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론 - 2

아이루다 2019. 1. 3. 11:42


[앞 글에서 계속]

 

#정보의 역할#


그런데 왜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될까? 이것이 세 번째 이어지는 질문이다.

 

그리도 행복하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그저 마음만 바꿔먹으면 금세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다른 행복해지려고 하는 노력들에 비하면 거의 거저 얻을 수 있는 행복인데도 왜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만약 앞에서 말한 건강, , 관계, 인정, 하고 싶은 일, 이 다섯 가지 조건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것을 달성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어야 맞다.

 

현재는 과거보다 훨씬 더 건강해졌고, 훨씬 더 돈이 많다. 훨씬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살고, 훨씬 더 자주 인정을 받을 기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의 종류도 엄청나게 다양해졌고, 실제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30년 전 만에 해도 해외여행은 소수의 사람들만의 독점인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시대가 그 시대에 비해서, 아니 그 전 시대에 비해서 그렇게 행복해졌을까? 전 인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인류의 행복지수는 과거에 비해서 훨씬 더 높아졌을까?

 

슬프지만 그 답은 '아니다' 이다물론 어느 정도는 행복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얻은 것에 비하면 그 행복은 너무 빈약하다바로 한 세대 전만 봐도 그렇다. 먹을 것도 없고, 대여섯 명이 단칸 방에 살았지만 그 시절이 그리도 불행했을까? 아니다. 요즘 보면 오히려 그 시절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뭔가 바뀐 것일까? 몸의 체질이 바뀌어서 이젠 비싸지 않은 음식을 못 먹게 된 것일까? 이제는 국내 여행을 가면 아무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일까? 이제는 천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자전거를 타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된 것일까?

 

당연히 모두 아니다사람들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여전히 하루에 한끼를 먹고, 하루 종일 숨쉬는데 필요한 공기의 양은 고정되어 있다. 여전히 같은 시간을 잠을 자고, 그 잠자리를 위해서 필요한 공간도 동일하다.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은 수천 년 전과 지금이 거의 동일하다.

 

유일하게 바뀐 것은 바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이다. 그것도 국제적 수준의 정보이다.

 

정보는 기본 적으로 좋은 것이다. 이 시대가 정보의 시대이기도 하고, 정보를 통해서 훨씬 더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다. 정보가 돈이 되는 시대이고, 정보가 편리함이 되는 시대이다. 정보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고, 정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정보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꼭 알 필요가 없는 것들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사우디 갑부가 뭘 하고 사는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들이 어떤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사는지 알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몸에 좋지만 비싸고 귀한 음식, 대학 동기의 연봉, 직장 동료가 최근에 샀다는 집, 자신이 빠진 친구들의 모임 소식, 누군가에 대한 평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전거보다 훨씬 더 좋지만 무척 비싼 자전거 등등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접할 때마다 각자가 가진 목표가 요동을 친다.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이 급변한다.

 

내가 왜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내가 왜 그런 수준의 연봉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그런 집에 살아야 하는지, 내가 왜 그런 모임에도 초대를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그런 자전거를 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근거가 바로 주변의 정보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몰랐으면 그런 조건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을 뜻한다. , 아는 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다들 어떻게든 자랑을 하려고 하기에 알지 못하기도 힘들고, 몰라서 답이 되었다가는 언젠가 우연히 아는 날 그나마 어설프게 누리고 있던 행복조차 송두리 채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오랜만에 동창회에 다녀오는 날이 그렇다잘 쓰던 가방이 구질구질하고, 남편의 연봉이 초라하고, 사는 집이 좁고 불편하고, 학교 잘 다녀온 아이가 미워진다.

 

그러니 모르는 것이 약이 아니라 알고도 병이 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진정한 열쇠이다.

 

그렇다면 왜 알면 병이 되는 것일까를 알아봐야 한다. 알고도 병이 되질 않는다면 조건은 더 이상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목표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의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게 되면 불행의 조건을 뛰어넘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원인, 두려움#

 

그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각자가 가진 두려움 때문이기에 그렇다.

 

누군가의 높은 연봉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 속에서 뭔가 마음 속에 뜨끔한 느낌이 든다. 마치 우연히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발견한 순간과 같다. 그렇게 밑이 없는 허공을 딛는 것처럼 갑자기 내면에서 불안함이 엄습한다.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었는데, 갑자기 작은 균열 하나가 생긴 듯 하더니 금세 넓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균열은 밤에 잘 때도 다음 날 아침에도 계속 유지가 된다.

 

그리고 그 균열은 자신이 가져야 할 것들을 높인다.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당연하게 만든다. 심하면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연봉은 받아야 만 덜 불안해질 것 같다. 덜 억울할 것 같다. 그 연봉을 받는 녀석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데, 아니 자기보다도 못한 녀석인데 왜 자신은 이런 취급을 받고 살고 있는지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잘 다니던 직장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친구의 아들이 전교 일등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속에서 뭔가 균열이 일어나고 그 순간부터 자기 자식의 성적은 초라해지고 만다. 어제는 분명히 오른 성적을 칭찬해줬는데 오늘부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집에 가서 더 잘 가르친다는 학원을 알아보게 된다. 문제는 돈이 더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잔소리가 하나라도 더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내적 균열은 모두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현재를 이렇게 보내고 있으면 미래에 불행할 것 같은 불안함, 남들에게 뒤쳐져서 결국 패자가 될 것 같은 불안함, 이것들이 바로 두려움의 근원이다.


#남과 나를 비교 하는 이유#

 

흔히 이런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자기 자신만 보고 살면 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자꾸 타인을 바라보게 되는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하는 겉핥기 식의 조언이 될 뿐이다.

 

사람은 애초부터 비교를 하는 이유는, 오직 비교를 통해서만 자신의 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의 모든 목적은 생존을 향하고 있다. 그저 그것을 어떻게 이루느냐에 따라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느냐, 인생 일대의 예술 작품을 만들려고 하느냐로 갈릴 뿐이다. 그러니 모나리자를 그린 천재 다빈치나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 낸 아인슈타인이나 너나 나나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각자 살려고 노력한 결과이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잘 준비를 했느냐 이다. 하지만 시험을 볼 방법도 없다. 자신의 삶을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를 시험으로 테스트 해 줄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니 도대체 어디까지 준비를 해야 제대로 준비를 한 것인지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얼마를 벌어야 돈이 충분한 수준인지, 얼마나 높은 성과를 내야 할 것인지, 얼마나 넓은 집에 살고 있어야 하는지, 얼마나 잘 해야 충분히 잘 하는 것인지를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변을 본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준비했는지를 보고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준비 상태를 가늠하려고 한다그래서 비교를 하는 것이다. 처음엔 꼴등일지도 모를까 봐 두려워서, 아니 그나마 중간은 가고 있는지 알려고 바라본다. 중간 정도만 되어도 어느 정도 안전하기에 그렇다.

 

평균 수명, 평균 연봉, 평균 평수, 평균 가족, 평균 지인 수, 평균 키, 평균 외모, 평균 어휘력, 평균 노래실력, 평균 주량, 평균 재산, 평균 직급, 평균 여행 횟수, 평균 지식, 평균 학력, 평균 성적, 평균 인기, 평균 건강 등을 확인하려 했다. 꼴등이 아니라 중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우월감과 열등감 그리고 가치의 생성#

 

그런데 하다가 보니 운 좋게도 평균 이상인 것들이 보였다. 중간이라도 되는지 알려고 봤는데 중간 이상에다가 더해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그 순간 매우 큰 만족감이 들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더 자주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보상 중독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그저 평균이나 되려고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일등을 하지 못하면 견디기가 힘든 상태로 변해 버리고 만다.

 

결국 자신이 잘하는 것은 우월감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그리 좋은 일도 아니지만 더 나쁜 상황도 생긴다. 그것은 바로 평균도 안 되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렇다비교 결과 자신이 평균 이하인 것을 알게 되면 본격적으로 두려움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꿈을 꾼다. 싸움을 잘하는 꿈을 꾸고, 달리기를 잘하는 꿈을 꾼다. 일등을 하는 꿈을 꾸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꿈을 꾼다. 하지만 두려움은 반대의 꿈도 만들어 낸다. 꿈 속에서 지신의 주먹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두 발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두려움이 가득해서 몸이 완전히 굳어진 듯 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말들을 하고 회사에서 잘리는 꿈을 꾼다.

 

결국 자신이 못하는 것은 열등감이 되고 말았다.

 

사실 생존에 관련도 없는 노래, 주량 까지도 모두 우월감과 열등감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실 어느 정도만 먹고 살 수 있으면 많은 돈, 높은 연봉, 큰 집까지는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평균은 되어야 하고, 평균이 되고 나면 상위권, 상위권이 되면 결국 일등을 하지 못하고는 참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우월감과 열등감은 평생 동안 사슬이 되어서 죄어 온다. 열등감을 느낄 때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느껴지고, 그때마다 자신이 가진 우월감을 되새긴다. 그래야 그 열등감을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분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분야의 가치는 무시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책을 무시하고, 책을 읽는 사람은 산을 오르는 것을 무시한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명예를 무시하고, 명예를 가치 있어 하는 사람은 돈을 무시한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다면 다른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기 까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가치에 대한 믿음만큼은 확실히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 그렇게 자신이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는 매일 그것을 가지고 싸운다. 내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외부에서 충돌하는 현장일 뿐이다.


#자존심과 자존감 그리고 완벽주의자#

 

그렇다면 모든 것을 다 잘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사람은 어떨까?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과정을 밟지 않을까?

 

다들 이런 생각을 하기에 슈퍼맨 영화가 만들어 진다. 사람들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주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신이 슈퍼맨이 되는 것을 꿈꾼다. 무엇이든 잘하는 완벽주의자가 되길 바란다. 다 잘하고다 익숙하며, 어떤 순간에도 긴장하지 않고 부드럽고 상황에 적응하는 사람이 되길 꿈꾼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래서 다들 그저 완벽해지고 싶은 불안정한 사람으로 남는다. 설령 어느 정도 능력을 타고나서 꽤나 많은 것들 잘하는 사람들조차도 몇 가지 자신이 못하는 것들을 평생 동안 열등감으로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단지 다행히 그것이 겉으로 들어날 위기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완벽해 보일 수록 작은 틈 하나가 아주 큰 영향을 끼친다. 주변에서 언제나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기에 틈이 있는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것이다. 그 작은 틈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두려움으로 인해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틈을 남에게 들켜서 기분이 상한 상태를 흔히 '자존심이 상했다' 라고 표현한다. , 자존심이란 자신의 내면에 어떤 두려움이 없다고 부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남들에게 들키면 상처받는 마음이다.

 

반면에 자존감은 최초의 원인인 두려움을 어느 정도 인정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맞서 싸워왔기에 스스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차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커다란 두려움 앞에서 자존심은 금세 무너지고 말지만 자존감은 꽤나 오래 버틴다. 하지만 이런 특징이 있기에 자존감을 갖기란 참으로 힘들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갖고 살기 보다는 보통은 자존심을 가진 완벽주의자 성향을 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공통적으로 아주 커다란 부작용을 만들어 내고 만다.

 

자신이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것을 남들에게 증명하려면 용기가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뭐든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주변에 끝없이 인정을 갈구하게 된다. 그것이 실제로 자신의 행복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그렇지 않는지 상관없이 사람들이 관심이 가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 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최초에 왜 그것을 하려고 했는지를 까맣게 잊고 말았다.


#잃어버린 목적#

 

행복하려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못하면 불행하게 된다. 행복하려고 돈을 벌었는데 가장 좋은 차를 타과 가장 큰 집에서 사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말았다하지만 그럴 수 없으면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행복하려고 관계를 맺었는데 얼마나 쓸만한 인맥이 있는지, 주변에 얼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불편하고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자신보다 더 잘나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용만 당하고 결국 상처를 입고 불행해지고 만다.

 

행복하려고 인정을 원했는데 커다란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오히려 불행해지고 말았다. 행복하려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불행하게 되고 말았다.

 

행복하려고 시작한 일은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불행으로 끝나게 된다. 중간만 가도 충분히 만족할 일이 상위권, 일등이 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

 

그리고는 결국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한 행복 말고는 다른 어떤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행복 불구자가 되고 만다. 마치 도박에 빠진 사람이 도박 말고는 그 어떤 곳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단지 그런 삶이 도박에 빠진 삶에 비해서 보통의 삶에 큰 문제가 없을 뿐이다.

 

이 잘못된 길을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

 

왜 사람들은 자신이 최초로 출발했던 시작점을 잊고 말았을까? 신입 사원이 때, 옥탑 방 전세에 살 때, 첫 아이를 얻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데이트 할 때, 처음 해외 여행을 하려고 비행기를 탔을 때, 처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처음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울 때, 그 순간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새 연봉을 따지고, 어느 새 서울에 집을 있는지를 따지고, 어느 새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고, 어느 새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은 당연한 것이 되고, 어느 새 여행은 가지 못하면 불행한 것이 되고, 어느 새 매주 영화를 봐야만 하는 사람이 되고, 어느 새 가장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을까?

 

그것들은 그저 살아오면서 받은 주변의 자극의 결과일 뿐이다. 과도한 정보를 자신에게 적용한 결과일 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옥탑 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문명이 멸망하면 폐허가 된 집 안에서 오래되어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참치 캔만 찾아도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가서 느낄 만큼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 있는데 쳐다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변과 비교를 하다가 너무 두려워져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 것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

 

그러니 행복의 비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현재 자신이 가진 것들을 모두 다시 다 쳐다보면 된다. 그리고 최초에 자신의 출발점을 기억해내면 된다.

 

커피값이 없어서 공원 벤치에서 데이트를 했던 시절, 차가 없어서 느리고 연착도 자주되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던 시절, 밥값이 없어서 라면으로 때우던 시절, 따듯한 물이 나오질 않아서 따로 끓여서 씻어야 했던 시절, 이런 시절들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다. 바로 얼마 전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 시절이 우리가 가진 목표의 시작점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작점을 다시 새로운 목표로 정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모두 다 정한 목표에 이르고도 한참 초과 달성했을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한가?

 

시작점을 잊어먹지 않는 사람은 시작점에 선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을 기억한다면, 올챙이 입장에서 올챙이를 이해해줄 수 있다. 결코 개구리 입장이 아니라 말이다.




 

하지만 시작점을 잊어먹은 사람들은 개구리 입장에서 올챙이를 대한다. 그리고 결국 꼰대가 된다. 사실 꼰대가 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까맣게 잊은 사람들이 바로 꼰대이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는 공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런 공감들은 시대와 문화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깊은 감동을 만들어 낸다. 행복하게 해준다. 마치 아주 오래 전 쓰인 고전을 읽고 흐르는 눈물처럼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이들의 작은 선물에 기뻐하고, 우연히 얻은 작은 공짜에 신나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미 예정된 비싼 생일 선물을 받는 행복보다 오히려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 자신에게 마음을 써서 준 소박한 선물이 훨씬 더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월급보다 경품으로 받은 상품권 한 장이 더 행복하다.

 

우리는 여전히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면 어린 아이들처럼 뛰면서 행복한 존재들이다. 꼭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장소에 가서 즐겨야 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경기를 하면서 정신 없이 뛰면 쉴새 없이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여전히 따뜻한 콩나물 국에 행복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꼭 비싼 음식을 먹고, 유명한 음식을 먹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변한 것이 없다#

 

우리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저 세상을 살아야 하기에 어른이 된 것뿐이다. 그런데 너무 어른이 되었다. 너무 철이 들었다. 그래서 어른이라는 이유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불필요하게 지고 살아간다.

 

그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더 많이 가진 것이 있다면 주변에 베풀면서 사는 삶, 이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이것만 이뤄낼 수 있다면 행복하기 위해서 뭔가 더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얼굴이 맑아지고 표정이 선해진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줄어들고 쉽게 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머리를 많이 쓸 필요도 없다. 모임에서 매번 누가 밥을 샀는지 기억할 필요가 없다.

 

딱히 뭔가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 행복할 수 있으며 가만이 있고 싶어도 끝없이 주변에서 연락이 온다온 몸에서 행복이 흘러나오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고 욕심 없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지 그 모임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된 것이다. 상위권에 들어갈 필요도 당연히 일등을 할 필요도 없다. 뭐든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된다. 꼭 누구만큼 잘 먹고 잘 살 필요는 없다.

 

이런 과정 속에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에 관심이 점점 줄어들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더 인정을 받는 기현상이 일어난다그러니 겸손한 척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겸손해진다.

 

어디를 가든 마음에 남는 것들이 줄어들고 생각과 행동이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마음 속에서 오래된 피해의식이 사라지고 더불어 자책감도 줄어들게 된다. 이미 충분히 이뤘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된다. 자신이 못한 것은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이 잘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우쭐함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다행스러울 뿐이다. 이 정도라도 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 마음 속에서 결코 잊지 않는다.

 

행복은 욕망의 실현이라고 한다. 그래서 욕망은 행복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열쇠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행복이다. 마치 시작된 연인의 사랑과 같다.

 

시작된 연인은 그 후 오랜 시간을 거쳐 깊은 신뢰를 형성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그것처럼 상대를 뜨겁게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너무도 소중해서 한쪽을 잃으면 다른 한쪽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자살하게 된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반쪽이 죽은 것이기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뿐이다.

 

사람들의 행복은 오래되어 신뢰를 쌓은 연인처럼 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사랑이 너무도 당연해서 결국 지루함이나 권태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런 변치 않는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가 되어야 한다. 행복은 그래야 한다.

 

결국 행복은 욕망의 실현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것이 부족한 젊은 시절의 행복은 잠깐 그럴 수 있지만나이를 먹을수록 이미 자신의 욕망을 통해 얻은 것들을 감사하는 쪽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존재감이 사라지기에 그렇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이순간 자신이 가진 것들을 바라보면 된다. 남보다 못 갖고,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이 있다. 단지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어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면 된다. 아내가, 남편이, 부모님이, 아이들이 소중하다. 비록 전세나 월세라고 해도 그 집이 소중하다. 다니고 있는 직장이 소중하다. 매일 걸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 매일 숨쉬고 살 수 있는 것이 소중하다.

 

혼자 숨도 못 쉬고, 혼자 걷지도 못하는 이가 그리도 갖고 싶은 욕망이다. 어제 죽은 이가 그리도 살고 싶었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다. 오늘 하루를 더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잊지 않을 수 있다면 불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꼭 물에 빠져서 공기의 소중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볼 필요가 없다. 사람이라면 생각과 상상을 통해서 얼마든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출발점을 다시 기억해 낸 오늘이 내가 행복해지는 첫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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