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김두삼씨 이야기 - 1

아이루다 2020. 1. 4. 08:01

 

 

1.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나는 우울함조차 사치였던 날들을 지나는 중이었다. 아주 작은 불운한 사건 하나로 시작된 꼬임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지더니 서른다섯이 무렵쯤의 삶을 결국 대한민국 상위 1% 올라서게 했다. 기준점이 차라리 가난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나쁘게도 그것은 바로 인간혐오의 순위였다. 그리고는 나는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없었다. 속절없이 추락하는 주식 그래프도 중간에 잠시나마 반동이 있기 마련인데, 당시 삶은 그런 작은 반항조차 한번 하지 못하고 그렇게 맥없게 주저앉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 해주기 마련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지만, 나에겐 오히려 시간은 독이 뿐이었다.

 

당시 서른이 나에게 며칠을 쉬어야 만큼 심한 감기를 앓은 갑자기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병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멀쩡하지 않은 어떤 것이었는데, 분명히 어딘가가 명확히 아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증상으로 인해서 나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예전처럼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서른 생일이 지나고 달쯤 지났을 무렵 몸에서 조금씩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냄새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그래도 초반에만 해도 증상이 그저 액취증 정도로만 여겼고 그래서 가능하면 최대한 자주 씻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데오드란트란 제품도 알게 되어서 열심히 바라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나마 당시에는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해결이 되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몸에서 나는 악취는 점점 심해졌고 이상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어느 문득 나는 직장 동료들이 나에게 미터 이상 가까이 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코가 둔한 사람들은 자리에 앉곤 했지만, 처음엔 사무실 여직원들부터 나중엔 사장님까지도 나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로 인해서 년에 걸쳐 자리는 서서히 사무실 구석 쪽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리 주변엔 누구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오래된 노래가사와 달리 서른 즈음에 나는 청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무실 내의 왕따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일은 있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고도 이메일, 전화, 채팅등을 통해서 충분히 일을 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들이 아직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오감 시각과 청각, 오직 가지만을 전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라는 곳이 단순히 일을 하고 돈만 받는 곳만은 아니었다. 또한 삶을 채워가는 곳이 집과 회사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엔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있었고, 삶을 채우기 위해 내가 가야 하는 다른 장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몸에서 나는 냄새로 인해서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람들을 만날 있는 공간에도 참여할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는 썩은 냄새를 풍기는, 상한 음식과 같지만 아직은 사람이라서 버릴 수는 없는, 그래서 그들이 알아서 피해가야만 하는 존재였다.

 

몸에서 나는 심각한 냄새로 인해서 나는 출근 퇴근까지, 그리고 퇴근 후에도 누구와도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에서 제일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납득이었다. 뭔가 명백히 잘못한 것이나 있으면 그나마 인정하겠지만 그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참을 없을 만큼 억울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내가 어떤 잘못을 했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용서라도 받을 있는 반면 나처럼 인간의 오감을 자극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현상은 도저히 어떤 해결책도 찾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해는 갔다. 누구나에게 귀를 괴롭히는 날카로운 소리, 물컹거리는 촉감, 날카롭거나 더러워 보이는 물체, 도저히 견딜 없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를 끝없이 자극하여 구역질이 정도로 만드는 냄새, 이런 것들은 원래 참을 없는 한계점을 넘어 선다. 나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몸에서 나는 수준의 냄새가 났다면 어쩔 없이 사람을 멀리 했을 것이다.

 

영화, 돌연변이 중 한 장면.

 

증상이 심해졌을 무렵 병원에도 갔었다. 하지만 한참 동안 증상의 병명조차 알아내질 못했다. 그리고 개월 동안 곳이 넘는 병원을 전전한 끝에 겨우 병명을 알아냈는데, 증상은 일명 '생선냄새증후군' 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공식적으로는 바로 '트리메틸아민뇨증'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소화를 담당하는 장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일종의 유전적 질환으로, 보통은 어려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나타난 편이라고 했다. 그나마 불행 다행이라고 할까?

 

만약 어린 시절부터 증상이 나타났다면 나는 아마도 한명의 친구를 사귀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멀쩡히 대학도 나오질 못했을 것이다. 직장에서야 사람들이 어쩔 없이 참겠지만 다름이 배척으로, 못남이 즉시 혐오와 차별로 연결되고 마는 정글 같은 학교에서 나는 친구들의 숱한 괴롭힘을 참아낼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증상이 늦게 나타난 것은 좋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끔찍한 죽음을 봤다고 해서 내가 손가락을 것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공식적으로 사무실 내의 왕따가 후로도 2년간 회사에서 버텼다. 그나마 나는 일은 제법 잘하는 편이어서 업무 성과는 좋은 편이었다. 단지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했고 화장실에 가게 위해서 잠깐이라도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는 동료들이 시선을 불편하게 피한다는 점이 힘들었다. 아마도 그들은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코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그들은 학생 때와 달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지라 몇몇 직원을 제외하고는 대놓고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단지 예의상이라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을 .

 

그나마 다행히 요즘 시대는 카톡과 같은 도구들을 통해서 온라인상으로만 관계를 맺는 일이 흔했기에 아예 고립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퇴근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잔을 있었던, 과거의 내가 누린, 사실 그때는 너무도 당연해서 별다른 느낌조차 받지 못했던 그런 소박한 행복들이 그리웠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하거나, 어떤 날은 사람들이 출근길 지하철의 힘들게 있던 자리조차 그리웠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단순히 역겨운 냄새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막이었고,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차단당한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막에 가로막혀 누구 옆에도 다가갈 없었다. 내가 딱히 이상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누군가를 해코지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사람이란 단어가 원래 서로 가까이 모이고 모여 하나로 압축이 비로소 삶이라는 글자로 바뀌는데, 사람들과 도대체 가까워 없었던 나는 그저 외모만 사람이었을 결코 삶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도심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자연인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몸에 나타난 증상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심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은 날이라도 오면 몸에서 발생한 냄새가 사무실 절반 지점까지 퍼지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사무실 내에 냉방이나 난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좁은 창문이라도 열어야 했다. 다들 아무런 말도 없이 창문을 여는 모습을 보는 나는 애써 보지 않으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더욱 모니터에만 집중하는 해야 했다.

 

그렇게 힘들지만 2년을 버텼다. 사실 내가 버틴 것이 아니라 그나마 나를 아끼던 사장님이 버틴 것이다. 직접 나에게 말하지는 않아도 다른 직원들의 불만이 끝없이 사장님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님은 자신의 직원을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내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인내심은 임계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아침 정말로 곤란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사장님의 표정을 보고 나는 날이 퇴사를 해야 하는 날임을 직감했다. 어떤 면에서는 홀가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장님은 미안했는지 지금 재택근무가 가능한 형태로 회사 시스템을 바꿔볼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회사가 사람을 위해서 돈을 들여서 그런 투자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말이 고마웠다. 설령 진심이 아니라도 누군가가 그저 미안해서 하는 말이라도 정말로 절박한 이들에게는 그조차 아쉬운 법이니까. 그날 이후부터 바로 이미 사장 면접까지 모두 끝나 있었던 후임에게 일주일 동안 인수인계를 했다. 원래는 15일간이었는데 후임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고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끝이 났다. 그리고 후임은 마지막 날에는 아침에 인사만 건성으로 하고는 멀리 떨어진 자리로 버렸다.

 

마지막 퇴사 일에 내가 짐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는 다시는 사이이고, 내가 오늘 그만 두는 것을 다들 테니 그냥 고개만 돌려서 가라고 마디 해줄 법도 한데,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눈앞의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도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그런 모습에 별다른 불만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저 이런 처지가 비참했을 뿐이었다.

 

지하주차장에 내려와 앞에 섰다. 냄새가 너무 심해지자 대중교통도 이용하기 힘들어서 2 전쯤 마련한 소형차이다. 나조차 역겨운 체취가 가득히 묻어 있는 차이며, 그로 인해서 나를 제외한 누구도 타보지 않는 차이다. 지하 주차장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평소와 달리 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아니, 이유만은 아니었다. 왠지 빠르게 움직이면 같았다. 내가 문을 열고,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고, 시동을 켜는 순간들이 마치 내가 인간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의식을 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기에 그랬다. 빠르게 움직일수록 그만큼이나 빠르게 내가 세상과 분리가 같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 것이다. 나는 천천히 게이트를 빠져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후로는 3 동안 집에서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지냈다.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을 없으니 집에서 전화로 있는 일만 찾아서 했다. 하지만 그런 일자리조차 그리 많지도 않았고, 한다고 해도 내가 전에 받던 보수에 비해서 턱없이 낮았다. 그로 인해서 나는 그간 회사를 다니면서 나의 미래를 위해서 모았던 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다음 달이면 통장의 잔액조차 백만 이하로 떨어질 예정이었다. 삶은 이상 버틸 없는 어떤 임계지점에 다다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회사를 그만 이후로, 아니 몸에서 생선이 썩는 듯한 기괴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그날 이후부터 삶은 천천히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니러니 하게도 몸에서 나는 냄새는 사실상 거의 해가 없이, 그저 썩은 냄새라는 형식에 불과하지만, 정작 삶의 내용은 형식에 눌려 제대로 썩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이제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론은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저 언제 어떤 방법으로 결정을 실행에 옮길 것이냐 만이 유일한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결심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자살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뜬금없는 도움의 손길이 왔다. 회사를 그만 3 동안 번도 연락이 없었던 회사 사장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것이다. 3 만에 전화를 사장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었다. 나는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기가 싫어서 그냥 쉬고 있다고만 대꾸했다. 그러자 사장은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그가 제안한 일자리는 경력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처구니없게도 늙고 병든 사람을 보살펴주는 간병인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나에게 누군가의 똥오줌을 받아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듣는 순간부터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아마도 그것은 안에 남아 있는, 아직은 부서진 자존심이 내는 소음소리인 했다. 삶이 이토록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여전히 숨을 붙이고는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녀석 덕분에 이런 삶이라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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