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에 대한 책임

아이루다 2018. 9. 22. 08:06

 

, 일반적으로는 생명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말해지는 삶은 인간의 것을 특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삶이다.

 

그런데 삶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뭔가 좀 더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흔히 '삶의 무게', '삶의 의미', '삶의 고뇌' 등과 같은 표현들에 숨겨진 것들이다.

 

아마도 그런 가장 큰 이유는 삶이 늘 가볍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어서 그럴 것이다. 삶이 꽤나 고달픈 과정이기에 그럴 것이다. 물론 좋은 날들도 많겠지만, 슬픈 날들도 많으니까 말이다. 오늘 활짝 웃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온통 장미 빛일 수는 없다. 그 웃음 속에 감춰진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사연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에 삶은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만약 삶이 늘 좋은 것이기만 하다면 사는 것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지 못하기에 살다가 보면 자신의 삶 앞에서 진지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군가의 불운, 누군가의 고민,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된다.

 

누구나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 누구도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삶은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당해야 할 무게를 떠넘길 수도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책임' 이고, 다른 하나는 '회피' 이다.

 

사실 원래 모든 사람의 삶은 '회피' 로 시작이 된다. 어린 시절엔 약하고, 능력이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더군다나 경험의 부재로 인해서 어쩔 수 없다. 물리적, 정신적 한계가 명확하니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 아이는 늘 보호 대상이 된다.

 

기본적으로 어른은 아이의 삶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나 부모는 그 의무에 대한 책임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설령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어른은 가능하다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 아이는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랬던 아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변화를 겪는다. 육체적 성장과 지식과 경험의 축척으로 인해서 서서히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태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결혼이다. 더군다나 아이라도 낳게 되면 이젠 자신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삶까지도 책임져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고 만다.

 

하지만 결혼이 회피에서 책임으로의 전환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으며,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수 많이 존재한다. 사실 결혼은 그저 껍데기 증거일 뿐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이 행복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원래부터 책임을 진다는 것은 그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어떤 상황이든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것을 온전히 즐길 수가 없다. 단체로 여행을 갔을 때 주최측은 그 여행에 관련된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여행을 거의 즐기지 못한다. 끝없이 일정을 신경 쓰고, 계획대로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신경 쓰고,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겨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기에 그렇다.

 

이렇듯이 책임은 삶을 행복보다는 불행 쪽으로 이끈다. 그러니 그것이 싫은 사람들은 최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어른 된 후에도 여전히 삶을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꽤나 많이 존재한다. 분명히 자신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리고는 평생을 아이처럼 살려고 한다

 

자신의 삶을 회피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지 회피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다른 말로 질문을 바꿔보면, 과연 삶을 책임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을 나타나게 될까?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일까? 부모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서 홀로 살기 시작하는 것일까? 결혼을 하는 것일까?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일까? 자신이 입을 옷을 스스로 고르는 것일까? 홀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일까

 

이런 예들은 나름대로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이 역시도 결국 껍데기 증거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꽤나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그것은 바로 삶이 가진 가장 어두운 부분, 즉 자신의 두려움을 얼마나 스스로 감당하고 살아가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렸다.

 

사람들은 살아온 시간을 과거라고 부르고, 살고 있는 시간을 현재라고 부르며, 살아갈 시간을 미래라고 부른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고정되어서 후회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현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정신 없이 대처를 할 뿐 뭔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는 과거나 현재와는 다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미래가 오기 전까지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는 바뀐다. 더군다나 그 조차도 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노력보다는 훨씬 더 운에 따른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운은 전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니 그저 열심히 노력을 한 후 운이 따르길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미래는 미지의 대상이다걱정과 불안함의 대상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미래를 계획한 사람은 그것이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다 못해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것은 준비해 둬야 한다. 그리고 운이 나쁘면 원하고 계획하고 준비하고도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을 책임진다는 말의 의미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과 미래에 다가 올 삶이 가져다 줄 결과를 본인이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운이 나쁘든,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했든, 심지어 주변 사람들의 실수로 인해서 그것이 망쳤든 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그래서 독립적인 것과 책임을 지는 것도 그다지 상관이 없다.


책임이라는 것은 도움은 받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미루지 않는 것이며, 종속적으로 살더라도 어떤 결과를 스스로 온전히 감당하려는 태도이다.

 

이것은 마치 못을 박을 때 망치를 쓰는 것과 같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서 아주 좋은 도구이지만, 못이 잘 못 박혔을 때는 망치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다. 삶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많은 것들,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이 생겨날 때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 주변의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에 따른 최종 결과는 오직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고, 행복하기 보다는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언제나 아이처럼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다른 사람의 등 뒤에 숨으려고 한다. 아내나 남편의 등 뒤에 숨고, 늙은 부모의 등 뒤에 숨고, 심지어 친구의 등 뒤에 숨기까지 한다. 주변에 누군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 뒤를 비집고 들어가려고 한다.

 

자식의 등 뒤에 숨는 부모들도 꽤나 많다. 이미 결혼을 하고 장성한 아이들을 키워 낸 부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는커녕 회피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삶의 책임 자체는 단순하게 정의가 가능하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지 아니면 회피하고 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도움을 받지 않고 사는 것, 독립적으로 사는 것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흔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사는 장소의 독립, 경제적 독립, 가장을 꾸리는 일, 홀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삶, 독단적 결정, 홀로 놀기 등은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삶의 증거는 되지만, 그것이 결코 책임지는 삶의 증거는 될 수 없다.

 

이것들은 책임지는 것과는 무관한 것인데 마치 이런 것들을 하면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흔한 예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몸이 불편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을 사는 분들 중에서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분들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주변의 도움이 없이 독립적으로 사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별로 관련이 없다.

 

자신이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이 경매로 넘어갔을 때, 직장에서 잘리고 취직을 못해서 대책이 필요할 때, 홀로 여행을 떠났다가 강도를 만났을 때, 혼자 잘 놀고 있다가 크게 다쳤을 때, 이런 경우에 회피와 책임이 갈린다.

 

평소엔 멀쩡하게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때가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늙은 부모에게, 자식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다. 아니면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욕만 하고 있거나 말이다.

 

그 연락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와서 대신 책임을 져달라고 하는 것이면 문제가 된다.

 

의도치 않게 생겨난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리 운 없이 생겨난 일이라고 해도, 그것을 스스로 온전히 감당하려는 자세, 이것이 바로 회피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에 도움을 청함과 동시에 책임을 조금이라도 전가하려고 한다. 상대가 받아주는 태도를 보이면 다 떠넘기기도 한다. 그리고 나중엔 좀 더 뻔뻔해져서 왜 책임을 져주지 않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피를 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 이다. 주변 사람들을 끝없이 탓하는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몰아가야 하기에 그렇다. 물론 그런 탓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제대로 책임을 졌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주변을 탓하는 일이 생겨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최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기에 이 세상엔 탓을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관계 종속적 성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나중에 회피를 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놔야 하기에 그렇다.

 

회사를 옮기거나 잘릴 수 있으니 친구들과, 특히 잘나가는 친구들과 잘 지내놔야 한다. 그래야 그들을 통해 다닐 회사를 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유산을 받거나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울 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 시댁에서 끝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끊어내지 못한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상처받는 말을 들으면서도 친구들 모임에 빠지지 못한다. 동창회만 나가면 기분이 상해서 들어오면서도 꼭 나가려고 한다. 부모, 시댁, 처가, 친구 모임, 사교 모임, 심지어 회사 내의 인간관계까지, 모두 나중에 어떻게 자신의 삶을 회피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실제적인 이득도 되고, 즐겁기도 하고, 많은 일들을 함께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되었을 때 제대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무한한 관계의 늪에 빠져서 평생을 허우적대고 만다.

 

원래 모든 관계는 행복하지 않다면 계속 이어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심지어 그 대상이 부모라고 해도 그렇다. 혈연이란 말로 그것을 엮으려고 하지만, 사실 부모와 부모가 아닌 사람과 뭐가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그 차이는 바로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여부이지, DNA를 물려 받은 물리적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끝없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착한 존재이고, 인간적이고, 삶을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그것은 언젠가는 책임져야 할 순간에 회피를 하려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해줬으니 나중엔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자신의 삶의 무게를 회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려고 하거나 혹은 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또한 그들은 상대방의 그런 태도를 결코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해주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듯 보이면 화를 내고 관계를 끊을 듯이 군다.

 

하지만 회피에 대한 미련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그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려고 한다. 그리고 평생을 상처와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도 온전히 책임은 질 수 있듯이,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 돕거나 도움을 받는 것은 책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니까 그렇다. 오히려 더 잘 돕는다.

 

그러니 부모에게, 형제에게친구에게, 직장 동료에게 도움을 주거나 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그들과 최대한 잘 지내려고 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관계가 행복이나 이득이 아닌 불행이나 손해로 다가올 때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감당하기 힘들 때는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하지 않은데, 상대가 끝없이 자신에게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달라고 하는데, 왜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할까?

 

그렇게 다 끊어내고 나면 남은 사람이 없어질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면 그 조차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런 두려움조차 결국 회피에 대한 욕구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주변에 자신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사람만 남을 것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의 것이다. 그것을 책임지든 회피하든 그것조차도 본인의 선택이다. 그렇지만 삶이 유난히 불행하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생각보다 그런 불행들의 원인은 그저 주변에 대해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어서 생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렇다. 그러니 실망하고, 그러니 탓을 하게 되고, 그러니 당연하게 여기고, 그러니 상처받는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삶만 책임질 수 있다. 원래부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진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오만함이며 착각이다. 언젠가 불운이 닥쳤을 때 자신의 삶을 맡기려고 하는 기대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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