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플라시보 효과

아이루다 2019. 8. 26. 07:46

 

며칠 전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길가에서 우연히 아주 커다란 간판 하나를 보게 되었다.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암 정복, 양자 파동과 같은 단어들이 적혀 있는 커다란 간판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이가 좀 되어 보이는 남자분 얼굴이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아마도 병을 일반 의학보다는 뭔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듯 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무실의 간판이었다. , 요즘 이런 형태의 대체의학이 워낙 많이 퍼져 있어서 그냥 그런 가보다 하면서 지나갔다. 단지 그 순간엔 양자 파동이란 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천재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양자의 특징을 이미 치료에 쓰고 있는 것처럼 써 놓은 것이 독특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저런 치료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상관없이 치료를 받는 사람이 믿고 하면 치료가 될 것이란 생각도 이어졌다. 그러니 양자파동이란 타이틀을 가진 치료법이 어떤 식으로든 효과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치료효과를 보통 플라시보 효과라고 부른다. 정말로 믿고 치료를 받으면 실제로 치료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전에 읽었던 그것에 관한 극단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 내용이 잘 기억이 날질 않긴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린 후 새롭게 개발된 실험적 치료제를 통해 완치가 되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치료제가 가짜라는 폭로가 나왔다. 그러자 치료된 사람이 그 기사를 보고는 다시 그 병이 생겼다. 그리고 결국 죽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보통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면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다. 일종의 속임수라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어제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믿어서 몸이 나았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속임수로만 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일종의 정신적 문제인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꾸준한 운동을 통해서 몸이 건강해지고 나면 그에 따라서 우울증이 낫는 경우가 있다. 육체의 건강한 변화가 정신을 치료하는 경우이다. 그러니 이것은 꽤나 좋은 우울증 치료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반대인 정신의 변화를 통해 육체를 치료하는 것은 왜 그리 좋은 것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내 선입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보통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신과 육체, 이 두 가지로 나눠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할까? 좀 더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정신이 영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만약 정말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정신만 관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는 죽음과 동시에 썩어서 없어지기 때문에 만약 육체까지도 영혼과 관련이 있게 되면 죽음과 동시에 영혼까지도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니 당연히 육체는 영혼과 관련이 없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가 끊어져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것은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고 실제로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하고 사는 것을 보면 정신과 육체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산다. 우울할 때는 운동을 하고, 몸의 한계는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은 아주 흔히 일어나고 있는 편이다.

 

결국 육체와 정신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믿음과 육체와 정신이 생각보다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현실 속 경험이 매우 혼란스럽게 섞여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거부감이다.

 

그런데 그것은 아마도 정신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그 자체에 대한 문제 때문은 아닌 것 같다. 플라시보 효과의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속았다' 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더라도 그 원인이 정신이 속아서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극단적으로 플라시보 효과가 나타났던 사람의 예처럼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속았다는 것을 모르고 평생 살다가 죽는다면 정말로 속은 것이 큰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사실 냉정히 따져보면 많은 종교들에서 말하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실제로 죽어봐야 아는 것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종교적 교리에 속았는지 여부를 살아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본인만 제대로만 믿고 있다면 사후에 어떤 새로운 삶이 있을지, 아니면 죽음은 오직 그것으로 끝인지 딱히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편히 떠나면 그만일 수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사실 하나가 바로 이 세상엔 사기꾼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삶을 현명하게 살려면 사기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늘 상대의 의도를 의심하는 버릇을 가져야 한다. 또한 수 많은 사례 등을 보고 들으면서 수 많은 사기 수법이 당하지 않아야 한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과정이 바로 이런 '불신'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른이 될 수록 의심이 많고 잘 속지 않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방어체계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좀 과한 면도 있다. 물론 이해는 간다. 한번 잘못 사기를 당하게 되면 너무 큰 데미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플라시보 효과는 불신이란 벽에 막혀 있는 듯 하다. 그런데 결국 삶에서 불신이 답이 될 수는 없다. 불신은 삶을 그저 안전하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반대로 신뢰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

 

불신과 신뢰의 경계에서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삶은 가끔 그냥 믿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비록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몸에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면 괜찮지 않을까?


요리를 하기 위해서 구해 온 토끼가 사실은 자신이 달에 살고 있었던 토끼였으며, 그래서 '어린왕자토끼' 라고 불러달라고 할 때 그것을 믿어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오랫동안 불신의 논리에 깊게 빠져 있었고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너무도 많은 불신을 보게 되는 탓에 결국 이런 생각까지 이어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