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행복의 표정

아이루다 2018. 9. 15. 08:17

 

잠시 자신이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자. 가족, 애인, 친구, 회사 동료, 선생님, 자주 가는 가게 사장님 등등, 많은 사람들은 이름과 얼굴이, 어떤 사람들은 이름은 몰라도 얼굴이라도 떠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주민등록증에 찍힌 사전처럼 무표정한 상태로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그 동안 아주 다양한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감정에는 기쁨, 슬픔, 짜증, 분노, 서글픔, 아쉬움, 삐침 등 여러 가지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보통 한가지 표정만 떠오르기 마련이다. , 좀 더 생각하면 다른 표정들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일단 처음 떠오르는 표정은 반복적으로 그렇게 된다.

 

웃는 얼굴, 심각한 얼굴, 짜증난 얼굴, 당황한 얼굴, 졸린 얼굴, 지루한 얼굴 등등,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가장 많이 지었던 표정이거나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표정일 것이다.

 

그리고 즐겁고 웃는 표정이 먼저 생각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슬프거나 짜증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반대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평소에 자주 웃고 있는 사람이거나, 평소에 자주 우울한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를 알기 위해서는 딱히 생각해볼 필요가 없이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만 생각해봐도 어느 정도 판단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그 표정이 나를 볼 때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을 완전히 일반화 시킬 수 없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를 만나고 있을 때 행복한지, 불행한지, 관심이 없는지는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을 떠올려 보고 짜증이나 우울한 표정이 주로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특히나 사귀는 사람의 표정이 그렇다면 이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이 만나고 있는 누군가의 표정이 밝고 즐거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어도 나를 만나고 있는 동안은 행복하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경우가 있다. 생각하면 분명히 밝은 표정이 떠오르는데, 좀 더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그리 행복한 것 같지는 않은 경우이다. 그래서 자주 짓는 표정과 행복이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평소엔 그다지 별 다른 표정이 없고 주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충분히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밝은 표정과 행복한 표정은 서로 다른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둘 사이엔 뭔가 미묘한 차이점이 있어 보인다.

 

사람들은 수 많은 표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표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밝은 쪽에 해당되는 행복한 표정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쪽에 해당되는 불행한 표정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밝은 표정에 해당되는 기쁜 표정, 즐거운 표정, 재미있는 표정,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 활짝 웃는 표정, 반가운 표정 등은 모두 행복한 표정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표정이 생긴 이유와 그 이유가 사라진 후에는 뭔가 미묘한 차이점들이 생겨난다.

 

웃기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활짝 웃는 사람은 당연히 행복해 보인다. 게임을 하면서 즐거워 보이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하면서 표정이 활기로 반짝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다들 행복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그 사람의 삶이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좋은 표정은 짓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 외부 요인의 영향 하에 있는 동안은 분명히 웃고 즐기지만, 그것이 끝나는 순간 그 표정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것은 마치 쌀쌀한 늦가을에 모닥불 주변에 있는 것과 같다. 가까이 가면 온기가 느껴지지만, 등은 여전히 춥고 더해서 모닥불이 꺼지는 순간 금세 추위에 노출이 된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웃는 이유는 생각보다 이상한 경우도 많다. 누군가를 뒷담화 하면서도 웃고, 누군가를 깔보고 비웃으면서도 웃고, 심지어 폭력적 상황에서도 웃는다.

 

과거 로마 시대에 콜로세움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경기를 했었다. 글래디에이터라고 불린 검투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로마 시민들은 그것을 구경했던 것이다. 그때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환호하고 즐거워했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행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물론 요즘 시대엔 그런 경기는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권투나 이종격투기 등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권투 선수나 격투기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인 것일까?

 

요즘은 특이한 것들도 많이 생겼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남들이 여행을 떠나서 서로 주고 받는 대화를 들으면서방송 중에서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면박 주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즐긴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인 것일까?

 

물론 행복한 것은 맞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서로 죽이는 경기장에서 나온 표정이든, 누군가 먹는 모습을 보고 나온 표정이든 상관없이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표정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표정이 끝난 후에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 지가 의문이다.

 

기쁨과 희열, 즐거움과 흥분이 끝난 후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오늘 잭팟을 터트려서 세상을 얻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도박 중독자에게 과연 내일은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표정들을 정말로 행복한 표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아니, 반대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과연 그것이 행복한 것이냐고 반문을 할 수 있다. 도대체 왜 그것을 그리 까다롭게 구분하려고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답이 있다. 까다롭게 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뜻하게 데워진 온돌방은 더 이상 보일러가 돌지 않아도 밤새 따뜻함을 유지할 것이다. 그것은 모닥불과는 다르다. 그러니 행복에 관해서는 모닥불이 아닌 온돌방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감기에 안 걸릴 테니까 말이다. 한 순간 따뜻하다고 해서 그것이 다는 아니니 말이다.

 

사실 어떤 사람이 모닥불 행복이 아닌 온돌방 행복을 경험하고 있을 때는 그 표정이 다르다. 그 표정은 그리 격하지도 않고 명확하지도 않다. 오히려 웃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오는 길에 사온 붕어빵을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 것을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 아프다는 한 마디에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과 죽을 사 들고 온 후 안심하는 연인의 표정, 자신이 받은 상처를 얘기한 후 누군가에게 깊은 공감을 받을 때 나오는 표정, 몇 년간 힘들게 고생하면서 준비한 시험에 합격한 후 자신을 믿고 뒷바라지 해준 부모님의 흐뭇해 하는 얼굴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표정이 그것이다.

 

맛나게 젖을 빨고 만족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 더운 여름 날 어디선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일하고 있는 아내나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표정, 하늘이 맑은 오후에 별 말도 없이 서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면서 가끔 서로를 바라보는 노부부의 표정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더 많은 예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온돌방의 행복이며 진짜로 행복한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꺼지지도 않고 금세 사라지지도 않는 행복이다. 그 시작은 분명히 외부의 자극이지만 결국엔 스스로 내면에서 만들어 낸 감정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이런 표정들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충만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감정그 충만함 말이다. 하지만 그 충만함은 쉽게 경험하기가 힘들다. 또한 그 충만함을 경험할 때 생각보다 환한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오히려 표정은 차분하고 내면에 기쁨이 가득하다.

 

그 어떤 감정이든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그 어떤 표정이든 결국 충만함이 없는 감정과 표정은 자극이 사라지는 순간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만다. 곧 과거가 되고 만다.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했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충만함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 자극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행복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다. 충만함은 온돌방에 있는 따뜻하게 달궈진 돌들과 같다. 그래서 한참 그 온기를 머금고 있다.

 

충만하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행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끝없이 줄어들기에 아무리 가득 찬 충만함도 결국엔 빈 공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충만함 중에서 그것을 뛰어 넘는 충만함이 존재한다. 그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다.

 

그것이 바로 가득 차서 넘치기 시작한 충만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넘치기 시작한 충만함은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거의 평생을 유지를 하게 된다.

 

반대로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은 깊은 외로움을 의미한다. 홀로 외톨이가 된 것이다. 너무 비어 버리면 정신없이 웃고 나서도 서글프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누구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삶이 서러운 것이다.

 

그것은 불안함이다. 홀로 살아가야 할 삶이 두려운 것이다. 젊은 시절엔 그나마 견딜만하다. 건강도 큰 문제가 없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외로움을 느낄 틈도 별로 없다.

 

충만함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아주 가끔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혼자 사는 자유로움이 훨씬 더 좋다고 느낀다. 사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충만함을 고사하고 상처만 입게 되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그것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활짝 웃어도 어느 순간엔 허무함과 서러움과 외로움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 안이 비어 있으니 밖에서 자꾸 뭔가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내가 가득 차서 밖으로 뭔가를 내보내야 하는데, 내가 비어 있으니 밖에서 자꾸 나를 채우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채운 것들은 내 것이 아니다. 또한 언제든 끊기거나 변질될 수도 있다.

 

그렇게 빈 공간엔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기업의 광고와, '너를 소중히 여긴다는' 종교의 말씀이 채워진다. 그나마 종교적 체험은 운이 좋다면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가능성은 무척 낮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광고든 종교든 상관없이 자신이 텅텅 빈 것도 모른 채 남의 빈 것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그래서 오히려 그 빈 공간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란 말을 믿는다.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래서 그런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망령처럼 떠돈다.

 

자신이 텅 빈 사람들은 남에게 말로 채워주는 수 밖에 없기에 그렇다. 그래서 비어 있는 사람들은 나처럼 여행을 하라고, 나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살라고, 나처럼 취미생활을 하라고, 나처럼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서 집중하라고, 나처럼 열심히 일을 하라고, 나처럼 목표를 가지고 살라고 주변에 끝없이 조언한다. 자기 자신이 비어 있기에 그렇게 살고 있음을 모른 채 말이다.

 

반대로 이미 스스로 충만함 속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아도 흘러 넘치고 있어서 그렇다. 오히려 말을 하는 것이 방해가 된다.

 

이제는 사람들이 행복의 표정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잊었다. 그런 충만함을 경험해본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그렇다슬프지만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꽤나 많다. 그리고 세상은 홀로 사는 것이라고 하고, 세상은 전쟁터라고 하고, 세상은 상처를 주고 받는 곳이라고 하고, 세상은 늘 긴장하고 이겨야 하는 곳이라고 서로 말하고 믿는 척 하기도 한다.

 

그래야 할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불안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봐, 조금이라도 남들만큼 못 살까 봐, 조금이라도 이상할까 봐, 조금이라도 남들이 경험하는 밝은 표정을 자신만 경험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그것은 삶의 목표가 된다. 살면서 해야 할 것들 리스트가 떠돌아 다닌다. '위시 리스트' 라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포장되어서 그것들을 하고 살면 진짜로 행복한 표정이 나올 것처럼 느낀다.

 

여행을 가서 힐링이란 이름으로 그것이 충만해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 충만함도 충만함은 맞다. 단지 그것은 그저 채워진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흘러 넘치지는 못한다. 그러니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조금씩 줄어서 결국 또 다시 텅 비어 버리고 만다. 그러면 또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것이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문제는 한번 여행을 떠날수록 채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익숙해지니까 그렇다. 익숙하다는 것은 자극이 적다는 것이고, 자극이 적다는 것은 뭔가를 느끼기가 힘들다는 뜻이기에 그렇다.

 

첫 비행기를 탔을 때 느끼는 설렘은 다시는 경험할 수 없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사라지지 않는 충만함은, 흘러 넘치는 충만함은 오직 사람으로부터 얻는 수 밖에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명확하다. 모닥불은 피우자 마자 온기가 생겨나지만 온돌방은 따뜻하게 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 세상엔 모닥불이 너무도 많다. 돈만 주면 바로 행복을 살 수 있는 시대니까 말이다.

 

그래서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 기다리려고 해도 주변에 누군가 모닥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순간 그쪽으로 끌린다. 한참을 춥게 기다려야 온돌방이 따뜻해지는데, 당장 저쪽이 더 따뜻해 보이니까 거기로 가고 싶다. 그리고 결국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돈으로 모닥불을 산다. 그래서 돈이 더 필요해진다. 삶이 돈을 버는 목적으로 맞춰진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불행하다고 느낀다. 마약에 중독되듯 돈으로 쉽게 사는 행복에 중독된다.

 

돈이 없으면 SNS에 빠지고, TV에 빠지고, 게임에 빠지고, 인터넷 게시판에 빠진다. 그나마 돈이 있으면 여행에 빠지고, 골프에 빠지고, 술에 빠지고, 도박에 빠지고, 불륜에 빠지고, 운동에 빠지고, 취미에 빠진다.

 

이것 말고도 수 많은 것들에 빠진다. 그것을 활력이라고 부르고 빠져 사는 삶을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들을 할 때 행복한 표정이 나오는 것은 맞다. 하지만 거기엔 충만함이 거의 없다.

 

어떤 삶을 살지는 각자 정할 문제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충만함을 찾지 못하면 삶은 끝없이 숙제가 될 것이다. 내면에서 행복이 만들어지지 못하니 평생 외부에서 그것을 찾아서 채워야 하기에 그렇다.

 

그러니 평생 동안 자극을 추구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이가 먹을수록, 경험이 쌓을수록, 기억이 늘어날수록 자극은 무뎌진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매일 하루씩 늙는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무감과 책임감  (0) 2018.11.26
보람찬 하루  (0) 2018.09.29
지적 능력이 성격에 미치는 영향  (0) 2018.09.12
민감함 이해하기  (0) 2018.09.04
행복의 구조  (0) 2018.08.20