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죽음경험자 - 2

아이루다 2019. 6. 11. 08:04

 

2. 일석이조

 

"저희 쪽에 들어 온 다른 의뢰 건이 하나 있습니다. , 별로 특이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것이 좀 까다롭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실패할 가능성도 있고.."

 

백사장은 마치 이미 연습해 둔 것처럼 막힘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쭉 이어갔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또 다른 의뢰 건은 돈 많은 부자가 자신의 아들이 일으킨 사고를 조용히 처리해 달라는 요청이라고 했다그 의뢰인의 자식은 부자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하게 자라서 한없이 철없는 아들이었는데 평소에 비싼 고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길 즐겨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평소처럼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취한 채로 차를 몰았는데, 결국은 사람을 치는 사고를 내게 된다하지만 과속에 음주까지 한 상태라서 겁이 나서 뺑소니를 쳤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사람은 결국 죽었다. 분명히 그런 행동은 나쁜 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종류의 인간이 자신이 사고를 내서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싣고 병원에 가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었을 것이라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그런데 그 철없는 아들이 천운이라도 타고났는지사고가 났을 당시 해당 도로는 차 한대 지나가지 않았고 평소에도 인적이 드문 곳이라서 사고 장면을 본 목격자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그래서 결국 경찰들도 범인을 잡을 수 없는 뺑소니 사고가 되고 말았다. 사망 신고를 받은 경찰은 며칠 간 해당 지역을 탐문 조사를 하다가 결국엔 사고 목격자를 찾는다는 커다란 플랜카드 하나 내걸고는 사실상 조사를 마무리를 지어 버렸다. 그래서 철없는 자식은 자신의 삶에서 닥쳐 온 아주 큰 위기 하나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행운은 딱 거기였다 보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죽은 남자의 아내의 동생, 그러니까 처남이 경찰이었던 것이다. 비록 사고가 난 지역이 자신의 관할 지역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매형이 새벽에 뺑소니를 당하고 그 범인을 잡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본인 스스로가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는 한참 시간이 지나도 포기하지 않고는 계속 그 사건에 파해 쳤는데수 없이 사고 현장에 가서 조사를 하다가 운 좋게도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는 작고 붉은 색 플라스틱 파편 하나를 주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조사를 해보니 그 파편 조각이 사고를 낸 차량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가능성이 컸다. 진짜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하지만 그 경찰의 행운은 당연히 철없는 자식에게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는 불운이 되었다.

 

경찰은 해당 파편 조각의 성분을 의뢰하고 그 성분 분석을 통해서 해당 차량의 종류를 알아낼 수 있었다그것은 어느 특정 회사의 차량에 장착된 범퍼의 일부였는데, 다행히도 흔치 않는 제품이라서 국내에서 겨우 오백 대 가량 운행되고 있을 뿐인 차종이었다더군다나 파편과 같은 붉은색 색상의 차만 골라내고 나면 겨우 백대 정도만 그 대상이 되었다. 물론 백 대도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매형의 죽음을 해결하고 싶은 처남의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숫자였다.

 

경찰인 처남은 이후 대상이 되는 차주들의 연락처를 구해서 직접 차주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연결이 되면 사고 당일 날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최근에 차량 수리를 한 적이 있었는지 물었는데, 이때 순서에 따라서 전화를 받게 된 철없는 자식은 통화 중에는 대충 둘러댔지만 결국 겁을 덜컥 먹게 되었다. 실제로 자신이 사고 후 범퍼 수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경찰이 본격적으로 조사를 하시 시작하면 자신의 범죄가 드러나는 것은 한 순간이 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그제서야 제대로 겁이 난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부모에게 털어 놓으며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몇 주 전에 자신이 술을 먹고 사람을 쳐서 죽이고는 겁이 나서 뺑소니를 쳤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부모는 당연히 엄청나게 화를 내지만  자식에 그 부모였던 것이다. 부모는 그런 별 일도 아닌 일로 자신의 귀한 자식 인생에 빨간 줄을 그을 수 없으니,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사장의 사무실에 처리 해달라고 의뢰를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일을 완전히 무마시키는 조건으로 2억을 제시했습니다."

 

현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 왔지만 그것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분명히 돌아가는 상황만 들으면 그가 오랫동안 교육 받아왔던 도덕적 잣대에 의해서 제법 화가 날만한 일이지만 그는 현재 그런 감정 조차도 담고 있기가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저희는 이번 일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1억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고객님도 그 후보 중 한 명이지요."

 

현수는 순간 1억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1억이란 돈을 제시하는지 불안하기도 해서 섣불리 뭐라고 대꾸하지 못하고 백사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잠깐 생각해봐도 이런 사건에서 그가 시킬 일은 결코 합법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일단 저희 쪽에서 구상한 해결책은 이렇습니다적당한 사람 하나 구해서 그 부자 집 아들내미 대신 자수를 시키는 것이죠. ,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하고, 상황도 꾸며야 하긴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 얘기는누군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는 뜻인가요?"

 

현수는 백사장이 제시한 해결책이라는 것이 가짜 자수라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상상도 못해본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쪽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자신이 들어와 있는 퇴락한 건물처럼 밖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셈이죠. 그런데 뺑소니 사고라고 해도 많아 봐야 5년 형입니다. 그리고 피해자와 합의를 잘 봐서 정상 참작이 되면 집행유예까지 떨어질 수 있을 정도죠. 하지만 저쪽에 경찰도 끼어 있고 해서 그렇게까지 하기엔 힘들 것 같고, 저희는 대충 2 정도 보고 있습니다. 그 정도 감옥 생활에 1억을 받는 것이죠. 괜찮지 않습니까?"

 

현수는 백사장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가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처지군요."

 

"뭐 일단 겉으로 들어난 형식만 그렇습니다."

 

"? 그럼 뭔가 더 있나요?"

 

"당연히 있지요. 사실 이 일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요즘 1억 준다고 하면 2년 정도 감방 가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넘쳐나거든요."

 

현수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지만 듣기에 좀 씁쓸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얼마 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식조사에서 1억이면 얼마든지 감방을 가도 괜찮다고 했다는 비율이 제법 나왔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오지랖과 같은 무의미한 걱정이 오래된 버릇처럼 잠시 머리 속을 스치고는 흔적도 없이 금세 흩어졌다.

 

"그렇다면 왜 저에게 이 일을 제안하시죠?"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놈들을 당췌 믿을 수가 없어서요. 일단 자수를 하게 되면 경찰이 사건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묻게 될 텐데 아마도 그때 조금만 틈을 보여도 집요하게 파고들 겁니다. 특히 그 죽은 사람의 처남이 개입하게 되면 억울함을 풀려고 반드시 진범을 잡으려고 할 텐데, 그때 서투르게 거짓말을 하려다가는 금세 들통날 수 있지요. 그리고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취조를 받게 되면 겁을 내게 됩니다. 경찰들이 취조과정에서 매우 심하게 공포심을 자극하거든요. 그래서 초범들의 경우엔 쉽게 무너지지요."

 

"그럼 저는 다른가요?"

 

"고객님은 단순히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보통 돈 주면 감방 가겠다는 놈들은 그저 그 돈으로 놀고 먹으려는 놈들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니까 감옥도 갈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그래서 쉽게 무너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고객님은 다릅니다.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놀고 먹을 돈이 아니라 절실하게 필요하죠. 그러니 저희가 믿을 수 있지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고객님에게는 남들과 달리 감방 생활을 아주 깔끔하게 해 낼 비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제가 무슨 대단한 조폭 조직 소속도 아닌데 무슨 대책이 있죠?"

 

현수의 질문에 백사장은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고객님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아주 특수한 능력이 있잖아요그것을 잘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최대한 빠르게 형을 선고받고 나서 최종 확정되면 그때 감방 안에서 자살을 하시면 됩니다. 아주 깔끔하지요. 그런데 고객님은 자살을 해도 다시 되살아나잖아요. 그러니 그야말로 완벽한 처리가 되는 것입니다."

 

백사장은 얼굴 가득히 만족감이 든 표정으로 현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야, 라는 표정이었다그리고 한편으로는 네가 지금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결국 자살을 해도 다시 살아난다는 너의 말이 처음부터 거짓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지, 라는 표정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현수 역시도 그 순간 백사장의 머리 굴림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부자 집 아들은 죄를 면할 수 있게 해주고, 백사장 본인은 중간에서 돈을 벌고자기 자신은 지금 본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조사 의뢰 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게 된다하지만 백사장의 진짜 목표는 자신이 죽은 후 되살아나고 있다는 주장을 스스로 완벽히 증명하게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러다가 혹시나 죽으면 자신의 몫인 1억까지 다 먹으면 되는 것이고, 정말로 살아난다면 자신의 말이 사실이니 그 돈으로 원하는 대로 추가 조사를 해주면 되는 것이다그로서는 이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전혀 손해 날 것이 없었던 일석이조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사고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진범은 아니지만 모르기에 진범이라고 믿는 범인은 잡아서 억울함은 어느 정도 풀어졌을 것이고, 그 범인이 감옥 안에서 자살을 했다면 더욱 더 마음이 풀릴 것이다. 원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생명은 자신의 행복에 도움이 될 때 까지만 소중하다. 혹은 잘해봐야 자신과 별다른 관련이 없을 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 경우라면 그 존재의 생명은 개똥보다도 더 가치가 없다.

 

"솔직히 심정으로 감탄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사장의 머리 굴림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를 처음 봤을 때 느낌, 그러니까 장사꾼이란 느낌이 확실히 맞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아주 체질에 잘 맞아서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별말씀을. 아무튼 하실 생각은 있으시죠? 사실 요즘 다들 억억해서 그렇지 1억이란 돈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제안이 정말로 흔하지 않는 기회라는 뜻이죠."

 

맞는 말이었다. 1억 버는 것, 쉽지 않는 일이었다. 요즘은 TV에서 하도 쉽게 억 단위가 거론되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개인이 그 돈을 벌려면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돈이었다. 그리고 백사장은 작정하고 자신이 노리는 진짜 목표, 그러니까 현수가 정말로 되살아나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의도는 아예 숨기기로 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현수 입장에서도 딱히 그것을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그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꼭 증명뿐만 아니라 정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달콤한 제안을 듣고도 바로 썩 내키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솔직히 좀 겁이 나네요. 그렇게 되면 경찰에게 취조도 받아야 하고, 판사 앞에서 재판도 받아야 하고, 감방에도 가야 하는데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불안하기도 하고요."




 

태어나서 한번도 감방에 가본 적이 없는, 아니 경찰서 자체를 드나든 적이 거의 없는 현수의 입장으로써는 당연히 드는 걱정이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찰서에 가게 되면 제가 설명한대로만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되더라도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변호사를 붙여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은 아마도 아주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관되는 날 며칠 내로 편히 떠날 수 있는 약을 넣어 드릴 것입니다. 우리가 불법적인 일을 하긴 하지만 그 방면으로는 꽤나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 현수는 그 표현에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백사장의 방금 말한 표현처럼 그가 경찰, 변호사, 그리고 교도소 내부까지 뻗어 있는 이들의 영향력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 법치국가라고 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저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고 있는데 그가 하는 말들이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고 있는 말은 아닌 듯 싶었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현수는 망설여졌다.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기분이 그랬다.

 

"아직도 고민이신가요?"

 

백사장은 너는 결국 우리랑 거래하게 될 거야, 라는 확신이 담긴 표정으로 현수의 긍정적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네요."

 

"혹시 신분 때문인가요?"

 

현수는 백사장의 질문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지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채현수라는 인간, 그러니까 어찌되었건 간에 자신이 36년간 살아온 한 남자가 공식적으로 소멸되는 문제였기에 그랬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섯 번이나 죽긴 했지만 그는 다섯 번 되살아났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살 시도는 당연히 혼자 있다가 죽은, 그리고 결국 죽지도 못하고 되살아났기에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은 줄 몰랐던 죽음이었다. 그러니 살아나게 되더라도 자신의 여전히 채현수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 교도소에서 자살을 하게 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죽는 것이고 결국 자신은 공식적으로 죽은 것이 된다. 아무리 예전처럼 되살아나더라도 자신은 결코 더 이상 채현수일 수가 없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어차피 최종적으로 완벽히 죽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었기에 그런 문제는 별 것도 아닌 것일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 황당하게도 그 문제가 몹시 신경에 쓰였다.

 

"거기에서 죽으면, 제가 더 이상 채현수로 살 수 없는 것이죠?"

 

"역시 그 문제가 걸리셨군요. , 그렇죠. 그런데 저희 쪽에서 이미 대신할 신분을 다 마련해뒀습니다. 되살아나기만 하면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주민등록번호 정도는 새로 외워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겠지만요."

 

백사장은 그런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답을 했다. 하지만 현수는 이상하게도 새로운 신분을 이용한 해결책을 들어도 별 다른 감정적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 그의 부모님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그럼 저희가 좀 더 쓰지요. 추가로 모든 처리가 다 끝나면 오천 더 드리겠습니다. 저희로서는 분명히 손해이긴 하지만, 고객님도 되살아난 후 살아갈 돈이 필요할 테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백사장은 현수의 그런 심정을 모른 채 단순히 그가 돈 문제로 인해 결정을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 추가적인 돈을 제안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돈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쪽 세계를 잘 모르는 현수 입장에서도 대충 짐작하건대 아마도 백사장은 의뢰비로 최소 3억 이상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원래 진짜 장사꾼은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패를 모두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렇게 즉석에서 오천을 더 올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름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현수에게는 자신이 왜 자꾸 되살아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래야 영원히 죽을 수 있다. 그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죽으면 돈이 얼마나 남아 있든,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든, 누가 억울한 일을 당하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대로 된 죽음만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목표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돈 때문은 아니었지만 결국 마음이 정리되었다.

 

"정말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백사장은 협상이 잘 된 것에 크게 만족하는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백사장이 내민 손을 가볍게 잡은 후 현수가 물었다.

 

"일단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제가 며칠 내로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그때 다시 사무실에 나와서 저랑 실전 연습 좀 하시고 일주일 정도 후에 자수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제가 만들어 놓은 사고 당일 날 시나리오가 있으니 가서 읽고 숙지하셔야 합니다. 완전히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읽으세요. 그리고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상상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을 때 당황하더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취조 하는 경찰들에게도 저희 쪽에서 손을 써 놓을 계획이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이렇게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백사장은 이미 준비해 둔 A4 용지로 열 장 정도 되는 분량의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현수가 몸을 거의 다 일으켰을 때쯤 백사장이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뭔가 망설이는 듯 앞 문장만을 말한 채 잠시 동안 침묵 속에 있었다.

 

"?"

 

현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잠시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남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현수는 대답은 하지 않고 얼굴에 '그게 뭔데요?' 라는 표정만 보였다. 그러자 백사장은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말을 이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질문인데, 왜 그렇게 죽고 싶어하시죠?"

 

순간 현수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리고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들은 빠르게 사라져갔고 오히려 그는 금세 차분하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표정이었던 것처럼 그랬다.

 

", 뭐 꼭 어떤 답을 듣고 싶어서 한 질문은 아닙니다."

 

백사장은 자신의 질문에 현수의 표정이 시시각각 빠르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는 조금 당황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글쎄요? 살고 싶은 데는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있어야 하겠지만, 살고 싶지 않는 것에 따로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어차피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서 죽는 것인데 말이에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사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만 살고 싶지 않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백사장은 전혀 재미있어 하지 않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면서 동의를 했다.

 

", 꼭 제 얘기는 아니지만 아마도 자살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뿐이죠. , 그 사람들도 결국 죽음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만요."

 

"이 세상에서 누가 죽음을 경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저요."

 

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답을 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죽는 과정은 고통스럽죠. 아주 많이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저 역시 죽는 것이 여전히 두렵습니다.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욱 더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사는 것은 여전히 더 고통스럽네요."

 

말을 내뱉은 순간 현수는 과거 자신이 죽었던 순간 속에서 경험했던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것을 물어봤습니다."

 

백사장은 현수의 얼굴을 보고는 솔직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현수는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는 백사장같이 철저한 장사꾼도 저런 진지한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가세요. 그럼 연락 드리겠습니다."

 

현수의 형식적인 인사에 백사장이 형식적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현수는 자신이 처음에 들어갔던 더러운 문을 통해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그리고 그때부터 건물을 완전히 나서는 순간까지 들어갈 때와는 달리 문의 더러움도 건물 안의 탁한 공기가 주는 불쾌함도, 깜빡 거리는 형광등에 대한 신경 쓰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기엔 머리 속이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오히려 건물을 나서는 순간엔 당장 오늘 밤부터 도대체 어디에서 잘 것이냐 라는 생각만 들었다집의 보증금마저 뺀 상황이라서 잘 곳조차 없었기에 그랬다.

 

밖으로 나오자 그를 괴롭히던 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도심의 거리는 이미 어스름을 지나 어둠 속에 잠겨서 곳곳에 켜진 가로등만이 그곳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현수를 둘러싼 주변 건물들에서 아주 간간히 몇 개의 불빛만이 켜져 있을 뿐,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별로 없었다현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그냥 근처 찜질방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푹 자긴 힘들지만 개인이 하루 밤 지내기엔 제일 쌌다. 그리고 그 전에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백사장과 협상이 끝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배가 많이 고파왔다주변을 바라보니 멀리 이런 저런 국밥을 팔 것 같은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현수는 천천히 가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걱정 반 기대 반이었지만 가게에 다가갈수록 점점 배가 심하게 고파졌다. 그리고 꼬르륵 하는 소리가 커질 수록 머리 속 생각은 점점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으로 채워졌다. 그 순간 뜬금없이 도대체 몸 속에 있는 위장은 자신과 음식점과의 거리를 어떻게 알아서 저리 요란하게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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