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감정 정당성

아이루다 2019. 3. 8. 08:27

 

먹을 것을 찾아 숲 속을 헤매던 한 남자가 갑자기 탁 트인 공간 앞에 서게 되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강 건너편에는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과일이 열려 있는 나무가 보였다. 몹시 배가 고팠던 남자는 꼭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이었다.

 

그 남자는 아예 수영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시도해 볼 수도 없었다. 강 건너의 저 과일 나무를 포기하게 되면 굶어 죽을 수도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야말로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고 강을 건너려다가는 잘못하면 빠져 죽을 상황이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은 일종의 확률이다. , 운이 좋다면 안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있게 되면 굶어 죽는 것은 확정적 상황이다. 그러니 결국 용기를 내어 강을 건너보려고 시도해보는 것이 낫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과일 나무가 강 건너에 있는 저것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나무를 찾아 나서는 것이 나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두 가지 생각이 서로 싸운다. 그리고 최종 판단의 기준점은 과연 무엇이 더 두려운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안타깝긴 하지만 이 남자의 결론은 스스로 내야 한다. 그러니 이후 일어날 일은 각자의 상상에 맡겨보자대신 이 짧은 이야기 한편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동작하고 있느냐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의 이야기에 몇 가지 상황을 붙여 보자.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일단 남자가 그 강 앞에 도달한 이유를 붙여 보자그것이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받아서 온 것이라면 어떨까? 물론 많은 잘 익은 과일이 열려 있다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 커다란 강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한 상황인 것은 동일하다.

 

이런 경우라면 이 남자는 강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욕이 나올 수 밖에 없다. , 자신에게 소개를 해준 사람에게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 앞에 강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설명해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아주 수영을 잘해서 그 강을 건너는 것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점이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이제 또 다른 상황을 하나 더 붙여보자.  남자는 어린 시절에 수영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힘들기도 하고 놀고 싶어서 제대로 배우지를 않았다. 그럴 경우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기본적으로 후회를 하게 된다. ,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책이 생겨나는 것이다.

 

두 가지 상황을 더해보니 원망과 후회란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마지막 한가지 상황을 추가해보자. 만약 운 좋게 강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과일 나무를 발견해서 이미 충분히 배를 채운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여전히 그런 감정들을 느끼게 될까?

 

당연히 아니다. 일단 강을 건널 필요가 없으니 수영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쪽 길로 누군가 가라고 했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다강 건너에 있는 나무에 열린 열매들이 아쉬울 수는 있지만 쉽게 포기를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과거에 수영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영에 대한 두려움, 추천한 사람에 대한 원망, 자신에 대한 자책, 이 모든 감정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들은 처음부터 왜 생겨나는 것일까그냥 배만 불렀으면 생겨나지 않을 감정이었다.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최초의 감정이다. 그리고 이후 그 감정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두려움의 감정은 크게 충돌을 일으켰다.


원래 두려움이 하나 뿐이면 별 다른 문제가 안 생긴다. 그냥 그 두려움만 해결하면 되니까 말이다. 혹은 회피하거나 말이다. 그런데 다른 선택이 생겨나고 그것도 두려운 상황이면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진다. 즉, 여러 개의 두려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다른 말로 하면 심적 갈등이고, 이것은 심각한 스트레스이다.

  


단순히 표현하면 기분이 몹시 나빠진 것이다. 몸이 긴장이 되고 마음이 답답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이 되지 않았기에 크게 불안함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 놓이는 것을 누가 좋아할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서 해결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상황에 놓이게 만든 원인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나무에 대해서는 알려줬지만 강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는 사람, 수영을 열심히 배우지 않은 자신의 과거, 이것들은 모두 현재 상태를 벗어나고 싶기에  '판단적감정들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남자 최종적으로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원망과 후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초에 그런 감정들을 불러 일으킨 두 가지 두려움,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과 물에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잊혀지고 그런 감정들로 인해서 생겨난 판단적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예로 누군가 갑자기 등을 때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럴 경우 깜짝 놀라게 되고 가슴이 철렁할 수 있다. ,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화가 나고, 친한 친구면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런데 이때도 자신이 최종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은 분노나 짜증이다. , 최초의 두려움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사실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아주 다양한 단어들로 표현되지만 그것들은 그저 나쁜 감정에 대한 다양한 상태 표현일 뿐이다. 두려움이 그 강도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황에 따라서 두려움 -> 분노 -> 짜증 -> 신경 쓰임 -> 귀찮음으로 다르게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낯선 존재가 자신의 등을 때렸을 때 상대가 덩치도 아주 크고 피가 묻은 도끼를 들고 있다면 화는 나지 않는다. 그저 두려움과 공포만 느낀다. 그런데 그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체구라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금세 분노로 바뀐다. 그러다가 상대가 자신보다도 약하다는 판단이 들면 짜증으로 변하고 아이가 되면 신경 쓰이다가 작은 강아지가 되면 귀찮아진다.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자신이 느낀 감정의 강도에 따라서 표현 그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두 같은 감정이다. 바로 두려움 말이다. 그래서 많은 나쁜 감정 표현에 쓰이는 단어들은 두려움의 강도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국 최종적으로 판단된 단어를 자신이 느낀 감정이라도 믿는다분명히 그 시작은 두려움이었는데 그것이 판단에 의해서 원망이나 후회로 변하게 되면, 그것이야 말로 자신이 느낀 진짜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가 착각이긴 하지만 자신의 진짜 감정이 뭔지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그리 문제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커지고 만다왜냐하면 누구나 나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기에 그렇다. 좋은 감정들은 정당화의 대상이 아니지만 나쁜 감정들은 100% 정당화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감정 자체가 판단의 감정이었는데 그것을 억지로 정당화 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자신에게 풍성하게 열매가 열린 나무에 대한 정보를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다 사라지고 강물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 원망만이 남게 된다. 어린 시절엔 누구나 놀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인데, 나이를 먹은 지금 관점으로 과거의 자신을 판단하고 후회를 하게 된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나이 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런 식으로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수 많은 파생되는 문제점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고 만다굶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강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원망이나 후회로 파생시킨 후 그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각자 개인이 겪어야 하는 수 많은 갈등이나 다툼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렇게 삶이 힘들어진다.

 

나중에 마을에 돌아가서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나무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사람에 대해 비난을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둘은 서로 싸우고 서로에게 마음을 닫아버릴 지도 모른다. 수영만 잘했어도 생겨나지 않을 원망이었고, 그저 고마음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원망을 만들고 원망이 갈등을 만들어 낸 후 결국 관계를 파탄낸 것이다.

 

이때 상대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서 동의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이 느낀 원망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느낀 두려움을 외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어떤 나쁜 감정이 생긴 원인이 '외부' 에 있다는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두려움이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부터 생겨난 것과 외적으로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생겨난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니까 말이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좀 더 깊게 파보자.

 

사람들이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수단은 주로 다른 사람들의 동의이다. ,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그런 감정을 느낀 상황을 설명하면서 당연히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흔히 '공감' 이라고 부른다. , 공감은 자신이 느낀 어떤 감정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감은 좋게 말하면 '그래, 그럴 만 했네, 힘들었겠다' 가 되겠고,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당연하니까 너는 동의하는 말을 해줘야 해' 라고 말 할 수 있다.

 

단지 공감을 했다고 해서 뭔가 어떤 행동을 바라는 것은 아니기에 공감 그 자체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어느 정도 진정시켜주는 효과가 있게 된다.

 

그런데 왜 공감을 받으면 나쁜 감정들은 진정이 될까?

 

이쯤에서 감정의 숨겨진 진짜 정체가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나쁜 감정들이 왜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판단되어야 진정이 될까?

 

만약 자신이 경험하는 두려움이나 공포심이 온전히 자신이 가진 문제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심이 자신의 문제로 일어났다는 말은 단 한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 나쁜 감정을 미래에도 또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다. 사람들의 성격이란 말의 의미는 일종의 패턴이기에 그렇다. 원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면 긴장되는 사람은 특별한 계기가 없는 경우 계속 그런 상태가 되게 된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도 기분이 나쁘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것을 미래에 또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답은 단순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기분 나쁜 감정이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적인 문제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한방 맞고 기분이 몹시 나쁠 때 내가 약해서 맞은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서 맞은 것이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또 누군가에게 맞을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현재 경험하고 있는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이 사람들이 대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기분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고 느끼지만, 사실 사람들이 진짜로 받는 스트레스는 바로 과거로부터 생겨나 미래로 향하는 두려움이다.

 

이 시점에서 나무를 찾아 다녔던 사람을 다시 떠올려보자.

 

강의 존재를 몰랐던 이유는 두 가지가 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세밀하게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실수로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자신이 자세하게 묻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면 나중에 반드시 그런 일은 반복되게 된다. 자세하게 묻지 않은 과거가 또 다시 미래에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수영을 제대로 배워놓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또 다른 상황에서 후회를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나무 타는 것을 제대로 배워놓지 않았을 때, 칼을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워놓지 않았을 때 등등 참으로 많다. 현대 사회라면 좋은 외국계 회사에 취직을 할 기회가 생겼는데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해놓지 않아서 포기해야 할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으른 과거로 인해서 또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도 과거의 일이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식의 미래에 또 다시 닥칠 수 있는 나쁜 감정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감정을 증폭시키고 거기에 매달리게 만들고 만다.

 

사람의 감정은 매일 매 순간 끝없이 변한다. 기분이 좋다가, 나쁘다가, 지루하다가, 재미있다가단 하루만 생각해봐도 감정 그 자체는 널뛰듯이 변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하루 동안 울다가, 웃다가, 지루해하다가, 너무도 재미있어 하다가 하는 등등 매 순간 정신 없이 변한다. 어른들보다 훨씬 감정적인 표현이 자유롭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사실상 어른도 별로 다를 것이 없어야 정상이다.

 

기분이 나쁜 순간도 있지만 어느새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 기분이 나쁜 순간을 붙잡지만 않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을 했듯이 미래에 또 다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감정을 붙잡는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걱정과 근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남을 원망하고 자신을 자책을 한다고 해도 결국 그 결론은 동일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다.

 

그러니 이것을 줄이기 위해서 끝없이 감정 정당성에 매달린다. 자신이 느낀 원망이 정당한 것임을, 자신이 느낀 자책 역시도 남들이 흔히 경험하는 것임을 증명 받고 싶어한다.

 

이런 절차로 감정 정당성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된다. , 반복될 수 있음에 대한 두려움이 감정 정당성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때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감정 정당성을 만들어 내려고 할까그냥 될 리는 없다.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이성과 합리 그리고 논리적 사고를 훈련 받았기 때문이다. 그냥 '저 놈은 나쁜 놈이야' 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무엇인가가 나쁘다고 말을 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반드시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자신의 논리에 동의해주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상황 설명을 한다. 그러면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주게 되어 있다. 그래서 네가 그런 감정을 느낄 만 하다고 말해준다.

 

매일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온 남편이 꼴 보기도 싫다고 했을 때 친구는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같이 남편을 욕해준다. 하지만 이 과정을 잘 생각해보자. 과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가?

 

전혀 아니다. 남편이 매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면 자신도 화가 날 것이기에 그렇게 말해 준 것이다. , 누군가의 감정에 대한 정당성 확보는 그저 또 다른 누군가의 동일한 감정 반응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는 저 사람 생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싫어' 라고 말하면, '나도 저 사람이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싫어' 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싫다는 감정의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또한 그것에 대한 답으로 자신 역시도 그런 스타일이 별로라서 싫다는 설명이 어떻게 서로에게 논리적인 동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보기엔 분명히 이성과 논리의 형식을 이용했지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점은 결국 상대방의 감정인 셈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기분 나쁠 수 있으니 너의 기분 나쁨이 근거가 있다, 이 말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가진 나쁜 감정의 정당성은 또 다른 누군가가 느낄 수 있는 나쁜 감정을 통해 정당화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너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화가 났을 거야라고 감정적 동의를 받으면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한 정당성이 생기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같은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낄 가능성이 줄었다고 판단이 되기에 놀랍게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제대로 잘 따져보면 감정 정당성의 확보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둘째 치고라도 정당성 확보를 하는 과정 그 자체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정당성 확보가 사실상 무의미한 짓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누군가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는 절대로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사람들은 대부분 객관적으로 말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잘못을 줄이고, 상대의 잘못은 부풀리게 되어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말을 들어 줄 상대는 이미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 이미 처음부터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을 만난다. 보통 친구이며 평소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는데 어떻게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겠는가?

 

세 번째 말을 할 때 이미 답을 정하고 말하기에 상대는 자연스럽게 그 장단에 맞춰주게 된다. 만약 상대가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니까 친구 목록에서 지워버린다. 그러니 언제나 두 번째 조건은 유효하게 유지가 된다.

 

이런 문제점들을 안고 얻어낸 감정 정당성이 정말로 얼마나 정당할 수 있을 것인가?

 

원래 사람이 어떤 사람과 잘 맞는다는 말 자체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에 그렇다. 서로 비슷하게 억울하고, 서로 비슷하게 기분이 좋기에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느낀 감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해서 스스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무의미한 감정 정당성 확보를 위한 시도는 또 다른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필요성이 커지면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감정이 정당할수록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기에 그렇다.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더 잘못했느냐 여부를 따지는 것은 당연히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재판장은 자신이 느낀 억울함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겨루는 곳이 된다.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면 누구 잘못이 더 크냐에 따라서 위자료가 달라진다. , 자신이 느낀 나쁜 감정들이 얼마나 상대방의 문제로 인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증명할수록 이득은 커지고 손해는 줄어든다.

 

둘째는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공감을 넘어서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다.

 

현재 느낀 두려움의 반복될 가능성을 줄여주고, 손해를 줄여주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지녔을까? 그러니 감정 정당성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서 그나마 손해를 줄여주고 자신을 도와줄 목적으로 감정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의 과정에서 그럴 정도로 감정 정당성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다. 재판이나 이혼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연을 알려서 도움까지 받아야 하는 경험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감정 정당성 확보에 대한 욕구는 그저 두려움이 반복될 가능성으로 인해 생겨나고 있다그것이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냥 두면 사라질 두려움이 사라지지 못하고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일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공감을 얻어내는 것을 반복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뤄지는 수 많은 일상적인 대화들이 그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뒷담화는 아주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 모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는 어떤 공통의 적을 욕함으로써 각자 평소에 경험했던 소소한 나쁜 감정들을 서로 공감해주는 자리이기에 그렇다. 대 놓고 느낀 감정들이 아니고 딱히 꺼내놓고 말하기 쉽지 않았던, 사실은 좀 지질할 수도 있는 감정들이 그때 정당성을 확보 받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들 뒷담화를 그리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자신이 느낀 아주 작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잠시 싫어하는 순간 양심의 가책이 일어나고 그것은 작은 두려움이 된 것이다. 그러면 안될 것 같은데 감정이 생겨나니까 그것이 살짝 생채기가 난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두려움은 처음부터 그 이유가 있을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거기에 왜 이유가 필요할까? 그런 곳에서 왜 두려움을 느끼냐고 묻는 사람은 정말로 바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죽기 싫어하기에 느끼는 감정이 바로 공포와 두려움인데, 왜 죽기 싫어하냐고 묻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데도 그 두려움을 또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서 분노나 짜증, 원망과 억울함, 그리고 후회와 자책 등의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만다.

 

두려움은 인정하면 사라진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왜 자신은 높은 곳에 오르면 두려움을 느끼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그냥 고소공포증이 있구나, 하면 된다. 누군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면 무섭다. 그러면 나는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이구나, 하면 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끝날 감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아니고 싶어한다. 미래에 또 다시 같은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고 싶지 않기에 그렇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이 되어서 다시는 이런 감정을 경험하고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해서 다들 결국 똑같은 결론을 낸다. 그것은 바로 결국 완벽한 존재이다. 그래서 다들 완벽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영웅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환호한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억울함에 관해서  (0) 2019.07.01
두려움과 가치  (0) 2019.03.20
사랑, 사랑, 사랑  (0) 2019.02.18
인간적인 삶  (0) 2019.01.14
행복론 - 2  (0) 2019.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