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억울함에 관해서

아이루다 2019. 7. 1. 09:34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은 당연히 나쁜 감정들을 경험하는 일이다. 두려움과 그 두려움이 변질되어서 생겨나는 분노, 짜증, 혐오, 귀찮음, 서운함, 억울함 등이 바로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상대적으로 강한 감정들, 그러니까 분노, 억울함, 짜증 등은 불행한 삶을 살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악영향을 끼친다.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졌거나, 큰 돈을 사기 당했거나, 다른 집들 가격은 다 오르는데 자신이 사는 집의 가격만 떨어졌거나, 자신의 실수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다면 삶이 불행하지 않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행은 사실 어쩔 수도 없다. 그저 그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거나, 혹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는 방법을 써야 한다. 시험을 보니 떨어지고, 돈을 벌고 싶으니 사기를 당한다, 집을 샀으니 가격이 떨어지고, 자신이 실수를 했으니 그런 고통을 당한다. 단지 모든 최초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기에 스스로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황을 다르게 바꿀 수는 있다. 물론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이유들로 사람들이 불행해질까? 물론 이런 일을 당하면 불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들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 과연 몇 번이나 중요한 시험에 떨어지고, 큰 돈을 사기 당하고, 집을 샀는데 그 집 값만 떨어지고, 회사에 큰 피해를 입힐 만큼 실수를 하는 경험을 하겠는가?

 

이런 불운은 반드시 큰 불행으로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주 경험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인생의 행운이 세 번 찾아온다는 말이 있듯이, 인생의 불운도 기껏해야 세 번 찾아 올 것이다. 물론 아주 운이 없는 사람인 경우 더 자주 겪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번이나 혹은 아예 단 한번도 그런 불운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꽤나 될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불행한 상태에 놓여 있다. 저런 큰 불운을 경험하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불행해지는 것일까?

 

 

 

::강도와 빈도::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통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행복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행복을 설명해준 책을 쓴 서민국 교수님은 자신의 책을 통해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닌 빈도다라는 설명을 했다. 매우 깊은 성찰이 담겨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행복을 불행으로 바꿔보자. 그 역시도 말이 될까?

 

그러면 불행 역시도 나쁜 감정들의 강도가 아닌 빈도다라고 바꿔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커다란 나쁜 감정을 한 번 경험하는 것보다 작은 나쁜 감정들을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이 훨씬 더 불행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열 번 베인 것과 손가락이 아예 잘리는 것 중에서는 후자가 훨씬 더 불행하다. 그러니 행복에 관한 명언은 불행에 관한 명언으로 바꾸면 이상한 뜻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독특한 현상 하나가 발견된다. 불행에 관해서 빈도와 강도 중에서 강도가 훨씬 더 중요하게 보이긴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반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불행도 역시 강도가 아닌 빈도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왜 커다란 나쁜 감정을 한 번 경험하는 것보다 작은 나쁜 자주 반복되는 것이 더 불행을 불러오게 될까? 그 반대편인 행복에서는 쉽게 이해가 간다. 행복의 기원 책에서도 그것에 대해서 아주 멋진 설명을 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행복은 반드시 적응되어서 그렇다. 처음 금메달을 땄을 때 느낄 수 있는 행복은 이후 절대로 같은 금메달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행복은 반복될수록 강도가 약해지며 심지어 너무 자주 하면 지루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신나는 놀이공원도 365일 연속으로 가게 되면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어지고 만다.

 

하지만 불행에서는 다르다. 이미 뼈가 반복적으로 부러졌다고 해서 오늘 부러질 때 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나마 나은 점은 경험을 했기에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이를 처음 낳는 산모와 이미 두어 번 경험이 있는 엄마의 차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아이를 낳을 때 고통스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절대로 적응될 수 없다. 그리고 적응되어서도 안 된다. 다리가 여러 번 부러져서 이제는 더 이상 부러져도 아프지 않다면 누가 다리가 부러지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겠는가?

 

이렇게나 뻔한 불행에 관한 특성이지만 놀랍게도 현실 속에서는 잦은 작은 불행을 경험하는 것이 불행한 삶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흔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불행할 때 느끼는 그 작은 나쁜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증폭이 되어서 그렇다. 또한 그런 감정 증폭 현상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감정 정당성::

 

사람이 좋은 감정을 느꼈을 때와 나쁜 감정을 느꼈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 , 하나는 웃고, 하나는 찡그리는 것이니 당연히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큰 차이가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감정을 경험했을 때 행복에 대해서는 결코 따지지 않지만 불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따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행운에 대해서 라고 묻지 않는다. 로또를 산 후 당첨이 되면 왜 나한테 이런 행운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누군가 큰 실수를 했는데 그 결과로 인해서 회사 이득이 늘어났다면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도둑질을 하러 집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119에 신고를 해줬다면 그 사람의 절도죄는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왜 했는지에 대해서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일은 전혀 다르게 대접받는다. 나쁜 일들은 따져져야 한다. 사실 필요하기도 하다. 시험을 본 후 복기를 할 때는 맞춘 문제가 아니라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봐야 한다. 그래야 또 다시 시험을 볼 때 비슷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어서 성적이 오를 수 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도 그 책임 소재를 밝히고 그것을 통해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하기에 따져지는 것이 맞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만약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번 난 사고는 반드시 반복되게 된다.

 

사람이 느끼는 나쁜 감정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일단 나쁜 감정들이 들면 그것을 왜 경험하게 되었는지 알려고 하고, 그것을 통해서 그런 감정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그 외의 다른 것들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가 있다. 진짜 목적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낀 나쁜 감정이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감정 정당성 확보, 그것이 바로 개인이 자신의 느낀 감정을 따져보는 진짜 이유이다.

 

만약에 다리가 무너졌을 때 그 다리가 무너진 원인을 원래 설계자와 시공자에게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그들은 사고 원인을 밝히기 보다는 그 원인이 최대한 자신들에게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혈안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고가 나면 반드시 외부 조사기관이 따로 조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의 경우엔 그것이 불가능하다.

 

개인은 자신이 느낀 나쁜 감정의 원인을 파악할 때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느낀 감정 정당성을 스스로 판단하게 되면 결국 설계자와 시공자에게 사고의 원인 분석을 맡겨 놓은 상황과 동일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자신이 느끼고 있는 나쁜 감정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어떤 외부적 상황이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 있다는 것으로 결론 내려고 한다. 그래서 형식은 감정 정당성이지만 내용은 감정 합리화가 되고 만다. 혹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정당성을 찾을 근거가 없으면 자책감이 되고 만다.

 

그나마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제 삼자에게 설명함으로써 객관적 태도를 유지해보려고 절차적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거의 실패한다. 왜냐하면 그런 형식도 결국엔 감정 정당성을 추가적으로 획득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어서 그렇다. 일단 들어주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더 우호적인 친구들이 대상이다. 그리고 설명을 할 때도 자신이 잘못한 점은 축소하고 상대가 잘못한 점은 확대한다. 또한 이야기를 하는 내내, ‘너는 내 편을 들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화낼 거야’, 라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그러니 누가 객관적으로 판결을 해주겠는가?

 

그러다가 누구 하나가 객관적으로 판단이라도 하면 바로, ‘내가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지 판결을 내려달라고 했니?’ 라고 따진다. 그래서 결국 최대한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는다. 그래서 자신은 잘못이 거의 없고 상대에게 거의 모든 책임이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런 전체적인 과정을 사람들은 흔히 위로나 공감이라고 표현한다.

 

 

 

::감정 삭제::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감정의 원인 분석을 제대로 해서 그것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도록 방지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만 할까? ,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자신의 잘못이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럴 경우 미래에 또 그런 잘못이 반복될 불안함이 생겨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서투르다는 것을 들켜야 하기에 더욱 그런 감정을 표출해야 할 상황이기에 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사람들은 딱히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근거 없이 짜증을 내며, 잘한 것도 없이 억울해하기만 한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한다.

 

결국 의도대로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가 되면 자기 합리화가 되기에 자신의 잘못이 아닌 상대방이 그럴만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된다. 그러니 상대에게 용서를 빌 것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직장 상사이거나 시어머니 등과 같이 대놓고 따질 수 없는 처지가 되면 그때부터는 시간만 되면 상대방이 뒷담화를 하는 것으로 감정을 풀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이런 식으로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도 결국 잘못의 한 상대방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지 못하면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증폭되기만 한다.

 

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너무도 명백히 자신의 잘못으로 결론이 나서 자책감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보통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애쓴다. 가서 직접적으로 사과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은근슬쩍 미안하다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명백히 드러난 잘못인 경우나 그렇고, 작은 실수로 인해 일어난 감정들은 그냥 파묻혀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파묻힌 감정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한 그 상대로 계속 묻혀 있다. 그것을 흔히 양심의 소리라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좋은 감정들은 적응이 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지만 나쁜 감정들은 반드시 적절한 처리가 되어야 사라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증폭되거나 깊게 파묻혀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10살에 당한 부모로부터 받은 불공정한 일에 대해서 평생 동안 억울해 하면서 살아가기도 하며 15살 때 저지른 자신의 실수를 죽을 때까지 후회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나마 후회는 파묻혀 있기에 증폭은 안 된다. 그래서 회한이 되어 비교적 잔잔하게 느껴지는 반면, 사과를 받지 못한 감정은 평생 그 상태를 유지하거나 생각할수록 증폭이 된다. 어린 시절에 오빠만 참고서를 사주고 자신에게는 사주지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억울함은, 이후 오빠는 결혼도 잘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자신은 결혼도 못하고 그리 좋은 직장에도 다니지 못하는 현실과 합쳐지면서 엄청나게 증폭이 된다. 결국 차별을 한 부모에 대한 분노는 그들에 대한 뿌리깊은 원망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가장 위험한 감정, 억울함::

 

사람은 많은 종류의 감정을 경험하고 산다. 그 모든 감정이 모두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어서 판단을 통해 각종 나쁜 감정들로 확장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된 감정들은 이후 감정 정당성이란 절차를 거쳐서 크게 두 가지로 결론이 난다. 자신의 잘못일 때는 상대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신의 잘못이 아닐 때는 상대에 대한 억울함으로 나타난다. 이때 미안함은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 아니라서 용서를 구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억울함은 다르다. 일단 한번 억울해진 감정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때만 유일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억울함으로부터 파생되는 가장 흔하고 강한 에너지를 가진 감정이 바로 복수심이다.

복수심은 중국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 산에 들어가 20년간 무예를 수련하는 힘이 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을 그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일에 다 받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더라도 해결하기 전까지는 억울함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억울함의 정도가 약한 것을 서운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운함 역시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억울함이 얼마나 대단한 감정인가 하면, 이제 살만큼 살아 보이는 늙은 분들도 대화를 해보면 자신이 행복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억울하게 당한 일들을 그리 서럽게 말하곤 한다. 해결되지 못하니 죽음의 코 앞에 다가온 순간까지도 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 억울함의 감정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좀먹어 왔는지 말이다. 사실 억울함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감정이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이것은 에너지가 약한 죽음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인 억울해서 죽는 죽음은 그 에너지가 다르다. 대단히 큰 에너지를 가졌다. 그러니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억울해서 살 수가 없으니 그렇게 자기 파괴적인 행동까지 하는 것이다. 너무 화가 나면 자해를 하긴 해도 죽는 사람은 없다. 너무 짜증이 나거나 슬퍼서 죽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너무 억울하면 죽는다. 억울하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상대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억울함은 자신이 판단한 감정 정당성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이 상대가 사과할 기회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아무튼 어떤 일이든 자신은 정당하다고 믿었는데 상대방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면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그렇게 남는 것들은 큰 일들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일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감정들이다. 큰 일은 어떤 식으로든 표면화 되어서 처리가 되는 반면, 작은 서운함과 억울함 등은 표현해봐야 부끄럽고 소심하거나 찌질하다는 평가를 받으니 그냥 숨겨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작지만 꾸준히 쌓인 감정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폭탄이 되어 간다.

 

 

 

::사소한 감정들::

 

어린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보면 참 어리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어리다는 것에는 아직 세상을 몰라서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것도 포함되지만 그것보다 오히려 그들이 표현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해도 느끼면 말한다. 혼내서 말하지 못하게 하는 한 한다. 혼나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말로 표현한다.

 

힘들다, 짜증난다, 심심하다, 먹고 싶지 않다. 놀고 싶다, 엄마 밉다, 아빠가 좋다, 할머니 보고 싶다, 저 아저씨 싫어, 등등 아이들은 옆에 있는 엄마가 당황할 수도 있는, 딱히 말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모두 표현한다.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란 이유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런 행동의 가장 좋은 점은 바로 표현되었기에 쌓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찌질한 감정이라고 해도 다 표현하기에 처리가 된다. 그래서 남지 않고 사라진다.

 

하지만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결코 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유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특히 나쁜 감정들은 최대한 숨겨야 한다는 것을 아픈 경험들을 통해서 배운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다. 친구들에게 표현했다가 놀림이라도 당하게 되면 더욱 더 조심을 한다. 그렇게 될수록 감정은 표현되지 않고 점점 더 숨겨진다.

 

본격적으로 어른이 되면 이제 인간관계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숨겨야 한다. 나쁜 감정만 대상이 아니다. 좋은 감정도 숨겨야 한다. 그래야 거래를 할 때 우위에 설 수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쪽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감정을 숨기는 일은 회사 상사를 대할 때, 손님을 대할 때, 고객과 만날 때, 심지어 화투를 치거나 포커를 칠 때도 필요하다.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숨기는 얼굴을 포커 페이스라고 한다.

 

하지만 이 포커페이스가 결국 문제가 된다. 사회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에서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가족과 같은 인간적인 관계에서조차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하는 감정들이 무의식적으로 숨겨진다. 그리고는 어처구니 없는 기대를 한다. 그것은 바로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어련히 알아줄 것이라는 기대이다. 자신이 최대한 숨겨놓고는 알아서 찾아내라고 한다. 감정이 무슨 보물찾기도 아닌데 상대가 자신이 꼭꼭 숨겨놓은 감정을 몰라주면 서운해 한다. 진심을 몰라 준다고 억울해 하기도 한다.

 

 

 

::관계의 두 가지 종류::

 

인간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적인 관계이다. 보통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들이 거기에 속한다. 또 하나는 사회적 관계이다. 친목 모임이나 일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관계들이다. 그리고 어떤 관계든 상관없이 사소하게 서운하거나 억울한 감정들이 쌓이게 되면 폭탄이 될 위험성이 높다.

 

그나마 감정 표현이라도 해서 중간중간 잘 풀어주면 괜찮은데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하니 그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관계는 별 상관이 없다. 유리하면 계속 유지하고 불리하면 끊으면 되니까 그렇다. 하지만 가족과 같이 인간적인 관계에서는 다르다. 가족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게 되면 불화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아내가 남편을 싫어하고, 자식이 부모를 싫어한다. 그래서 가정이 불행해지고 만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이유는 큰 일들이 아니다. 매일 일상 속에서 쌓인 서운함과 억울함이 장시간에 걸쳐서 쌓이면서 그런 상태를 만들어 내고 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별도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특히나 가장 중요한 관계가 바로 부부나 연인인데, 삶이 많이 얽혀 있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사소하게 쌓이는 억울함의 감정들도 자연스럽게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커다란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좋아야 할 관계가 가장 최악의 관계로 변하게 된다. 특별히 싸울 이유도 없는 서로 죽일 듯 싸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정말로 죽이기까지 하는데, 그 역시도 너무 억울해서 복수를 실행한 것이다.

 

생일 선물로 20만원짜리 시계를 사줬는데, 정작 자신의 생일엔 5만원도 안되어 보이는 스카프를 사줬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나마 대 놓고 뭐라고 하면서 다시 사달라고 하면 쌓이지 않을 감정인데 알아서 좀 잘해주지 하는 생각에 표현도 하지 않고 해결도 하지 않고는 쌓아만 둔다. 내년 생일에 두고 보자는 마음만으로 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억울함으로 인한 복수심은 내년 생일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저녁에 뭔가를 먹고 싶다고 하도 평소와 달리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면 상대방도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해주지 않는 오늘의 일을 쌓아 둔다. 그렇게 숨겨진 사소한 감정들이 매일 쌓여간다.

 

 

 

::말하기 부끄러운 감정들::

 

흔히 여자어라고 알려진 내가 왜 화난 줄 몰라라는 말에 담긴 재미난 심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심리이다. 그러니까 그 표현은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좋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그 감정을 직접 말하려고 하니 내가 좀 찌찔해 보여서 싫고, 네가 알아서 처리해줬으면 해. 하지만 절대로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말아줘의 짧은 버전이다.

 

하지만 듣고 있는 남자는 그것을 짐작하기가 힘들다. 여자와 남자의 감정 흐름이 좀 달라서 그렇고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여자들에 비해서 더 열심히 포커페이스 훈련을 해와서 감정을 훨씬 둔하다. 그러니 여자의 미묘한 감정을 파악하는 일이 몹시 힘들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저 말을 듣는 것을 매우 두려워한다. 그래도 처리는 해야 하니 미안해라고 했다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너는 진짜로 그게 문제야라는 대꾸를 받을 수 있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인생의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이런 심리는 여자만 가진 것이 아니다. 남자도 상황만 다를 뿐 똑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감정들을 느낄 때가 꽤나 많다. 보통은 서운하고 심하면 억울하다고 느끼지만, 그런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 자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사실 꺼내면 정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초딩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 다들 느끼면서도 느끼는 것을 표현하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엔 자신은 그런 찌질한 감정은 느끼지 않는다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 착각이다.

 

빵이 10개 있었는데 사람은 11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 자신만 빵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꼭 빵을 먹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좀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빵을 나눠준 사람이 미안하다고 해도 괜히 기분이 좀 그렇다. 마치 자신이 그런 빵 따위로 기분이 상할 것 같은 사람 취급을 해서 그렇다. 실제로 다들 받은 빵을 못 받아서 기분이 약간 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그것을 대놓고 표현하면 괜히 기분이 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운하거나 억울하지만 딱히 자존심 때문에 그런 감정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괜히 자기만 속이 좁은 사람 같고 괜히 자기만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되지 않은 서운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다. 언젠가 터질 그날을 위해서.

 

 

 

::찌질함 인정하기::

 

감정을 남기지 않으면 큰 감정들이 대상이 아닌 소소한 감정들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불필요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 부끄럽더라도 상대방에게 솔직히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 예전 방식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싸움만 커진다. 과거 방식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상대에 대한 비난이 목적이었다. 결국 정당성 확보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결국 싸우게 되고 만다. 상대방이 자신이 느낀 나쁜 감정의 원인이 너라고 하는데 누가 그냥 듣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싸움이 난다.

 

그래서 그런 의도로 대화를 하면 안 된다. 그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상대는 화내지 않고 들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순간 공감을 하면서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은 매우 유사하며 생각보다 매우 소심하고 찌질하다. 그래서 자신의 찌질함을 상대방에게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도 자신의 찌질하다고 공감해줄 것이다. 물론 이런 대화는 반드시 신뢰할만한 관계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억울함 처리하기::

 

억울함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그냥 놔버리는 것이다. 당신에게 억울함을 안겨준 상대방은 이미 그때 모두 잊어 먹었다. 원래 상처를 준 사람은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상처를 받은 사람만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러니 억울함은 혼자 쥐고 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본인만 불행하다.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20년간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연히 사랑이 찾아와 잘 지낸다. 그런데 시간이 되자 남자가 원수를 죽이러 떠난다고 한다. 여자는 다 지난 일이니 잊고 둘이 잘 살자고 설득하지만 남자는 기필코 해야 한다고 한다.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하지만 원수를 갚고 나면 남자 역시도 죽을 운명이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떠나 보낼 수 없다. 그들을 보는 시청자는 그냥 여자랑 살지 꼭 원수를 갚아야 하겠는지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겪은 억울함은 쥐고 살아간다. 제 삼자의 억울함은 그냥 잊고 살았으면 하면서 자기 자신은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억울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그냥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마음 속에서 내려 놓는 것이다. 과거는 그저 과거이며 현재와 미래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억울한 과거의 망령을 쥐고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이다. 스스로 불행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당사자 말이다. 그냥 내려 놓으면 편해지는데 그것을 그리 내려놓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마음 속에 자리를 잡은 과거의 억울들은 여전히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으로 인해서 불행해지더라도 그냥 가지고 가겠다고 할 것이다. 그 누구를 위한 복수인지 모르지만, 상대를 용서하느니 내가 불행해지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감정의 정당성은 처음부터 허상이란 점을 말이다. 감정은 정당한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감정은 결코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논리도 아니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감정은 그저 자극된 두려움이 다양한 형태로 변한 것뿐이다. 그리고 어떤 감정이든지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만다. 오직 그것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 남는다.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생겨난 두려움은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런데 내려와서 자신을 그것에 데려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나면, 그렇게 감정이 증폭되고 나면 반드시 정당성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정당성을 얻으면 반드시 상대방의 사죄를 받아야 하지만 상대방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때 생겨난 억울함은 내면에 쌓인다. 그래서 그 장소와 그 사람만 생각하면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은 제대로 인생 낭비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원인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우연히 타고난 고소공포증이다. 그런데 왜 그것으로 정당성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높이 올라가라고 할거면 개인별로 고소공포증이 있는지 물어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친구들에게 설명한다. 그러면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다.

 

당신이 매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생겨난 감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정당성이 생기면 그것을 억울함으로 바꾼 후 복수심이란 이름으로 저장하고 있다. 스스로 불행해지고 언제가 터질 폭탄의 크기를 매일 조금씩 키우고 있다. 그런 삶을 자신의 삶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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