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의무감과 책임감

아이루다 2018. 11. 26. 09:15

 

의무감과 책임감, 이 두 단어는 일상 속에서 꽤나 혼재돼서 사용되곤 한다. 그럴 만도 하다별 생각 없이 이 두 단어를 사용할 때 의무와 책임을 바꿔 써도 그리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너는 네 방을 청소해야 할 의무가 있어' '너는 네 방을 청소해야 할 책임이 있어' 이 둘은 그리 다른 말 같지가 않다. 둘 모두 너는 방을 청소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그러다 보니 둘을 아예 섞어서 쓰기도 한다.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에 있어서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듯 말이다.

 

하지만 이 둘은 비슷하지 않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반대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혼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갈등이다. 원래 어떤 단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갈등을 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상식이란 단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이 세상의 수 많은 갈등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이 둘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기 위해서 흔히 국민의 4대의무로 알려진 것들에 의무 대신 책임을 넣어 보자.

 

국방의 의무가 있다. 현재는 남자만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군대를 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그야말로 의무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간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가지 않으면 감방에 가야 하니까 간다.

 

그래서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남자들이 하는 일은 거의 시간 죽이기가 된다.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책임감 같은 것들은 거의 없다. 그저 별 탈 없이 빨리 군생활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된다.

 

만약 군대를 의무감이 아닌 책임감을 가지고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태도가 달라진다그저 빨리 시간이 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동안 열심히 훈련을 받고, 철통 같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나라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이 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

 

이것을 단순히 표현하면, 직업적으로 군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 즉 장교들은 그나마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 밑에 어쩔 수 없이 군대에 온 사병들은 의무감으로 근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세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의무적을 세금을 낸 사람은 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심을 갖질 않는다. 그저 내라고 해서 내고, 내지 않으면 심한 불이익이 있으니 내는 것 뿐이다하지만 자신이 낸 세금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이 두 경우를 통해서 의무감과 책임감의 가장 큰 차이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커다란 어떤 과정의 일부이다. 군대에 가는 것도, 세금을 내는 것도 다 그런 것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그렇다. 어떤 일 하나가 그 자체만으로 전체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는 커다란 전체 과정 중 일부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때 의무는 그 전체 과정 중에서 자신이 맡은 일만 제대로 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래서 그 전체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이 없다. 물론 잘되면 좋겠지만, 잘 되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저 자신이 맡아서 한 일에 어떤 책임 소재가 없기만을 바라게 된다.

 

책임감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책임은 자신이 맡은 일뿐만이 아니라, 그 전체 과정이 모두 잘 끝나서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 맡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이 전체 과정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 맡은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한다.

 

어떤 회사에서 신규 상품을 개발할 때, 일반 직원들은 주로 자신이 맡은 일,  개발, 디자인, 광고, 시장조사, 판매 현황 분석 등등을 담당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는 의무감이 된다. 반면에 책임자는 해당 상품을 기획해서 최종적으로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책임감으로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서도 상급자들은 책임감을, 그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상급자들은 자신들이 책임감을 갖기에 그 밑의 직원들에게도 책임감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밑에 일하는 직원들이 상급자만큼의 책임감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두 입장간의 서로 다른 태도는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 직장 내의 많은 갈등을 불러오는 원인이 된다.

 

의무감과 책임감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의 개념에서는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많은 오해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급자는 책임감으로 지시를 하고, 밑의 직원은 의무감으로 그 일을 하다가 결국 서로 갈등이 생기고 큰 충돌이 나게 된다.

 

그나마 이 정도는 괜찮다하지만 두 단어의 혼용이나 오용에는 훨씬 더 큰 문제가 숨겨져 있다. 단지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별다른 문제점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로는 의무감으로 뭔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매우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살아간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다.

 

그런데 자신이 어떤 일을 의무감으로 가지고 하고 있는지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맡은 일의 최종 결과가 나쁘게 나왔을 때 본인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오고 있는지를 스스로 자각해보면 된다.

 

의무감으로 그 일을 한 사람은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했냐, 못했냐 가 중요한 관심사이고, 오히려 그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다.

 

하지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원인이 아닌 해결책이 주 관심사가 된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원하는 결과로 이끌어야 하기에 그렇다. 물론 그것만이 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실패했다면 그때는 잘못된 원인 분석으로 제대로 하고 이 후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절차를 바로 잡아야 하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원래 일을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노력을 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이다.

 

처음부터 책임 소재만 따지는 것은 오직 의무감으로만 그 일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끝없는 방어 논리와 주변 탓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솟구쳐 오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단 그 물을 막는 일이다. 누가 잘못해서 수도관이 터졌는지를 따지거나, 수도관이 터지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니 별 것 아니라고 하거나, 너무 추워서 수도관이 터진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주변을 설득하는 일은 그 상황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도관이 터진 책임의 소재가 자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에 열과 성의를 다 하거나, 어떤 나쁜 결과가 별 것이 아니라는 듯 쿨한 태도를 보이거나, 수도관이 터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니 자신은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시민이 강도를 만나 신고를 했을 때 시민은 경찰의 책임을 요구한다. 하지만 경찰은 직업자로써 의무만을 다하려고 한다. , 처리 절차가 매뉴얼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자신의 처신이 공무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적합했는지, 신고에 대한 응대를 적절히 했는지 여부만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신고를 한 시민을 속이 터진다. 문제가 생긴 상황이 해결될 수 있도록 제대로 책임 져줬으면 하는데 그저 의무만 다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불만이 생겨나고 민원이 생겨난다.

 

그런데 민원이 생긴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경찰의 책임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신고에 따른 경찰 내부의 대응 매뉴얼만 더 복잡해질 뿐이다. 왜냐하면 그 경찰도 돈을 벌기 위해서 그 직업을 선택한 것이라서 그렇다.

 

이런 일들은 일반 회사에서는 훨씬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어떤 고객에게 주문한 제품이 제 때 들어가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면 최종 책임자는 이 문제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서 밑의 직원에게 질문을 한다. 왜 제품이 제 때 배달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담당자는 공장에서 제품에 제 때 생산되지 못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책임자는 다시 묻는다. 왜 공장에서 그 제품이 제 때 생산되지 못했냐고 한다. 그러면 담당자는 그때 공장에 전화를 한다. 그리고 한참 통화 후 대답한다. 생산에 필요한 자재가 제 때 입고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책임자는 다시 묻는다. 왜 자재가 제때 입고되지 않았냐고 한다. 그러면 담당자는 다시 자재 입고를 담당하는 부서에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 통화를 하고 나서 해당 업체가 필요한 자재를 수입을 하는데 그 통관 절차가 길어져서 납품을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책임자는 또 다시 묻는다. 왜 그 통관 절차가 길어졌냐고 묻는다. 그러면 담당자는 곤란한 듯 말한다. 그것은 다른 회사의 일이라서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 책임자는 답답해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 문제를 가지고 자신의 상사에게 갔을 때 분명히 그것을 물어 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담당자에게 어떻게든 그 회사에 연락을 해서 왜 통관 절차가 제 때 이뤄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아 내라고 한다.

 

담장자가 의무감만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신이 맡은 일만 잘하면 되기에 그렇다. 하지만 책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해서 그 일이 잘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둘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 크다.

 


그나마 이런 일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 의무감으로 해도 커다란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될 곳에서도 그렇게 한다.

 

그 중에서 큰 문제가 생겨나는 영역이 바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책임감이 아닌 의무감으로 키운다.

 

자신의 아이를 책임감인지 의무감으로 키우는지 여부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판단이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이에게 해주는 것들이 사회 통념상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무감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증거이다. , 남들이 입히는 것을 입하고, 남들이 먹이는 것을 먹이고, 남들이 보내는 학원을 보내고, 남들이 경험하는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려고 한다. 딱 남들처럼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이가 커서 뭔가 잘못되었을 때 원망을 듣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사실 아이에게 해줄 것은 따로 있는데 그저 의무감을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최종 결과가 좋게 나오길 바란다. 그것은 바로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그런 식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의 행복한 삶을 바라는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커 가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거기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원래 행복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남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기에 그렇다. 누군가 산을 오는 것이 행복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행복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은 집에서 뒹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원래부터 행복은 온전히 개인적 몫이다. 오히려 자꾸 남을 보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누릴 행복조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에게 남들과 똑같이 해주려고 노력하고, 아이에게도 남들과 똑같이 살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부모로써 해야 할 의무만 다하는 것이다. 반대로 책임감을 느끼는 부모는 아이가 제대로 된 삶을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아이 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이 된다. , 분명히 자신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떠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자신의 삶조차도 의무감으로 살아간다.

 

남들처럼 여름이 되면 해변으로 여행을 가고, 남들처럼 맛집이 소개되면 그곳에 간다. 좋은 여행지가 알려지면 그곳에 여행을 가고, 유용한 제품을 누군가 잘 쓰고 있다고 하면 그것을 산다. 삶의 과정이 온통 남의 의견으로 결정이 된다.

 

물론 그러면 좋은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남만 원망하면 끝이다.

 

TV를 원망하고, 인터넷 의견을 원망하고, 옆집을 원망하고, 친구를 원망하고, 직장 동료를 원망하고가족을 원망하면 되는 것이다. 정작 원망해야 할 것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하고 결국 행복해지지 못한 자신의 선택인데 말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책임을 질 사람은 나중에 그것이 잘못되었어도 자신을 원망하지도 않게 된다. 당연하다. 책임을 지게 되면 처음부터 무엇보다도 그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게 된다. 그러니 노력을 많이 한다. 잘 되야 하니까 당연히 그렇다. 스트레스는 받는다. 하지만 일단 많은 노력을 하기에 성공할 가능성도 높고 설령 실패해도 노력을 한만큼 했기에 마음은 후련하다.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때 그것을 하는 것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그렇다더 할 수 있었는데 안 했으니 후회와 원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다하게 되면 그 결과가 나빠도 아쉬움만 들 뿐 그것이 끝이게 된다.

 

자신에게 일어난 불운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은 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맛있다고 판단해서 입 속에 넣는 것은 오직 그 자신만이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입에 들어간 것을 남들이 절대로 체험할 수는 없다. 원래 행복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행복한 것이지, 남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이 오직 삶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책임감을 무겁게 여긴다.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저 의무감으로만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나오는 증상이 눈을 뜨니 살아가는 것이다. 학교에 갔으니 공부를 하고, 직장에 갔으니 일을 한다. 공부가 잘되고, 일이 잘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자신이 맡은 의무를 다해서 욕을 먹지 않으면 된다. 삶도 그렇다.

 

일단 살아있으니까 살아진다. 삶이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수동적 행위로 전락한다. 그리고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 많은 나쁜 것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과 후회로 마무리 한다.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온통 외부에서 찾아다가 설명하고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사회가 그리 공정한 것도 아니고, 사회가 그리 정직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사람들은 못됐고,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최대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려고 하는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남들을 비난하고,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결국 어떤 과정을 거쳐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불편한 진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으니까 말이다.

 

삶에 대한 책임감,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 만큼은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것에는 더욱 더 중요한 이유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체로써의 책임감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삶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통해 유지가 된다. 다른 존재를 먹어야 살기에 그렇다.

 

그러니 사람마다 다른 생명체에 대한 목숨의 빚이 없는 존재가 없다. 설령 돼지나 닭과 같은 그런 동물들에게 왜 그런 빚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서 그 범위를 사람으로만 좁혀도 상황은 동일하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사는 삶들이 모두 과거에 살았던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 값이기에 그렇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 새로운 약을 만들다가 죽은 사람들, 노동의 가치를 위해서 투쟁하다 죽은 사람들,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 자체가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물론 그들 조차도 남이니까 별다른 책임감이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부모님은 어떨까? 자신을 키우기 위해서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살아 온 부모님 말이다. 적어도 거기엔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 머리 속에 부모님의 희생은 '당연함' 이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사람들의 희생은 더할 것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수 많은 생명들의 희생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맛난 먹거리가 되느냐 여부만 관심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이 결국 책임감이 아닌 의무감의 삶을 만들어 내고 만다. 당장은 핑계를 대고, 남탓을 하기에 편할지 모르지만, 결국 삶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려서는 내팽겨치고 만다.

 

내 삶은 내 삶이다. 하지만 내 삶은 내 삶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단단하게 혹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을 통해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삶을 책임감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나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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