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 안의 구멍

아이루다 2020. 3. 1. 09:47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그 내면에 텅 빈 구멍을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도 있고, 태어난 후 성장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 진 것들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결국 동일하다.

 

사람마다 구멍이 만들어진 시기, 구멍이 만들어진 원인, 구멍의 크기, 깊이, 모양 등이 모두 다르기에, 각자가 가진 구멍을 메우는 방법 역시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동일한 것은 구멍은 본인 의지에 상관없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일단 만들어진 구멍은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서 뭔가를 하고 싶다고 느끼고, 뭔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느끼고, 뭔가를 제대로 했을 때마다 뿌듯함이나 만족감을 느끼고 반대로 실패하게 되면 후회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끝없는 반복 과정을 흔히 '' 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지만 언제 어떻게 왜 생겼는지도 모를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 평생 동안 노력한다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행을 가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낚시나 사진찍기 등을 하는 것도술을 마시는 것도종교를 가지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TV를 보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텅 빈 구멍을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이다. 단지 어떤 것들은 당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고 어떤 것들은 전혀 아무런 효과가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심지어 반대로 메우기보다 오히려 구멍의 크기를 더 넓히는 경우까지도 일어난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관점에서 보면사람들이 하는 모든 종류의 노력들은 결국엔 동일한 결론에 다다른다. 그것은 바로 어떤 종류의 노력도 그 구멍을 완전히는 메울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순간적으로는 어느 정도 메웠다고 느낄 수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또 다시 텅 빈 공간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10년간 노력을 해서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느끼는 허탈함과 더해서 몇 달 만에 또 다른 목표를 세워야 하는 이유이다. 잠시 채워진 듯 보였던 구멍이 다시 텅 빈 까닭이다. 그나마 그런 식으로 채운 것처럼 느끼는 경험을 한 사람조차도 그리 많이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을 하면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한번이라도 메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조언을 듣고는 자신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그렇게 다들 살아 생전에 열심히 그 구멍을 메우려고 노력한다다행히 노력하면 아주 잠깐은 그 구멍이 메워진 듯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충만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결국엔 밑 빠진 독이다. 밑 빠진 독이라고 해도 미친 듯이 물을 부으면 순간적으로는 가득 찰 수 있는 것이다그렇지만 결국 시간이 배신을 한다. 그래서 가득 찬 물은 서서히 빠지고 결국 또 다시 텅 빈 독으로 되돌아 가고 만다.

 

각자가 가진 구멍은 두 가지 현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는 결핍이고 다른 하나는 집착이다. 결핍과 집착은 마치 동전의 앞뒤 면처럼 붙어 다닌다. 그래서 결핍이 클수록 집착이 커진다. 반대로 결핍이 작으면 집착도 줄어든다.

 

구멍의 크기가 클수록 결핍도 커진다. 태어나기 전부터 생겨난 결핍부터 어린 시절의 결핍까지, 잘 먹지 못한 산모의 배속에 든 태아나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의 내면엔 끝없이 구멍이 생겨난다. 개에 물린 경험도 구멍을 만들어 내고, 어렸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한 경험도 구멍을 만든다. 친구들은 다 가졌지만 나만 갖지 못한 경험도 구멍을 만들어 내고, 잘나지 못해서 존재감이 희미했던 경험도 구멍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집착으로 이어진다.

 

외모에 집착하고, 돈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관계에 집착하고, 성공에 집착하고, 인정에 집착한다.

 

그럼에도 결핍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바로 모든 의지와 의욕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기에 그렇다. 구멍이 큰 사람일수록 의지적이고 강한 의욕을 갖게 된다. 결국 뭔가 이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구멍이 너무 크면 그것을 메우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아주 큰 스트레스가 되며, 스트레스가 너무 크면 삶이 불행해지고 만다.

 

사실 처음에 구멍을 채우려는 노력은 분명히 결핍을 줄여서 행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구멍 그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의 원래 목적을 상실한 채 그 행위 자체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처음에 행복하기 위해서 구멍을 메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는 구멍을 메우는 행위 그 자체에 몰입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을 메웠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다.

 

이런 상태를 다른 말로 '사로잡혀 있다' 라고 한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구멍에 사로잡힌 채, 평생 동안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난다. 단지 서로 다른 구멍으로 인해서 서로 다른 집착을 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로 살게 되면 그것은 본격적으로 엉뚱하게 해석되기 시작한다. 구멍으로 인한 결핍에 따른 집착이 욕망이 되고, 희망이 되며, 목표가 되고, 믿음이 되며, 신념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야 말로 삶의 모든 것이 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서로 형태가 다른 채움의 방법들일 뿐이다. 그래서 평생 동안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삶은 그렇게 정의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까? 이런 운명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타고난 구멍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타고 났으니 그냥 그렇게 채워지지 않더라도 채우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일단 슬프지만 그 답은 '그렇다' 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그 구멍은 평생 동안 끝없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선택 자체가 불가능 하다. 두려움을 느낀 인간은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만약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스트레스로 인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한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력 그 자체를 줄이는 방법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채워도 결국 또 다시 빌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장 두려움에 쫓겨서 할 수는 있지만 사로잡혀 있지 않을 수는 있다. 결국 구멍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지면 비로소 약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신념, 믿음, 목표, 가치, 희망, 욕망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작은 변화이지만 생각보다 아주 큰 변화이기도 하다. 처음엔 단 1도의 변화이지만 시간이 쌓이게 되면 원래 가려는 길에 비해서 엄청나게 멀어진 길에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내면에 존재하는 채울 수 없는 구멍을 채우려는 무의미한 노력임을 인식하는 순간 스스로 약간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한가지 좋은 현상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진 신념, 믿음, 목표, 희망 등과 반대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을 겪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진다결국 타인의 삶에 무척 관대해질 수 있게 된다.

 

구멍에 사로잡히면 오직 두려움밖에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성적 생각이 완전히 불가능해 진다. 겉으로 보기엔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신념이나 믿음 그리고 가치 등은 완벽한 감정적 활동에 불과하다. 두려움을 감추려고 그 위를 뭔가로 쌓아서 만든 견고한 탑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견고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그리고 가치 등을 부정하게 되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의 두려움을 자극했기에 그렇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사람은 두려울 때 가장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그것으로부터 한발자국만 벗어나 약간의 자유를 얻게 되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 자신의 내부에 구멍을 가지고 있으며, 평생 동안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직 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기에 그렇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너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서로 얼마나 안쓰러운가?

 

다들 각자의 삶이 겉으로는 제법 그럴 듯 해보지만 결국엔 예쁘게 화장을 하고 잘 차려 입은 옷일 뿐이다. 보이지 않게 옷 안에 숨겨져 있는 육체는 매일 매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도, 누군가의 삶을 혐오할 필요도, 내 삶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우쭐할 필요도, 내 삶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면서 우울해 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는 그 형태만 다르지 결국엔 똑같다.

 

나를 이해해주고, 나를 감싸 안아주고, 나를 소중히 여겨줘야 한다. 남을 이해해주고, 남을 감싸 안아주고, 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들 힘들다. 다들 괴롭다. 다들 사로잡혀 있다. 다들 사느라 고생이 많다.

 

내가 잘나서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이기에 잘해주는 것이다서로가 불쌍하기에 잘해주는 것이다.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다. 그러니 불쌍한 존재들끼리 서로 어깨를 감싸줘야 한다. 우리는 추울 때 서로를 안아준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하지만 조금만 따뜻해져도 서로를 잊는다. 거추장스럽다고 느낀다. 질척거린다고 느낀다. 그렇게 따뜻하니 쿨할 수 있음을 모른 채 쿨하게 살기 위해서 평생 노력한다하지만 정말로 추울 때 쿨하면 얼어 죽는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것은 그저 운 좋게 얻은 따뜻함의 효과일 뿐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내 경쟁자가 아니다. 그저 함께 살아가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다. 사람인 이상, 각자 안의 구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연민과 혐오는 결국 같은 감정의 다른 얼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거지를 볼 때 내가 기분이 좋으면 연민이 느껴지고, 내가 기분이 나쁘면 혐오가 드는 것이다.

 

삶을 어떻게 정의할지는 각자의 문제이다. 하지만 한번쯤 평생 동안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결핍과 집착이란 것을 되돌아 보는 것은 제법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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