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이야기들

혼자 있어도 심심하긴 하지만 외롭지는 않다

아이루다 2019. 6. 22. 07:10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나 밖에 볼 능력이 안돼서 그것이 다른 점이라기 느끼기 보다는 모두가 다 나처럼 그런 줄 알았다.

 

그 다른 점은 바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그 감정을 왜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나에게 너는 참 이상한 녀석이다, 라고 한 적이 있다. 사실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 진짜 목적은어떤 감정들을 느끼기 싫어서였다당연히 질투, 열등감귀찮음 등과 같은 나쁜 감정들이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런 성향이 있다는 것을 나이를 한참 먹은 후에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자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의 무관심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자신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지 아예 모르는 채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감정이 들 때면 자각한 후 열심히 노력해서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잘나게 태어나 그런 감정들을 느낄 일이 별로 없어서 진짜로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무마시키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 속한다그리고 과거의 나는 자각한 후 노력하거나 비난하여 없애려는 짓을 해왔다.

 

아무튼 내 감정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나중에 나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은 이후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확장되었다.

 

이 세상을 판단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 그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무엇인가를 결정할 때 두렵지 않다. 그래야 의도치 않는 결과를 받았을 때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진리를 완벽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식적으로는 거의 끝에 달한 느낌이다. 이것을 느낌이란 말로 표현하는 이유는, 결국 진리에 다가갈수록 신뢰라는 감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어떤 면에서도 보면 오히려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 이 세상은 확신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확신도 기대하지 않는 것, 불확실성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아마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진리인 듯 하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갔을 때 배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하는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파도가 치는 대로 배가 적절히 흔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배가 뒤집히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잠시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은 확신할 것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확신은 하고 있는데 확신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확신보다 신뢰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 하다.

 

예전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얘기 했을 때 그 사람이 반박을 하면 화가 났다. 특히 그 사람의 말에 어느 정도라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랬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 자극되어서 그랬다.

 

요즘은 누군가 내 말에 반박을 하면 내가 표현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이 오해를 하게끔 하는 표현을 해서 상대가 저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마다 어떤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단계가 존재하는데, 내가 내 욕심에 너무 앞서갔다는 약간의 후회도 한다.

 

사실 누군가에게 맞는 단계로 표현을 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내 능력으로는 아직까지는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는 에고의 활동으로 인해서 잠시만 방심해도 그런 말들이 서둘러 나가고 만다.

 

그러니까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여부에 상관없이 내가 잘난 척하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원하기에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에고가 만족하니까 말이다.

 

내가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맞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된다. 상대를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고 에고를 잠재우는 것도 쉽지 않다. 아마도 앞으로 내가 꾸준히 훈련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불안정하다. 불안해 한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다들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

 

특히 인간중심주의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왜곡되었다다들 이 세상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스스로도 불행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세상의 중심이라는 에고가 만들어 내고 있는 행복은 꽤나 달콤하기에 그렇다.

 

나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단지 최대한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모습도 불완전한 존재로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에고는 부정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줘야 한다. 아이가 울 때 혼낸다고 해서 울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울 때는 안아줘야 한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다른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다른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그들이 좀 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결이 된다.

 

내가 요즘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이다. 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그래서 무엇을 착각했는지 설명을 해주고 싶다. 그런데 명백히 한계는 있다. 일단 그 대상이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나는 여전히 편파적으로 사람들에게 대한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무관심하다. 같이 웃고 지내지만 그때뿐이다.

 

그리고 같이 있기도 싫은 사람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랑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너무 두려움이 커서 강한 에고를 가졌거나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대충 비율을 보면 20% 정도 사람은 내가 교류를 할만한 사람들이고, 60% 정도의 사람들은 내가 무관심하긴 하지만 관계를 맺고 살 정도의 사람들이 되고, 나머지 20% 정도의 사람들은 나하고는 맞지 않는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이 세상 사람들 중 최대 80% 정도만 감당할 수 있을 듯 하다.

 

꽤나 최근까지 20%의 문제로 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결국 누군가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에 대한 결벽증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느 날 한 문장의 조언을 봤다. 어떤 현자에게 행복하게 사는 비법을 묻자 '바보를 설득하려고 하지 말아라.' 라고 답을 해준다. 듣고 보니 정말로 맞는 말이다. 말이 통하기 힘든 사람들과 어울려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모두를 감당하려고 하는 것도 에고다. 잘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물론 에고가 사라지고 나면 모두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고가 사라지기 전에 그것을 바라는 것은 에고가 하는 짓이다.

 

예전엔 진짜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했다. 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나보다 더 깊이 들어가 있는 분과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정말로 누군가와 제대로 된 공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이것은 사람을 매우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다. 지음에 나오는 백아와 종자기의 이야기처럼 그렇다.

 

하지만 그런 생각 이면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의 존재를 원하는 에고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틀리지 않다고 믿고 싶은 에고가 있다. 그러니까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은 멋진 것이지만, 결국 그들도 에고의 한계를 가진 것이다. 백아는 거문고를 연주할 때 그것을 누가 듣든 상관이 없어야 했다.

 

요즘 나에게 일어난 변화가 그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아서 그렇다.

 

사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것은 꽤나 좋은 변화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오해를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어떤 표현을 할 때 내가 아닌 상대를 기준으로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가 나에게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시기인 듯 하다. 임계지점을 통과하는 느낌도 든다. 물론 여전히 한계는 명확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생긴다. 어떤 의미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생각도 필요하지만 결국 나이와 그 시간만큼 쌓인 경험이 더 중요했다.

 

제대로 경험되지 않는 지식은 에고의 성찬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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