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사람은 왜 악해지는가?

아이루다 2018. 12. 20. 09:18

 

해묵은 질문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반적으로 선해 보이는 사람은 본인이 착하게 살고 싶은 것이고, 반대로 악해 보이는 사람은 본인이 정말로 나쁘게 살고 싶은 것일까, 에 관한 질문이다.

 

일단은 그런 것 같다.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착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악해질 리가 없고, 나쁘게 살고 싶은 사람이 선해질 리도 없어야 한다. 이것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원리와 같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왜 착하게 살고 싶기도 하고 악하게 살고 싶기도 한 것일까도대체 분명히 같은 인간이라는 종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것일까?

 

어렵고 그 답을 찾기가 애매한 질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애매한 질문에 대한 답이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로 알려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후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어떤 것이 더 옳은지에 대해서 명확한 답이 내려진 것은 없다사람들은 여전히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선하거나 악한 것에는 딱히 이유가 없다. 그저 각자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는 결론 말이다그러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하거나 악하게 살다가 죽는다. 결국 어떤 사람이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는 개인적 선택 사항이 아닌 것이다그것은 그저 자연의 원리이다.

 

그런데 이 결론이 맞는 것일까? 정말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은 태생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서 선과 악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몫인 것일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분적 맞는 부분은 있다.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개인들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점이다.

 

, 결국 동일하게 선택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이유가 타고나서 그런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래서 새로운 결론은 이렇게 난다. 그것은 바로 비록 선과 악은 타고 나는 것은 아니지만, 각 개인의 타고난 성향과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 등이 영향을 끼치면서 결국 자신의 삶이 어떻게 풀려가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결정되게 되어간다는 점이다.

 

똑같은 사자라고 해도 환경이 척박해서 늘 불안하고 배가 고프면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 사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잘 먹이고 주변 환경을 잘 갖춰주면 사람에게 개처럼 군다. 모든 동물들이 마찬가지다.

 

사람도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풍족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나서 자라게 되면 선한 사람은 되지 못해도 딱히 악당까지는 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빈곤하고 불안한 세상에서 태어나서 자라게 되면 아주 비열한 악당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누군가가 악당이 되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문제라기 보다는 환경적 문제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가정환경을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과 결혼할 상대자의 부모가 편부모이거나 이혼이나 재혼의 경험이 있다면 결혼을 반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렇게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나눌 때는 그 사람의 환경적 요소를 거의 무시한다. , 그 사람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만을 보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숨겨진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쁜 사람이니까 조심하거나 싫어하는 관점에서만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었을 때는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남들이 나쁜 것에 대한 환경적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의 나쁜 것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자기 자신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환경적인 요인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 어떤 악당이라고 해도 자신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이 악당이 된 것을 그리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을 고칠 생각도 없고 더해서 오히려 악당으로 살 때 얻게 되는 추가적인 이득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악당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악당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합리적 근거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TV에서 그 사람이 악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자라온 환경을 다큐멘터리로 찍어서 보여주지 않는 이상 그것이 가능할 수가 없다. 그리고 설령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보는 순간만 감정이 움직여서 이해가 될 뿐, 그 자신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게 되면 바로 태도가 바뀌게 된다.

 

결국 자신이 악함은 어떤 식으로든 납득이 되고, 타인의 악함은 절대로 용납이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서로 싸움이 나게 시작하면 결코 한쪽이 물러나지 않게 된다.

 

악당은 악당대로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고, 그 사람을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도 그 사람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데 어떻게 한쪽이 물러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런 원리는 단순히 개인간 갈등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진 이런 특징은 단체가 될 때 더욱 더 확산되는데, 가장 치명적인 형태가 바로 국가와 국가의 갈등이다. , 국가와 국가는 무조건 각자가 옳다. 그저 지는 쪽이 악당이 되는 것뿐이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독일은 과거 나찌에 관한 역사에 관해서 끝없이 고개를 숙이는데, 그것은 그저 전쟁에서 졌기에 그러고 있는 것 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힘과 힘의 경쟁의 결과일 뿐이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등등 이 사회에 존재하는 수 많은 갈등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각자가 옳으니까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반대로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악하다면 답은 아주 쉽게 내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렇게 절대적으로 선과 악을 규정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흔히 악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적당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변호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불친절 했다든가, 상대 생김새가 자신을 배신한 애인 얼굴을 닮았다든가, 어려서 자신의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다든가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사람들이 환경에 의해서 선해지거나 악해지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만약 이 과정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면 남이 아닌 각자 내면에 가진 스스로의 악함에 대해서도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과정이 제대로만 된다면 적당한 이유로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좀 더 확장이 되면 타인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진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단 답을 먼저 보자. 사람들이 환경에 의해서 악해지는 이유는 바로 다양한 형태의 상처 때문에 그렇다그리고 그 상처들 중에서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상대에게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를 받았을 때, 즉 관계 속 보상심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했다는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어려서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당이 되지는 않는다. 불안하고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말이다. 어려서 외모와 같은 타고난 것으로 놀림을 많이 받은 사람은 소심하고 에너지가 거의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당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악당은 부정적이긴 하지만 아주 큰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욕망 덩어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악당은 사람이 경험하는 다양한 상처들 중에서 유난히 한 가지 원인으로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더 많은 것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런데 좀 더 깊게 들어가보면 그렇게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는 이유가 바로 어려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만큼을 가지지 못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해서 그렇다. , 관계를 통해 주고 받을 때 자신이 늘 손해를 본 경험을 많이 한 것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아주 단순한 원리이다. 살면서 자주 상대에게 만 원을 기대하고 만 원을 줬는데, 상대가 천원만 돌려주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그렇게 되면 보통 크게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은 단순히 구천 원의 손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을 별로 중요한 존재라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며자신이 사람을 잘 판단하지 못한다는 근거이며, 상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또 다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구천 원이라는 실질적인 손해, 관계에 대한 신뢰도 하락, 주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함에 대한 불안함 등으로 이어지며 결국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확장되고 만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미래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부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불안할수록 하나라도 더 챙겨야 한다. 그래서 전염병이나 좀비가 출현하면 인류는 병이나 좀비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죽여서 망하게 된다처음부터 누군가에 대한 양보와 배려는 그 자신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이 들 때 가능하다. 그래서 주변에서 다들 부자라고 평가를 해줘도 정작 자신은 여전히 불안한 사람인 경우, 다른 사람들에게 단돈 10원 쓰는 것도 아까워서 못한다.

 

문제는 하나라도 더 챙기려면 언제나 관계 속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쟁은 반드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불행함을 가져온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경쟁을 그만두고 물러서야 한다고 느낄까? 그러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오히려 반칙이라도 해서 이기고 싶어진다. 당연하다. 원래 사람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도덕적 가치가 가진 중요성을 그리 따지지 않게 된다. 실제로 몹시 춥거나 더운 날이 되면 횡단보도 앞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확실하게 늘어난다. 어느 정도의 관찰력이 있다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범죄라고 해도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경쟁에서 이기다 보면 재력, 권력 등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그때는 본격적으로 그것을 사용해서 매우 비겁한 방법으로 쉽게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중독이 된다. , 경쟁에서 이길 때마다 느껴지는 승리의 기쁨만이 유일한 삶의 행복이 되고 만다.

 

사람들이 악당이라고 평가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니 악당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악당들을 자신의 가치관 기준에서만 비난한다. 하지만 절대로 통할 리가 없다. 자신이 행복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그런 비난들은 패배자들의 헛소리가 될 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살펴보면 악당이 악당이 된 이유가 아이러니 하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이 상처를 입어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다. 배신을 당하고, 준 만큼 기대를 했다가 받지 못하고, 신뢰를 잃고,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런 사람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좋은 사람들 틈에서 자랐다면 보통의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나쁜 사람들 틈에서 자라서 상처를 받고 악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이렇듯 온전히 주변 환경 탓일까? 그것은 아니다. 거기엔 분명히 타고난 성격이 영향을 크게 미친다.

 

흔히 그 성격을 욕심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사람마다 각자 어떤 이유든 간에 자신이 준 것과 상대로부터 받을 것에 대한 계산 공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공식에 따라서 주고 받음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

 

하지만 이 공식이 사람마다 모두 제 각각이고모두가 자신이 가진 계산 공식만이 옳다고 믿기에 수 많은 계산 착오가 일어나게 된다.

 

누군가는 집 앞의 편의점에 다녀오는 심부름이 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믿고, 누군가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두 사람이 한 집에 살게 되어서 한쪽은 오천 원의 돈을 내고 다른 한쪽은 편의점에 다녀와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면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계산법으로 자신과 상대 행위가 가진 가치를 측정하게 된다.

 

만약에 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직접 갈 때면 상대가 오천 원밖에 안 냈기에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상대가 가게 되면 상대에게 오천 원만큼의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쪽 입장은 전혀 다르다.

 

상대는 직접 본인이 갈 때는 상대로부터 만원의 이득을 얻은 것이 되고, 반대의 경우엔 오천 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깟 편의점 다녀오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때 각자 상대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중에 그 빚을 근거로 뭔가를 요청할 수 있는데, 반대쪽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빚을 진 것이 아니기에 그 요청을 그냥 거절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여기고 부탁한 사람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싸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일들은 사람들 관계에서 정말로 매일, 매 순간 일어난다. 상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상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아주 기본 중에서 기본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서로 계산법이 다르다는 점이다.

 

반대로 비슷한 계산법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그리 편하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자신의 기대치와 많이 일치하니까 말이다. 흔히 사람들이 서로가 잘 맞는다고 느끼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계산법이 비슷하면 복잡하게 계산해서 행동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기준에서 주고 받은 것에 대한 가치가 상대에게도 비슷하니까 그에 맞게 해주면 되니까 말이다.

 

그나마 이런 사람들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서로 가끔 다툼이나 갈등은 일어나겠지만 본격적으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들 가끔은 손해 보고가끔은 뜻하지 않는 이득 보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계산법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상황이 몹시 복잡해진다그들은 바로 만원을 주면 십만 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만원을 주고도 천원도 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정의하게 만든다.

 

성격적으로 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주 쉽게 상처를 받는다. 반대로 주는 것보다 훨씬 적게 원하는 사람은 상처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전자는 악당이 되고, 후자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나뉘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성격으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주는 것보다 더 적은 것을 원하는 성격으로 태어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 가정은 처음부터 착각이다. 이 세상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도 없고, 반대로 주는 것보다 더 적은 것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싸우는 도구로 무엇을 가장 최고로 여기느냐의 차이점에서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싸우는 도구, 다른 말로 하면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치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달라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돈만 있으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돈의 가치가 최고가 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돈은 매우 명백한 주고 받는 대상이 된다. , 만원을 꿔주면 만원을 돌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 관계를 잘 맺으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돈보다는 관계성에 더 크게 가치를 둔다. 그래서 설령 돈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관계 유지를 하려고 한다.

 

그것은 누군가는 지식, 누군가는 운동 능력, 누군가는 외모, 누군가는 사회적 지위, 누군가는 많은 경험, 누군가는 다양한 재주, 누군가는 다양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는 가족 등등이며 사람마다 무척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돈이 최고의 도구라고 여기는 사람은 돈에 관해서 욕망을 가진다그래서 만원을 주면 최소한 만원 이상을 돌려받아야 한다. 더 많이 받을수록 좋다. 하지만 마음이 편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설령 상대가 돈을 떼먹어도 딱히 보채지 않는다. 돈을 채근할 때 본인이 감당해야 할 불편함이 싫은 것이다.

 

흔히 이런 사람들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가치 평가는 처음부터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빌려 준 돈의 가치보다 자신의 마음 편함이 더 가치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설령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아주 큰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돈을 받아야 할 때는 결국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대신 엄청 힘들어 하면서 할 뿐이다. 더군다나 나중에 폭발하면 힘들었던 것 만큼 아주 심각해질 수도 있다.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서운 이유이다.

 

사람이 악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주변의 어떤 사람이 이기적으로 굴고 나쁜 짓을 하는 것에 대한 조금의 이해는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아무리 이해해도 남은 남이고, 그들의 나쁜 짓이 자신의 손해로 이어지면 언제라도 이해는 사라지고 당장은 화가 나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함을 이해하는 것에는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이 세상 그 누가 자신이 가진 악함에 대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겠는가? 오직 본인 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악함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도 없다.

 

아니, 끼친다. 그 악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상처를 입히게 되면 결국 관계에 관련된 손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두려움과 싸울만한 가치를 추구해도 그 두려움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 아무리 돈이 많아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커져서 아주 높은 담을 쌓고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이고 만다.


또한 돈의 가치를 추구해서 자신이 가진 두려움과 싸우는 것 자체도 전혀 문제가 없어야 한다. , 돈만 추구하는 삶도 그 나름대로의 해결책인 셈이다. 문제는 경쟁의 심화이다. 획일화된 가치는 반드시 쏠림이 일어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을 극도로 스트레스 받게 만들고 결국 폭력과 범죄가 발생시키고 만다.

 

그래서 사회는 최대한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도록 구성원들을 설득한다. 특히 어울려 살 때 도움이 되는 가치들을 늘 강조한다. 정의, 근면, 책임, 공공성, 신뢰, 상식, 관계, 가족, 양심 등등 일반적으로 인간적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모두 돈의 가치를 내려놓고 아무런 욕망도 없이 살아가면 난감해진다. 그러니 다른 한쪽으로는 또 열정, 의지, 희망, 노력, 발전, 성공 등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욕망 속으로 내몬다. 과거에 아이를 많이 낳으면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는 것이, 아이를 적게 나으면 혼자서는 외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사회였다. 사회는 개인의 행복이 아닌 언제나 전체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처음부터 선과 악은 사회가 정한 것이다. 그러니 악당이란 말은 사회에서 반대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 마음 속에 존재하는 악은 그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에 대한 잘못된 해결책일 뿐이다. 아니, 사회에게 악이라고 정의한 것들이다

 

그리고 결국엔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론은 동일하다. 어떤 두려움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국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해결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삶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회적으로 악함으로 규정된 욕망들을 스스로 비난하려고 하면 안 된다. 처음부터 욕망은 잘못이 없다. 또한 욕망을 일으킨 두려움도 잘못이 없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살고자 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노력이기에 그렇다. 단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불필요한 노력을 하느라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잃는 어리석은 짓은 멈춰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함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으로부터 이해받고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본질적 원인인 두려움은 오직 그것을 인정할 때만 줄일 수 있다. 아무리 두렵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두려움을 부정하거나, 두려움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줄어들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그저 자신의 머리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평가하고 분류된 후 자연스럽게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은 진짜 두려움만을 감당하면서 살면 된다.

 

그때 남는 것은 유일하게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입으로 먹고 사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일단 먹고 살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은 그 두려움은 거의 다 해결이 되었다. 먹고 살 걱정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그렇게 악하게 살 필요가 없다. 그렇게 힘들게 경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상대에게 뭔가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

 

지금처럼 끝없이 경쟁하고,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하고, 주도권을 쥐려고 하고, 주는 것과 받은 것의 가치를 비교하고, 절대 십 원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매일처럼 다짐하고, 작은 손해라도 입게 되면 참지 말고 바로 잡으려고 하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스트레스이다. 돈을 너무도 큰 가치화 시켰기에 생겨나는 스트레스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이미 주변에 베풀고 살아도 충분히 가진 세상이다. 그러니 베풀고 살면 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그리 친하지 않더라도 선물을 할 수 있고,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면 별다른 기대 없이 도와줄 수도 있다. 큰 돈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쓰고 잊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다들 마음을 닫았다. 손해를 볼 것 같으면 바로 멀리하고, 이득을 볼 것 같으면 최대한 붙었다. 그리고도 불안하니 두꺼운 벽을 만들고는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안전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는 무척 외로워졌다. 그래서 더 불안해졌다.

 

그냥 벽을 허물로 나와서 서로 손만 잡아도, 그 손을 통해서 상대의 마음만 느껴져도 수십 억의 돈으로도 얻지 못하는, 내면의 두려움과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 혼자 감당할 두려움을 둘이서 나눠서 감당하면 반이 아니라 백분의 일로 줄어드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다.


누군가 내민 진심어린 손만 잡을 수 있어도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함, 두려움,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서 그런 손을 내밀 수도, 누군가 내민 손도 의심스러워서 잡지를 못한다.


다들 서로가 그렇게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진짜 바보는 우리들 모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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