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 안에 똥강아지가 산다

아이루다 2019. 4. 19. 08:21

 

내 안에 똥강아지가 산다. 그리고 그 녀석은 체구도 작고 겁도 많지만 가끔은 이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도 없는 듯한 표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는 평소엔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낸다. 그런데 특정한 조건이 되면 마치 그 자신이 나의 모든 것인 냥 행동하곤 한다. 그리고는 사방에 똥을 싸놓고서 사라진다. 그러니 그것을 치우고 정리해야 하는 일은 오직 내 몫이다. 그것은 꽤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똥강아지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그리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불길한 예감도 든다.

 

이 똥강아지가 튀어나오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 상황이다. 하나는 뭔가 두려움을 느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뭔가 자랑을 하고 싶을 때이다.

 

첫 번째 경우인 두려움, 불안, 걱정 등의 감정이 생겨나면 똥강아지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민첩하게 뛰어 나온다. 그리고 나와서 처음에 하는 일은 제 나름대로 맹렬한 기세로 짖어대는 일이다. 나를 두렵게 한 상대, 나를 불안하게 한 상황, 나를 걱정스럽게 만든 일 등에 대해서 일단 세차게 짖고 본다.

 

이 똥강아지가 짖게 되면 내 얼굴은 똥강아지로 인해서 붉게 달아오르고 얼굴은 일그러진다. 보통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화 났냐?' 라고 물어볼 표정이다.

 

똥강아지가 세차게 짖으면 짖을수록 나의 화는 점점 더 크게 부풀려진다. 특히나 상대가 자신의 맹렬한 기세에 전혀 겁을 먹지 않는 듯 보이면 보일수록 더 크게 짖으려고 애쓴다. 결국 그러다가 심한 말을 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뭔가를 부수거나, 심한 경우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똥강아지가 하는 일을 그냥 귀엽게만 봐줄 수는 없다.

 

하지만 늘 똥강아지가 같은 상황이더라도 언제나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똥강아지는 자기가 짖을만한 상대라고 생각할 때만 짖는다. , 일반적으로 똥강아지는 불노조절잘해증을 가지고 있다. 오타가 아니다. 장애가 아니라 잘해이다.

 

똥강아지는 튀어 나오는 순간엔 일단 맹렬히 짖어 보지만 상대가 결코 만만하지 않거나 혹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존재라는 판단이 들면 즉시 그 태도를 바꾼다. 그것은 바로 꼬리를 말고 낑낑거리는 전략이다. 상대방에게 졌다는 표시를 하고는 그 존재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똥강아지가 일단 그 상태로 바뀌면 나 역시 변화가 일어난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고 말투가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은근슬쩍 상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하지만 그 똥강아지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짖는 일이다. 눈치를 살피는 것보다 짖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강아지는 상대를 보고 일단은 꼬리를 말면서도 언제나 빈틈을 노린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짖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도 똥강아지는 금세 튀어 나온다. 이때 똥강아지는 재빨리 그 모습을 보인 후 코 끝을 치켜 세우고 꼬리도 빳빳하게 세운 후 자신감 있게 걷는다. 그때는 마치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해낸 일인 냥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히 느껴진다. 예전에 두려울 때 어찌할 바를 몰라서 꼬리를 말았던 그 수모를 기억하기에 더욱 더 과도하게 그런 태도를 취한다.

 

그때 상처 입었던 자존심을 이번 기회에 만회해야겠다는 의지에 불탄다. 그래서 이후엔 억지로 내 입을 열어서 내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떠들도록 만든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더해서 똥강아지가 원한 반응, 그러니까 '대단하다' 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어릴 시절엔 그것을 몰랐기에 칭찬을 받고 싶었다가 무시를 당하거나 면박을 받고는 상처를 받은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교묘하게 자랑을 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랑 같지 않도록 자랑을 해서 상대가 눈치를 못 채도록 하게끔 만든다. 또한 상대가 자랑을 할 때도 별 관심이 없더라도 일단 크게 반응하도록 시킨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가 자랑을 할 때 상대도 그렇게 반응을 해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는 겁이 많기도 하지만 영리하기도 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튀어나오려고 한다. 특히 두 가지 모습 중에서는 가능하다면 자부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오고 싶어한다.


두려워서 나왔든지 칭찬을 받아서 나왔든지 상관없이 일단 똥강아지가 나왔다가 들어가면 그 자리엔 그녀석이 싸놓은 똥이 가득하다.


화를 냈다면 화를 낸 흔적, 물리적 상처부터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졌거나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다는 후회까지 남는다. 칭찬을 받았다면 그 순간 어린아이같이 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후회나 칭찬에 취해서 너무 과도한 자기 자랑을 했다가 보게 된 사람들의 탐탁지 않아 하는 눈초리가 기억난다. 그 똥들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긴 하지만 있는 동안은 꽤나 냄새를 풍겨서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나는 이 똥강아지의 존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똥강아지가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에 중독되어서 좀처럼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를 자제시키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렇기에 또한 두려움이 느껴질 때 튀어나오는 똥강아지 역시 말릴 수가 없다. 똥강아지가 자랑스러워 할 때의 주는 행복을 원하기에 나올 수 있는 통로를 넓혀 놓았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통로 자체를 좁혀서 똥강아지가 최대한 튀어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똥강아지가 짖는 모습도 똥강아지가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도 덜 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통로를 더 넓혀서 거의 똥강아지가 늘 내 안에서 상주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후자의 방법을 선택한다. 살다가 보면 꼬리를 말아야 하는 순간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그때만 잘 견뎌내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부심 가득한 똥강아지와 함께 지낼 수 있다.

 

그런데 이 똥강아지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각자가 가지고 있는 똥강아지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똥강아지와도 본능적인 경쟁심을 느낀다. , 평소엔 대놓고 싸우지는 않지만 뭔가 서로 충돌이 나는 상황이 오면 상대방 똥강아지를 보고는 더욱 더 맹렬하게 짖어댄다. 마치 물러서면 죽을 것처럼 말이다.

 

그나마 상대가 사람이 아닌 그냥 자연적 존재나 혹은 상황 등이었다면 조금 짖다가 말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똥강아지이기에 상대가 나를 조금 툭 치고 지나간 일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몸싸움으로 이어지다가 살인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서로에게 큰 손해이기에 나나 다른 사람들은 평소엔 이 똥강아지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술을 먹거나 어떤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는 통제가 되질 않는다. 그래서 술을 먹다가 보면 그렇게 싸움이 난다. 어떤 경우엔 평소엔 너무 통제를 하고 살았다가 술만 먹으면 똥강아지가 너무 많이 튀어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야 말로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똥강아지는 왜 처음부터 내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안에 살고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같이 태어난 녀석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원래 없었던 녀석인데 자라면서 어느새 만들어 진 존재이다. 더해서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을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똥강아지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역할은 컸다. 그러니 똥강아지는 세대를 걸쳐 무한정 재생산된다.

 

왜 어른들은 자신도 평생 똥강아지에 시달려서 힘들게 살아 놓고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문제를 지닌 똥강아지를 만들도록 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똥강아지가 가진 가장 확실한 장점이 있기에 그렇다. 똥강아지는 잘나고 싶다는 욕구는 이후 온갖 고난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고 있는 노력과 의지력은 모두 똥강아지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대단한 것을 이뤄내기도 한다.

 

, 인간 사회에 이만큼 발전해 온 것은 바로 똥강아지의 힘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 사회의 집단 두뇌는 이렇게 판단을 했다. 각자의 내면에 있는 똥강아지를 최대한 자극해서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인간 사회 전체가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다는 판단 말이다.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똥강아지가 극도로 발달할수록 사람들은 자기 행복과 목숨까지도 담보로 한 채 한 없이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 물론  과정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도 커져버린 똥강아지에 먹혀 버려서 결국 실패한 후 낙오가 되고 버려진다. 하지만 그 중 단 한 명이라도 높이 올라가면 그것은 인류 전체가 한 걸음 디딘 것과 같다.

 

그렇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갔고 그렇게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렸으며 그렇게 남극과 북극에 인간의 기발이 꽂혔고 그렇게 수 많은 과학적 원리를 담은 공식들이 만들어졌다. , 인간 문명 그 자체가 똥강아지의 성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뒷면에 수 많은 실패자들이 파묻혀 있다. 인류 전체가 큰 걸음을 옮기기 위해서 희생된 이들이다. 평생 똥강아지에게 사로잡혀서 행복하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못한 채 그 이름조차 다 잊혀진 인물들이다.

 

2등조차 기억하지 않는 세상에서 100, 200등은 흔적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생이 전체를 이롭게 하기에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추구가 된다. 각자 안에 있는 똥강아지는 오늘도 자신이 왜 그렇게 커져야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옆에 있는 누군가의 자극에 의해서, TV 속에 나오는 누군가의 자극에 의해서, 책에서 나오는 누군가가 쓴 글에 의해서 자극이 되어 자라고 있다.

 

물론 외부 자극만으로 똥강아지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외부에서 그런 자극이 와도 똥강아지를 키우는 결정은 결국 각자의 몫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유혹에서부터 견뎌내기란 무척 힘들다. 특히 뭔가 잘해서 주변에서 칭찬을 할 때 보여주는 똥강아지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 홀로 그 빛을 받고 있는 존재처럼 찬란해 보이기에 그렇다.

 

처음 자기 발로 한걸음 걸을 때, 처음 혼자 화장실을 갔을 때, 처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썼을 때 주변에서 많은 칭찬이 쏟아진다. 그때 이제 막 생겨난 똥강아지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임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고 미래엔 반드시 이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서 세상을 오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것은 달콤한 유혹이다. 똥강아지의 표정만 봐서는 절대로 거짓이나 허풍이 아닌 것 같다. 특히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실제로 똥강아지가 하늘에서 내려온 빛을 받고 있는 그 순간은 그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 순간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순간엔 미래는 온통 꽃 길로만 채워져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그 유혹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똥강아지는 생겨나고 자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똥강아지는 조금씩 더 자주 꼬리를 말고 낑낑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가끔 주변의 칭찬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시 예전의 도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최대한 노력하면 언제나 도도할 것 같기도 하다.

 

최대한 도도해지기 위해서 남들의 비난이나 실망엔 쿨해지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남들의 칭찬만큼은 계속 받고 싶다. 그래도 도도해지니까 말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판단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서 반응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루지 못할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한다. 비난이나 실망을 최대한 덜 받고 칭찬을 최대한 많이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똥강아지는 강화되어서 점점 더 자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좋은 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똥강아지가 스스로 강해졌다고 느낄수록 예전 같으면 겁이 나는 상황이라고 해도 똥강아지가 자부심으로 가득 찬 모습을 나올 일이 많아질 수 있다.

 

그런데 똥강아지가 강화되면 왜 그렇게 바뀌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똥강아지가 두려움에 대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생겨서 그렇다. 세차게 짖거나 꼬리를 말고 낑낑대던 두 가지 방법 말고 상대를 무시할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바로 연민이나 혐오라고 부르는 감정이다.

 

원래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는 두려움을 느끼면 맹렬히 짖거나 꼬리를 말기만 했다. 하지만 똥강아지가 강화되게 되면 이제는 상대를 밑으로 깔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딱히 맹렬히 짖을 필요도 없고 당연히 꼬리를 말 필요도 없다. 그냥 무시하고 상대 안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기분은 오히려 좋아진다. 그러니 두려움을 느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로 그 끝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 표정에 나타나는 미소가 바로 연민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된다. 물론 조금만 기분이 나빠지면 혐오의 표정으로 바뀔 테지만 말이다.

 

똥강아지가 그날 어떤 상태였는지에 따라서 연민이 될지 혐오가 될지 결정이 된다. 그날따라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면 연민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날따라 기분이 나빴다면 혐오로 나타날 것이다.

 

아무튼 새롭게 얻는 세 번째 방법 기존의 두 가지 방법에 비해서 훨씬 나아 보인다. 내가 화를 내거나 비굴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상대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란 제목을 달고는 가장 우아한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모습을 가졌더라도 똥강아지의 본질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겁 많고 비겁한 존재 그 자체이다. 똥강아지의 본질이 그렇다는 것은 바로 똥강아지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를 통해서 증명이 가능하다.

 

원래 누구나 부족한 것을 채울 때 가장 좋아한다. 배부른 사람에게 특급 소고기보다 배고픈 사람에게 감자 하나가 훨씬 더 큰 행복을 준다. , 무엇인가가 행복하다는 말은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똥강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용기 있고 똑똑하고 잘났다는 칭찬이다. 그러니 똥강아지의 본질은 비겁하고 멍청하고 못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용기 있고, 정말로 똑똑하고, 정말로 잘났으면 그런 칭찬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누가 당연한 것을 칭찬으로 듣겠는가?

 

그래서 '너는 다리가 두 개라서 대단하다, 너는 앞을 볼 수 있어서 대단하다, 너는 잠을 잘 수가 있어서 대단하다, 너는 숨을 쉴 수 있으니 대단하다는 말은 칭찬이 될 수 없다.

 

똥강아지는 잘나지 못했기에 잘났다는 말을 가장 좋은 칭찬으로 듣는다. 똥강아지는 평범하기에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똥강아지는 비겁하기에 용감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똥강아지는 자랑하고 싶어하기에 겸손을 떤다.

 

그리고 이 똥강아지가 바라는 것은 나의 거의 대부분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 역시도 잘나고 싶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고, 용감하고 싶고, 겸손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내 안에 커다랗게 자란 똥강아지와 일체화 된다. 그렇게 나는 똥강아지 그 자체가 되고 만다.

 

그리고 도대체 똥강아지가 없다면 행복할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뭘 하든 사람들에게 떠들어야 행복해지고 만다. 먹은 것도 말하고, 여행한 것도 말하고, 돈이 많을 것도 말하고, 최근에 얻은 행운도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만이 유일한 행복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그저 내가 똥강아지에게 완전히 먹혀서 종속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나는 원래 그냥 먹는 것을 좋아했고, 맑은 하늘에 걷는 것을 좋아했으며, 벚꽃이 화려하게 핀 날 꽃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처음부터 먹는 것을 사진 찍지 않았고, 맑은 하늘이 뭔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벚꽃을 보면 그 배경으로 내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상대를 상대로만 바라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똥강아지에게 완전히 먹힌 후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다.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가 그것을 원하니까 말이다.

 

예전에 인류 전체가 가진 집단적 똥강아지는 이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고, 인간은 동물이 아닌 어떤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싶어했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 만큼 말이다.

 

똥강아지들은 특별해지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니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지구가 특별해야 하고, 인간이 특별해야 하며, 그 인간들 중에서도 자신만이 유일하게 특별하고자 한다. 할 수 없어서 못할 뿐,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똥강아지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그렇다. 하지만 똥강아지의 그런 바램은 결국 똥강아지가 가진 본질적 한계를 설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비겁하고 두려움에 떠는 그 존재 말이다.

 

인간들은 지진이나 해일 그리고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두고 자연을 위대한 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은 하나도 위대하지 않다. 그저 지구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작용일 뿐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힘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기에 자연을 위대한 힘으로 정의했다. 그래야만 상대적으로 인간이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연이 위대하지 못하면 그 힘에 꼬리를 말고 낑낑거리는 우리 자신들은 무엇이 되겠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전혀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은 존경과 흠모로, 자신이 만만하다고 느끼는 두려움은 뭐든 파괴할 것 같은 분노로, 별 것 아닌 것 같이 보이는 두려움은 혐오로 처리하고 있다.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100배의 돈을 가진 사람은 존경하고, 자신과 비슷한 돈을 가진 사람은 질투하고, 100배 적은 돈을 가진 사람은 경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돈이 많기로 유명한 빌 게이츠를 부러워는 할지 몰라도 질투하지는 않는다. 대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직장 동료, 친구, 동창, 옆집 가게는 질투한다.

 

이 모든 것이 똥강아지가 매일 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똥강아지의 정식 명칭은 바로 '자아' 이다. 영어 이름도 있어서 에고(ego) 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내가 어려서부터 너무도 자주 들었던 '자아실현', '자아성취' 등의 그 자아가 바로 똥강아지를 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바로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이 똥강아지를 키워야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은근슬쩍 강조한 표현들이다. 이 세상은 노력을 해야 할 대상이며 언제나 의지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게으르거나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척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오늘도 여전히 나는 그 동안 그래왔듯이 내 안에 있는 똥강아지를 키우려 애쓴다. 잘 키워서 봐야 잡아 먹는 것이 아니라 잡아 먹힌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들 그러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