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화의 어려움

아이루다 2019. 3. 11. 09:45

 

나는 어느 새부터인지 대화의 주제가 보통 사람들이 주로 하는 내용과 좀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자 의도한 바는 아니고 아마도 주로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서 갈리는 듯 하다.

 

요즘 주변 사람들은 건강 얘기를 많이 한다. 돈 얘기도 빠지지는 않는다. 특히 부동산 얘기는 자주 듣는다. 자녀들에 대한 얘기도 한다. 새로 연 음식점이나 어딘가 있다는 맛집 얘기들도 많이 한다. 자신을 속상하게 하는 남편에 대한 얘기도 듣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회사 사람 얘기를 듣기도 한다.

 

새로 나온 책이나 영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어딘가 갔다 온 여행지에 대한 얘기도 한다. 새롭게 시작한 취미 생활에 대한 얘기를 하고 가끔은 연예인의 이상한 사생활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정치적인 사건이나 개인적 견해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하고, 남녀차별을 비롯해서 사회 만연한 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듣고 나서 어느 정도 맞장구는 쳐줄 수 있지만 내 입에서 이런 관심사에 대한 얘기나 먼저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 뿐이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아니,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딱히 남에게 말할 정도로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만약에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하는 자리라면 나는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 자리가 좋다. 말 그대로 아무런 내용이 없이 나오는 농담 말이다. 뼈있는 것 같은 것은 싫고, 그냥 순수하고 즐거운 농담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문제는 그런 자리에 있을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다.

 

농담도 사람마다 고유한 코드가 있어서 똑같은 농담도 사람에 따라서 웃는 포인트가 다르다. 혹은 아예 웃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매일 미세하게 감정 상황이 변하기에 같은 농담도 어제는 웃기는 일이었다가 오늘은 심각한 반응이 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농담을 상황에 맞춰서 잘하는 것도, 그런 농담들을 그냥 많은 신경을 쓰지 않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면에 문제가 없는 사람을 만날 확률도 그리 높지가 않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화를 하고 살기가 힘들다.

 

내가 선택한 것인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요즘 만나는 사람들과는 그냥 농담만 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그나마 수영장에서 만나게 되는 분들은 그럴 수 있는데, 특히 독서모임에서 만나는 분들과 대화를 하다가 보면 언제나 비슷하게 진지해지고 만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답답함일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자주 충돌을 할 때 몇 가지 단계적으로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가장 강한 감정은 분노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니까 화가 나는 것이다. 신경을 긁는 말을 하고, 눈엣가시와 같은 행동을 하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화만 내고 살 수는 없으니 상대를 어떤 식으로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음 감정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한심함이다. 흔히 다들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기에 그렇다. 저러면 자기만 손해일 것 같은데, 저러면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지,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지, 왜 저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는지, 왜 내가 싫어하는 말과 행동만을 골라서 하는 듯 보이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심해 보인다. 상대의 삶이 참 그래 보인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여전히 분노는 미약하게나마 존재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 조금 더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아니 인간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면 한심함은 답답함 혹은 안타까움 정도로 변하게 된다. 저 문제를 조금만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적어도 화가 나거나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은 더 이상 나질 않는다. 그저 답답하며 조금만 고치면 좋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만 느끼게 된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하면 그냥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라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수용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물론 여기도 도달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직접 본 적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정말로 여기에 도달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르기도 힘들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답답함과 안타까움의 중간 단계 쯤에 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도 그런 감정을 함부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화에 있어서 도움이 전혀 되질 않기에 그렇다.

 

대신 화가 나지는 않는다. 또한 한심해 보이지도 않는다.

 

자꾸 누군가와 얽히는 것이 나쁜 영향만 나타난다면 그때는 그저 그 사람과 내가 잘 맞지 않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니 그때는 거리를 두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화를 냈고 비난을 했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이후 나는 왜 불행한가에 대해서 오랜 시간을 생각해오다가 보니 그런 화와 비난 등의 모든 나쁜 감정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오직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만 두기로 했다. 내가 자꾸 나를 불행하게 해봐야 무슨 득이 있겠는가?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잠재웠다. 비난도 줄게 해줬다. 그래서 편해지긴 했다. 하지만 나는 요즘 주변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타인에게 겨누고 있는 과거의 나를 꽤나 자주 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저 자책이기에 그렇다. 어떤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자신의 탓으로 여기기에 그런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입으로는 남을 탓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비난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상태에 있는 분들을 보면 답답함과 함께 연민도 느껴진다. 그렇게 외부로 뻗은 그 수많은 날카로운 창들이 사실은 자신의 내면을 깊게 찌르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그것이 아픈 만큼 강하게 신념화가 되어 있다. 부드럽고 섬세하면 찔릴 때 몹시 아프다. 그러니 둔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밖에서 그것을 깨고 들어가기가 몹시 힘들다.

 

스스로 깨어나야 할 뿐이다. 그 단단함은 스스로 만들 것이기에 만약 잘못해서 그것을 건들게 되면 강한 반발만 사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그나마 내가 좀 더 잘나게 태어났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나는 원래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 말하는 목소리도 그리 좋지 않고 단어 선택이나 표현도 많이 부족하다. 글을 쓰는 것은 오랫동안 해왔더니 조금 되는데, 나머지는 영 꽝이다. 그렇다고 대화를 할 때마다 글을 써서 보여줄 수는 없지 않는가?

 

아마도 그래서 답답한 것인가 보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답답함을 만들어 내는 원인인 것이다. 그러니 답답함 역시도 상대가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 확실하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얻은 가장 좋은 결론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직 내 자신만이 문제일 뿐이다. 이런 내 자신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아직도 내 자신에 대한 기대를 품고 그것을 포기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어리석다고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그럽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결국 내가 누군가에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원인은 하나뿐이다. 내 안에 있는 에고의 존재이다. 더 잘나고 싶고, 더 멋지고 싶고, 내가 하는 말들이 남들에게 잘 이해가 되고 싶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바로 답답함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이 에고만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아니 좀 더 줄일 수 있다면 그만큼이나 답답함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이 어려울 것이다. 그래 많이 어려울 것 같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 그 자체도 바로 에고니까 말이다. 돈이 없이 사는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내 안에서 매일 소용돌이 치고 있는 소리, '결코 남을 바꾸려 하지 말라', 이 말이 가진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리인 것 같다. 남을 바꾸려 하는 그 모든 시도가 바로 에고의 의도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의 대화는 그저 늘 농담으로 채워지면 좋을 것이다.

 

대화가 어렵다. 매일 듣는 대화 속에서,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나와 동일하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환상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과 타인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을 만들어 내고 만다. 그리고 후회와 걱정 그리고 불안함을 조합시킨다.

 

하지만 그 문제를 밖에서만 해결하려고 한다. 자신과 갈등을 겪고 있는 그 존재의 변화를 바란다. 그 사람만 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변할 가능성은 0%이다.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이 변하는 길이다. 내가 변하면 그 사람도 따라서 변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지만 매일 같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 한심함, 답답함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끝없이 다른 사람을 바꾸고 싶어한다.

 

운이 좋다면 소수의 사람들은 변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공격을 당한 만큼 더욱 더 단단해질 뿐이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며,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길을 가야 한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삶의 유일한 해답이 바로 행복이기에 그렇다. 행복은 생존의 필수적 조건이고, 생존의 생명체의 유일한 목적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조차도 부정한다. 삶은 생존이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삶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해는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말이다. 내가 예전에 한 말 중에서 지금도 가끔 아내가 나를 놀리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만 행복하면 다야?', 그것이다. 참 부끄러운 질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다야.' 라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인정하기까지 과정은 몹시 힘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리 속에는 삶은 좀 더 뭔가 원대한 의미가 있어야 하고,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좋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강할수록 너무 단단해서 남들과 좀처럼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속에 있는 말만 꺼내면 날카로운 창이 되어서 상대를 찔렀다.

 

이런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환상이 인간 전체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냈고, 인간의 영속적인 발전이 모든 판단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 사회가 공정해야 하고, 정의가 살아 있어야 하고, 차별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도 그런 생각들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신이 행복하다면 말이다. 삶은 행복이 목적이며 결국 생존이 유일한 목적이란 말을 부정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문제는 설령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매우 부정적으로 인정이 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라고 말할 때도 안타까움과 슬픔을 표현한다심한 경우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그런데 왜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면 슬픈 일일까? 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 존재면 안 되는 것일까?

 

그 작고 귀여운 참새나 토끼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생명체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사실 부정적인 것들은 없다.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들만 있을 뿐이다. 선과 악도, 정의와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은 그렇게 보고 듣고 배워서 늘 그런 식으로 평가되는 것들뿐이다.

 

북한에서 자랐으면 김일성이 신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우연히 자란 곳에서 얻은 지식과 상식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리는 말로 표현되지 못한다. 그 옛날 노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도를 말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고 말이다.

 

답답하니 오늘 이런 글도 쓴다. 가능하다면 다시는 안 썼으면 한다. 정말로 그러길 바란다. 그래도 한가지 소득이 있으니 답답함은 좀 줄어든 듯 하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내 문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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