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떤 것이 좋은 이유는 싫은 이유가 된다.

아이루다 2019. 4. 15. 07:03

 

어떤 사람이 '나는 그 사람이 말이 너무 많아서 별로야' 라고 말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말주변이 별로 없는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많이 해서 좋아' 라고 말한다. 평가 대상인 된 인물은 동일한데, 사람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특징이 싫은 이유가 되기도 하고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떤 남자의 강한 성격은 어떤 여자에게는 멋진 카리스마로 느껴지지만 또 다른 어느 여자에게는 강압적인 마초이즘으로 다가오게 된다. 어떤 여자의 부드럽고 섬세한 면은 어떤 남자에게는 그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매력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어떤 남자는 그저 까다롭고 도대체 예측 불가능한 감정 기복을 가진 여자라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키가 큰 남자는 키가 커서 좋고, 키가 커서 부담스럽다. 착한 사람은 착해서 좋기도 하지만 착해서 싫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정이 많기도 하지만 오지랖이 넓기도 하다.

 

가벼워서 좋고, 가벼워서 싫다. 무거워서 좋고, 무거워서 싫다. 높아서 좋고, 높아서 싫다. 빨라서 좋고, 빨라서 싫다. 못생겨서 좋고, 못생겨서 싫다. 관심이 없어서 좋고, 관심이 없어서 싫다. 사람이 진지해서 좋고, 너무 진지해서 싫다. 사람이 재미있어서 좋고, 너무 장난스러워서 싫다.

 

결혼 전 돈을 잘 쓰고 매번 비싼 선물을 사줬기에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던 남자는남편이 되는 순간 돈을 모으지 못하고 허영심이 심한 남자로 평가가 바뀐다. 결혼 전 화 한번 안 내던 남자는 결혼 후 고부간의 갈등이 생기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냥 잠시만 생각해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된다. 똥은 더럽지만 똥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생명체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생명체들을 통해서 똥을 더럽다고 여기는 존재들 역시도 살아갈 수 있다. 어느 한쪽만 사라져도 양쪽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좋은 것이 너무 좋은 사람들과 싫은 것이 너무 싫은 사람들은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좋은 것에 대해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싫은 것에 대해서 비난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가치화가 된 후 의미를 가지게 된다.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를 너무 좋아하게 되다가 커피에 대해서 전문가가 된다. 그리고 커피 얘기만 나오면 커피에 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한다. , 그 정도에서 멈추면 여기까지도 괜찮다. 그저 수다스러운 정도니까 말이다.

 

하지만 멈추지 않기에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커피들에 대한 비난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커피가 삶의 의미가 되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어지면 나머지 것들은 덜 가치가 있고 덜 의미가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다. 원래 가치나 의미 그 자체가 상대적인 개념이라서 그렇다.

 

고작 커피 가지고 그런 가치나 우월감을 느끼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커피 따위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커피 대신 책을 그 자리에 둔 것뿐이다. 책 얘기만 나오면 줄줄이 책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비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커피의 우월감은 동의해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힘들겠지만 책은 다들 인정해주니 더욱 더 강한 우월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나마 책 중에서 그러지 말라는 책들이 좀 있으니 최대한 숨기긴 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작 커피나 책 같은 것을 가지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든지 상대를 비웃었다면 비웃은 사람 역시 다를 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누군가를 비웃었다면 바로 자신이 그것들을 비웃을 수 있는 근거, 그러니까 남들을 비웃을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가치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일 테니까 말이다.

 

또한 만약 가지고 있는 남다른 가치 하나 없이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그저 뭔가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삐뚤어진 열등감일 뿐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삶을 정의해 줄 단 하나의 가치조차도 없는 삶이니 그것은 더욱 더 슬픈 상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커피나 책은 영화나 여행이 될 수 있다. 영화나 여행은 봉사나 기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되느냐는 그저 개인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처음엔 단순히 좋았던 것이다. 누군가 싫어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좋아진 그것 말이다.

 

커피의 쓴맛이 좋은 사람과 커피가 써서 싫은 사람은 같은 이유이다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중간에 움직이지 못하고, 화장실도 쉽게 가지 못하지만 그로 인한 집중력으로 인해 두 시간 가량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도 좋은 이유와, 같은 이유로 영화관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 아는 것이 힘이 되지만, 책을 통해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한다. 여행이 주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설렘은 여행이 주는 새로운 장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두려우냐 아니면 흥미로우냐는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가 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외적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상을 두고 자신이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일이 다른 사람들 내부에서 일어난다. , 내가 그들에게 외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정할 수 없는 일이다.

 

칭찬을 받고 있다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칭찬을 받을 수만은 없다. 그러니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해서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누군가 내가 키가 커서 싫다고 하며, 누군가 내가 노래를 못해서 싫다고 하고, 누군가 내가 너무 부지런해서 싫다고 하면 그것을 스스로 바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안티 팬이 있기 마련이며, 사람을 수백 명 죽인 연쇄 살인마들에게도 추종자는 생기기 마련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의 차이는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특징을 그 자신과 동일화 시킴으로써 자신이 가진 우월감의 토대를 마련하거나 자신이 느낄 열등감 소재로 써 버리고 만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 모든 것들은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오는 상처는 모두 나만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일까? 있긴 있다. 그리고 원리 그 자체는 단순하다. 겨울에 창문을 열어 두면 환기는 되지만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기에 집안의 온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환기를 하면서 집안의 온도도 유지할 방법은 없다. 이 둘은 동시에 일어나거나 동시에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어떤 것의 단점은 반드시 어떤 것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반대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비난의 상처를 막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칭찬의 기쁨을 포기하는 이이다.

 

처음부터 찬사를 받은 것을 허용했다면 비난을 받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 둘은 같이 온다. 나에 대한 좋은 평가는 반드시 나에 대한 나쁜 평가와 함께 온다는 뜻이다.

 

더 다른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세상의 유일한 원리이다. 모든 장점은 반드시 단점이 되기에 그렇다. 그러니 비난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찬사의 행복도 포기해야 한다. 칭찬만을 골라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비난으로 인해 삶이 흔들리지 않고 싶다면 그나마 선택 가능한 칭찬으로 인해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인 이상 그렇게 살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경우 그렇게 사는 것처럼 흉내는 낼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칭찬을 해도 엄숙한 얼굴로 거부하고, 최대한 겸손함을 보여 줄 수는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면 잠자기 전에, 샤워를 하다가 문득 그 칭찬을 떠올리고는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는 사람으로 되고 만다.

 

그래도 그 숨겨진 모습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매우 인격적인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존경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비난을 받을 회수가 줄어서 실제로 자신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착각 속에서 오래 살다가는 어느 순간 깊숙이 들어온 한마디에 비수를 찔린 듯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삶의 본질을 바라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어렵지는 않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좋아할 자유도, 싫어할 자유는 있다. 그러니 내가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도, 누군가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도 모두 각자의 자유이다. 그것들은 자연스러운 것들이니 외부에 있는 것들을 가치와 증오, 나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우월감과 열등감으로만 확장시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그러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고 싶고, 나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고 싶어서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살고 싶어서 그렇다. 생존 그 자체이다. 모은 생명체는 살기 위해서 살아간다. 인간도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살고 싶어서 사는 존재가 삶는 이유를 가지고 싶어하기에 모든 착각이 일어나게 된다. 커피가 가치 있어지고, 책이 의미를 가진다. 봉사가 뜻 깊은 행위가 되고 기부가 선행이 된다.

 

모두 그저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조금 좋게 포장해서 말하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인데 가치가 되고, 의미가 되고, 선행이 되고, 심지어 신의 뜻이 되기도 한다. 그저 자신이 싫어서 안 한 것인데 신념이 되고 인격이 된다.

 

그저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내가 싫으면 싫은 것이다. 다른 이들이 나를 좋아하면 좋은 것이고, 다른 이들이 나를 싫어하면 슬프지만 그것도 또한 그들의 몫이다. 그러니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된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피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안 만나면 된다.

 

내가 못나서도, 내가 잘나서도 아니다. 누군가 못나서도, 누군가 잘나서도 아니다. 오직 그저 각자의 취향일 뿐이다. 그저 담배나 술처럼 선호도의 문제이다. 술이나 담배는 잘한 것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잘한 것도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취향이 생존에 도움이 될수록 가치화가 쉽게 되며, 가치화가 된 것들은 좋아하도록, 싫어하도록 강요를 받게 된다. 내가 좋아하니 너도 좋아해야 한다고 하고, 내가 싫어하니 너도 싫어해야 한다고 한다. 매일같이 서로 그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내가 좋은 것, 내가 싫은 것을 상대에게 왜 그러는지 설명한다. 상대도 자신이 싫은 거, 자신이 좋은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서로 잘 맞을수록 상대와 자신이 뭔가 좀 더 친한 존재인 듯 느껴진다. 심한 경우 영혼의 짝이란 착각까지 생겨난다.

 

하지만 전혀 그것이 아니다. 그저 가치 기준이 서로 잘 맞고 무시의 대상이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착각에 빠진 두 사람은 매일같이 서로가 좋아하는 것, 서로가 싫어하는 것을 말하면서 우쭐댄다. 자신들이 가진 가치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증오를 뿜어 댄다. 사실상 정도가 약할 뿐,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고 사는 일이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이 있으니 그것에 대해서 의견 표현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을 아주 쉽게 그것을 넘어서 버린다. 그러니 싫은 것을 비난하고 좋은 것에 대해 찬사를 늘어 놓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미 설명했듯이 답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어야 하고, 사는 이유가 있어야 하며,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 그것들이 없다면 당장 죽임을 당해도 따질 말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냥 살면 되는데 살아가야 할 이유를 가지고 싶어하기에 생겨난 오류이다.

 

물론 키우는 아이 때문에, 책임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루고 싶은 것이 있어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개인적인 이유가 될 뿐이다. 결코 절대적인 이유가 되질 못한다. 그러니 결국 신을 끌어 들인다. 신이 준 목숨이니 자신은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신이 준 목숨이 아닌 것인가?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100% 인정하지는 못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100% 인정했더라도 그것은 그저 인간의 범주일 뿐이다. 지구 전체 생명체가 인정하더라도 지구라는 한계를 가진다. 우주가 인정해줘도 우주라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니 처음부터 '절대적인 인정'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싶기에 매일 같이 그 이야기를 한다. 커피를 찬양하고, 여행을 찬양하고, 봉사활동을 찬양한다. 그것들을 찬양할수록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의미가 생겨나는 듯 느껴지니까 그렇게 한다.

 

매일 같이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을 평가하고(주로 단점만 골라서 평가한다), 다른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에(주로 단점에 대해서만 평가한다흔들린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싶어서 그러고 있다는 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커피든 책이든 충분히 편히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맛있는 빵이 맛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남을 돕고 나면 기분이 뿌듯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해서 여행을 떠났을 때 즐겁지 않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처음부터 의미나 가치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좀 더 냉소적으로 말하면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싶어서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고급 행복과 저급 쾌락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냥 좋아하는 것을 그저 즐기면 된다. 남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남들의 설명에 흔들리지 않고, 강요에 반발하지 않으면 된다. 그저 사람들이 그러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외부의 것들을 크게 평가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 역시도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뿌리가 깊게 뻗어야 한다. 이 둘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 외부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다면 남의 말에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먼저 외부에 대한 평가를 멈춰야 한다. 저것은 왜 좋고, 저것은 왜 싫고, 저것은 무엇이 좋고, 저것은 무엇이 문제라는 말을 줄이면 줄일수록 다른 이들이 하는 말들 역시 그 소리가 줄어들고 결국 스쳐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스쳐 지나갈수록 점점 더 어떠한 흔적도 남질 않는다. 찬사의 행복도 비난의 불행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치와 의미 그리고 찬사의 행복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그것들에 중독되어 있는지 조차 모른 채 매일 무시와 비난의 불행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저 살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살기 위해서 엄마의 젖을 빠는 아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시보 효과  (0) 2019.08.26
내 안에 똥강아지가 산다  (0) 2019.04.19
대화의 어려움  (0) 2019.03.11
진심을 다해야 하는 이유  (0) 2019.02.28
갈등 이야기  (0) 201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