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적인 삶

아이루다 2019. 1. 14. 08:04

 

미래에 인류는 새로운 기술을 만든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기억들을 잊게 해주는 기술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기억,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기억,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기억, 크게 실패해서 좌절감에 빠져서 방황했던 기억과거에 한없이 비겁했던 기억까지도 모두 지울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기술의 치료를 받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체적인 고통도 느끼지 않게 해줄 수 있다. 비록 치료는 못해도 고통이라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치료 불가능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에 이 역시도 정말로 필요한 기능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모두 해결해주는 기술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기술이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은 바로 중추세포에 삽입된 칩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간의 통증을 관장하는 그곳에 인공지능이 탑재된 칩을 삽입함으로써 신경망을 따라 이동하는 통증의 신호를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칩이 삽입되면 인간은 모든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그 후로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단 하나의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기억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억들도 차츰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정말로 소중한 기억들까지도 말이다.

 

첫 키스의 기억, 아이가 처음 태어난 날의 기억, 사랑하는 연인과 떠난 여행의 기억, 친구들에게 가득 둘러싸여서 치른 생일 파티의 기억,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합격한 날의 기억 등등잊고 싶지 않는 날의 기억도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그럼에도 큰 문제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고통을 해결한 이 순간은 무척 행복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치료를 받았던 한 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기억이 사라짐을 알고 난 후 자신의 몸에 삽입된 칩을 제거하려고 한다. 신체적으로도 이미 치료 불가능한 만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지만자신의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그 칩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자 그의 몸에 삽입되어 있는 칩에 탑재된 인공지능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데 자신에게 연결된 그 사람은 그 본능을 거스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소중한 기억을 잃지 않다는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시 마주하려는 그 사람의 모습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인공지능뿐만이 아니라 그냥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기도 한다. 아무리 그런 기억들이 소중해도 당장 견디기 힘든 고통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행복과 불행 중에서 불행함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이해를 한다아마도 인간이라면 다 그럴 것이다. 물론 본인이 당사자이라면 다르겠지만, 남의 고통이니 훨씬 쉽게 이해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정신 세계는 고작 인공지능이 판단하는 참과 거짓 수준의 그런 단순한 체계가 아니다. 인류는 과거로부터 늘 고통 속에서도 소중한 것을 지켜왔고, 가치를 추구했으며,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음마저도 받아들였으니까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히 생존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인공지능이 의구심을 품듯이 그렇게 고통을 느끼더라고 소중한 기억을 지키고 싶어한 것일까? , 단순히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 질문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그 사람은 소중한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서 다시 고통을 감당하려고 한 사실은 맞지만결국 그런 모습은 더욱 더 견디기 힘든 큰 고통이 있었기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그 사람을 이해를 못한 것은 단지 소중한 기억을 잃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에 관한 것이다.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인공지능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 파괴의 고통은 쉽게 이해가 가지만, 소중한 것을 잃는 고통은 소중한 것을 가져봐야 알 수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소중한 것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가질 수도 없다.

 

소중하다는 것은 감정이기에 그렇다. 아무튼 결국 그 사람은 그저 더 큰 고통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알고 있듯이 인간이 최대한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고문을 당할 때 입을 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신체적으로 무자비한 고통이 느껴져도 동료를 배신한다는 두려움이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의리라는 말이 가진 의미가 그것이다. 의리란 말은 신뢰를 배신할 때 평생 동안 감당해야 할 자기 불신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에 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다는 것, 동료를 배신하지 않고 싶어하는 것,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매우 표피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소중한 것을 잃는 두려움, 동료를 배신하는 자기 파괴의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소중하다는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감당해야 할 고통이 엄청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중한 것을 통해서 그만큼이나 행복했으니까 말이다. 그 행복이 사라질 때 감당해야 할 불행이 너무도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 두려움이 계속 유지가 된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평생 돈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벌지 못할까 봐 두렵고, 돈이 충분히 많을 때는 그 돈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 돈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려면 너무도 돈이 많아서 이젠 더 이상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돈을 쓸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순간이 되면 그 누구도 돈을 통해서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불행이 없어졌기에 행복도 없어질 수 밖에 없다. 행복은 부족함을 채울 때 생겨나는데 그 부족한 자체가 없어졌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돈으로 더 이상 어떤 종류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 상태가 되는 즉시 돈은 공기가 된다.

 

생존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지만, 너무도 당연해서 그 누구도 그것의 존재에 대해 잊고 만 공기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한다. 고통을 느끼지 않고 싶어한다. 최대한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삶의 모든 목표는 고통을 줄이는 것에 맞춰진다. 처음부터 고통은 죽음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에 그렇다인간은 누구나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실 사는 것이 전부인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고통이 늘 신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꼭 그 고통이 과거의 나쁜 기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아니 고통스럽다기 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특징 때문에 놀랍게도 사람들에게서 이타적인 면이 나타난다.


 

내 신체의 고통과 내 기억의 고통만이 고통의 전부였다면 이 세상은 오직 나만 아는 이기적 사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중함의 의미를 안다. 그래서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은 목숨마저도 내놓을 수 있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커서 목숨을 잃는 두려움 조차 넘어 서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것, 나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것, 이것이 바로 이타적 인간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된다. 사람들의 몸 속에 삽입된 인공지능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너무 단순한 관점에서만 본 것이다.

 

고문을 할 때는 끝까지 버티던 사람이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쥐고 협박하면 바로 굴복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인간적인' 면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며 그 역시도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것이 그저 나 자신이 아닌 소중한 누군가를 향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좋다. 그것을 통해 수 많은 좋은 가치들이 만들어지니까 말이다.

 

단지 한가지 주의할 것은 있다. 그것은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진 인간적인 것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은 바로 각자 내부에서 생겨나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절대로 이타적일 수는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다고 믿게 되면 자신에 대한 터무니 없는 오해가 생겨나게 된다. 자신이 선한 존재인 듯, 자신이 남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현상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매일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해줬다고 믿는다. 그 사람을 위해 밥을 해줬고, 그 사람을 위해서 돈을 벌었고, 그 사람을 위해서 선물을 샀다고 믿는다. 그 사람을 배려해줬고, 그 사람을 챙겨줬고, 그 사람을 생각해서 비싼 밥을 사줬다고 믿는다.

 

그나마 착각을 했더라도 주변에 착하게 굴면 좋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선의를 베풀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대가를 바라게 된다. 물론 대놓고 바라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서로 입장이 바뀌었을 때 상대가 자신이 해준 것처럼 해주지 않으면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주는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는 받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 잘해야 절반 정도만 전달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주는 사람이 만원을 줘봐야 받는 사람은 오천 원을 받았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 간의 오천 원의 괴리감이 결국 나중에 실망과 상처를 만들어 내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더 잘해줬다고 믿으니까 말이다.

 

감당해야 할 고통이 모두 자신의 것이듯, 어떤 남을 위한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느끼는 좋은 기분들 역시도 모두 자신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진짜로 이것만 잊지 않을 수 있다면 삶은 정말로 단순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런 것을 잊으면 손해만 보고 살 것 같고, 삶을 무슨 기대감으로 살 지 두려울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숨겨진 삶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 기대가 가지는 행복에 대한 효과는 대단하지만, 그만큼 상처와 불행의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어떤 기대도 없이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삶은 매우 행복해질 수 있다. 자신이 주변에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베풀면서 살면 되니까 말이다.

 

다시 받을 생각이 없으니 해주는 것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끝난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고 그래서 미련이나 후회도 사라지게 된다.

 

후회를 할 걱정이 없으니 현재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민을 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현재 시점에 뭔가를 결정할 때는 오직 현재 상황만이 중요해진다. 과거는 금세 잊혀지고 미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지금, 여기'를 산다는 말의 의미이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미래를 무시하고 현재의 나를 위해 흥청망청 쓰고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저 매 순간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어떤 사람도 한없이 착해질 것이다. 악당들조차도 죽음의 순간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해지니까 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미래가 있기에 악해진다.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서 그렇다. 미래에 더 잘 살고 싶기에 욕망이 생겨나고, 욕망이 생겨나니 욕심이 생기고 무리를 하게 된다.

 

그러니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없다면 사람들이 나빠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매일 당장 주변에 선심을 씀으로써 환영 받는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다. 그 누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환영을 받는 자리에 있게 되면 그렇게 바라던 행복이 찾아온다. 마음이 평온해지고안정적이며, 따듯하다고 느낀다. 더불어 사람들이 많아지면 재미도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말이 쉽지 기대를 갖지 않고 선의를 베푸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재산이 100억 이상이 되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별 다른 이유가 없이 만 원짜리 선물 하나 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번 선물을 해주면 그 사람들이 계속 그것을 기대할까 봐 그렇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조차도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다.

 

자신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선물을 줬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갈 것이란 기대가 없다면 선물을 줄 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기대감을 갖기에 결국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그 기대감이 떨어질 때쯤 되면 또 선물을 해야 할 것 같으니 처음부터 선물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딱히 이유도 없이 자신이 먼저 선물을 하면 마치 자신이 관계에서 을이 된 듯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더 상대를 아쉬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선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마음의 문제이다. 을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선물을 하는 행복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꽤나 빠르게 받은 것을 잊는다. 준 것은 잊지 않아도 받는 것은 잊는 것이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상대를 을로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고마워한다. 오히려 너무 비싼 선물이면 부담스러워 한다.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이 세상엔 선물을 줄 만한 사람들도 제법 된다. 적당히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선물을 줬을 때 충분히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래서 선물을 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보답은 하지 않더라도 뒤통수를 때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저 주변에 조금만 더 잘해주고 살면 된다. 큰 돈 드는 것도 아니다. 한 달에 한 명에 2,3만원짜리 수준의 선물을 하고 사는 것을 실천해도 된다. 매달 누구에게 해줄지를 정해놓고 해도 된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 받는 사람의 입장은 그리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취향 정도만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돈으로 하는 선물 말고도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제법 된다. 이 세상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으니까 말이다. 그 모든 것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란 점만 잊지 않는다면 정말로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그 누구도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인간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이거나, 선한 것이거나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이 행복한 삶에 아주 큰 도움이 되기에 그렇다. , 인간적일수록 행복해지기가 쉽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누군가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을 좋아하기에 그렇다. 인간이 가진 이기심이 타인을 향해 표출될 때 인간적이고, 그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때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사람은 행복해지고 착해진다. 그러면 세상은 평화로워지고 안전해진다.

 

인간적인 것이 가져오는 좋은 효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직 그것만이 행복의 열쇠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을 때 행복한 경우도 많다. 먹기 위해서 동물을 죽여야 할 때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헤어지자고 말해줘야 할 때, 힘들지만 목표를 달성하라고 쓴 소리를 할 때 그렇다.

 

그럴 때 자신이 혹은 남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해서 딱히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인간적인 것은 행복하려고 한 것이기에 더 행복한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비인간적이어도 된다. 단지 비인간적인 것에는 범위의 문제가 있다적어도 적극적으로 남의 이득을 뺏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범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저 조금 더 욕심이 있느냐, 조금 덜 욕심이 있느냐 차이만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인간이 이룩한 모든 정신적 가치는 바로 인간적인 것을 기반으로 했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서 인간의 모습 자체가 너무도 왜곡되고 말았다. 이기적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소중한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 듯 포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틀에 갇혔다

 

많은 사람들이 착함 증후군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힘들어도 웃는다. 하기 싫어도 한다. 거절을 하지 못한다. 모두 두려워서 그렇다. 인간적이지 못하면 삶이 망가질 것 같아서 불행을 참는다.

 

더해서 아주 작은 이기심도 괴로워한다. 그냥 자신이 이기적 존재임을 인정하면 쉬운데 말도 안 되는 수 많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은 절대로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것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살고 있다. 정말로 필요가 없는 행위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무리한 욕심만 내지 않고, 남에게 특별히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자주 인간적으로 살라고 한다

 

지금 당장 행복하게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주변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다.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매일 매일 그렇게 노력하고 힘들게 사는데도 늘 부족하다.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다. 그럴 때마다 자책이 들고 부끄럽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인공지능의 인간에 대한 단순한 판단을 보면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인공지능 따위가 어떻게 인간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니?' 라고 말이다. 감정이 있는 존재이기에 인간이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믿는다. 행복, 소중함, 가치, 의미, 추억, 기대, 위로, 공감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인공지능과 인간을 구분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그저 살고자 하는 존재이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만 존재한다. 살고자 하기에 행복이 생겨나고, 행복을 원하기에 많은 좋은 가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인간적으로 살 필요가 없다. 인간적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때는 좀 그만 둬야 한다삶의 어느 순간엔 정말로 나를 위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일단 내가 행복해지고 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는 내가 불행하기에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설령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행복하면 아무런 문제가 아닌 것이 불행하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해질 수가 없기에 이 해결책을 이해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 경험해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답이 달라질 수는 없다.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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