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를 정의하는 것들

아이루다 2019. 1. 10. 11:22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생아로 태어나 유아기 그리고 청소년기, 결국 성인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그 시간 동안 각자가 경험한 것들과 기억에 남긴 것들은 천차만별이겠지만 과정 자체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과정 중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뛰어난 것,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선택이란 표현은 맞지 않다. 오히려 이미 정해진 것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우연히 읽은 책에 감명을 받았거나, 자신에게 큰 충격을 준 누군가의 삶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린 시절에 에디슨 전기를 읽고 발명가가 되기로 하거나드라마 허준을 보고 한의사가 되기로 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하지만 선택을 한 것과 그것이 이뤄지는 것은 별로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선택을 하면 실패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방송에 나오기도 하지만, 그 성공의 뒷편에 실패한 채 쓸쓸히 사라진 수 많은 실패자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선택을 했다고 믿든지, 아니면 타고난 것을 잘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아채든지, 아니면 스스로 선택을 했는데 운 좋게 타고난 것과 잘 맞아 떨어지든 상관없이, 일단 자신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는 것을 발견을 한 사람들은 이후 모두 다 동일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하는 것을 ''를 정의하는 것에 쓴다는 점이다.

 

이때 보통 예쁜 얼굴을 가진 나, 운동을 잘하는 나, 시험을 잘 보는 나 등이 기본적으로 작용하는데, 주로 신체적으로 타고난 것들을 통해서 이뤄진다. 외모, 신체 능력, 직적 능력이 바로 그것들의 근간이다.

 

더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파생된 것들도 그 대상이 된다. 졸업한 대학교, 현재 회사 내의 직급다니고 있는 회사 이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영화 '타짜' 에서 나온 명대사,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 말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잘날 수는 없다. 사실상 소수만 가능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고난 것들이나 그것을 통해서 파생된 것들을 통해 나를 정의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때는 타고난 것, 잘하는 것 보다는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많은 곳을 여행한 자신, 집안의 웬만한 것들을 고칠 수 있는 자신, 전국 맛 집을 꿰고 있는 자신, 낚시에 대해서 전문가 수준인 자신, 많은 책을 읽은 자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신, 수 많은 자동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신, 눈을 가리고도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구분할 수 있는 자신, 약속 시간을 잘지키는 자신, 영화를 많이 본 자신, 남을 잘 웃기는 자신, 술을 잘 먹는 자신, 눈치가 빠른 자신, 분위기를 잘 파악하는 자신 등이 바로 그것이 된다.

 

이런 것 대부분은 딱히 타고 나지 않아도 노력만 하면 얻을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틈만 나면 그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주변에서 잘 인정해주지 않기에 어쩔 수 없다. 스스로 홍보를 해야 하기에 그렇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방법이 하나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가치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정의하는 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돈, 권력, 명예 등과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인데, 가장 확실하다. 아무리 자신을 스스로 정의했어도 남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기에 그렇다. 원래 낚시를 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 것과 연봉을 통해 자신을 정의한 것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때 서로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추가적으로 하면 안 되는 정의 방법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가족 중에 잘난 누군가, 뛰어난 성공한 친구를 둔 것, 심지어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기도 한다. 마치 과거에 대감 집에서 사는 노비가 위세를 떠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정의하고 싶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다.

 

자신을 정의하는 대상을 정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결국 원리는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한다고 느끼는 것이 그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정의는 바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자기 자랑이나 타인으로부터 받고 싶은 인정에 관한 심리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것이 좀 더 확장되면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 여겨 봐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정의하는데 쓴 대상에 대한 신뢰도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거리' 라고 표현하길 좋아하는데, 거리가 멀수록 신뢰도가 낮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신뢰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더해서 신뢰도가 높을수록 안정적이고, 신뢰도가 낮을수록 불안하다.

 

두뇌능력이나 신체능력 그리고 외모 등은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높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대부분 평생 유지가 되기 때문이다그리고 반대로 자신이 아는 성공한 친구, 자신이 모시는 사람 등은 신뢰도가 무척 낮다. 언제 관계가 끊길지도 모르고 버림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중간엔 연봉, 직장 명, 사는 집 평수 등이 들어있다같은 직장이라고 해도 공무원이냐 아니면 일반 회사의 직원이냐에 따라서 신뢰도 차이가 존재한다. 공무원일수록 높고 일반회사일수록 낮다. 직장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서 그렇다.

 

거리가 멀고 신뢰도가 낮다는 말의 의미는 그것이 자신과 분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 부장이란 직급이나 1억이란 연봉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게 되면 회사에서 명퇴를 당하는 즉시 생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의를 바꿔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다시는 취직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놀게 된다. 원래 받았던 대접, 원래 받았던 연봉을 받을 직장만을 고집하니 새로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정의한 대상에 대한 신뢰도는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신뢰도가 낮은 것을 통해 자신을 정의해서 살게 되면 결국 그것에 대한 불안함으로 인해서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신뢰도가 높은 것을 대상으로 해서 자신을 정의하게 되면 안정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왜냐하면 잘한다, 잘났다는 말이 가진 본질적 의미 때문에 그렇다.

 

이런 말들이 가진 본질적 의미는 바로 '비교' 이다. , 잘났다에는 못났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비교 대상이 있다는 뜻이고, 그 대상이 바뀔 경우 언제든 잘남은 평범함으로 심지어는 못남으로 바뀔 수 있다는 위험 요소를 품고 있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했던 아이가 서울 상위권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느끼게 되는 괴리감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도심 출신들의 아이들을 보고 느끼게 되는 좌절감이다. 얼굴이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연예인이 되려고 방송국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주변에 너무 예쁜 사람들도 많고 더해서 재주도 많으니 자신감을 잃고 무력해지고 만다.

 

그래서 신뢰의 문제는 복잡하게 작용한다. 자신이 타고났으며 더해서 경쟁이 심하지 않는 분야일 때 그 신뢰도가 높게 유지가 될 수 있다.

 

더해서 사람들은 단 한가지 항목 만으로 자신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잘하기에 그렇다. 그래서 자신을 정의하는 단계는 꽤나 복합적으로 이뤄진다.

 

그럼에도 대표적인 잘하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그리고 이 대표를 정하는 문제는 삶을 크게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 대표 자리에 신뢰도가 더 높은 것을 정할수록 삶이 좀 더 안정적으로 행복하고 반대로 신뢰도가 낮은 것을 무리해서 정하게 되면 삶은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기에 그렇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자신이 잘난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자신이 잘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정하는 편이 좀 더 나을 것이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신뢰도가 높아서 그렇다. 또한 경쟁도 덜 치열하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꾸 다른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지 말고 사회가 인정하는 것을 하라고 한다. 미술을 하면 굶어 죽기 쉽고, 기술을 배우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사회적으로 미리 정해 놓은 가치들이다. 누구나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치들이다.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이 바로 돈이다. 특히 사람들은 말하는 것과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데,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가치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광경이 아주 자주 펼쳐진다.

 

그것 말고도 권력, 명예 등이 주로 그 대상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스스로 내린 정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길 바라기에, 아니 잘난 사람이란 평가를 받고 싶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보다는 주로 사회적으로 더 인정을 받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결국 남는 문제는 신뢰도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분야는 경쟁도 심하다. 그래서 기득권이란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단 한번 쥐면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을 정의했으니 내려놓을 수가 없다. 실제로 내려놔야 할 시기가 되었어도 말이다.

 

퇴직 후에도 직장에 다닐 때처럼 자신의 영향력이 유지되길 바라고, 아이들을 다 키워서 독립시킨 후에도 아이들에게 키울 때처럼 영향력이 있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조합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뛰어난 머리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해서 의사나 교수가 되어서 사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타고난 외모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이 되어서 연기자의 삶을 사는 것이 그것이다.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승부를 겨루는 프로가 되어서 사는 삶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의사, 교수, 운동 선수, 연예인들 대부분은 안정적으로 행복해야 맞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흔히 일어난다그들은 왜 그렇지 못할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성공을 거두고 나면 그때 얻는 부와 명예로 자신에 대한 대표적 정의를 바꾸기 때문이다. , 스스로 신뢰도가 낮지만 사회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알려진 것으로 대표적 정의를 바꾸는 것이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판사가 되면 정의를 지키는 것보다 권력이, 과학자가 되면 훌륭한 연구 결과를 만들기 보다는 명성을 얻는 것을, 정치인이 되면 당연히 권력이 우선시 되는 것이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날까? 그냥 잘 타고난 것을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면 끝인데, 왜 그런 불안한 삶으로 자신을 몰아 넣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뿐이다. 결국 자신이 진출한 분야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경쟁 때문에 그렇다. 잘난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 잘남은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아서 그렇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다른 잘난 것으로 경쟁해야 한다. 당연히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쉬운 가치가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자신이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일치가 되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좋았던 사람은 의사가 된 후 그것을 천직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정의는 변하지 않으니 신뢰도도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의사가 된 사람은 이후 돈을 많이 버는 것과 명성을 얻는 것으로 바뀔 수 밖에 없다. 의사가 될 정도면 누구나 다 머리가 좋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연기를 하는 것이 너무도 좋은 연예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좋은 교수, 지는 것조차 즐길 줄 아는 프로 스포츠 선수,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는 예술인 등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일치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더해서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가치가 되는 운은 정말로 얻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그리 힘들다. 행복하기가 어렵게 된다.

 

결국 나를 정의 하는 것은 크게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사회적 가치, 이 세 가지 조합으로 구성이 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선택 가능한 것은 하나뿐이다. 사회적 가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잘하는 것은 이미 타고난 것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행복에 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 여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행복에 관련된 책들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뭔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더해서 좋아한다는 것이 실제로 정말로 그것을 좋아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에 그렇다.

 

예를 들어서 책을 좋아하지만 사실은 책을 많이 읽은 것을 남들에게 칭찬을 받아서 좋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사실은 여행을 많이 다닌 자신을 SNS에 자랑하는 것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처음부터 주변의 인정을 목표로 뭔가를 좋아할 수도 있기에, 자신이 뭔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정말로 그것을 좋아하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경우엔 남들이 관심을 가지면 같이 관심을 가지고, 남들의 관심이 줄어들면 자신도 관심이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즉, 유행에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유행을 따른다.

 

그러니 문제가 아주 복잡해진다.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도, 좋아하는 것이 정말로 좋아하는지 여부도 불명확하다. 그렇다고 경쟁이 치열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길을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운 좋게 잘나게 태어나지도 못했으니 깜깜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안정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도저히 답이 없어 보인다. 앞길이 깜깜하다.


 

그러면 최초의 질문을 다시 뜯어 봐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제는 질문을 의심해 봐야 한다. 답이 없는 질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깊게 생각해보면 정말로 질문이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왜 나를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왜 정의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냥 살면 안 되는 것일까?

 

아이들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저 재미있게 놀 뿐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어른이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렇게 변하는 것일까? 그냥 계속 아이처럼 재미있게 놀면 안 되는 것일까? 꼭 뭔가 잘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잘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을 통해 꼭 나를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없다. 그런 것 별로 필요가 없다. 그냥 잘하면 행복하고, 행복하니 웃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왜 자꾸 다른 것들을 추가해서 전체적인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다. 왜 인정받고 싶을까? 그 이유도 단순하다. 무리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회사에서 일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이유는 승진을 하고 싶어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엔 쫓겨나지 않고 싶어서 그러고 있는 이유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 중 하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자신이 속한 곳에서 쫓겨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언제나 퇴출 순위에서 가장 후 순위가 되길 원한다.

 

사실 대통령이 바로 그런 자리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커다란 부를 소유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꾸 자신을 정의하려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인정받고, 소속되어 있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미 이 세상은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다들 여전히 삶의 유일한 목적이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에 멈춰져 있다. 그것만이 삶의 모든 과정에서 유일한 결정 요소가 된다.

 

그래서 자신이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면 좀 더 늦게 쫓겨날 것 같아서 그렇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위협이다. 현대 문명 사회에서 쫓겨남이란 개념은 이미 사라졌다. 오히려 복잡함이 싫어서 스스로 나가려고 하는 세상이다. 쫓겨나지도 동떨어질 수도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수백 년 전에 가졌던 두려움을 계속 유지한 채 살아갈 것인가?

 

그러니 무엇인가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미련한 짓은 이제 좀 그만 둘 때가 되었다. 그냥 매일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든, 무엇을 꿈꾸든, 무엇을 이뤘던 그것들은 그저 생존 활동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그저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니 거기에 의미나 가치는 없다.

 

그렇게 얻어진 돈과 시간을 행복으로 채우면 된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 된다.

 

나는 처음부터 정의될 필요가 없었던 존재이다. 나는 생존하면 되는 존재이다. 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지 '내가 누군 줄 알아~' 라고 외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외부의 어떤 것으로 자신을 정의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진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머리가 좋은 것으로, 돈이 많은 것으로, 많은 곳을 여행한 기억으로 나를 정의하게 되면 그렇다. 나는 그저 행복하려고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정의하는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행복하면 하고, 행복하지 않으면 안 하면 된다. 억지로 나를 극복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살면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최소한 먹고 살 돈을 구하는 일이다. 그래야 사니까 말이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다.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을 수 있다면 도대체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다들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을 정의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그리 줄어들고 만다. 가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못하는 것이다. 먹는 것을 거부하기도 하고, 만화책을 멀리 하기도 한다. 게임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낄낄대는 것을 안 하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그것을 자신을 정의하는데 쓴다. 맛 집에 대해서 잘아는 자신, 만화책에 별점을 매기는 자신, 게임을 잘하는 자신, 자신이 감명 깊게 본 드라마를 명품이라고 칭하는 자신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결국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런 것들로 자신을 정의하게 되면 주변에서 그것을 인정 안 해줄 것이 뻔하기에 자존감 하락이라는 철퇴를 맞을 수 있다.

 

어떤 것을 해서 시간을 소비했다면 그 소비는 그냥 시간을 보낸 것으로 끝나야 한다. 무엇을 했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다. 자꾸 그것을 연장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이 지난 후 자신에게 어떤 것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연장되고 남으면 바로 그것들은 나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이용되고 만다.

 

''를 정의하는 것은 정말로 흔하고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매일 같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그렇게 되고 만다. 그러니 끝없이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어책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가분한 삶  (0) 2019.02.08
노래방 지옥  (0) 2019.01.18
40대라는 나이  (0) 2018.12.26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0) 2018.12.14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이유  (0) 2018.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