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세이

신데렐라의 친구 - 7

아이루다 2019. 3. 13. 08:20

 

마시던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천천히 내려 놓은 주상훈은 잠시 그 향과 맛을 음미하려는 듯 지긋이 눈을 감고 한참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느긋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서민국의 답답한 마음은 점점 더 그 강도가 심해져만 갔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뭐라고 한마디 채근이라고 하려는 순간에 닫혀 있던 주상훈의 입이 열렸다.

 

"세나씨의 과거는 기본적으로 서변호사님이 이미 알고 계신 것과 그리 다를 바는 없죠."

 

한참 뜸을 들인 것에 비하면 별 내용 없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서민국은 대답 대신 방금 네가 숨겨진 진실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표정으로 주상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빨리 본론을 말해줬으면 하는 서민국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상훈은 나지막한 톤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서민국은 그런 그에게 뭔가 따질 수가 없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조세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주상훈은 그전과는 다르게 뭔가 미묘하게 분위기가 변했고, 그로 인해서 서민국은 스스로 조심스러워지고 말았다.

 

"세나씨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14살 때 일어났던 그 사건은 분명히 불행한 사건이긴 하지요. 미성년자이고 또한 비록 의부아빠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부녀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두 사람이 성적인 문제로 얽힌 일이었으니까요."

 

"그것은 당연하죠. 사회가 아무리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될 짓이 있는 겁니다."

 

차분히 설명하고 있는 주상훈과 달리 서민국에게서는 명백히 불편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런데 만약.."

 

주상훈은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말을 잠시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쭉 커피 잔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서 갑자기 서민국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하듯 물었다.

 

"서변호사님은 그날 있었던 그 사건의 시작이 정작 의부아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면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드리겠어요?"

 

"?"

 

무슨 말일까? 서민국의 순간적으로 머리 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지만 도대체 눈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방금 뱉은 말을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건의 시작이라니.. 그렇다면 혹시? 사고의 흐름이 거기에 다다르자 서민국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면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국 그의 당혹스러움과 의구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주상훈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자 주상훈은 그가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정말로.."

 

",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에요. 그날 일어난 사건의 주범은 사실 조세나씨거든요. 그러니까 의부아빠가 그녀의 방에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세나씨가 의부아빠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였다고 해야 하겠죠."

 

"도대체 왜.."

 

너무도 놀란 서민국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왜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한 이유는 설명하기가 그리 쉬운 내용이 아니지요. 거기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심리적 갈등 요소가 숨겨져 있으니까요. 그래도 가장 대표적인 원인을 하나 뽑으라면 그것은 바로 세나씨의 엄마에 대한 복수심이라고 해야겠네요."

 

"엄마에게 복수요?"

 

", 저도 세나씨를 통해 들었던 얘기인데, 그 당시 세나씨는 자신의 엄마를 몹시 증오했거든요."

 

"왜 그랬죠세나씨 엄마가 그녀에게 못되게 굴었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정 반대지요. 세나씨는 외동딸이었고 그래서 아주 귀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왜요?"

 

"친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가 새 남편과 결혼한 일 그 자체에 대한 증오였다고 봐야 하죠. 특히 세나씨는 아빠를 정말로 좋아했었기에 아빠가 죽은 후 겨우 3년만에 새 남편을 맞아 결혼한 엄마의 행동을 일종의 배신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에요."

 

", 나이가 나이이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남자를 유혹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도 겨우 14살의 나이에 그런 판단과 행동을 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거기엔 좀 추가적으로 좀 더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뭔데요? 솔직히 말해서 진짜로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제발 저를 좀 이해시켜 줘 보세요."

 

주상훈은 서민국의 나름 심각한 표정을 보았지만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이 있을 수 있지만, 세나씨의 엄마에게 이미 어떤 문제가 있었거든요. 물론 제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점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세나씨의 엄마 되는 분과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고 오직 세나씨를 통해서만 듣고 판단한 내용이니까요."

 

"아무튼 그 문제가 뭔데요?"

 

"단순하게 표현하면, 세나씨의 엄마는 심각한 종속성이 나타나는 성격이었거든요. 물론 그것이 아주 특이한 것은 아닙니다만, 세나씨의 엄마의 경우에는 그것이 좀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고 봐야겠지요. 더군다나 40대도 안된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로는 더욱 그 증상이 심각해져 버렸죠."

 

"종속성이요?"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성격을 뜻하는 것이에요. 세나씨의 엄마의 경우엔 남편이 없이는 못사는 것으로 나타나죠."

 

"그거야 사실 여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특징 아닌가요? 남자들의 경제력에 기대려고 하는 여자들이 꽤나 있는 세상이니까."

 

하지만 말하는 도중 서민국은 갑자기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 자신은 분명히 아내가 결혼 후부터 계속 자신의 경제력에 기대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지만요즘 자신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느껴지고 있었기에 그랬다. 그로 인해서 그는 요즘 자신의 아내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런 부분은 남자들이 많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해요. 보통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집안 일을 담당하기에 그렇게 여겨지는 경향이 큰데, 실제로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웃기는 말 같지만, 남자가 가진 육체적인 힘이에요. 그로 인해서 여자들이 경제력 하나 없는 평생 백수로 지내는 남편을 데리고 살면서 밖에서 일도 하고 집안일까지 독박으로 하기도 하면서도 결국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 그것이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여자들이 남자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돈이 아닌 육체적 힘 때문이라고요?"

 

", 이렇게나 문명화된 세상이지만 그런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흐음.. 그 얘기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서변호사님은 혹시 밤거리를 걸을 때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있으세요? 아니면 택배를 시킨 후 집에서 받을 때? 집안의 고장 난 것을 고치거나 주문을 한 제품을 설치하기 위해서 외부 사람을 집안에 들일 때, 그런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남자들에게서 어떤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있으세요?"


"
아니요. 별로. , 좀 불편하긴 하지만요."

 

"그렇죠. 일반적으로 남자는 다른 남자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자는 전혀 다르죠. 여자는 남자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해요.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는 그저 단순히 힘이 쎈 존재를 넘어서거든요."

 

"그러면 뭔데요? 남자가 무슨 악마라도 된다는 뜻인가요?"

 

뭔가 좀 억울한 듯 보이는 서민국의 태도에 주상훈은 또 다시 살짝 웃음을 머금고 대답을 했다.

 

"그건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남자도 다른 남자가 두려울 때가 있죠.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다른 남자와 시비가 붙게 되면 그 순간 남자 역시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까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두려움은 그저 여자만이 문제는 아니라고요."

 

"하지만 여자에게는 남자에게는 없는 한가지 두려움이 더 있어요. 그리고 훨씬 더 두렵죠. 그런데 그 두려움을 남자들은 잘 모르죠."

 

"그게 뭔데요?"

 

"쉽게 말해서 성폭행이고 그런 강제적 폭행으로부터 이어지는 임신과 출산 등등의 모든 것에 관한 두려움이죠."

 

".."

 

", 그래서 그것은 남자는 이해하기 힘든 두려움이에요. 아무튼 그래서 많은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남자의 보호를 원해요. 단순히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들의 성적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라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남자들 역시도 이미 짝이 있는 여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선을 긋고 살아요. 만약 실수로 이미 남자가 있는 여자에게 잘못할 경우 아무리 순한 남자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남자 스스로 너무도 잘 알거든요. 반대로 남자가 없는 여자는 수 많은 남자들의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는 존재가 되고 말죠. 그런 면에서 여자는 남자가 결코 느껴보지 못하는 두려움을 갖게 된답니다. 반대로 남자의 경우엔 많은 여자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게 되면 오히려 더 좋아하죠."

 

"그 말 뜻은, 세나씨 엄마도 그랬다는 것인가요?"

 

", 맞습니다. 세나씨는 자신의 엄마를 남자에 환장한 여자라고 표현했지만, 제가 판단해본 결과는 그녀는 그녀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에요. 더해서 하나뿐인 가족이면서 같은 여자인 세나씨 역시도 지킬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겠죠."

 

"그러면 그 부분을 세나씨에게 잘 설명해줬어야죠."

 

"제대로 했더라도 14살 먹은 여자아이가 인정하기엔 너무 과도한 두려움이죠. 그 나이엔 이 세상엔 무서운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그리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기도 하죠."

 

"결국 그러면 그 사건은 엄마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철없는 14살짜리가 저지른 지저분한 비극인가요?"

 

"물론 14살짜리 유혹에 넘어간 의부아빠도 큰 잘못이 있죠. 그리고 스스로 서지 못하고 결국 남자라는 울타리를 급하게 찾은 세나씨 엄마의 약함도 일정 부분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요."

 

".."

 

서민국에게서는 어느새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분노의 어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대신 그의 표정에서는 착잡함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아무튼 그날의 비극은 그 집안 사람들 모두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었어요. 세나씨 본인에게는 말을 할 것도 없고, 비록 의부딸이지만 14살짜리 여자 아이의 유혹에 넘어간 아빠,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엄마, 이 세 명 모두 제 정신일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럼 그 후로 그 가족은 어떻게 되었죠?"

 

"여기에서부터가 정말로 놀라운데요그들은 그 후로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그렇게 지냈어요. 엄마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명시적으로 꺼내지는 않았어요. 의부아빠는 그날 일을 무척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 역시도 일종이 피해자라고 생각한 듯 입을 다물었죠. 그리고 별 다른 행동 변화 없이 남편으로써 그리고 아빠로써 책임을 다한 모양이에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세나씨의 반응이 가장 놀라운데, 그녀는 그날 이후로 엄마에게 매우 친밀하게 대했다고 해요.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 그리고 자신이 엄마를 전혀 증오하지 않는 듯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렇게 복수를 하고는 엄마에 대한 나쁜 감정이 사라진 것인가요?"

 

주상훈은 잠시 얕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세나씨는 그렇게 믿었죠. 그일 이후로 엄마와의 관계는 계속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사실 전혀 아니죠제가 세나씨를 오랫동안 지켜 본 결과세나씨의 그런 태도는 일종의 승자의 미소였어요."

 

"승자의 미소요?"

 

", 의부아빠를 두고 엄마와의 승부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우위에 선 것이죠. 새 아빠를 유혹해서 성공한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그 사실을 엄마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거든요. 그보다 완벽한 승리가 어디에 있어요. 상대를 강하게 때렸는데 상대가 맞고도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상태,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아닌가요?"

 

".. 그렇긴 하군요."

 

"그리고 14살의 세나씨가 이겼다면, 그 후로 성인이 되어서 점점 더 여성성이 강해지는 세나씨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더 쉽게 엄마를 이길 수 있을까요? 결국 세나씨는 엄마와 자신을 완벽히 차별화 시킬 수 있었기에 엄마를 혐오나 증오가 아닌 연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에요."

 

"솔직히 그 심리가 잘 이해가 가지는 않네요."

 

"사람의 마음 속은 참으로 오묘한 데가 있어서 그래요. 하지만 단순히 생각해서 자신이 누군가를 압도적으로 이기게 되면 그때는 상대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는 것은 정상이죠. 물론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을 혐오로 느끼기도 하지만, 세나씨의 입장에서는 엄마를 관대함으로 느낀 경우가 되겠네요. 사실 연민은 혐오의 또 다른 얼굴이고 관대함은 모멸감의 또 따른 얼굴이거든요."

 

그 순간 주상훈의 말투에서는 뭔지 모를 씁쓸하고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서민국은 여전히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또한 그것을 인정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냥 갑자기 든 생각인데, 세나씨는 왜 상담을 받고 싶어 했나요? 사실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잖아요. 그것도 삼 년씩이나 말이죠."

 

서민국의 질문에 주상훈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어쩌면 더욱 더 부정적인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서민국은 주상훈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그가 점점 자신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과는 결이 전혀 다른 사람이란 느낌이 들면서 낯선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조세나가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그 사람을 만나면 영혼까지 탈탈 털릴 수 있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 삼 년간의 상담을 통해서 세나씨가 얻은 것은 바로 자신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더해서 일반적인 정신과 상담을 통해서는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최종적 결론이었죠."

 

"그러면 그래서 이곳에 온 것인가요?"

 

", 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나름 복잡했지만, 결국 이곳까지 찾아 왔죠. 저는 지금도 세나씨가 이 사무실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온 그 날이 또렷하게 기억이 나요얼굴을 반쯤 가리던 커다랗고 진한 선글라스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노란색 작은 가방을 든 채 문을 열고 검은색 높은 굽의 신발로 또각또각 소리내면서 걸어 들어오던 세나씨의 모습은 그야말로 저에겐 혼돈 그 자체였거든요."

 




주상훈은 조세나를 처음 봤던 그때가 생각하는지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서민국 역시도 그 순간 자신이 두 번 만났던 조세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방금 주상훈이 사용한 단어, '혼돈' 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아마도 자신이 그녀에게 느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바로 그런 그녀의 특징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세나씨의 정체성과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이지요."

 

주상훈은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서민국을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그런 것 같네요."

 

서민국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혼돈이라니..

 

"그래서 세나씨는 일반적인 상식이나 평범한 사고흐름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그 과거의 특이함은 그 사건에만 머물지는 않거든요."

 

"? 그럼 또 그런 사건들이 있었나요?"

 

", 물론 유형은 전혀 다르지만, 있긴 했죠."

 

"그게 뭔데요?"

 

서민국은 한껏 호기심이 담긴 표정으로 물었지만 그 순간 주상훈은 난감함과 흥미로움이 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 드릴게요. 세나씨의 개인적 기억이기도 하고 또한 그런 자세한 이야기까지 안다고 해서 세나씨에 대한 이해가 그리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요. 사실 세나씨를 이해하는 것은 그녀가 14살때 일어났던 그 사건만 제대로 아는 것으로 충분하죠."

 

주상훈은 완곡히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갑자기 서민국의 눈을 정면으로 뚫어져 라고 바라보았다. 서민국은 자신도 모르게 '왜 그렇게 봐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서변호사님은 이곳에 왜 오셨나요?"

 

"? .. 그거야 당연히 제 의뢰인의 재판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왔죠. 제가 조세나씨의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재판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런가요? 다 좋은데, 세나씨의 과거에 있었던 또 다른 일들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 그럼 뭐 또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 순간 부정을 하는 서민국의 음성엔 약간의 당혹감이 느껴졌다.

 

"그럼 지금까지 얘기한 정도로는 부족한가요? 사실 그 정도만 이해해도 세나씨의 독특한 삶의 패턴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실 텐데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좀 더 솔직히 말씀 드릴게요. 괜찮으시겠죠?"

 

".. 그러세요."

 

"그냥 까놓고 말씀 드리면, 이런 심리상담의 결과는 재판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잖아요. 오히려 정식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 내용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봐야죠. 그쪽에서는 구체적인 병명까지 부여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것들은 재판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긴 합니다. 하지만 변호라는 과정은 자신이 책임진 의뢰인에 대한 무죄 추정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악당이라고 생각하면서 변호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변호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조세나씨의 삶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변호사로써의 의무를 더욱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일단 임기응변 식으로 꺼낸 말이긴 했지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서민국이 잘나가던 로펌에서 쫓겨난 이유도 바로 비슷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잘못을 한 어느 재벌의 변호를 담당하다가 결국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숨기지 못하고 너무도 뻔뻔한 의뢰인 앞에서 폭발해버렸고, 그 일로 인해서 사건에서 손을 떼야 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결국 그 일은 위선으로 알려져 결국 그가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더 이상 버틸 능력이 안됨을 증명하고 말았다. 그 로펌에서는 개별 사건에 대한 변호사 개인적인 신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돈만이 최고의 결정 요소였던 것이다.

 

"보기 드물게 훌륭하신 변호사님이시군."

 

내용은 좀 그랬지만 결코 빈정거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진지한 대답이었다그런데 그 순간 서민국은 생각하지도 못한 낯선 감정으로 인해서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갑자기 자신의 안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로 인해서 억지로 퇴사를 당한 후 지난 일년간 단 한 명도 그런 식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그런 그를 잘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냥 왜 그런 좋은 회사에서 왜 쫓겨났냐고 만 했다. 주변 친구들도 같이 술을 마실 때는 모두 그를 위로하는 듯 했지만 얼굴 한쪽 표정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서민국에게 깊은 상처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지금은 친구들과 관계를 거의 끊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우연히 만난, 자신을 전혀 모르는 한 남자의 진지한 대답에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고 있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서민국은 울컥하는 마음을 최대한 감춘 채 겨우 형식적인 대답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다는 아니죠?"

 

"?"

 

주상훈은 대답대신 살짝 웃기만 했다.

 

"제에게 무슨 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인가요?"

 

"그것을 제가 딱히 입 밖으로 꺼내서 말씀 드려야 할까요?"

 

묘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서민국은 왠지 상대의 말을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그 자신이 상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지 그 이유는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저는 지금 슬슬 서변호사님에게 관심이 생기는데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세나씨와 같은, 사실은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서민국 변호사님에게 관심이 생긴다는 뜻이에요. 사실 그쪽 계통에서 꽤나 잘 나가는 분 아니었나요?"

 

"저에 대해서 뒷조사를 하셨나요?"

 

"뒷조사라고 하긴 그렇고, 제가 세나씨에 대해서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하기에 미리 좀 파악한 내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네요. , 그래 봐야 인터넷 검색 정도지만요."

 

서민국은 그것이 뒷조사하고 뭐가 다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 그것도 한때죠. 지금은 개인 사무실을 차려놓고는 임대료도 내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 이제 좋은 일만 있으시겠죠. 이렇게 큰 사건도 맡았으니까."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마무리를 했으면 합니다. 곧 예약한 방문자가 올 시간이라서요."

 

".. . 아무튼 오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세나씨에 대해서 저에게 따로 해주실 말씀은 없나요?"

 

서민국의 요청에 주상훈은 고개를 돌려 잠시 동안 물끄러미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서민국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단 제가 알고 상상한 범위에서 말씀 드리자면, 세나씨가 그녀의 친구 한은서씨를 죽인 일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더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실이 따로 있을 것이란 정도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나씨가 범인이 아니란 뜻은 아니에요. 사실 제가 아는 세나씨는 살인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 방금 한 말씀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하시죠?"

 

"확신이란 원래 존재할 수 없죠. 단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미약하게나마 그런 느낌이 들어서 더욱 이 사건에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뭔가 숨겨진 진실이 따로 있고, 그것은 오직 세나씨 홀로 안고 있다는 느낌 말이에요."

 

"그럼 그 느낌을 따라가세요. 그러면 결국 진실의 문이 열릴 것이에요."

 

".. 그런데 또 찾아와도 괜찮을까요?"

 

"언제든 오세요. 그리고 제 생각인데 서변호사님도 따로 시간을 내서 심리상담을 한번 받아볼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 사실 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만요."

 

"제가요?"

 

"자신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고 싶다면요. 아니면 상관이 없고요."

 

주상훈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띤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서민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서민국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는 듯 하다가 서둘러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하고는 그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어차피 시간이 늦어서 자신의 사무실에 들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언제든 나가지 않아도 되는 사무실이었다. 자신이 대표이니까 말이다. 비록 돈에 쫓기긴 하지만 이런 것은 좋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사장이 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퇴근 시간이 좀 남은 지하철은 올 때처럼 여전히 한산했다. 그래서 여유 자리도 있었다. 서민국은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좀 날리고 싶었기에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들으면서 그가 가끔 들어가는 유머 커뮤니티 사이틀 방문했다. 일단 오늘 올라 온 그들을 읽기 시작하자 곧 더욱 더 강한 무의식 상태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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