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가 상처를 받는 과정

아이루다 2019. 10. 6. 10:09

 

상처, 참 아픈 단어이다.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상처는 그 크기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아프다는 사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들의 위로와 공감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온전히 동일한 감정은 경험할 수는 없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겪고 있는 상처의 아픔은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경험 가능하다.

 

그럼에도 위로와 공감은 상처를 버텨내는고 이겨내는데 있어서 도움이 된다. 특히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아는 사람들이 해주는 진심이 담긴 위로는 그 아픈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이미 생겨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심한 경우 평생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기도 하다. 그래서 상처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흔히 상처 그 자체를 입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상처를 입는 원인 자체를 없애는 방법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감정 그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그래서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운 우리는 그야말로 '쿨해' 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쿨하다는 말은 그저 '둔해진다는' 말의 영어 버전일 뿐이란 점을 모른다.

 

아무리 영어로 그럴 듯 하게 표현했다고 해도 쿨한 사람들은 결국 둔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이 둔해지는 것은 그리 쉬운 일도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 스스로 쿨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느낀 감정을 애써 외면하거나 착각해서 부정하는 사람들일 뿐이다더군다나 설령 노력해서 정말로 쿨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는 것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쿨하다, 이성적이다, 이런 말들이 가진 의미는 감정을 잘 조절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은 원래 조절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저 사람에 따라서 감정 민감성이 차이가 날 뿐이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래 둔해서 쿨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 쿨해지고 싶다는 말은 스스로 무뎌지고 둔해지겠다는 뜻이다

 

그런 목적에 가장 근접한 존재가 바로 로봇이다.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그야말로 쿨하고 이성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로봇이 되길 바란다. 감정의 홍수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이 너무 싫어서 감정을 느끼는 것 그 자체를 줄이고자 한다. , 그럴 수 있으면 그래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도 쉽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한가지 중요한 것을 잃고 만다.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감정은 결코 선별적으로 줄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감정에 대한 둔해져서 민감함을 잃게 되는 순간 좋은 감정들을 느끼는 기회도 잃게 된다. 코가 둔해지면 나쁜 냄새에서 해방이 되지만 좋은 냄새를 맡을 기회도 잃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방법은 반 쪽짜리 해결책이다. 그렇다면 상처를 받지 않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가 왜 상처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그 과정을 이해하면 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가 생겨나는 이유::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가 어떤 감정적 변화를 겪게 될지 생각해보자. 아마도 그때 경험하는 감정은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처들 중에서 거의 가장 힘든 수준의 것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사고가 뺑소니였다면 어떨까? 부모의 마음 속에는 자식을 잃은 상실감의 고통과 함께 자식을 죽게 만든 범인에 대한 분노가 감당하기 힘든 만큼 생겨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상실감이 큰 만큼이나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당사자에 대한 분노가 생겨날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사실 이미 자식이 죽었다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기에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억울함은 수사가 제대로 된다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렇게 범인을 잡았다고 해보자. 그러면 억울함은 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재판 결과 형량이 너무 적게 나왔다면 어떨까?

 

자신이 겪은 마음의 고통은 그리 힘든데 그 고통에 비하면 사고를 낸 사람이 받은 형량이 너무 터무니 없이 적다. 사실 사형이라도 시켜야 마음이 풀릴 것이니 아무리 강한 처벌을 해도 납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오히려 분노와 억울함이 더 커질 수도 있다.

 

다행히 그렇지 않고 큰 형량이 나와서 그나마 억울함이 좀 풀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번엔 사고를 내 범죄자가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고 가정 해보자.

 

아침에 회사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그 죄를 저지른 인간은 술을 먹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핑계를 댄다. 그리고 재수가 없어서 그런 사고가 났다고 한다.

 

만약 이런 말을 자식을 잃은 부모가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칼을 들고 있었다면 칼로 찌르고 싶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라면, 설령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더라도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자식을 잃은 부모가 감당해야 하는 상처를 덜어주는 것은 바로 그 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적절한 처벌과 상대의 진심 어린 사죄이다. 이 둘만 되어도 적어도 억울함의 감정만큼은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모는 상실감을 통해서 생겨나는 분노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설령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운 없이 죽었다고 해도 비슷하다. 그때는 원망할 누군가가 없어서 억울함은 안 생기지만 대신 자신이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된다. 자책감은 자신에 대한 분노이다.

 

보통의 부모들은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자식을 앞세우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자식을 잃은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못한다. 그 후로 부모의 삶은 마치 나무가 잘리는 것과 같다. 나무는 계속 자라겠지만 그 전에 자라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된다.

 

이 예를 통해서 상처에 생겨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상처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을 당하기에 생겨난다. 그것이 타인이든 스스로이든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처가 된다.

 

, 상처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을 당하거나 막히거나 무시가 되는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당황스러움, 좌절감, 분노, 억울함, 어처구니 없음 등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의미한다.

 

자식을 사고로 잃은 부모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이란 강한 감정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그 감정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잡았더라도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을 때, 처벌이 내려졌더라도 범인이 뉘우치지 않을 때 부정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부모는 감당하기 힘든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 정도의 분노이다.

 

그런데 상처는 상실감과 같은 나쁜 감정들을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좋은 감정이라도 부르는 것들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 상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많은 노력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상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보통은 그렇게 되면 주변에서 아주 크게 축하를 해준다. 특히 가족들의 축하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런데 만약 누구도 그 상에 대해서 그리 축하해주지 않는다고 해보자. 가족들도 별 것도 아닌 데 왜 그렇게 힘들게 노력해서 그런 상을 받았냐고 하거나 아예 가족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그때 당사자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자신이 느낀 기쁨이란 감정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부정 당하거나 막혔거나 무시당한 것이다. 이때 역시도 동일하게 상처를 받게 된다. 상을 받은 기쁨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상처의 크기도 커지게 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 신나게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자랑을 하려고 할 때 엄마가 남들 다 받는 100점가지고 무슨 헛소리냐고 하면서 밖에서 들어왔으면 빨리 씻기나 하라고 잔소리를 하면 아이는 아주 크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쁜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느낀 감정이 주변에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된다. 그렇다면 방금 전 언급했던 그런 강렬한 감정들만 이런 식으로 동작될까?

 

아니다. 작아서 본인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조차 모를 감정들도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종류의 감정은 생겨남과 동시에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상처로 이어지게 된다.

 

어제 야근을 해서 피곤하다고 했을 때 남들 다 하는 야근해놓고 뭘 그리 힘들다고 하냐고 면박을 받을 때, 파마를 새로 해서 기분이 좋게 왔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를 때 상처를 받는다. 어떤 종류의 감정을 느끼든지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무시가 되거나 부정될 때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경험하고 산다. 삶 자체가 감정 경험의 총합이라도 해도 전혀 무리한 표현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는 꿈 속에서조차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슬픈 꿈을 꾸고 나면 일어나자마자 울기도 한다.

 

감정은 매 순간 발생하고, 그 감정은 다행히 대부분 인정을 받는다. 미세해서 무시되더라도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정일 경우엔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준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다. 그러니 어느 날 상황이 꼬이면 결국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쁜 감정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상처는 아주 커지게 된다.

 

내가 숨기고 싶은 비밀을 남들 앞에서 떠들어서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그것을 왜 사람들 앞에서 얘기했냐고 따질 때,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고, 소심하게' 라는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는 것이다. 성격이 좀 되어서 상대에게 큰 소리로 욕이라도 하면 그제서야 상대가 어쩔 수 없이 미안하다고 해서 해결이 될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관계가 깨질까 봐 그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날 밤에는 억울함의 상처로 인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나마 상대가 '미안해. 내가 생각 없이 말했네' 라고 하면서 사과를 했어야 줄어들 상처였다. 사실 숨기고 싶은 비밀이 다 공개되어서 상대가 미안하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없으면 말도 하지 말아야지' 라고 한마디 쏘아붙였어야 속이 조금이라도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반대로 오히려 소심하다는 평가를 통해서 새로운 기분 나쁜 감정까지 덤으로 얻게 된 상황이다. 상처가 줄긴커녕 더욱 더 커져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매 순간 숱하게 일어난다. 이 세상은 사람들마다 매일 미묘하게 일어나는 감정들이 서로 충돌하는 현장인 셈이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면 어떤 감정은 상처가 되고 만다. 심지어 운이 정말로 나쁠 경우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 채 오히려 무시와 조롱을 당함으로써 별 것도 아닌 감정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상처가 일어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새로운 시야로 상처를 볼 수 있게 된다사람들은 모두 상처 받고 싶어 하지 않지만, 사실 상처가 생겨나는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왜냐하면 그 상처는 상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이라서 그렇다. 상대는 그저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내 감정에 반대하거나 무시한 것뿐이다. 상대가 내 감정을 인정해줘야 할 의무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내가 상처를 받는 것은 오직 인정을 받으려고 한 내 문제이다.

 

결국 내가 감정을 느끼는 한 상처는 반드시 받을 수 밖에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낀 모든 종류의 감정이 언제나 인정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대로부터 인정받기 힘든 타당한 이유를 들으면 납득이 되면서 상처는 남아도 억울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운이 조금이라도 좋지 못할 때는 그 감정이 무시되어 버리는 경우도 꽤나 흔히 일어난다. 우리가 그러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상처를 받게 되는 이유이다.

 

 

::흔한 상처 해결책 - 영향력과 돈::

 

어떤 사람의 존재감은 그 사람이 가지는 감정이 얼마나 주변에 잘 인정을 받느냐 여부로 결정이 된다. , 존재감이 큰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감정은 주변에서 잘 인정이 된다.

 

한 회사에 가장 존재감이 높은 사람은 사장이다. 그래서 그 회사에서 사장의 감정은 가장 쉽게 인정을 받게 된다. 회사 매출이 나빠서 화를 낼 때나 깜짝 매출이 일어나서 기분이 좋을 때나 심지어 아침에 집에서 아들 녀석이 말을 안 들어서 한바탕 싸움을 하고 와 기분이 나쁜 것도 쉽게 인정을 받는다.

 

사장 본인이 실수를 해서 웃으며 사과를 하면 밑의 직원들은 언제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웃으면서 괜찮다고 한다.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보필을 잘못한 자신들의 문제라고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밑의 직원이 실수를 한 후 멋쩍게 웃었을 때 사장이 '지금 웃음이 나오냐?' 라고 한마디 하면 직원은 금세 웃음기를 지우고 잘못했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숨겨져서 잘 안보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은 자신의 감정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이며 밑의 직원은 사장의 감정 변화에 비위를 맞추다가 결국 아니꼬와서 출세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이렇게 강한 영향력을 가질수록 그 사람의 감정은 쉽게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상처를 덜 받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크게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또한 그런 인정은 권력에 굴복해서 생겨나는 결과이기에 근본적인 위험을 가지고 있다. , 회사가 아닌 밖에서 동등한 관계로 만났다면 결코 받을 수 있는 인정이 아니다. 물론 그런 반쪽 짜리 인정조차도 앞에서 하면 기분이 풀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가 자신에 대한 직원들의 뒷담화를 한번이라도 듣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분노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 해결책은 힘들기도 하고 더해서 위험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 감정은 인정이 아닌 돈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을 아주 기분 나쁘게 하고 사과도 하지 않더라도 아주 큰 돈으로 보상을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감정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많은 사고들이 돈으로 보상이 된다. 사실 돈으로밖에 할 수 없어서 그런 경향도 있지만, 돈으로 보상을 받게 되면 그나마 억울한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린다.

 

하지만 이 해결책 역시도 문제는 여전하다. 만약 상대가 잘못을 하고 돈을 준다고 해도 그것을 집어 던지게 되면 아무리 큰 돈이라도 그 순간만큼은 결코 받고 싶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돈을 받고 끝내기도 한다. 분명히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저렇게 돈으로 해결하려는 상대를 보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것 같기도 한데 돈만으로도 쉽게 감정을 푼다. 그래서 심하면 비굴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사실 자신의 감정을 돈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내부엔 그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겨지는 것이다.




 

::감정을 인정받는다는 것의 의미::

 

이런 현상을 이해하려면 감정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감정이 왜 생겨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가니 결론만 단순히 말하는 것이 좋겠다.

 

감정은 생존을 하기 위해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인간이 감정을 느낀다는 말의 의미는 생존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살기 위해서 두렵고, 살기 위해서 기쁜 것이다. 사람들은 매 순간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매 순간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그래서 감정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싶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된다그것이 바로 로봇이다.

 

감정이 매 순간 생겨나는 생존활동의 결과라면 그 감정을 인정받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이 된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어떤 감정들을 느꼈는데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 분명해' 라는 의미이다. 반대로 반대되거나 무시된 감정은 '내가 생존을 위해서 뭔가를 느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 라는 의미이다.

 

, 감정의 인정은 내가 생존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감정의 부정은 내가 생존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내가 생존활동을 제대로 못한다는 말이 가진 의미가 무엇일까? 당연히 내가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두려움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고 노력을 한다. 뭔가를 배우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과 만나서 논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런데 반대로 뭔가를 했는데 오히려 생존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말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 감정이 무시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죽을 길을 가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거대한 두려움이며 참을 수 없는 불안함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상처가 가진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얼굴이다.

 

어떤 문제가 터진 회사에서 두 사람이 각자 다른 해결책으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러다가 한 명의 의견이 좀 더 나은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자신의 의견이 묵살된 사람은 크게 분노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상대방의 의견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일단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의견을 더 지지하게 되면 그냥 그 자신도 그 의견을 따르면 된다. 딱히 억울함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생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한 해결책은 결국 자신의 생존전략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그 생존전략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경험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러니 억울함을 느낄 수 밖에 없고 분노가 치밀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돈으로 상처를 해결 받게 되면 매일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데 그것을 돈으로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암에 걸리면 죽는다.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기에 상처를 돈으로 해결 받더라도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치유되지 않고 안에서 쌓이고 또 쌓여서 삶 자체가 점점 더 망가지게 된다. 상처가 자기신뢰가 떨어진 순간인데 그것이 누적되면 결국 자기신뢰가 부족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 사람을 흔히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존감은 자기신뢰의 다른 말이며, 자기신뢰가 높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불필요해진다. 그래서 인정을 덜 원하게 되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자신이 입은 상처를 다룰 때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인간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상처는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자신이 남들보다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오히려 상처를 잘 받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감정적으로 둔한 것이다. 미각이 없어서 아무 음식이나 잘 먹는 사람인 것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소음에 잘 견디는 사람이다. 코가 둔해서 꽃 향기를 못 맡는 사람이다. 상처를 덜 받지만 덜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상처의 횟수는 감정의 민감성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그래서 민감할수록 상처를 더 잘 받게 되는데, 일단 민감해서 상처를 잘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더 중요한 그 상처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때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은 바로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감정을 인정받고자 했기 때문에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상처를 받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감정의 인정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음에 들거나 이득이 되면 인정하고 이상하거나 손해가 되면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니 남의 태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감정을 인정받고 싶은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생존하고 싶어서 그렇게 감정의 인정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도 잘못이 없다생명체가 살고자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단지 잘 생각해보라. 내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일과 그 일을 저지른 범인을 잡아서 처벌하는 일은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아이가 죽은 일은 내 생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그렇게 강렬한 상실감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범인을 잡아서 처벌하는 일은, 아주 큰 시야에서 보면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그래야 하겠지만, 나 자신의 생존과 그리 크게 연결고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일단 어떤 감정이든 상대방에게서 인정을 받고자 하기에 결국 범인에게서 사죄를 받고 그 사람을 처벌을 해야만 그제서야 감정이 풀린다.

 

하지만 반대로 운 나쁘게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거대한 상실감이 모두 범인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서 감당하리 힘들만큼 큰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째로 그 감정을 인정 받는데 바치기도 한다. , 사부를 잃은 제자가 원수를 갚기 위해서 평생 숲에 들어가 훈련을 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정말로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위일까?

 

최초의 상처는 생존활동을 하려고 감정을 발생시켰으나 그것이 부정당해서 생겨난 두려움이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욱 더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에 더욱 더 가깝게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하게 된다. 심지어 그 억울함만 풀 수 있다면 죽어도 된다고 여기게 된다.

 

물론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간다나도 그럴 것이다(이것이 바로 누군가의 감정을 인정해주는 표현이다). 하지만 상처는 단순히 자신은 그렇게 느끼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황인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살아가오면서 많이 틀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성장한다. 그러니 틀림이 그렇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치명적이지만 않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왜 유독이 감정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까? 모두가 욕하는데 범인 혼자만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이 모두 부정을 당했다고 느낄까왜 그렇게 단 한 사람만 부정을 해도 그것이 그리 깊게 남을까?

 

100명이 모인 곳에서 단 한 사람만 자신의 의견에 반대를 했는데 자기 전에 왜 그 사람 의견만이 왜 자꾸 머리 속에 떠돌까? 우리가 느낀 감정은 늘 100% 옳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감정에 대한 완벽한 정당성에 대한 욕구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결국 두려움이다. 스스로 확신이 없기에 그렇게 작은 반대에도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감정인데, 그 무의식 자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시험지 답안을 다 쓰고 나왔는데 한 칸씩 밀려 썼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과 비슷하다.

 

결국 상처를 가장 제대로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낀 감정이 인정을 받든 못하든 스스로 잡지 않는 것이다인정받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이다.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 그 자체가 바로 자기신뢰 부족으로 인해서 자신의 감정이 잘못되었을까 봐 두려워서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크게 상처를 받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우연히 자신의 감정이 쉽게 부정당하지 않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일 뿐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냥 운이 좋았던 것이란 뜻이다. 이 세상엔 내 감정을 무시할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 만날 일이 없었는데 운 나쁘게 가끔 만나게 되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크게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니 내가 오늘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둔해졌거나, 영향력이 커져서 사람들이 가식적으로 대하거나, 운이 좋게 상처를 줄 사람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조건부 해결책들에 불과하다.

 

상처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감정의 본질을 이해하고, 왜 우리가 상처를 받게 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감정 그 자체를 흘려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스스로 믿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정당한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난 생존 활동일 뿐이다. 감정은 물론 아주 좋은 것이며 인간의 본능적 생존활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고 그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인정을 해줘도 옳고 그름 자체가 사람들의 판단일 뿐 결코 절대적으로 정해질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 날은 운 좋게 옳다고 판단을 받아서 인정을 받고 어느 날은 운 나쁘게 틀렸다고 판단을 받아서 상처를 받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정당성만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흘려 보낼 수 있으며, 특히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미 기분이 나쁜데 또 거기다가 인정까지 받으려고 해서 더욱 더 그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내가 행복한 것이 최고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그냥 흘려 보내야 한다. 내 감정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그저 아주 오래된 나쁜 습관일 뿐이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나쁜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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