서는 오랜 시간 동안 어떤 한 인간의 더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이용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천사라고 칭송했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악몽 그 자체였죠."

 

"피고의 판단에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녀의 남편인 오명수입니다. 지금 제양그룹 회장으로 있는 그 인간이 바로 은서를 철저하게 이용했지요."

 

오명수란 이름이 거론되자 사람들이 또다시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판사는 또 다시 경고성 발언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로에 이번엔 본인도 많이 놀란 탓인지 목소리가 그리 엄중하지는 않았다.

 

"한은서의 남편인 오명수가 어떻게 그녀를 어떻게 이용했다는 말인가요? 그 말을 증명할만한 합당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경우 증인은 위증죄로 추가 고발될 수 있습니다."

 

"물론 증거도 있습니다. 그 전에 우선 오명수가 제 친구 은서에게 저지른 일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하세요."

 

"오명수는.."

 

계속 차분히 말을 해왔던 조세나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목이 메이는 듯 말을 멈췄다하지만 서민국은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한 태도로 그녀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인간은 사람에게 처방이 금지된 약품을 은서에게 몸에 좋은 영양제라는 이름으로 장시간 복용시켜 왔습니다. 그 둘이 결혼을  후부터 은서가 죽기 전까지 쭉 말입니다."

 

"그것이 대체 무슨 약품이죠? 그리고 어떤 용도인가요?"

 

조세나는 원래 차분한 태도를 되찾은 후 보니테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했다. 과거 어떤 더러운 목적으로 개발된 약품인지, 사람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또한 장시간 복용하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를 말했다.

 

"그런데 그런 용도를 지닌, 거기에 부작용까지 확실한 약품을 오명수가 아내인 한은서씨에게 장기가 복용을 시켰다고요?"

 

",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약의 효과로 인해서 원래도 착했던 은서는 오명수가 이용하기 딱 좋은 상태의 착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어떤 의도든 간에 사람이 착해지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변호사님. 사람이 너무 착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시죠? 당연히 모르시겠죠. 제가 보기에 그리 착한 분은 아니니까 말이에요."

 

순간 방청객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났다. 서민국 역시 잠깐 실소가 났지만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 저는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지요그리고 제 주변에서도 그렇게 착한 분들도 없고요."

 

"사실 사람이 너무 착해지게 되면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그렇게 착한 사람이 살아가기에 너무도 악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보니테임을 오래 복용하게 되면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비극에 대해서 끔찍한 공감을 경험하고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그러니 하루만 TV 뉴스를 보고 나도 온몸이 아프고 열이 나며 식은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조세나는 설명을 하다가 또 다시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패륜적인 폭력, 악랄한 행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범죄들이 매일 일어나는 사회입니다하지만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은서는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희생자들에 대해서 끔찍한 공감을 멈출 수 없었지요. 10만원이 없어서 자살한 사람들, 자식을 버린 부모들쳐다본다는 이유로 사람을 찌르는 세상은 은서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은서는 버티면서 살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엔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더해서 자신에게 대해 높은 기대치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실망시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은서는 낮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천사 같은 미소로 지냈고 밤에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악몽을 꾸면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 듣고 보니 참 힘들었겠군요."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착해져 본 적이 없을 테니까요. 결국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 받던 은서는 어느 날부터 선과 악의 균형론에 대해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또 무엇이죠?"

 

"단순히 말하면 선한 존재가 있는 만큼 악한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처럼 극단적으로 착한 사람이 존재하기에 그만큼이나 나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좀 황당하지만 그렇다고 치고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뭐가 바뀌죠?"

 

"그 이론에 따르면 자신처럼 착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만큼이나 나쁜 악당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설마 그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것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살을 위한 핑계는 될 수 있었지요. 은서는 사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언제든 죽고 싶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상황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자살을 하더라도 스스로 납득할만한 이유가 필요했죠그러니 최면을 걸 듯 자신이 죽어야 악도 줄어들 것이라고 믿고 싶어했습니다."

"지금까지 피고가 말한 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둘째치고, 제가 아는 한 그 누구도 한은서씨가 그런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피고만 지금 유일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피고만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수가 있었지요?"

 

"제가 알아냈으니까요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그 수준의 고통을 겪어 본 자만이 알아 볼 수 있거든요."

 

순간 서민국의 머리 속에는 조세나의 삶에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고통이 존재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스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사이 조세나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제가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은서가 체념한 듯 모두 털어 놓더군요. 그녀의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자살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처음엔 저도 말렸습니다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은서는 최종 결심을 하고 저에게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할 때라고 했을 때 더 이상 저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고 또한 더 이상 말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은서의 결심을 도와주기로 했죠. 대신 저는 은서 모르게 한 가지 추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그것이 바로 은서의 죽음을 통해서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오명수의 가면을 벗겨내고 악마와도 같은 추악한 진짜 얼굴을 드러내게 하는 일이었죠."

 

"설령 그 효과의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오명수가 단지 자신의 아내를 착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악마처럼 묘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요?"

"그냥 그러기만 했다면 변호사님 말씀이 맞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오명수는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모든 것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이 가장 이용하기 용이한 대상으로 은서를 골랐고, 그녀에게 접근해서 마음을 얻어내고,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한다고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그렇게 전략적으로 은서를 자신의 짝으로 정하고는 언론에서 그들의 결혼을 현대판 신데렐라라고 부르면서 이슈화 되도록 했죠. 그리고 그 이후 착한 은서를 통해서 그룹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한은서씨를 통해서 그룹 이미지를 통째로 바꿨다고요?"

 

서민국은 이제는 모두 이해를 하고 있었기에 이미 아는 이야기이지만 놀라는 척을 했다.

 

", 맞습니다. 그 둘이 결혼을 하고 나서 은서는 끝없이 사회 사업에 전념했습니다. 타고난 성격에다가 약에 의해서 강제로 만들어진 공감능력이 그녀를 그냥 살 수 없게 만든 것이죠더군다나 제양그룹은 전폭적으로 은서에게 많은 예산을 밀어줬습니다. 기업 입장에서 기부는 세금 탕감 효과가 있으니 손해 볼 일도 아니죠. 그리고 은서 입장에서 보면 날개를 단 격이 된 것입니다그녀는 아주 열심히 일을 했고 그런 은서의 천사 같은 행동들이 언론에 노출될 때마다 제양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는 수직 상승했습니다."

 

"하지만 오명수씨 역시도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왜 스스로 하지 않았지요?"

 

"대중 앞에 노출될수록 본인의 한계가 드러날 테니까요.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결국 그 더러운 본심은 표정에서, 태도에서, 말투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명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은서와 같은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더해서 착한 아내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남자라는 이미지 역시도 여심을 공략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요."

 

조세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은서는 재벌 그룹의 회장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늘 낮은 자세로 다른 사람을 대했습니다그런 겸손한 태도와 아픔을 가진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늘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은 그녀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었습니다물론 그것들은 좋은 것입니다결국 제양그룹이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용도로 철저하게 이용되고 말았지만요."

 

"피고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그런 면도 있겠군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적인 약물 유통 및 투여 이외에 더 큰 범죄가 될 수 있나요? 결국 한은서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말입니다."

 

"오명수의 그런 행위들이 범죄가 될 수 있느냐를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를 법을 통해 처벌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이 사건을 크게 이슈화 시킬 결심을 한 것입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야 오명수가 은서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제양그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제대로 바로 잡힐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오명수는 처방이 금지된 약물을 불법으로 수입해서 은서에게 투여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은서는 불임이라는, 여자로써 가장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고, 더해서 과도한 공감능력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 속에 살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간접 살인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정작 오명수 본인은 다른 여자를 첩을 두고 거기에서 자식까지 낳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의 있습니다. 지금 변호사와 피고는 본 재판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피해자의 남편인 오명수의 죄를 논하고 또한 증명되지 않는 개인 사생활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별도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도 없이 피해자를 피고가 죽이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충격적인 폭로에 정신이 팔렸던 검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판사가 서민국에게 물었다.

 

"변호사는 피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한은서가 생전에 남긴 동영상을 보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판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렇게 하라고 했다서민국은 미리 준비한대로 USB를 꺼내서 법원 행정 담당자에게 건냈다잠시 시간이 흐른 후 벽면에 있는 영사막으로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이 쏘아지기 시작했다그리고 살아 생전 유서처럼 남긴 한은서의 목소리가 재판정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저는 한은서라고 합니다...'

 

영상을 통해서 살아 생전 한은서의 모습이 나타나자 금세 그녀를 알아 본 사람들 입에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그렇게 죽기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천천히 차분하게 읽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영상 자체로만 보면 극적인 내용은 없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죽는 것이며 그 죽음을 도와준 조세나에게는 그 어떤 죄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짧은 영상은 조세나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세나가 오늘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와서 한 모든 말에 대한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있는 첫 단추가 되기에도 충분했다.

 

"여기 이 문서는 영상에서 한은서씨가 방금 들고 읽었던자필로 쓰고 공증까지 받은 그녀의 유서입니다."

 

서민국은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제출 한 후 자신의 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어 오른 손에 들고는 말을 이었다.

 

"이 자료는 자신의 여동생이 비밀을 알게 된 후 실종되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장수철이란 인물이 찾아낸 자료로써, 지난 수십 년간 제양그룹과 보니테임을 수입한 병원 사이에 오간 물품과 돈 거래 내역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들입니다. 너무 양이 많아서 일부만 들고 나왔으며, 추후 보강해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민국은 한 무더기 서류 뭉치를 제출했다거기엔 장수철이 병원 분쇄기를 뒤져 하나하나 힘들게 이어 붙인, 그의 처절한 노력이 담긴 문서들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서류들은 지난 10년간 제양그룹의 매출현황과 죽은 한은서씨가 언론에 노출된 빈도수의 상관관계, 그리고 제양그룹에 대한 사람들의 브랜드 선호도가 변화 온 추이를 정리 해 놓은 자료입니다. 물론 이 자료가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통계 자료들을 통해서 오명수가 한은서를 통해 노린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을 수는 있습니다. 참고 자료로써 제출합니다."

 

"그리고 피고인 조세나씨는 자신의 이름으로 제양그룹의 회장이자 죽은 한은서씨의 남편인 오명수를 고발할 것이고, 또한 본 변호사는 검찰은 이후 조세나씨의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오명수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서민국은 거기까지 단숨에 말하고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할 것이고 또한 저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입니다. 피고는 왜 이 모든 사실을 1심이 진행될 당시 다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조세나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서민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그녀 특유의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변호사님은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요?"

 

순간 서민국의 얼굴에 잠깐 미소가 스쳤다가 빠르게 사라졌다맞는 말이었다. 조세나에게 따로 듣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그는 그녀가 그녀 자신을 좀 더 변명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주길 바랬지만 그녀는 아마도 알고도 거절한 것이리라.

 

서민국의 생각에 그녀가 이 사건을 2심까지 끌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사건이 터짐과 동시에 조세나가 오늘 법정에서 한 이야기들이 함께 나왔다면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녀가 오늘 한 이야기들은 초반부터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과거와 달리 요즘 시대의 언론은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지 여부에 의해서 생존이 결정된다. 그러니 그들은 진실이 담긴 내용보다는 더욱 더 자극적인 내용을 위주로 다루게 된다. 신데렐라가 된 친구를 오랜 시간 질투해 오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인한 한 여자의 사연과 친구를 위해 사회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는 한 여인의 사연 중에서 어떤 진실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게 될까? 어떤 마음이 더 진심으로 느껴질까? 딱히 시도해보지 않아도 뻔한 승부였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은 누군가의 진심의 여부나 어떤 것이 정말로 가치가 있는지 믿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상황에 놓였는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그러니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서로 다른 말을 할 때면 주로 불행한 사람의 말을 믿으려고 한다. 결국 조세나가 억울하게 치른 6개월 정도의 감방 생활의 불행은 그녀의 진심을 믿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생각에 얼마나 억울하면 여자의 몸으로 감옥까지 가면서 저렇게 진실을 밝히려 하겠는가 싶을 테니까 말이다.

 

세 번째로는 꽤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것은 추정이 아닌 거의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서민국 자신과 관련된 것인데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는 것과 찬물에 넣은 후 서서히 끓이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만약 조세나가 처음부터 모든 진실을 털어 놨다면 서민국은 끓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팔짝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무죄의 증거들을 수집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그녀의 계획 자체를 말리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서민국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변호사라면 모두 그랬을 것이다. 그 계획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제양그룹이라는 거대한 기득권 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었고, 딱히 오명수에 관한 증거물들을 가지고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더군다나 이미 한은서가 영상으로 남긴 조세나에 대한 무죄의 증거가 존재하는데 어떤 변호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을 조세나의 계획처럼 풀어나가려고 하겠는가? 그저 조세나의 무죄만 증명하는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려고 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 사건을 맡았던 서민국에게 사건의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한은서에게 그런 짓을 한 오명수에 대한 정의로운 응징도 별 다른 의미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세나의 침묵이 길어짐에 따라 오히려 서민국은 자발적으로 진실에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서 그는 서서히 끓어가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처럼 그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에 대해 무뎌졌고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조세나의 침묵은 서민국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꿔놓은 힘이 된 것이다처음엔 그냥 적당히 유명해지고 최대한 빨리 자신이 성공했던 시절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서민국을 어느새 진실을 파헤치려고 노력하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법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던 순수했던 그 자신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물론 서민국이 조세나에 대해 느끼고 있는 미묘한 감정과 이제는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는 절박함이 더해진 점도 컸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만 증인 심문을 마칩니다."

 

서민국은 조세나의 마지막 발언에 별다른 이견을 표시하지 않은 채 심문을 마무리 한 후 자리에 돌아왔다. 하지만 법정 안의 사람들은 모두 서민국의 마지막 질문과 조세나의 마지막 답변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궁금해 하고 있었다. 심지어 판사조차도 그 답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한 듯한 표정을 보였지만 서민국이 그냥 자리로 돌아가 버리자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검사 측 반대 심문 하세요."

 

하지만 검사 쪽은 자신의 보좌관과 한참을 논의한 후 반대 심문은 다음 재판 때 하겠다고 말했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검사는 오늘 조세나가 처음으로 증언한 내용에 대한 파악을 하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반대 심문을 계획하는 것은 더욱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서민국은 결국 검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조세나의 살인죄 자체는 한은서가 생전에 남긴 동영상을 통해 이미 무죄임이 증명된 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다른 죄목으로 물고 늘어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살인죄보다 더 중할 수는 없다.

 

특히 조세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오명수를 법정 증인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눈 앞의 쌓인 증거들만 봐도 오명수에게 그리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더군다나 오명수의 입장에서는 법정 증인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이미지 손상을 입을 수 있다. 평소 쌓아 놓은 이미지가 좋은 만큼 그것이 무너지는 것도 아주 작은 틈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리한 그가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또한 검찰 역시 재계 서열 2위의 그룹 회장을 확실한 증거 없이 수사를 시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될 것이고 검찰 고위층에서는 머리를 맞댄 후 결국엔 출구 전략을 쓸 것이다. 오명수를 끌어 들이지 않기 위해서 조세나의 죄를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 방법이다. 그들에게 정의란 숨겨진 진실을 캐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보지 못하게 더욱 더 깊이 묻어서 아무도 모르게 만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또한 예상은 했지만 조세나의 상대들은 아주 대단했다. 보니테임을 불법으로 수입해서 유통한 병원의 원장은 갑자기 급작스럽게 퇴직을 한 후 외국으로 떠났다. 주변 지인들에 의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양그룹의 페이퍼 컴퍼니였던 회사는 금세 폐업을 한 후 바지 사장으로 있던 인물도 행방이 묘연해졌다. 법원은 죽은 장수철씨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한 병원과 제양그룹 사이에 일어난 불법적 거래에 대한 증거 문서들은 취득 과정의 불법성을 이유로 아예 증거물 자체에서 제외했다제양그룹은 조세나의 증언 직 후 그녀를 바로 고소했지만 시간이 지나 언론의 관심이 어느 정도 줄자 슬며시 취하를 했다.

 

그럼에도 조세나의 무모한 계획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2심에서 그녀가 터트린 폭탄은 신데렐라 살인사건 이후로 딱히 호재가 없었던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 그들은 금세 태도를 바꿔 조세나의 진술을 기반으로 해서 오명수의 의혹에 관한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언론이 집중한 것은 오명수의 내연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오명수의 숨겨진 사생활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사이 제양그룹 계열 회사의 CF를 다년간 계약했었던 여러 명의 여자 연예인들 이름이 오르락 내렸고 그때마다 그들의 소속사에서 소문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대중의 관심만이 살길인 언론과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씁쓸한 풍경이었다. 또한 수 개월에 걸쳐 조세나를 악녀로 욕했던 사람들 중에서 단순히 비난의 대상을 제양그룹으로 옮겨 탄 사람들도 많았다. 그로 인해서 세상은 한참을 시끄러웠고 조세나와 한은서 그리고 제양그룹의 오명수와 얽힌 일에 대해서는 이 땅에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졌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던 조세나는 자살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엮이면서 완전한 무죄를 선고 받지는 못했어도 집행유예 2년으로 최종 선고가 되었다. 그리고 조세나는 2 선고가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어 법원을 나서던 날 그녀를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하늘이 무너질 듯한 슬픈 표정으로 펑펑 눈물을 흘림으로써 자신이 해 온 일의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누군가의 표현처럼 그녀가 법정에서 말한 모든 진술의 증거는 그녀가 흘린 눈물로 완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찍힌, 누가 봐도 옆에서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처연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사진 한 장은 다음 날 신문 기사 1면에 실림으로써 대미를 장식했다. 그 사진 한 장이 조세나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를 통째로 바꿔 놓은 것이다. 결국 이후 조세나는 이제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를 죽인 잔혹한 범죄자에서 친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스스로 감옥까지 간 용감하고 의리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찬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효과로 인해서 인터넷에서부터 신데렐라 살인사건에 관련된 제양그룹과 오명수의 비리를 파헤쳐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동시 다발적인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마도 조세나가 법정에서 터트린 진실은 법적으로는 거의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들이 가진 힘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세나는 제양그룹과  회사의 사장인 오명수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것이 바로 기업 브랜드 이미지 손상에 의한 매출 감소였다. 브랜드로 흥한 기업이 브랜드로 망해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오명수 개인에 대한 직접 죄를 묻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가 가진 것의 일부는 빼앗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은서라는 이름을 가진 누구보다도 착했지만 그로 인해서 누구보다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여인에 바치는 친구 조세나의 마지막 진혼곡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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