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오늘 삶이 힘든 그대에게..

아이루다 2019. 12. 19. 08:04

 

 

힘든 그대,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별 다른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많이 힘들겠구나, 사는 것이 쉽지가 않네..' 라는 한마디 밖에 해줄 말이 없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또한 지금 그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낯선 이의 이런 무의미한 위로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같이 이 시대를 힘들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써 그 고단함에 대한 작은 공감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런데 아마도 진짜 문제는 지금의 힘듦이 그 끝을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나마 끝이 보이는 힘듦은 당장은 숨이 턱턱 막혀도 결국 견뎌낼 수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질 않는 힘듦은 그대를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 절망으로 이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삶은 원래 그런 것인 것을그렇지만 그대는 지금 이 순간 아마도 '나만 왜 이렇게 힘들지' 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대는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과거 그대가 운이 좋게 행복했던 어느 날 그대가 아닌 누군가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생각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오늘이 너무도 힘든 그대라고 해도 분명히 언젠가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질 않더라도 그 시절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문제는 오늘이다. 그리고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내일이다. 그래도 모레가 되면, 내년이 되면, 10년 후가 되면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보다 답은 단순하다.

 

그대가 그것을 원하면 된다. 그대가 그것을 의도하면 된다. 그대가 그것을 목적으로 하면 된다. 그래서 만약 미래의 그대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오직 그대의 잘못이다.

 

그대의 미래는 오직 그대의 손에 달렸다.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삶은 점점 더 행복해질 것이다하지만 그대가 불행하길 원한다면 불행해질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누가 자신의 불행을 원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원인은 대부분 스스로 불행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다리가 부러지는 불행이 다가오면 그것도 내가 원한 것인가? 하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그대의 질문은 충분히 타당하다. 다리가 부러지는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다리가 부러진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다. 그 점을 그대는 늘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다. 오직 그 사건을 해석하는 그대의 머리 속이 가장 중요하다.

 

누군가는 다리가 부러져서 당분간 삶이 불편해지는 것을 마치 인생이 끝난 것과 같은 불행으로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너무 힘들게 일해왔던 누군가는 다리가 부러진 것이 당장은 불편하긴 하지만 오랜만에 일을 쉴 수 있는 꿀맛 같은 시간들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대는 어떤 해석을 원하는가?

 

물론 보통 사람들은 긍정적인 해석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누군가는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으니 그대 또한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멀리 밀치지는 말기 바란다.

 

삶은 늘 불운과 행운이 교차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행복과 불행은 그것들을 해석하는 입장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그래서 불운도 행운이 될 수 있고, 행운도 불운이 될 수도 있다.

 

집 식구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당연한 가사 노동으로 인해서 스스로 노예가 된 듯 느껴지는 주부는 갑자기 다리가 부러진 후 삶이 변화될 수도 있다. 자신이 일을 못하니 가족들이 마지못해서 집안 일을 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하다가 보니 사실 자신이 그렇게 희생하지 않아도 가족들 모두 스스로 자기 일을 잘 해낼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부는 이후 더 이상 주부로써 살지 않으려고 한다.

 

당장 에어로빅을 등록하고 동네에서 이뤄지는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여유 돈이 생기면 고기를 사다가 아이를 먹이던 주부는 이제는 예쁜 자신의 옷을 사는 여자로써 다시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무리 불운한 사건도 불운 그 자체로 끝나는 경우는 없다. 또한 아무리 행운의 사건도 행운 그 자체로만 끝날 수는 없다. 설령 죽음으로 가게 되는 암에 걸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수십억 원의 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그로 인해서 인생이 파탄 날 수도 있다.

 

이렇게 어떤 장점도 단점을 가지고 있고, 어떤 단점도 장점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행복은 오직 해석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대가 앞으로 그대에게 일어날 일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만 있다면, 아니 진짜로 행복해지고 싶다면 최대한 그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부정적인 해석이 더 자주 일어난다면 그대는 원래부터 행복이 아닌 불행을 원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설명들은 당장 듣기엔 그럴 듯 하지만 어떻게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따지고 싶을 것이다. 물론 그런 질문은 당연히 생겨날 것이지만, 조금 진지하게 말하면 그런 질문조차도 부정적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질문을 바로 머리 속에서 지우라는 말은 아니다.

 

떠오르는 질문은 당연히 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답을 찾고자 하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 결국 이런 설명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고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이론적이기만 하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것에 관한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럴 듯 하고, 해볼 만 하고, 할 수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해도 똑같이 적절한 답을 찾을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대의 자유이다. 불행을 원한다면 삶이 불행하다는 증거를 찾아라. 사실 널리고 널린 것이 바로 그런 증거들이다. 하지만 행복을 원한다면 삶이 행복하다는 증거를 찾아라. 이 역시도 널리고 널렸다.

 

이것은 오직 그대가 선택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선택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몇 마디 덧붙여 본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미 세상을 먼저 살아 본 존재들로부터 다양한 조언을 얻게 된다어떤 사람들은 삶은 열심히 노력해서 쟁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게 노력하지 말라고 한다. 삶은 짧고도 짧은데 왜 그렇게 너의 소중한 시간을 갉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그들은 미래를 살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너의 행복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삶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열심히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경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지금 가진 것들을 잘 지키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당장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더 끌릴 것이다. 사실 너무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즐기면서 사는 삶이 더 좋긴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려면 문제가 있다그렇게 살다가 보니 남들은 점점 더 앞으로 나가는데 자신만 한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서 그렇다.

 

친구들의 변화를 보고, 직장 동료의 발전을 보고, TV 속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되고, 누군가 도전해서 쟁취한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그것에 대한 불안함이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만약 그런 마음이 들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온전하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대가 이 글의 제목을 보고 들어왔다면 그런 삶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함에 대한 이야기를 딱히 읽을 필요를 못 느낀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도 불행의 이야기에 끌린다면 온전한 행복이 아니다.

 

우리가 불행의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한가지 이유뿐이다. 남의 불행을 통해 상대적 행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덜 행복한 사람들만이 남의 불행에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이야기가 불편할 뿐이다.

 

그대가 오늘을 즐기고 살면 당장은 좋지만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아이를 위한 좋은 학군에서 살 수도 없고, 한달 간 유럽 여행도 떠날 수 없고 한끼 수십만 원 하는 식사는 엄두조차 내질 못하게 된다그대는 평생 동안 돈에 쫓기면서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끝없이 그대를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 당장 오늘을 즐기면서 사는 것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결국 미래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현재를 즐기는 삶이 아닌 미래를 대비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삶이 점점 지루해져서는 결국엔 현재조차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고 사는 대부분의 삶은 결국 낮은 자존감과 경제적 문제만 야기시킬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위해 끝없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은 좋을까?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끝없이 몰아 붙이는 삶은 과연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결국 삶의 정의에 과한 두 가지 이론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다.

 

과연 삶은 노력하는 과정인가? 아니면 내려놓고 마음 가는 대로 편히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둘 모두가 삶의 답일 수 있다고 진지한 태도로 답을 내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읽고 있는 그대는 도대체 어떤 것이 답인지 알기가 힘들다.

 

오늘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자기 계발서가 더 마음에 와 닿고 내일은 힘든 그대를 위로해주는 따뜻한 인문학 책이 그대의 마음에 더 깊게 다가올 수 있다. 매일매일, 그대의 삶의 상태에 따라서 어떤 말이 더 다가올지 결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삶의 답은 정말로 어떤 것일까?

 

누군가는 삶의 정답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맞다. 모두 각자만의 삶을 살아가며 삶을 통해서 얻은 경험과 기억이 완벽히 일치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의 삶은 똑같다. 태어나고 자라고 어른이 된 후 살다가 죽는다. 이것이 결국 삶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땐 삶에 대한 정답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앞에서 나온 삶에 관한 두 가지 선언은 모두 적용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삶은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투쟁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고 내려놓고 스스로 만족하면서 오늘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하다.

 

단지 차이는 인생의 시기에 따라 그 정의가 서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 나이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 바로 삶이다.

 

젊은 시절엔 당연히 열심히 경쟁하고 노력하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 삶이 되어야 한다. 생존 그 자체가 원래 투쟁이란 본질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하며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은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훨씬 더 큰 두려움 가진 채 살아가게 된다.

 

더군다나 그것을 실현할 육체적 강함도 지니고 있으며 아직 쌓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해서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니 젊은 시절의 삶은 자기계발서가 맞다.

 

하지만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노화가 시작되고 더해서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이 비슷해지는 시기가 오면 삶에 대한 정의가 변화되기 시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그 나이가 바로 40대이다. 평균 수명의 절반의 나이, 노안이 오고 흰머리가 나며 탈모가 시작되는 나이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많은 병원을 다녔는지 서로 떠드는 나이이다.

 

삶의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에 들어설 때 삶에 대한 정의를 바꿔야 한다. 사실 40대에 들어서면 사회적으로도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결정되어 있다. 다니고 있는 직장도, 앞으로 직장을 바꾸더라도 새롭게 이직할 직장도 거의 결정되어 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집도, 결혼의 여부와 아이를 낳아 키울 것인가에 대한 것들도 거의 다 결정되어 있는 시기가 바로 40대이다.

 

새롭게 만날 인연보다 이미 맺어진 인연으로 살아갈 나이이며, 새로운 도전을 하기 보다는 이미 이뤄놓은 것들을 잘 이용해서 살아갈 나이이며, 몸으로 살기 보다는 머리로 살아야 할 나이이며, 그 무엇보다 거의 다 결정되어 버린 현재 상황으로 인해서 두 번째 깊은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나이이다.

 

젊은 시절엔 남들이 가진 것들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가능한 나이가 아니다. 그 나이가 바로 40대이며 그때부터 삶은 다르게 정의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서? 바로 그대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다.

 

40대 이후의 삶은 가지지 못한 것을 욕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왜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그래야 행복하니까 그렇다.

 

행복방정식은 가진 것을 욕망을 나눈 값이다. 그래서 가진 것이 클수록, 욕망이 작을수록 행복이 커지게 된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많이 있는 젊은 시절엔 행복하려면 가진 것을 늘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노력은 원래 고통스럽다. 그러다 보니 지금 그대가 이렇게나 힘든 것이다. 힘들지만 행복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40대가 넘어가면 이제 가질 수 있는 것들은 거의 고정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이제 그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늘릴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쉽기도 하다.

 

그래서 만약 그대가 지금 40대 이전이라면 지금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40대 이후에도 여전히 삶이 힘들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저 그대가 아직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로 인해서 욕망을 줄이지 못해서 그렇다.

 

오직 자신의 한계가 인정될 때 좌절은 받아들임으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바로 욕망을 줄여둔다. 결국 그것만이 유일한 행복의 열쇠가 된다. 자신의 한계점에 대한 부정은 젊은 시절엔 아주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이를 먹는 사람에게는 그저 아프기만 한 매이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늘 기억하라. 삶은 목적은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닌 행복이다. 그대가 오늘 그리도 바라는 돈, 가족, 여행, 음식, 진급, 성공, 인정 모두가 그저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들일 뿐 행복 그 자체가 될 수가 없다. 수단은 수단일 뿐임을 잊으면 안된다. 그리고 수단이 제대로 활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환 과정이 필요하다.  돈이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돈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많은 돈은 그저 걱정거리만 될 뿐이다. 가족이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 화목하지 못한 가족은 오히려 불행의 덫이 된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먹고 탈이 난 음식은 절대로 행복의 열쇠가 될 수 없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리로 오른 진급은 심할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불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깊고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말로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이다.

 

사실 그대의 머리 속에 있는 수 많은 욕망들은 생각보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 주입된, 사실상 외부에서 강제된 욕망들이다. 그대는 원래 천 원짜리 한 장만 있어도 세상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살이 찐다고 해서 잘 먹지 않는 햄버거 하나에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그대는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그대는 변했다. 아니, 그대는 변해졌다. 과연 누가 그대를 변하게 했을까? 스스로 그랬을까?

 

아니다. 그대의 가족, 그대의 친구, 그대의 이웃, 그대의 직장 동료, 그대의 지인들이 그대를 변하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그대를 많이 변화시킨 존재는 바로 기업이다. 그대의 소중한 돈을 쓰게 만들기 위해서 그대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고 있는 기업들 말이다. 기업들은 TV등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매일같이 그대의 욕망을 자극한다.

 

기업들의 목적은 하나뿐이다.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잘 파는 것이다. 기업이 매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그것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구매 욕구를 불러 일으키느냐를 연구한다. 그래서 큰 기업들은 모두 마케팅 팀과 홍보 팀을 별도로 운용하고 있다. 그대 역시도 아마 그런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이다.

 

기업의 제품은 최초 기획단계부터 아주 깊게 논의가 된다. 그냥 만들어져 나오는 제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장조사부터 설문조사 그리고 개발과 피드백, 테스트베드를 통한 시험 과정을 거친 후 최종 단계에서 소비자들이 실제로 살 수 있는 시장에 나온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투여되고 수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니 그것이 예상처럼 팔리지 않으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이것은 거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니까 결국 기업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팔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다는 뜻이다. 그대가 가진 욕망의 근원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기업들이 목숨을 걸고 그대를 자극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흔적, 그것이 바로 그대의 욕망이다.

 

그들은 광고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라마나 쇼프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블로그내 유튜브 등의 매체를 통해 또 다른 소비자들의 그림자 속으로 그 정체를 숨기기도 한다. 그렇게 기업이 씨를 뿌린 욕망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정교하게 다듬어져서는 이것을 갖지 못하면 불행하며, 가져야만 행복하다는 욕망으로 변화된다.

 

예전에는 소문으로 퍼지던 욕망이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날개를 달고 지구촌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글로벌 시대이다.

 

그래서 그대는 과거와는 달리 지구 전체에서 오는 욕망으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다. 옆집 사람만이 욕망을 자극했던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로 인해서 그대는 이미 변했고 변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대의 삶이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쩌면 지금 시대를 살아서 힘든 이유가 가장 클지도 모른다.


 

문명의 발달은 사람을 많이 편하게 해줬지만 사람이 편해진만큼 행복해지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매일 접하는 정보는 두 가지 양면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은 힘이지만,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달되어 오는 정보를 무턱대고 피할 수는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도착하는 수많은 정보들, 그러니까 어딘가 좋은 여행지, 어딘가 맛있다는 맛 집, 직접 보면 황홀하다는 연주회, 남들이 가지고 있는 수 많은 상품들, 남들이 경험하고 있는 수 많은 행복 기회들 중에서 과연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 내는 것, 하나뿐이다.

 

그대에게 일어나는 수 많은 일들 중에서 가능하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내는 것, 그대에게 전달되어 오는 수많은 욕망의 정보들 중에서 정말로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내는 것, 이것이 그대가 가진 유일한 자유의지이며, 그대만이 절대적 권리이다.

 

그대의 오늘 삶이 힘든 이유는 분별되지 못한 수 많은 욕망과 그것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많은 불운이 겹쳐서 생겨난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니 행복해지고 싶다면 욕망을 분별하고 불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는 마라. 답은 하나뿐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모든 일에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고 하고, 이미 너무 오랫동안 가져와서 도대체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는 수 많은 욕망들도 되짚어 봐야 한다.

 

그대는 왜 유럽 여행을 가고 싶은가? 그대는 왜 넓은 집에 살고 싶은가? 그대는 왜 남들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싶은가? 그대는 왜 성공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권력을 가지고 싶은가? 그대는 왜 결혼을 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아이를 낳고 싶은가? 그대는 왜 영어를 잘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게임을 잘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노래를 잘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가? 그대는 왜 비싼 명품 가방을 가지고 싶은가? 그대는 왜 수 많은 정보를 알고 싶은가? 그대는 왜 역사를 알고 싶은가? 그대는 왜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그대는 왜 이런 글을 읽고 있는가?

 

그대는 왜 그 모든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허무하지만 그대가 두려워서 그렇다. 그대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은 다 두려워서 그렇다. 살고 싶어서 그렇다.

 

그대의 삶이 힘든 이유는 살고 싶어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살기 싫어해야 삶이 덜 힘들어지는 것이냐, 라고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니다.

 

생각보다 그대는 충분히 살만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먹고 잘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일단 최소한의 생존활동은 되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선택이 가능하다. 그대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를 괴롭히면서까지 자유의지를 발휘하지 말아라. 그대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은 결코 의지적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자유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최대한 겁을 먹지 마라. 그래서 뛰고 싶을 때 뛰어라. 남들이 뛴다고 뛰지 말아라. 그들 대부분 역시 누군가 뛰고 있으니 따라 뛰고 있을 뿐이다.

 

기업이 앞장을 서고, TV가 뒤를 잇고, 각종 SNS와 블로그 그리고 유튜브가 또 다시 뒤를 잇고 있다. 누군가의 입소문이 다음 순서에 오고, 당신이 알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무의식적 정보들이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대가 그 뒤를 이어서 뛰고 있다.

 

사람들이 왜 뛰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어려서부터 뛰어 왔으니 계속 뛰고 있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쫓겨서 뛰고 있다. 실제로 강제로 멈춰져서 죽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도 하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더욱 더 두려워서 뛴다. 당장 지쳐 죽을 것 같지만 뛰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대는 언제든 멈춰서 쉴 수 있다. 강제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뜻이다. 그대의 자유의지는 얼마든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

 

, 앞에서 말했듯이 그 시기는 40대를 넘어서 이뤄져야 한다. 30대까지의 나이는 두려움에 쫓겨서 계속 뛰어야 하는 나이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넘어서면 각자 뛸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해진다. 그러면 이젠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한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빠르게 뛰려고 하면 안 된다. 적당히 내가 견딜 만큼, 내가 행복할 만큼만 뛰어라. 너무 쉬기만 하면 건강이 나빠진다. 적당히 달려라. 그리고 적당히 쉬어라.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 결코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일, , 명성, 권력, 성공, 여행, 예술, 독서, 사유, 도전, 쇼핑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서 행복하다면 당연히 해야 한다단지 언제나 그 과정이 행복한지 고민해라. 오직 결과만 행복하다면 그대는 그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뛰고 있는 것뿐이다. 결승점은 언제나 행복만이 설 수 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행복이란 결승점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소모품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 자체가 결승점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중간에 언제든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은 뛰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것이다. 중간에 멈췄을 때 단지 더 이상 행복하지 않기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대는 아마도 멈추는 순간 불행해질 것이다. 결국 두려움 때문에 견디질 못할 것이다. 그로 인해서 그대의 삶에서 그 어떤 선택도, 그 어떤 자유의지도 발휘될 수 없다.

 

그대는 사실 단 한번도 인간인 적이 없었다. 그대는 지금껏 그저 머리가 좀 좋은 동물로써 살아온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지 못한 존재는 지금껏 우리가 정의해왔던 인간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은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질 때 동물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언제든지 인간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깨어나면 된다. 그 오랜 미몽에서 깨어나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써 거듭날 수 있다. 지금부터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대가 진심으로 간절히 그것을 원한다면 말이다. 그대를 평생 짓눌러 온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이제는 멈추길 바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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