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남 탓과 자책

아이루다 2019. 11. 29. 08:34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긴다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아니, 언제나 좋은 일만 생기면 나쁜 일이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좋은 일조차 없어질 것이다그러니 나쁜 일이라는 것은 좋은 일이 있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결국 나쁜 일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쁜 일은 최대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은 일어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나쁜 일이 일어날 때 마다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그 나쁜 일이 일어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 '남 탓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자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각자 다른 이유로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피해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도움보다는 피해가 좀 더 큰 편이다.

 

우선 도움이 되는 것은 이미 일어난 나쁜 일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을 했다는 점'이다. , 남 탓을 하든 자책을 하든 상관없이 그 일의 분석은 끝났다. 그러니 그 후에 처리할 방법만 고민하면 된다. 만약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면 그것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내고 운 좋게 마지막 최종 면접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탈락을 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 지원자는 크게 실망하고 화도 나겠지만 자신이 왜 결국 탈락했는지 매우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왜 탈락한 것일까?

 

만약 그 이유가 자신의 외모가 우연히 회사 사장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겨서 탈락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화가 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니까 그렇다. 그러니 남 탓을 하게 된다.

 

하지만 최종 면접 날 몇 가지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큰 실수를 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이유로 탈락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책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결국 왜 탈락하게 되었는지를 모른 채 마무리가 된다면(보통은 알려주지 않는다꽤나 답답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남 탓으로 끝나든 자책을 끝나든 일단 아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음 입사 지원을 시도할 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는 단점을 생각해보자.

 

나쁜 일의 원인을 남 탓으로 마무리를 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분노가 생겨나거나 심한 경우 피해의식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자주 남 탓만 하고 살면 삶이 매우 부정적이며 불행하게 된다. 자책도 비슷하다자책이란 말 자체가 바로 자신을 비난하는 일이니 결국 지기 비하, 자괴감 등으로 인해서 삶이 불행해지고 만다

 

이 두 경우 모두 우연히 일어난 나쁜 일이 단순히 불운으로 끝나지 않고 불행으로 확대되어 버리는 과정이다.

 

그래서 사실 어떤 불운의 이유를 그저 단순히 일어난 우연한 결과이라고 여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태도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연히 일어난 행운은 그 이유를 따지지 않으면서 불운은 그렇게 그 이유를 따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것을 알고 있더라도 앞서 설명했듯이 그런 식으로 넘기기엔 답답해서 견디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생겨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또 다시 비슷한 종류의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함 때문에 그렇다.

 

최종 합격을 앞에 두고 탈락한 입사 지원자는 또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다.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컸으면 컸을 수록 더욱 더 그 두려움의 크기는 클 것이다. 그러니 꼭 그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그나마 두려움이 잦아들 것이다. 물론 대신 까딱하면 피해의식이나 자기 비난에 사로잡히겠지만 말이다.

 

남 탓은 세상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는 쪽으로 나갈 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자책은 후회로만 끝나지 않고 반성을 통해 변화의 계기가 될 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 탓과 자책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은 그저 피해의식이나 자기 비난으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이쯤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남 탓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책을 하게 되는 부분이 그렇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나게 될까? 심한 경우엔 분명히 자신의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고 굳이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책을 하는 사람까지도 있다.

 

그런 행동들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반응이 나뉘는 현상은 참 특이한 일이다.

 

사실 이런 반응의 차이는 타고난 기질과 이후 형성된 성격에 따라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별에 따른 차이이다. , 남자와 여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사실 누군가 어떤 한 사람에게 일어난 불운이 온전히 남의 탓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도로에서 운전을 하다가 뒤에서 다른 차가 추돌을 하면 보통 과실 비율은 100: 0으로 뒤차가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 조차 온전히 뒤차 잘못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앞차가 그곳에 있었던 것 자체도 하나의 잘못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차를 몰고 나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뒤차에 타서 사고를 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왜 앞에 있었냐고 말이다.

 

앞차에 타고 있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황당한 말이지만 실제로 뒤차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식으로든 남 탓을 하고 싶기에 그런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그러다가 괜히 괘씸죄에 걸려서 그냥 넘어갈 일을 재판까지 가서 인생의 쓴맛을 보기도 한다.

 

, 이 상황에서 뒤차에 탄 사람이 친구를 만나 그 상황을 설명했을 때 흐름을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 가정해보자.

 

먼저 남자가 자신의 남자 친구들을 만나서 자신이 앞차를 추돌했다고 하면서 그 앞차가 너무 빠르게 브레이크를 밟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남 탓을 조금이라도 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아마도 친구들은 블랙박스에 담긴 동영상이 있는지 물어 볼 것이다.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이다.

 

왜 그런 식으로 나올까? 객관적으로 친구의 말이 정말로 맞는지 제대로 검증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동영상이 있다고 해서 보고 나면 정말로 객관적으로 판단해줄 것이다.

 

"지랄한다. 니가 브레이크 늦게 밟았네. 운전할 때 똑바로 해야지. 자꾸 딴짓하니까 전방 주시 의무를 게을리 해서 그런 것이지. 이런 놈은 운전 못하게 해야 해. 이 새끼 흉기네, 흉기."

 

약간의 욕설이 들어간 것 같지만 사실 정말로 많이 순화한 버전이다. 제대로 말하면 쌍욕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말을 친구들 중 한 명만 할까? 아니다. 뒤차에 탔던 남자는 자신이 만난 남자친구들 모두에게 거의 비슷한 말을 듣게 된다. 그러니 해봐야 욕만 먹고 끝난다.

 

그래서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있던 남 탓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직 자책뿐이다.

 

여자가 동일한 상황을 자신의 여자친구들에게 말했을 때 그 누구도 블랙박스 영상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물론 묻는 사람들도 아주 가끔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여자 친구가 남아있기가 힘들다. 아니면 그러고도 모임 내에서 남아 있을 수 있는 확실한 자기 매력이 있거나 말이다.

 

아무튼 대부분의 여자친구들은 자신의 친구가 하는 말이 제대로 맞는 것인지 아니면 우기는 것인지 그리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그저 위로를 해준다. 만약 여기에서 제대로 위로를 해주지 못하면 그 친구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을 거치고 나면 사고를 낸 여자의 내부엔 남 탓이라는 영역은 커지고 반대로 자책의 영역을 줄어든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남 탓만 남을 수도 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판단이 쉽다. 블랙박스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차의 잘못이라고 말할 근거가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불운은 이런 식으로 확실히 나뉘지 않는다쌍방과실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럴 때 각자에게 일어난 불운은 남 탓과 자책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우선시 될까?

 

당연히 남자의 경우엔 자책으로 여자의 경우엔 남 탓으로 결론이 나기가 쉽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흔히 알고 있는 수준의 남녀 차이를 훌쩍 넘어서는 차이이다.

 

많은 불운을 자신의 문제로 여겨야 하는 남자와 많은 불운은 남 탓으로 돌리는 여자의 차이를 어떻게 단순히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 그 자체를 다르게 만든다.

 

물론 모든 남자와 여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남 탓을 하는 남자들도 있을 것이고 자책을 하는 여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율상 많은 차이가 난다. 남자들은 자신의 불운을 대부분 판단 당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불운을 대부분 공감 받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서로 상대방에게 일어난 불운을 판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남자와 그냥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여자,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딱히 말하지 않고 혼자서 마음 속에 담고 사는 남자와 그것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고 몹시 답답하게 여기는 여자 사이의 갈등이다.

 

더해서 이런 남녀의 태도는 아이를 키울 때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단 판단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아빠와 최대한 아이 말을 들어주고 아이 편이 되어주려는 엄마로 나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과연 누가 더 끌릴까?

 

당연히 엄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엄마에 대해서는 아련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실수를 해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 그 사람이 바로 엄마이기에 그렇다.

 

반면에 아빠는 다르다. 아빠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려고 하고 공감하면서 위로하기 보다는 그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해결책을 알려주려고 한다. 물론 그 의도는 좋다. 하지만 남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바로 어떤 식으로든 크게 감정이 요동쳤을 때는 그 감정을 그냥 받아줘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감정이 조금 잦아 들었을 때 이성적인 설명이 들어갈 수 있음을 몰라서 그렇다.

 

너무도 이성적인 사고방식에 오랫동안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평생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더해서 이런 남녀의 차이는 이후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갈등에서도 아주 크게 작용을 한다그래서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여성운동, 즉 페미니즘이 여자들 사이에서 크게 호응을 얻는 이유도 역시 여자의 고유한 공감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들은 자신이 겪은 어떤 불운에 대해서 말해봐야 자신이 원하는 공감을 얻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 자신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늘 상대가 말한 것을 검증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다. 그러니 최대한 어떤 식으로든 설득할 근거를 마련한 후 그 일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아니면 말을 하다가 의견이 틀어져서 싸우든가 말이다. 흔히 보이는 남자들의 술자리 싸움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에 여자들의 경우엔 일반적으로는 그런 검증대 앞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정말로 객관적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입장에서 불운을 이야기 한다직장에서 겪은 차별, 가정 내에서 겪는 남편 문제, 시댁 문제, 아이 문제 등이 반복적으로 터져 나온다. 그리고 검증이나 반발보다는 주로 공감과 위로의 분위기가 이어진다.

 

남자들의 경우 문제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나쁜 감정을 주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삐뚤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남자들 마음 속에 숨겨진 화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느낀 나쁜 감정들을 남자라는 이유로 공감 받지 못해서 쌓인 분노이다. 서러움도 있다. 하지만 평생 꺼낼 수는 없다. 그것을 꺼내봐야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기에 그렇다. 오직 여자만이 그것을 해줄 수 있다.

 

그래서 남자는 유일하게 여자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강해 보이는 남자라도 여자의 품에서 유일하게 평온해질 수 있고 그 품에서 울 수도 있다. 평생 눌려온 아이의 눈물이다.

 

그런 남자의 특징이 오직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프고 힘들지만 세상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감정이 인정받지 못하니 자신이 느낀 감정의 타당성을 찾으려고 애쓴다. 지식을 습득하고 이론적 근거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보니 제법 똑똑해지기도 하고 합리적인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은 언제나 생겨나며 그것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 봐야 불행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지식을 활용한다. 두려움을 느끼면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원인과 왜 그것이 문제인지를 설명하려고 든다. 그냥 무섭다고 하면 될 것이 말꼬리가 자꾸 늘어진다.

 

사고 싶으면 사면 되는데 왜 사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데 왜 가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니 듣는 사람도 몹시 지겹다. 재미도 없고 흥미도 안 생긴다.

 

지식의 늪에 빠져서 끝없이 지식만을 추구한다. 서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경쟁하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문제는 아무리 경쟁을 해도 최종 손을 들어주는 역할은 여자가 한다는 점이다. 여자는 아는 것이 많은 남자보다 그저 재미있는 남자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경쟁에서 패배한 지식이 많은 남자는 지식을 버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여자들이 지식에 관심이 없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여자들을 공격할 이론적 근거를 찾아 헤맨다. 심한 경우 여자 혐오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자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산다. 대부분의 감정들을 공감을 통해 인정받기 때문에 딱히 억울한 감정이 남질 않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남으면 그것이 그리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 꼭 복수를 해야 속이 후련해진다. 더군다나 자신이 느낀 감정들이 친구들을 통해 정당하다고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그다지 망설임이 없다.

 

그래서 여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면 그 복수의 과정은 남자에 비해서 훨씬 잔인하고 거침없이 나타난다. 남자들은 자신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완벽히 확신은 할 수 없기에 어느 선에서 멈추는 반면 여자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거의 없기에 나타나는 차이이다.

 

또한 주변 친구들의 의견에 의해서 어느 선에서 조정되거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강제적으로 고쳐지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남자에 비해서 오히려 좀 더 맹목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해결할 방법으로 주변의 도움을 받게 되면 거기에 푹 빠지는 경향도 흔히 나타난다.

 

그런 현상은 연예인을 추종하는 일부터 일반 종교에서 사이비 종교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사주, 혈액형, 관상 등에 대한 신뢰도 남자에 비해서 훨씬 크다.

 

남자와 여자의 좋은 면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과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반대로 남자의 나쁜 점은 삐뚤어지고 세상에 대해서 지나친 비난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책이 큰 만큼 비난도 커진다. 더해서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냥 넘기질 못하고 끝없이 싸워댄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곧잘 폭력적이고세상의 일에 대해서 칼날같은 잣대를 드리댄다.

 

여자의 경우엔 자신의 잘못도 분명히 있는데 비해서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끝내고 만다는 점이다. 더해서 그것이 다른 비슷한 여자들과 뭉쳐지게 되면 숫자에서 오는 정당성이 생겨나면서 집단적으로 비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고 만다. 막무가내이고, 자기중심적이고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어떤 불운이 일어날 때마다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때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 노력조차도 깊은 성찰의 결과로 이뤄져야 한다. 내가 느낀 감정이 세상을 바꿀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면 그 불운은 그냥 두는 것이 맞다. 행운도 불운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잘못도 아니고 누군가의 탓도 아니다.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아침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은 것은 슬픈 일이다. 어제 산 복권이 당첨 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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