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아이루다 2018. 12. 14. 08:32

 

그대,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진심으로 그것을 원하는가?

 

이미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제목을 보고 들어왔겠지만지금 그것을 다시 묻는 이유는 생각보다 그대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깊은 마음 속에서는 변화하고 싶은 욕구 못지않게 변화하고 싶지 않은 욕구 또한 대단히 크게 자리를 잡고 있기에 그렇다.

 

그대가 지금 이순간 변화의 욕구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대가 요즘 행복한 순간보다 불행한 했던 일이 더 잦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대 역시 가끔은 행복한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변화들은 그대의 행복을 빼앗아갈 가능성을 품고 있다.

 

도심의 시끄러움이 불행해서 시골로 떠난 사람은 시골의 한적함으로 인해 행복해지긴 했지만, 평소에 쉽게 다닐 수 있었던 맛난 음식점, 도서관, 영화관근처의 편의점 등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된다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대에게 일어난 어떤 변화는 기존의 누리던 행복을 포기하게끔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던진 질문을 정말로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그대, 누리고 있던 쥐꼬리만한 행복까지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진심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여전히 그 답이 "그렇다" 라면 그대는 불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아니, 행복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잃을 행복도 없을 것이라서 그나마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오직 불행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절대로 변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 이미 행복한데 왜 변화하고 싶어하겠는가? 추운 날 따뜻한 잠자리 속에서 행복한 사람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누워있기 힘들거나, 배가 너무 고프거나, 오줌이 너무 마려울 때 겨우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면 그대는 분명히 불행한 사람이다. 아니라면 그냥 이 글에 호기심이 있어서 왔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읽고 있을 것이다변화를 하고 싶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가 궁금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에도 그대의 불행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처음부터 실망스러운 답을 줄 수 밖에 없다. 변화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정답도 없기에 그렇다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실망할 필요는 없다.

 

비록 정답은 없어도 정답에 근접한 것은 분명히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 답이 정답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없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답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잘 들어 맞지만 어떤 특정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을 수 있기에 그렇다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정답에 가까울 뿐, 절대적인 정답이 될 수는 없다.

 

, 그럼 이제부터 정답에 가까운 그것에 대해서 말해보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 불행한 그대를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고 싶다면 단 한가지만 하면 된다. 그것은 바로 그대 내면에 존재하는 비록 매우 위험하지만, 그만큼이나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욕망 하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행복 말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다.

 

말이 쉽지 매우 힘든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그대 안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그대의 삶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다. 삶에 언제나 불만이 가득하고 우울하고 자주 상처를 받아서 불안했던 삶이 감사하고 활기차고 안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로 인해서 인정을 받는 행복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그대가 그대 내면에 존재하는 인정의 욕망을 줄일 수 있다면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경험할 수 있으며그대를 아주 오랫동안 눌러왔던 불필요한 무게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이후로는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지적했듯이 그 동안 인정을 받을 때 느끼는 행복감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하고 싶은 욕구를 가졌느냐가 진짜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을 알면서도, 그로 인해서 삶이 매일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그 인정이란 독이 주는 달콤한 보상에서 벗어나지가 무척 힘들다.

 

인정의 행복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본능 수준에서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심, 인기, 매력, 칭찬, 존재감, 권력, 명예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많은 것들이 바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에서 시작되니까 말이다.

 

어떤 경우에 나는 그렇지 않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운이 좋은 것뿐이다. , 잘 타고나서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인정의 욕구를 상대적으로 덜 느낀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채워지는데 왜 느끼겠는가?

 

욕망의 본질은 부족함이다. 채워지지 않았으니 채우려고 하는 것이란 뜻이다. 처음부터 그것의 중요도 문제가 아니다. 공기만큼 생존에 중요한 것이 없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공기에 대해서 어떤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 물에 빠졌을 때 빼놓고는 말이다.

 

예쁜 외모, 높은 지적 수준, 뛰어난 운동 능력, 남다른 말 재주, 농담을 잘하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의 인정을 받기가 쉽다. 그러니 인정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행복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런 것들 중 하나도 제대로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도 제법 된다. 그리고 한두 개 정도 타고 났다고 해도 더 인정을 받고 싶어서 타고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끝없이 욕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인정을 받느냐 여부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마약이 삶을 망칠 수 있음을 뻔히 알아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했을 때 경험하는 행복이 너무 크기에 어쩔 수 없다.

 

다른 것들에 비해서도 인정의 욕망이 충족될 때 훨씬 큰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채우지 못할 때는 그만큼이나, 아니 훨씬 더 큰 불행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불행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상처를 받으니까 말이다.

 

심지어는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꼭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다가 결국 더 망쳐먹게 되면 그렇다. 그것은 돈을 벌려고 했는데 돈을 벌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빚을 지게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그러니 행복하지 못한 수준을 넘어서서 매우 불행해지고 만다.

 

여기까지 보면 변화를 위한 논리적 전개는 아주 단순한 흐름을 보인다.

 

그대는 처음부터 불행하기에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평소에 인정을 잘 받았던 사람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대가 원했던 인정의 욕구가 잘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며, 오히려 상처가 되고 불행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더군다나 앞으로 미래라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은 불안함과 우울함을 불러온다.

 

그렇다. 그대가 불행한 이유가 배가 고프거나 잠을 못자서 그런 것인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그대가 원하는 만큼 인정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연봉이 얼마냐 문제도 아니고, 얼마나 비싼 집에 사느냐, 어디까지 해외 여행을 가봤느냐, 얼마나 비싼 옷과 가방을 샀느냐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그대가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쓸 수 밖에 없는 대리만족이다.

 

하지만 그대는 여전히 인정의 욕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평생 그대를 불행하게 만들어도 아주 가끔 느껴지는 행복에 중독되어서 여전히 그대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더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인정이란 마약의 중독자이다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마약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앞으로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를 더 알아보려고 노력하고 애쓰겠는가?

 

이제 진짜로 선택의 시간이다. 인정을 받는 것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글을 그만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읽어봐야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후에도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은 인정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을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큰 호감을 느껴서는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로 이뤄진다. 그래서 그대가 품은 호감만큼 상대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결국 상대에게 코를 꿰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아주 가끔 주는 달콤한 인정에 목말라 할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인정을 얻은 대신 스스로 목에 목줄을 걸고는 그 반대편을 상대에게 준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가는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이 그 동안 그대가 살아온 삶이다. 분명히 하나의 독립체 존재로써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축복 속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지만, 정작 그대의 삶은 누군가에게 목줄이 잡혀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개의 주인이 개를 끌고 갈 때는 개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잘해준다고 하지만 오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개는 그저 밖에 나가서 전봇대에 오줌을 싸고 다른 개의 냄새를 맡고 싶어하지만 개의 주인은 대신 개를 목욕시키고, 미용실에 데려가 털을 깎고, 옷을 입힌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묶인 사람은 평생 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평생 동안 자발적으로 끌려 다니게 된다. 거기엔 처음부터 자신이 행복한 것은 없다. 그러다가 나중엔 목줄을 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부모님의 인정, 친구들의 인정, 아내의 인정, 남편의 인정, 아이들의 인정, 친척들의 인정, 주변 사람들의 인정, 조직 내의 인정, 동창회에서의 인정, 동호회에서의 인정 등이 끝없이 바뀌면서 그대의 목줄이 된다.

 

이것이 그 동안 그대가 살아온 삶이다. 어떤 이들은 주변의 인정과 자신의 행복이 잘 맞아서 운 좋게 행복했지만, 그대는 운이 나빴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대가 타고난 장점과 사회적 가치의 조합이 잘못된 것뿐이다.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는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 시대엔 머리가 좋고 힘이 센 것이 최고의 가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더 가치있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으로 여기까지 왔든지 상관없이 그대의 목줄을 쥔 상대는 둘 중 하나로 행동한다. 그대를 실컷 쥐고 흔들다가 떠나거나, 떠나지 않더라도 그대가 지겨워져서 함부로 대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대의 상처가 되고 결국 불행함이 된다

 

이런 흐름이 그 동안 그대가 살아온 삶의 패턴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 지겨워지거나 상처를 받고 만다.

 

인정에 대한 욕구는 근본적으로 그대와 남을 연결해 놓은 보이지 않는 끈이다. 이것은 매우 약한 끈이기에 위기 상황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처음부터 결코 생명 줄이 될 수 없는 끈이다. 단지 그대는 아주 오래된 관습으로 그것을 생명 줄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결국 생명 줄은 아니지만 흔들림 만큼은 그대로 전달되는 끈이다. 그래서 그대와 연결된 끈의 반대쪽에 있는 존재가 그 끈을 흔들어 대면 그대는 그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게 된다.

 

작은 칭찬, 작은 힐난, 작은 비판, 작은 지적질은 끈을 흔들고 그대에게 다가오면 올수록 점점 더 그 폭이 커져서 그대를 정신 없이 흔들어 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운 나쁘게 그대에게 연결된 또 다른 존재들의 흔들림까지 더해지는 날이라도 오면 그대는 아무도 없는 방구석에 홀로 쳐 박혀서 밖에 나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책을 읽고, 친구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강연을 들어서 그 상처를 잊을 때쯤이 되면 인정의 달콤함에 끌려서 또 다시 다른 존재들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티가 안 나게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할 것이며, 자신이 뭘 잘하는 지를 요령껏 말하려고 할 것이다. 자신이 예전에 경험했던 것을 말하면서 그들의 공감을 얻으려 할 것이고, 여럿이 모였을 때 대화의 주인공이 되고자 할 것이다.

 

자랑공감, 신세 한탄, 동감 등등 그것에 관한 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그 모두가 단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로 다른 이들의 인정이다.

 

그대는 그대가 한 말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크게 웃기를 바랄 것이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대에게 호의를 보여줄 것을 원할 것이다. 그대는 억울한 일을 설명하면서 동의를 구할 것이고, 그대가 다른 이를 아끼듯이 그들도 그대를 아껴주길 바랄 것이다.

 

그나마 이런 것들은 별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살아온 삶 그 자체이다.

 

그대는 분명히 삶을 스스로 선택해 왔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다. 늘 그대의 선택에 의해서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대의 삶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인정하고 있느냐에 따라왔을 뿐이다.

 

어린 시절엔 축구공 하나만으로 세상을 얻은 듯 행복했다. 친구들끼리 모여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나눠먹는 순간엔 인생 최대치의 행복을 맛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날이 온다. 누구도 운동장에 나오질 않고문방구에서 산 불량식품을 함께 나눠먹을 사람이 없어지는 날이다. 인기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축구를 잘하던 아이가 받던 주변의 찬사는 금세 사라진다그리고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안무를 잘 흉내 내는 아이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그러면 그대는 축구를 그만두고 춤 연습을 시작한다. 문방구가 아닌 도넛 가게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대는 그 가게의 도넛 이름을 모두 다 외우고 어떤 도넛이 가장 맛이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것은 커 가면서 계속 주변의 유행의 흐름에 따라서 바뀐다. 게임을 잘하고 싶어하고, 화장을 잘하고 싶어하며, 인기 아이돌 그룹 콘서트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나 잘하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언제나 인기가 많다. 그리고 계속 변하니 결국 다 잘해야만 해결이 된다. 그래서 다들 완벽해지고 싶어한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인기 대상은 끝없이 바뀐다. 그러다가 결국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연봉으로 종착된다. , 돈이 많은 것이 가장 인기가 있는 대상이 된다. 혹은 예쁜 얼굴을 가진 것이 평생 동안 인기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그대는 더 많은 돈을 벌기 바라고,  예쁜 얼굴을 가지길 바란다.

 

다들 영화를 보면 그대도 영화를 보고, 다들 여행을 떠나면 그대도 여행을 떠난다. 제주도 한달살이가 유행하면 그대도 그것을 하려고 하고,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하면 겨울에 집에서 귤을 까먹으면서 그것을 실행한다. 남들이 결혼을 하면 그대도 하고 남들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니 비혼 선언을 한다. 남들이 개를 키우면 그대도 개를 키우고, 남들이 SNS에 고양이 사진을 올리면 그대도 고양이 사진을 올린다.

 

더 나이를 먹어서 돈도 어느 정도 벌고 얼굴도 늙게 되면 인정의 대상은 바뀐다. 그래서 다들 하는 산에 오르거나 골프를 친다. 그리고 가끔 해외여행도 한번씩 간다. 남들이 점을 빼면 그대도 점을 빼고, 남들이 보톡스를 맞으면 그대도 보톡스를 맞는다. 남들이 맛난 음식을 먹으로 다니면 그대도 그러고 다니고, 유명해서 안 가본 사람이 없다는 곳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

 

그러다가 남들이 죽을 테니 그대도 죽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살아 오거나 앞으로 살아갈 삶이다. 그대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대는 단 한번도 그대가 행복한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들을 인정의 행복을 얻으려고 해왔을 뿐이다. 그러다가 누구도 더 이상 하고 있는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 그대도 역시도 슬며시 그것들을 삶에 지운다.

 

하지만 그대는 처음에 그저 축구공 하나와 불량식품, 그리고 같이 놀 친구만 있으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바뀐 것인가? 아니다. 그저 유행을 쫓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 뿐이다.

 

지금이라도 아이들의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서 학부모와 함께 하는 놀이에 참가하면 언제라도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언뜻 보기에는 유행하는 것을 따라 하는 삶은 매우 긍정적으로 보인다. 당장 눈에는 그것이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껍데기인 인정의 욕구는 근본적으로 그대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겨나고 있다, 내면에 불안함이 인정의 욕구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아주 행복해서 그 내면의 두려움이 현저하게 낮아진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이 행복한 것을 하려고 하지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들을 하려 하지 않는다그러니 다른 이들의 흔들림이 잘 전달되어 오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행복해져서 인정에 대한 욕구를 줄일 수 있느냐이다. 마치 닭이 달걀 중에 누가 먼저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단 행복해져서 인정에 대한 욕구를 줄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경우이든 주변에 뭔가를 해줄 때 아무런 기대가 없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전혀 기대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화 시키려고 하면 된다.

 

그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한 적이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친구에게 선물을 사줄 때도자녀들에게 밥을 해줄 때도, 누군가를 위해 돈을 기부할 때도, 심지어 봉사활동을 할 때도 그렇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을 위해서 그것들을 해왔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감사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대를 좋아하는 눈빛을 받고 싶어서, 좋은 사람이란 평가를 얻고 싶어서, 스스로 선한 사람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모두 다 인정의 행복이다.

 

하지만 인정은 처음부터 타인의 몫이다. 그대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그대는 그저 그대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놓고서 왜 타인의 찬사를 기대하는가? 완벽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해놓고 왜 그것이 이타적으로 보이길 바라는가?

 

그대는 그저 그것이 좋아서 했어야 했다.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밥을 해주고 싶어서, 상대가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어서, 선의를 베풀고 싶어서 했다. 남을 돕는 것은 행복하니까 그렇다. 그러니 그것으로 끝내야 했다. 왜 그것을 하고 나서 주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가?

 

그대는 지금껏 입을 다물지 못해서 그 많은 문제가 생겼다. 도움을 주면 생색을 내고, 착한 짓을 하면 남에게 이야기를 했다. 뭔가 남들에게 찬사를 받을만한 것을 하면 SNS에 올렸고, 심지어는 그저 자신에게만 좋은 것조차도 사진을 찍어서 남들에게 공유해왔다. 인정을 받으려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인정의 주체는 그대가 아닌 타인이다. 그래서 그대는 늘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매일 도대체 뭘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심지어 인정을 받기 위해서 자학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대가 주는 것과 상대가 그것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 모든 주는 것은 반드시 왜곡되기 마련이다.

 

그대는 그대가 생각했을 때 상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겠지만, 상대가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운 좋게 그것이 서로 만나면 상대가 많이 기뻐하겠지만, 그 부분은 그대가 결정할 몫이 아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냥 주는 것을 끝내라. 주는 기분만 좋고 말아라. 고마움이나 감사함, 호감의 눈길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머리 속에서 날려 버려라. 주기만 하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 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인정의 행복이 사라지면 도대체 무엇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된다.

 

걱정을 하지 마라. 만약 그대가 정말로 그렇게만 살수 있다면 오히려 원치 않던 인정이 쏟아진다사람들은 대부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를 좋아하기에 그렇다. 그렇지 못할 경우 부담스러우니까 말이다. 선물을 받으면 뭔가 대가를 줘야 할 것 같기에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대가 아무런 기대 없이 선물을 줬다면 그것은 그대의 태도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상대는 부담 없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상대는 그대를 훨씬 더 높게 평가하게 된다. 기대 없이 주는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그대의 기대치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그리고 그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대는 점점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아무리 호의를 베풀었어도 그것을 내색하면 그 호의는 금세 사라지고 만다. 호의는 그저 침묵 속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도와주고 생색내면 그 도움은 돕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비록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그대가 주변에 인정에 대한 욕구를 버리면 버릴수록, 자랑하고 싶은 욕구를 없애면 없앨수록 그대는 오히려 점점 더 인정을 받고 주변에서 알아서 그대를 칭찬을 해주는 사람이 되어간다.

 

죽음을 각오한 자가 승리해서 오히려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글을 읽고도 여전히 변화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꼭 기억하라. 주변 사람들에게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면 된다. 아무런 기대도 없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하면 된다. 그대의 도움이나 선의가 그냥 허공으로 다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그대는 누군가를 돕거나 선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행복해진다.

 

착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대신 그대가 잘 못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는 말아라. 그것은 그대를 불행하게 할 것이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그대가 잘 못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주변의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인정의 욕구를 줄이면 이 역시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래서 거절이 쉬워진다.

 

, 답은 나왔다. 그대가 잘하는 것만 하고 못하는 것은 거절해라. 인정을 원하지 않으면 이 둘 모두 너무도 쉬운 일이다. 상대가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말고 그대가 주고 싶은 선물을 줘라. 마음에 들면 좋은 것이고, 들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 처음부터 인정의 욕구가 없으니 얼마나 쉽겠는가? 그대가 잘 못하는 것을 해달라고 하면 그냥 거절해라.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니 얼마나 쉽겠는가?

 

그저 잘하는 것을 하면서 행복해져라. 그러면 결국 그대는 그대가 진정으로 원했던 커다란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삶은 그렇게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인정을 원하는 삶에서 인정이 부담스러운 삶으로 말이다. 그리고 완전히 변화가 된 어느 날, 그대의 과거가 왜 그랬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을 것이다. 신기할 것이다.

 

오늘이 그 변화의 첫 날이다. SNS를 끊고 불필요한 관계를 지워라. 주변 사람들과 연결된 인정의 끈을 잘라라. 그리고 그대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라. 딱히 없다면 그저 주변에 친절하게 대해라. 인정이 아닌 그 친절로 인해서 보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가 그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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