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상대론적 삶

아이루다 2018. 10. 2. 08:17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 한 남자가 그곳에 떠있다. 한 점의 빛도 없기에 그 어떤 것도 보이질 않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그러자 시간조차 망각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멀리서 작은 불빛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밝아진다. 불빛이 남자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그것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유일한 빛이기에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 사이 빛은 더욱 더 밝아진다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 빛으로 인해 희미하게 하나의 형체가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남자는 순간 익숙함에 대한 반가움을 느낀다. 그리고 곧 상대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서로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둘은 서로 엇갈린 채 다시금 멀어져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자 상대가 사라진 방향으로 아무런 빛도 보이질 않는다. 남자는 또 다시 완벽한 어둠 속에 존재하게 된다.

 

한참을 멍한 상태로 있던 남자의 머리 소에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온 것일까? 혹은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간 것일까? 아니면 둘 모두 서로에게 다가간 것일까?

 

일단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 자신이 움직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고 있거나, 움직이지 않고 있거나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

 

남자는 의문과 동시에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뭔가 자신을 미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온 몸에서 관성의 힘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점점 그 느낌은 강해진다. 그 순간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절대적 기준점이 없다면 정지해 있는 상태와 같은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는다면 기준점이 없더라도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서 이론을 완성할 때 했던 사고 실험 중 하나로, 그는 결국 가속도와 중력이 같은 원리임을 밝혀낸다.

 

그래서 이 이론의 명칭이 상대성 원리가 된 것이다.

 

비록 과학적 원리를 설명한 이론이긴 하지만, 상대성 원리가 인간 세상에 끼친 영향은 비단 과학 분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저 상대적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 어둠 속의 남자가 가졌던 의문을 인간 전체가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 살고 싶어한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잘 살고 있음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당연히 기준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삶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잘사는 것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있긴 하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기준점이 된다.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혹은 자신이 다가간 어떤 사람을 기준으로 자신이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다고 판단한 사람처럼, 누군가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동일하다. 내가 움직이는지, 상대가 움직이는지, 아니면 둘 모두 움직이는지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 , 아무리 옆 사람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잘 살고 있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어둠 속의 남자는 그저 움직이는지 여부만 판단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잘살고 있는 것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점은 너무도 다양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해야 하는 것일까?

 

살고 있는 집 크기연봉소비 형태차 메이커명품 가방, 주로 찾는 여행지, 먹는 음식입는 옷 브랜드취미생활, 직장 명, 가족 수, 자녀의 성적, 연락처의 사람 숫자, 졸업한 최종 학력, 읽은 책 숫자, 사회적 지위, 어디선가에서 받은 메달 수, 여러 가지 직책 등등 중에서 무엇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각자마다 기준점을 정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준점이 제대로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더해서 비교를 해도 상대 역시도 상대적으로만 비교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어둠 속의 남자는 가속도를 느끼면서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있긴 하다. 삶이 가속도를 받는 느낌이 날 때가 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두거나, 커다란 행운이 찾아오거나, 오랫동안 노력한 일이 결실을 거둘 때 가속도를 느낀다. 그래서 그때는 삶을 잘 사는 것 같다.

 

하지만 삶의 전체적인 과정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하는 일을 아주 드물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경험하기가 힘들고,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한번 정도로 끝난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삶을 제대로 잘 살고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잘살고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이기에 그렇다.

 

그런데 이 순간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어둠 속의 남자는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정지해 있는지가 도대체 왜 궁금했을까? 그것이 그 어둠의 공간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물론 약간의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숨 쉴 수 있는 공기, 먹을 것, 잘 곳, 춥거나 더위에 대비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닐까?

 

특별한 목적을 가진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에서 당연히 그런 것들이 고려될 필요는 없지만, 그 남자가 보통 사람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같은 관점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왜 제대로 살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 들까? 더군다나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도 매우 이상하다.

 

자신의 회사 동료, 학교 동창, 같은 아파트 사람, 계모임 등등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그렇다. 천문학적인 돈을 모았다는 어느 재벌이나, 입을 옷 하나 제대로 없이 노숙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과는 자신을 비교하려고 하질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정말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가늠하기 위한 용도일까?

 

사실 좀 깊게 들어가 보면, 그런 사람들의 심리엔 아주 오래되고 근원적인 두려움이 하나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봐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강한 태풍이 지나가면서 집의 유리창이 깨졌을 때, 다른 많은 집의 유리창도 깨지고 자신의 집도 깨졌다면 그냥 좀 속상하고 지나갈 일이, 다른 모든 집은 멀쩡한데 자신의 집만 깨졌다면 그때는 두려움이 생겨난다. 깨진 것 자체보다 자신의 집만 깨졌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들과 다른 자신의 모습이 있을까 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다른 경우를 두려워한다. 눈이 세 개이면 더 잘 보이겠지만,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딘가 서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 빵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면 자신도 모르게 그 무리를 쫓는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 빵이 모자라 혼자만 먹을 수 없게 되면 기분이 묘하게 나쁘다. 당연히 공짜로 나눠주는 빵이니 자신이 먹을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의 빵값이 없는 삶도 아니었지만 그렇다.

 

다들 무단횡단을 하는데 하필 자신이 할 때 경찰차가 지나가서 벌금을 문다든지, 친구들과 같이 가게에 가서 같은 물건을 샀는데 자신의 것만 하자가 있다든지, 입사 동기들이 다들 승진을 할 때 자신만 하지 못할 때 그렇다.

 

이것은 언뜻 보기엔 그런 감정이 드는 이유가 돈 낭비나 귀찮음이나 형평성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람들을 진짜로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운의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이다불운한 일이 자주 생기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행운이 잘 따르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기에 그렇다. 일은 사람은 하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이 한다는 말처럼, 실제로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최종적으로는 운에 따라 결정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라는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간다. 그 누구도 미래를 제대로 알 수 없기에 언제나 불안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지의 대상을 가장 잘 해결해줄 수 있는 힘이 바로 행운이다.

 

보험을 들었다고 해서 사고가 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벌어놨다고 해도 병에 걸려서 고급 일인 실에 입원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나쁜 일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잘 대비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쁜 일 자체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불운보다는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떤 상황인지를 가늠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둠 속에서 만난 상대일 뿐이다. 자신이 비교하는 있는 그 사람 역시도 자신과 똑같은 처지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비교를 멈춘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 조차도 가끔은 그것에 대한 의문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

 

어느 날 연속으로 빵을 받지도 못하고, 무단횡단 하다가 걸리고, 제품을 샀는데 하자가 있고, 버스를 탔는데 고장이 나면 그날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앞으로 또 무슨 문제가 생겨날까 불안해진다.

 

사람은 오늘이 잘되면 내일도 잘될 거라고 믿는 존재이다. 과거를 기준으로 미래를 판단하기에 그렇다. 그런데 과거나 현재에 문제가 생기면 잘될 것이라고 믿었던 미래는 급변한다. 그래서 걱정과 불안이 대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오늘 일어난 불운이 오늘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려면 행운이 생겨서 불운이 상쇄되어야 한다. 불운이나 행운은 나쁘거나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불운과 행운이 미치는 영향은 미래에 있다. 그래서 최근에 불운이 반복된 사람은 미래가 매우 우울하다고 느끼고, 반대로 행운이 반복된 사람은 장미 빛 미래를 꿈꾼다.

 

이 두 경우는 이후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결국 행운이 반복된 사람은 걱정이 없으니 잘 자고, 잘 먹고 하기에 건강한 삶을 살고, 불운이 반복된 사람은 불안감으로 잘 자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해서 건강까지 상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서 행운과 불운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말이다.

 

이것은 정말로 뿌리 깊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삶이 평균치 수준의 행운을 밑돌거나 평균치 수준의 불운함을 넘어설까 봐 두렵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평균치 수준의 정보가 다 틀린다는 합리적 의심이 생겨나기에 그렇다.

 

그리고 무리한 욕심도 아니다. 남들보다 훨씬 더 잘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늘 행운이 함께 하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 정도만 살 수 있으면 되고, 특별히 불운이 닥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가진 본질적 두려움의 실체를 스스로 깨달을 방법이 없다. 그것을 두려움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그렇다.

 

사실 유행도 같은 심리에서 출발한다. 남들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다. 평균치에 근접하고 싶은 욕구이다원래 동물 세계에서 유행은 아주 큰 생존 조건이다. 남들과 다른 털 색을 타고난 동물을 천적의 눈에 잘 띄어서 생존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러니 최대한 동료들과 비슷한 외모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뛰어 넘는 힘이 있다. 바로 생식이다. , 자식을 남겨야 하기에 개성이 생겨난다. 암컷에게 잘 보여야 하기에 다른 흔한 수컷들과는 다르게 좀 더 화려하고 독특해야 한다. 공작새의 화려함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유행과 개성이란 효과는 생명체의 생존과 생식에 관한 아주 뿌리 깊은 욕망으로 인해서 생겨난다.

 

그래서 사람인 이상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무인도에 혼자 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한 부족민도, 미국 뉴욕에서 사는 어떤 여자도 모두 같은 원리로 자신의 삶을 판단한다. 단지 비교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비교에 쓰이는 품목이 뿐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문제는 계속 존재한다.

 

그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가 움직이는지, 상대가 움직이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돈? 넓은 집? 공부 잘하는 자녀? 노후가 보장된 삶? 많은 자식? 폭 넓은 인간관계? 머리에 담은 많은 지식? 강한 권력? 사회적 명예? 다양한 취미 생활? 집에 넘치는 명품 가방? 자신만의 특별한 특징? 수 많은 여행 경험?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좀 이상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남들보다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있기에 평균 이상이 될 수 있는 품목을 골라서 그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믿기 시작한 현상 말이다.

 

돈이 가치 있고, 권력이 가치가 있고, 넓은 인간관계가 가치가 있으며, 수 많은 여행 경험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남들에게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이 통하면서 원래는 모두 상대적이었던 가치가 다수의 쏠림 현상으로 인해서 점점 더 절대적 의미를 갖게 되는 쪽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언제부터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절대적 기준점으로 삼아서 자신의 삶을 판단하는 것에 쓰기 시작했다.

 

돈은 얼마나 벌어야 하고, 학업은 어느 정도까지 마쳐야 하며, 차의 배기량, 아파트의 평수, 친구들 숫자, 여행 다녀온 나라의 숫자, 읽어 본 책 숫자 등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도대체 어디쯤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평균 안에 들어가길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 평균 안으로 들어오면 또 다른 목표가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평균 이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끝이 아니다. 평균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상위권으로 가고 싶다. 도대체 상위권이 어디부터인지 정확한 규정도 없지만, 일단 상위권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러면 끝일까?

 

아니다. VIP 다음에 VVIP 있기 마련이다. 이 역시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그냥 1% 안에 든다고 하자.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영향력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 끝일까?

 

아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바로 첫 번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역시도 끝이 아니다. 한 나라의 첫 번째라고 해서 지구 상에서 첫 번째는 아니다. 그러니 이제는 세계 속에서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게 끝일까? 아니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린 권력자가 되려면 징기스칸과 겨뤄야 한다많은 부를 이룬 사람이 되려면 미국의 빌 게이츠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전체 순위에 겨우 20위 안에 턱걸이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리고도 한참 많다. 천재 소리를 들으려면 폰 노이만을 넘어야 하고, 물리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아인슈타인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도 끝이 아니다. 미래에도 있다. 아무리 최고의 기록을 세워도 결국 후대엔 깨진다. 그리고 잊혀진다.

 

어디까지 해야 이것이 끝이 날까?

 

처음부터 왜 그렇게 남들과 비교를 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저 두려워서 그랬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다. 그런 의도였지만, 남들도 모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상대적인데, 모두가 절대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내가 움직이든 상대가 움직이든, 내가 정지해 있든 상대가 정지해 있든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야 한다.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가만히 있어도 결국엔 마지막엔 한 자리에 모인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개울을 따라 흐르고, 강물이 되고, 결국 바다에서 모두 모이듯이 그렇게 모인다. 바로 죽음 앞에서이다.

 

다들 그리도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서 끝없이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자신의 자리가 죽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 알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가까운 사람을 보면 안심과 함께 우월감을 느끼고, 자신보다 더 멀리 있는 사람들 보면 불안함과 질투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그런데 정말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니, 과연 그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내가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안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된 측량도 아니고, 그리고 설령 정확한 측량이라고 해서 삶이 뭔가 바뀔 것인가?

 

그저 주어진 하루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남에게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궁극적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것이 더 현명한 결정이 아닐까?

 

이 단순한 결론을 그리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리고는 두려우니 비교를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바라볼 생각은 없고 남의 삶만 바라본다. 그러니 입으로 열어서 나오는 말은 모두 남의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결국 남의 이야기다.

 

나를 속상하게 한 사람 이야기,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 이야기, 내 기분을 나빠지게 한 사람 이야기, 내 이득을 빼앗아간 사람 이야기,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 이야기, 나를 기분 좋게 해준 사람 이야기, 나에게 이득을 준 사람 이야기,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 이야기로 가득 찬다.

 

그 어디에도 나의 이야기는 없다. 나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내가 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이야기는 없다.

 

서로가 남의 이야기만 하고 있기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다. 나의 삶에 있어서 남은 모두 조연이다. 그러니 드라마를 보는데 매일 조연의 분량만 보고 있는 형국이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의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그것과 싸울 힘이 있다. 단 한 명도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없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으니 보이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것을 보고자 하면 보일 것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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